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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메사돈 사건, 정치문제화
1965년 6월 12일 합성마약 메사돈을
넣어 진통제를 불법 제조, 판매해온 국도
제약사의 박인선씨가 구속됐다.보건사회
부는 의약품에서 검출된 이물질의
정체를 밝히지 못해 고심하던 끝에
국립과학수사 연구소에 감정을 의뢰,
이 제3의 물질이 합성마약 메사돈임을
밝혀냈다.
보건당국이 이처럼 미처 손을 쓰지 못
하고 있는 동안 메사돈은 농어촌, 낙도,
사창가 등 도처에 파고들어 당국의 공식
추계로도 1만 5천∼2만(전문가들의
견해로는 10만)의 중독자를 낳았다.
조사과정에서 마약제조범은 서울대 약대
출신의 임국선이었음이 밝혀졌고, 영남,
유니언, 백십자 등 10여 개의 회사가
관련 되었음이 드러났으며, 충북
약무계장 이재욱 등 보사부 관리와
공화당 소속 국회의원 신관우가
수뢰혐의로 입건됐다.
이 사건은 마약을 허가된 의약품에 섞어
제조, 판매했다는 점과, 이를 정부관리나
국회의원이 뇌물을 받고 묵인해주었다는
점에서 사회에 커다란 충격파를 던져주
었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 B조
대한민국 vs 그리스
(2:0 대한민국 승, 이정수 박지성 골)
▶2010년 진보연대 한상렬 목사
무단 방북
한국진보연대 상임고문인 한상렬 목사가 6·15공동선언 기념행사에 참석한다며 2010년 6월 12일 무단 방북했다. 한상렬 상임고문은 당초 광복절인 8월 15일 귀환 예정이었으나 70일 만인 8월 20일 귀환했다.
무단방북 기간인 6월 22일 한상렬 한국진보연대 상임고문은 평양 인민문화궁전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천안함 사건과 관련 이명박 대통령을 비난하는 발언을 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또한 북한에 대한 찬양 발언이 확인되었다. 이에 귀환 즉시 공안당국은 북한 지령을 받고 반미시위를 주도하고, 무단 방북해 남한 정부를 비난한 혐의(국가보안법 위반)로, 구속되어 수사를 받았다. 한편, 방북기간동안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의 면담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고 알려졌다.
한상렬 한국진보연대 상임고문은 2008년 '광우병 위험 미국산 쇠고기 전면 수입을 반대하는 국민대책회의'의 공동대표로 당시 불법·폭력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구속된 바 있고, 2004~2007년 '평택 미군기지 확장 저지'시위, 2004~2005년 '맥아더 동상 철거'시위를 주도했으며, 2006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저지 범국민운동본부'의 대표를 맡는 등 반미 투쟁에 앞장섰다. 또한 그가 속한 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는 범민련과 한총련 출신으로 54명이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일이 있다. 대학 시절 북한의 주체사상에 동조한 이른바 주사파(主思派)가 상당수라고 검찰은 밝혔다.
▶2009년 북한의 2차 핵실험 제재 -
안보리 결의 1874호 발의.
▶2009년 이란 대선,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현 대통령 재선
▶2005년 김대중 전 대통령,
독일정부로부터 대십자공로훈장 수여
▶2005년 2000여년 전 종려나무
씨앗 싹텄다.
▶2003년 16만년 전
최고(最古) 인류 유골 발견
미국·에티오피아 공동 연구팀은 12일 과학전문지 ‘네이처’에 지난 1997년 아프리카 동부 에티오피아의 헤르토에서 발굴한 두개골 3점이 16만년 전의 것으로, 현생인류인 호모사피엔스의 가장 오래된 유골로 추정된다고 발표했다.
연구팀의 팀 화이트(미국 버클리 소재 캘리포니아대·생물학) 교수는 네이처에서 “에티오피아에서 발굴한 화석에서 어른 2명과 어린이 1명의 두개골을 복원했으며, 현대 인류의 직계 조상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이 유골은 호모 사피엔스의 출현시기를 5만년 가량 끌어올린 것으로, 에티오피아 현지어로 ‘조상’을 뜻하는 ‘이달투(idaltu)’를 붙여 ‘호모 사피엔스 이달투’라고 명명됐다.연구팀은 발굴장소와 추정연대, 외형으로 볼 때 이 두개골은 현생인류의 아프리카 기원설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증거라고 주장했다.
인류의 기원에 대해 학계에서는 그동안 아프리카에서 인류가 시작됐다는 단일 기원설과 유럽·아시아 등 여러 곳에서 발생했다는 다지역 기원설이 대립해왔다.연구팀은 1997년 유골을 발굴한 강변 계곡에서 유골과 함께 석기 등 유물 600여점도 함께 발굴했었다.
▶2001년 기독교제주방송 개국
(HLCC-FM 93.3MHz 출력 3KW)
▶2000년 세계신문협회 총회 개막
▶1995년 북미 준고위급회담서
경수로 지원협상 타결
▶1994년 오스트리아 EU가입 결정
▶1992년 브라질에서
`지구환경정상회담` 개막
▶1989년 알폰신
아르헨티나 대통령 사임
▶1989년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분리돼
연구기관으로 독립
▶1986년 언론인 선우휘 선생 사망
▶1985년 스페인.포르투갈
유럽연합(EC) 가입
▶1984년 코메콘 정상회담
모스크바서 개막
▶1983년 한국, 제4회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에서 4위 기록
1983년 6월 12일 제4회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대회서 4강 진출을 놓고
상대 우루과이와 경기를 벌이고 있는
한국 청소년대표팀(가운데)의 모습.
▶1983년 경상남도 양산군서 열차,
버스충돌, 6명사망 35명 부상
▶1982년 5백원짜리 새주화 발행
▶1981년 한국언론연구원 발족, 초대
이사장에 조선일보사 방우영 사장 취임
▶1980년 오히라 일본 수상
과로로 사망
▶1975년 인도 고법, 간디수상
선거부정 유죄판결
▶1973년 제3차 남북조절위원회
서울서 개최
▶1972년 법률구조협회발족
▶1971년 유엔측,
비무장지대의 평화이용 제의
▶ 1965년 메사돈사건, 정치문제화
1965년 6월 12일 합성마약 메사돈을 넣어 진통제를 불법 제조, 판매해온 국도제약사의 박인선씨가 구속됐다. 보건사회부는 의약품에서 검출된 이물질의 정체를 밝히지 못해 고심하던 끝에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감정을 의뢰, 이 제3의 물질이 합성마약 메사돈임을 밝혀냈다. 보건당국이 이처럼 미처 손을 쓰지 못하고 있는 동안 메사돈은 농어촌, 낙도, 사창가 등 도처에 파고들어 당국의 공식추계로도 1만 5천∼2만(전문가들의 견해로는 10만)의 중독자를 낳았다.
조사과정에서 마약제조범은 서울대 약대 출신의 임국선이었음이 밝혀졌고, 영남, 유니언, 백십자 등 10여 개의 회사가 관련되었음이 드러났으며, 충북 약무계장 이재욱 등 보사부 관리와 공화당 소속 국회의원 신관우가 수뢰혐의로 입건됐다.
이 사건은 마약을 허가된 의약품에 섞어 제조, 판매했다는 점과, 이를 정부관리나 국회의원이 뇌물을 받고 묵인해주었다는 점에서 사회에 커다란 충격파를 던져주었다.
▶1964년 소련,
동독 20년 우호조약 조인
▶1962년 라오스 임시연합정부 수립
▶1962년 한국-칠레, 국교 수립
▶1958년 이원영경사 월북사건 발생
▶1955년 사육신 묘에 육각묘비 건립
▶1950년 6·25 전쟁 13일 전…
한국은행 창립
광복 후 혼란 속에서 통화를 제대로 관리할 수 있는 중앙은행을 설립하기 위해 1950년 6월 12일, 한국은행이 창립됐다.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설립된 첫 중앙은행이었다. 초대 한은 총재는 구용서씨로 통화 정책 전문가가 부족했던 당시, 일제 시대 중앙은행 역할을 했던 조선은행에서 한국인으로 가장 높은 지위인 지점장에 올랐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한국은행은 창립되자마자 수난의 길을 걸었다. 기존의 조선은행권 화폐를 대체할 새 한국은행권 화폐를 발행하기도 전, 창립 13일 만에 6·25를 맞았기 때문이다. 보유하고 있던 지금은(地金銀) 처리가 문제였다. 27일 오후 2시, 트럭 1대에 지금은 89상자(순금 1070kgㆍ순은2513kg)를 실어 진해 해군통제부로 보냈지만, 남겨진 순금 260kg과 순은 1만 5970kg은 고스란히 인민군 수중에 떨어졌다. 더구나 북한군이 경제를 교란할 목적으로 약탈한 조선은행권 화폐를 남발하는 바람에 전시상황과 맞물려 경제도 엉망이 됐다.
정부는 급히 일본 도쿄 지점에 새 한국은행권 발행을 지시했고, 7월 13일 100원·1000원권 화폐가 국내로 공수됐다. 첫 한국은행권 화폐였다. 정부는 전쟁 기간 중 다섯차례에 걸쳐 조선은행권을 한국은행권으로 교환해줌으로써 자연스럽게 조선은행권을 폐기시키며 경제를 안정시켜 나갔다.
한국은행 창립 47주년 기념 리셉션(1997.06.12). 사진 왼쪽부터 박성상 동아시아 경제연구원장, 신병현씨, 강경식 재경원 장관, 이경식 한국은행 총재, 이수화학 회장, 하영기 제일생명보험 회장, 민병도 하얏트호텔 회장, 이정환 금호석유화학 회장.
▶1944년 독일 장거리로켓 V1,
런던 공격 시작
연합국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있은지 6일이 지난 1944년 6월 12일 독일의 신병기 V1 로케트(V는 독일어로 보복을 의미하는 단어의 첫 글자)가 프랑스로부터 런던으로 발사됐다. 820Kg의 폭탄을 탑재한 V1 로케트는 제트추진의 비행폭탄으로 1000미터의 고도를 시속 500~600Km로 날았다. 발사된 10발중 영국까지 도달한 것은 4발이었고 그중 1발이 런던의 한 철교에 명중해 6명이 사망했다.
그후 7월 6일까지 런던을 향해 2754발을 발사해 2752명의 사망자와 8천명의 부상자를 냈다. 무차별로 날아오는 V1 로케트에 2차대전 초기 독일군의 공습에 질려있던 런던시민은 공황상태에 빠졌고 급기야 영국정부는 7월20일 여성과 어린이 17만명을 런던으로부터 소개(疏開)시켰다. V1 로케트의 총 발사수는 8564발이었고 이중 런던 주변에까지 도달한 것은 2400여발이었다. 영국은 민간인 사망자 6184명, 중상자 1만7984명의 인명손실을 보았다.
V1호의 지하조립공장. 길이 7.9m,
중량2180kg의 V1은 820kg의 폭약을
탑재해 런던으로 발사됐다. 런던의
아이들은 그 특유의 추진음때문에
`버스폭탄`이라 불렀다.
▶1943년 암태도(岩泰島) 소작쟁의
지도자 서태석 사망
▶1942년 안네 프랑크,
`안네의 일기`를 쓰기 시작
“당신과 내가 처음 만난 날의 이야기부터 시작해 볼까요?” 1942년 6월12일자 ‘안네의 일기’는 이렇게 시작했다. 이 날은 안네의 열 세번째 생일. 그러나 안네는 12일자 내용을 이틀 뒤에 썼으므로 정확히 말하면 14일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한 셈이다.
극심한 불안과 갈등, 또래 소년에 대한 사랑과 꿈을 담아내던 어린 소녀의 일기는 2년이 조금 지난 1944년 8월1일자에서 갑자기 끝을 맺는다. 사흘 뒤 독일 비밀경찰이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은신처에 들이닥쳐 안네와 가족을 아우슈비츠로 끌고갔기 때문이다. 아버지 오토는 다행히 병이 깊어 그곳에서 해방군을 만나 목숨을 건질 수 있었지만, 안네와 언니는 독일의 베르겐 벨젠 강제수용소로 보내져 1945년 3월 발진티푸스로 죽음을 맞아야 했다.
전쟁이 끝나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에게 한때 그의 무역회사에서 일했던 한 부인이 노트 한 권을 전해준다. 안네 가족이 체포된 다음날 그 방에서 발견한 일기장이었다. 아버지는 1947년에 일기를 출간하며 딸의 죽음을 아파했지만, 그가 전쟁 바로 전까지 독일군에 물품을 납품했던 사업가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1942.6.12 열세 살 생일선물로 받은 일기장에 <안네의 일기>를 쓰기 시작하다
6월 12일은 안네가 태어난 날이면서 <안네의 일기>를 쓰기 시작한 날이다. 1942년 13세 생일 선물로 받은 일기장이었다. 안네는 “생일날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당신을 보았다”고 일기에 적었다. 유대인 학살이 전염병처럼 퍼지던 시절에 소녀 안네에게 일기장은 단순한 노트가 아니라, 자신의 모든 비밀들을 털어 놓을 수 있는 '마음의 안식처'이자 절친한 친구였다.
안네는 자신의 일기장을 인격화 시켜 '키티'라고 부르면서 마치 사람에게 편지를 쓰듯, 모든 것을 털어 놓았다. 여느 소녀처럼 예쁘고, 개성이 강하고 발랄한 유대인 소녀는 2년이 넘는 기간 동안 성실하게 일기를 적음으로써 점점 성숙해 진다. 그녀는 이 일기를 통해 나치 치하를 살아냈던 유대인들의 자서전을 남긴 셈이다.
나는 이 넓은 세상에 외톨이입니다
안네가 일기를 쓰게 된 동기는 감상적인 문학소녀의 모습이다. 멕시코의 화가 프리다 칼로가 끔찍한 사고를 당해 병상에서 거울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자화상을 그리면서 생의 의미를 찾았던 것처럼, 그녀도 무척 외로웠다. 외로움은 자신을 들여다보게 한다. 밖으로 나갈 수 없는 감옥과 같은 은신처에서 '외톨이' 안네는 일기를 쓴다. "드디어 문제의 핵심, 내가 왜 일기를 쓰기 시작했는가에 대해서 말 할 차례인데, 그건 한마디로 마음을 털어 놓을 만한 참다운 친구가 나에게는 없기 때문입니다. 좀 더 분명히 말하겠어요. 열세 살 먹은 여자 아이가 스스로 이 세상에서 외톨이라고 느끼고 있다. 아니 실제로 외톨이라고 해도 아무도 믿지 않을 테니까요."
암스테르담의 '안네 프랑크 하우스'에 전시되어 있는 세계 각국의 언어로 출간된 <안네의 일기>
안네는 1929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난 유대계 독일인이다. 은행가인 아버지 오토 프랑크과 어머니 메디트 사이에서 태어난 유복한 집안의 소녀였다. 1933년 나치당의 히틀러가 정권을 잡으면서 유대인 학살 정책이 만연하자, 안네의 집안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망명을 했다. 일기를 쓰기 시작하는 1942년은 나치가 네덜란드를 점령하고 유대인을 색출해서 수용소로 끌고 가던 때였다. 안네의 일기는 바로 그 시기를 그려낸 유대인 소녀 작가의 작품이다.
사춘기 소녀가 마음을 털어 놓을만한 참다운 친구가 없다는 고독감을 느끼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꼭 은신처에 있어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그녀는 이중고를 겪는다. 독일군을 피해 은신처에 숨고, 나돌아 다니질 않으니 친구가 없다. 이 단순한 동기에서 시작된 일기 쓰기는 안네가 바라보는 시대 상황, 사랑을 포함한 내면 고백, 나치의 만행을 놀라운 필치로 그려내고 있다. 너무나 성숙한 문장이어서, 이 일기의 진위여부가 문제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연구자들의 분석결과 그녀의 일기임이 밝혀졌다. 이 놀라운 일기를 보면 훗날 작가로서 대성할 재능마저도 말살시킨 미친 전쟁의 본질도 보인다.
종이는 인간보다 더 잘 참고 견딘다
안네는 일기장에 “종이는 인간보다 더 잘 참고 견딘다.” 고 적었다. 안네의 일생은 너무나 어린 나이에 끝이 났지만, 그녀의 표현대로 종이는 인간보다도 더 잘 참고 견뎠다. 1942년 6월 12일부터 1944년 8월 1일까지 은신처에서 몰래 살았던 기록이, 안네가 인간보다 더 잘 참고 견딘다고 믿었던 종이에 남았다. 종이는 글을 만나 완성된다. 만년필이건 연필이건 붓이건 간에 손의 연장인 도구를 통해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종이는 기다리고 견딘다.
암스테르담의 안네의집. 내부에는 은신처로 통하는입구를 책장으로 가려놓았다.
안네의 아버지가 마련한 네덜란드의 프린센흐라흐트 263번지 건물 창고에는 안네의 식구를 포함한 모두 8명의 유대인들(오토 프랑크 가족 4명, 일기에는 판 단이라고 나오는 판 펠스 일가 3명, 치과의사 뒤셀)이 숨소리를 죽이면서 살았다. 건물에 교묘하게 만들어진 비밀 공간에는 작은 라디오 하나와, 외부에서 도움을 주는 지인들만이 가끔 들러 생계를 도와주었다.
은신처에서 안네는 집단 수용소에 끌려간 유대인들과 자신을 비유하면서 '천국과 같은 생활'이라고 했다. 비록 사냥개 같은 독일 비밀경찰의 눈을 피해 기침소리조차 낼 수 없었던 공간이었지만, 맑고 밝은 소녀로서 안네는 어머니와의 말다툼, 같이 사는 다른 가족들과의 반목, 오랜 감금생활로 인한 스트레스와 우울증에 시달렸다. 사춘기 소녀의 성적인 호기심과 사랑이 움트기도 했다.
자전거를 타고, 춤을 추고, 휘파람을 불고… 동경하지만 마음 밖으로 드러내선 안 되는 것
그녀의 일기에는 날이 갈수록 성숙해져 가는 안네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숨어산 지 1년 반이 지나자 이렇게 쓴다.
"아마 당신도 1년 반이나 갇혀서 지낸다면 종종 견딜 수 없게 될 때가 있을 거에요. 아무리 올바른 판단력이 있고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아도 마음 깊은 곳의 솔직한 느낌까지 억누를 수는 없거든요. 자전거를 타고, 춤을 추고, 휘파람을 불고, 세상을 보고, 청춘을 맛보고, 자유를 만끽하고, (…) 나는 이런 걸 동경해요. 그러나 그런 마음을 밖으로 드러내서는 안 되죠. 하기는 우리 여덟 사람 모두가 자신을 불쌍하게 여기거나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지낸다면, 도대체 어떻게 될까요?"
안네의 일기에 적혀있는 나치의 만행 소식을 듣고 유대인들을 위해 울면서 기도하는 모습이나, 총소리, 대포소리, 비행기 지나가는 소리 등 전쟁에 대한 공포, 실수로 은둔처에서 발각될까 봐 조바심을 치는 모습이 있다. 저항문학으로 평가되었던 이러한 면보다는 보통 소녀로서 꿈꾸고 있는 안네의 모습이 눈에 밟힌다. 어머니에 대한 불만, 언니와의 말다툼, 성적인 호기심, 첫사랑 소년에 대한 그리움들. 2년이 넘게 숨어 사는 동안 그녀는 음지에서 자라는 식물처럼 점점 꿈꾸는 시간이 많아지고 있었다. 소녀에게 환한 태양 아래서 마음대로 활보하는 잠깐의 시간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숨어 지내는 동안 키가 얼마나 컸는지 문설주에 표시해둬
1944년 7월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안네는 드디어 은신처를 떠나 자유를 만끽할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어둠이 깊어 새벽이 오는 것이다. 그 희망의 새벽별을 바라보던 1944년 8월 4일 나치의 비밀경찰에 은신처가 발각되었다. 누군가의 밀고에 의한 것이었다. 안네의 손에 잡힐 듯 가깝게 오던 희망과 자유의 새벽별은 어둠과 죽음의 늪으로 떨어졌다.
안네의 아버지 오토 프랑크는 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 육군 장교였다. 안네의 은신처를 급습한 나치의 비밀경찰 카를 실베르바우어는 그 사실을 알고 잠시 머뭇거렸다.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조국을 위해 전쟁을 치른 장교마저도 수용소로 보내야 하는 현실이었다. 훗날 이 비밀경찰은 안네의 아버지 오토 프랑크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나에게 딸 안네를 비롯한 자기 가족이 은신처에서 지낸 2년은 행복했다는 말도 했다. 내가 믿으려 하지 않자 그는 은신처로 온 뒤 안네가 얼마나 많이 자랐는지 표시를 새겨 넣은 문설주를 가리켰다." 안네가 있었던 곳이 비록 은신처였지만, 같이 숨어산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행복을 찾았고, 전쟁이 어서 끝나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보다시피, 우리 딸은 작가랍니다"
1944년 9월 6일 안네는 은신처의 사람들과 함께 폴란드의 작은 마을 아우슈비츠에 끌려간다. 그 다음은 영영 이별이었다. 판 펠스 씨가 제일 먼저 가스실에서 사라졌고, 안네의 언니 마르고를 '어떻게' 하려던 경비병에게 대들던 어머니가 두 번째로 사라졌다. 은신처에서 같이 자라면서 사랑을 느꼈던 남자친구 판 펠스 씨의 아들 페터도 사라졌다.
은신처에 숨어 사는 동안에도 웃음을 잃지 않았던 안네와 지금도 애도 행렬이 끊이지 않는 그녀의 무덤
1945년 3월경, 아우슈비츠에서 베르겐벨젠 수용소로 이송된 안네와 언니 마르고는 열악한 환경의 수용소에서 장티푸스에 걸려 사망했다. 두 자매가 죽은 날짜는 확실하지 않지만, 영국군에 의해 수용소 사람들이 구출되기 한 달이 조금 넘은 전으로 추정한다. 유일한 생존자인 안네의 아버지는 아우슈비츠에서 극도로 나빠진 건강 때문에 다른 곳으로 이송되지 않고 남아 있었다. 1945년 1월 27일 소련군이 아우슈비츠를 들어와 다른 생존자들과 함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겪게 되었다.
독일 비밀경찰이 휩쓸고 간 은신처에 버려져 있던 안네의 일기는 이들의 은신생활을 도와주었던 미프 부인에 의해 보존될 수 있었고, 훗날 아버지에 의해 출판되어 전 세계인들의 눈시울을 적셨다. 안네의 일기를 잘 보관하고 있던, 미프 부인은 은신처에서도 글쓰기에 열심이었던 '안네'에 대해서 안네의 어머니가 자랑스럽게 한 말을 들려준다.
"보다시피, 우리 딸은 작가랍니다."
▶1941년 일본, 소련 통상무역협정체결
▶1935년 조선일보 태평로 신사옥 준공
▶1933년 세계공황대책을 협의키 위한
세계경제회의 런던서 개막
▶1929년 안네 프랑크 출생
다시 평화롭고 조용한 시절이 찾아오리라.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도 인간의 마음이 선하다는 것을 믿는다`. `안네의 일기`의 저자인 안네 프랑크가 1929년 6월 12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태어났다.
나치의 추적을 피해 숨은 다락방에서
일기를 남겨 큰 감동을 주었던
안네 프랑크의 모습.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 후 안네와 안네 가족은 독일 나치의 유태인 말살정책으로 사춘기를 아버지의 사무실 책장 뒤 숨겨진 골방에서 보내야 했다. 이 일기장은 아버지 오토 프랑크가 둘째 딸 안네의 13세 생일 선물로 사준 것으로 일기에는 1942년 6월 14일부터 가족이 체포되기 사흘 전 1944년 8월 1일까지 은신처인 골방에서의 하루하루 주변 일상사가 기록돼 있다. 그것은 저널리스트를 꿈꿨던, 한 감수성 풍부한 소녀의 성장의 기록이자 시시각각 옥죄어 오는 나치의 마수를 바라보는 연약한 인간의 절규이기도 했다. 또한 그런 와중에도 이웃 소년에 대한 사춘기 소녀다운 첫사랑의 감정을 토로하기도 했다.
1944년 8월 4일 한 네덜란드 인의 밀고에 의해 독일경찰 게슈타포들에 발각된 안네의 가족은 아버지 오토만이 소련군의 아우슈비츠 해방으로 인해 목숨을 건졌고 안네를 포함한 나머지 가족들은 가스실험을 당하거나 굶주림과 병으로 사망했다. 안네 역시 그의 언니와 함께 1945년 3월에 베르겐 벨젠수용소에서 발진티푸스로 사망했다.
`안네의 일기`는 지인인 네덜란드인 미프 히스 부인에 의해 안네의 아버지 오토에게 전해졌고 그는 이것을 `어린 소녀의 일기`라는 제목으로 출판, 그 후 지금까지 50여개국에서 3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돼 5천만부 이상이 팔렸다. 암스테르담의 프린젠크라흐트 운하 가까이에 있는 안네 가족의 은신처는 현재 박물관이 됐다.
▶1926년 임시정부,
상해에서 광동으로 이전 결의
▶1925년 우리나라 두번째 민간 비행사
장덕창, 모국방문 비행
▶1924년 미국 제41대 대통령
조지 부시 출생
▶1912년1901년 최초의 노벨 평화상
수상한 프랑스의 경제학자 파시 사망
▶1871년 대원군 각지에
척화비를 세우게 함
▶ 1854년 미국 발명가 이스트만 출생(롤필름 발명)
▶ 1829년 `알프스 소녀 하이디`의 작가 슈피리 출생
▶ 1780년 스위스의 초상화가 장 리오타르 사망
▶ 1494년 일본 침략군 인천 상륙
▶ 1494년 남아메리카 대륙 발견
▶ 1099년 고려 윤관(尹瓘), 송나라에서 자치통감(資治通鑑)을 가져옴
▶ 770년 신라, 5월에 나타난 혜성 사라짐
https://youtu.be/a7UupwsAHXA
출처 네이버지식백과,반가운의hi스토리,편집 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