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려공(昌黎公.韓愈)이 다른 사람을 위해 공덕을 새기고 사실을 서술한 것은 많은 것도 겨우 종이 몇 장이고, 그 평생을 논한 것 역시 몇 구절의 말에 그칠 뿐이었다. 그런데 후세에 입언(立言.교훈이 될 만한 말을 함)하는 선비는 경대부(卿大夫)의 묘지(墓誌)와 비문을 쓸 때 적게 쓴 것도 천여 글자를 밑돌지 않는다. 행실을 기록할 때에는 반드시 충효(忠孝)를 말하고, 형제간에 우애 있고 벗들 사이에 신의가 있다는 등 세상에서 칭찬하는 온갖 행실에 대해 하나라도 갖추지 않는 것이 없으니, 그 말이 자세하고 모두 갖추어져 티끌 하나 빠뜨림이 없다. 또 명(銘)을 청한 자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반드시 여러 번 고쳐서 완전히 흠이 없고서야 그만둔다. 그리하여 반복해서 읽으면 사람을 쉽게 싫증나게 하니, 오래 전하고자 하나 도리어 더욱 파묻혀 전해지지 않게 된다.
창려(한유)의 문장이 매우 소략(疏略)한 것 같아도, 당시에 선인(先人)을 영원히 전하고자 하는 자들은 반드시 공이 지은 명(銘)을 얻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고, 심지어는 죽음에 임해서 눈을 부릅뜨고는 한군(韓君.한유)의 기록을 얻지 못하면 장사 지내지 말라는 자도 있었다. 그렇다면 사람을 영원히 전하는 글은 과연 글자가 많고 상세한 데에 있지 않은 것이다.
공이 찬술한 사람들을 상고해 보면 그 사업과 행의(行誼)가 진실로 후대에 모두 검증하고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닌데도, 공의 글에 한번 이름을 올려 천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사람들의 입에 들어와 쉼 없이 읊어지고 있으니, 누가 그렇게 만든 것인가. 가령 공이 지금 세상에 살면서 이 도를 변함없이 지키고, 또 그 자제가 고쳤으면 하는 것도 따르지 않는다면, 과연 만족스럽게 물러나면서 부족하다고 여기지 않을 자가 있을까. 계유년(1693) 12월 1일 밤에 《창려집비지(昌黎集碑誌)》를 읽다가 그 뒤에 쓴다.
번역: 전주대학교 한국고전학연구소ㆍ한국고전문화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