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여름은 생의 처음인 듯 유난히 무덥고도 길었다. 폭염경보와 열대야의 날들이 이어지자 마치 야행성 동물처럼 낮에는 비실비실하다가 밤이 되면 모터사이클을 타고 대이동을 감행했다.
전남 완도에서 추자도로 건너갔다가 다시 해남 땅끝과 지리산, 경남 양산과 울산, 서울과 경북, 그리고 강원도를 넘나들었다. 은하수를 찾아 폭염경보를 뚫고 오히려 더 먼 길을 돌아다녔다. 이열치열의 날들이었다.
기상청보다는 옛 농부와 어부의 눈으로 자주 하늘을 보았다. 기상청이 무려 500억 원이 넘는 슈퍼컴퓨터를 들여놓고도 오히려 예보는 그 이전보다 더 자주 틀리는 ‘오보청’을 넘어 ‘구라청’의 진면목을 보여 주었다. 문제는 슈퍼컴퓨터가 아니라 이를 다루는 사람의 문제라고 하니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산다는 게 늘 그렇듯이 같은 하늘 아래 살아도 어느 곳에는 천둥 번개가 치고 먹장구름이 덮쳐오는가 하면, 또 어느 곳에는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순우리말로 ‘해밀’, ‘비가 온 뒤에 맑게 갠 하늘’을 보여 주기도 한다. 눈 시리도록 너무 진한 쪽빛도 아닌, 해밀의 저 연푸른 하늘빛이 너무나 좋다. 사람의 일 또한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먹구름 우산을 쓰고 보니 더 자주 해밀이 보인다면 거짓말일까.
하지 무렵 전후에 자주 오르던 구재봉 활공장에서 섬진강을 내려다보니 세상사가 한눈에 다 보이는 듯했다. 일희일비, 너무 촐싹거릴 것만은 아니다. 해밀과 먹구름과 운무가 모두 한몸이 아닌가. 기후변화로 조금씩 더 더워지고 있다는 것을 확연히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올 여름이 덥다면 25년 전 그해 여름도 더웠으며, 1000년 전의 어느 여름도 아주 많이 더웠을 것이다.
폭염주의보를 넘어 자주 폭염경보가 내리던 날 모터사이클을 타고 서울에 다녀왔다. 이산하 시인의 명산문집 <피었으므로, 진다> 출판기념회 때문이었다. 25년도 더 넘는 세월을 엇갈리는 인연으로 지냈다. 지난해부터 페이스북의 근황으로 언제나 늘 가까이 사는 듯했으니 이산하 형과 반갑게 포옹할 수 있었다. <피었으므로, 진다>에 끼어든 내 사진 석 장이 사실은 많이 부끄러웠다. 그래도 너무나 반가운 선후배 문인들과 가수들, 그리고 페이스북 친구 여러분들과 더불어 모처럼 유쾌한 서울의 술자리를 가졌다.
그런데 1박2일 동안 바이크 타고 서울 다녀오느라 더위를 먹었다. 신호등 많은 서울의 거리는 말 그대로 프라이팬이었다. 폭염경보에 걸맞은 바이크의 엔진 열과 아스팔트의 복사열에 탈진할 것만 같았다. “멈춰야 비로소 보인다”며 잘난 체하던 날들이 없지 않았으나 달리다 멈추면 죽을 것만 같았다.
살기 위해 미친 듯이 달리고 또 달려야 했다. 무더우니 더 빨라지는 역설의 여름, 비로소 신호등 없는 지리산에 돌아오니 다시 생기가 돌았다. 역시 한여름에는 낮에 자고 밤에 달리는 것이 ‘바이크의 정석’이다.
추자도 물빛은 블루가 아닌 그린
온몸에 뭉친 서울의 무더위를 떨쳐내고 하룻밤 쉬었다가 전남 완도로 달려갔다. 완도에서 새벽 배를 타고 추자도로 들어갔다. 추자도 앞바다의 무인도, ‘늘 푸른 섬’이라는 청도의 갯바위 섬인 연등섬, 그곳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밤새 달빛 아래 포효하는 사자섬을 바라보며 오후 4시부터 아침 6시까지 짙은 해무와 모기, 그리고 농어와 참돔과 볼락과 자리돔 등과 더불어 즐거운 사투를 벌였다.
바다낚시의 고수인 경남 하동군 금남면의 이철수씨. 지리산행복학교 후배인 그의 세심한 배려로 매우 위험한 무인도 갯바위에서 밤낚시를 해볼 수 있었다. 60cm 정도의 농어와 35cm 정도의 참돔을 낚으며 낚시꾼들의 갈망인 그 손맛을 느껴보기도 했다. 산촌놈이 난생 처음 갯바위에서 출세한 셈이다. 덕분에 낚시에 미친 사람들, 미칠 수밖에 없는 이들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내 관심은 월척보다 갯바위의 야생화와 달빛 밤바다였다. 텐트를 칠 수도 없는 아주 작은 갯바위 섬에 갇히고 짙은 해무에 포위됐지만 아주 유쾌한 유배였다. 지리산에서 새벽 4시에 출발해 다음날 밤 12시에 돌아왔으니 잠 한숨 못 잔 44시간의 강행군이었다.
추자도 물빛은 블루가 아니라 그린이었다. 물론 아주 깊은 곳은 ‘울트라 블루’겠지만 초록의 이 물빛이 나를 사로잡았다. 아주 오래전 현대상선을 타고 인도양과 지중해를 지날 때 보았던 그 울트라 블루와는 또 다른 친근한 빛, 잉크처럼 번져 내 몸속으로 들어오는 느낌을 받았다. 올 여름 무더위는 이 물빛으로 견딜 수 있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추자도에서 나오자마자 울산으로 달려갔다. 울산서점협동조합이 주최하는 인문 북 콘서트 ‘울산은 아름답다’에 참가했다. 울산의 밤은 열대야를 시원하게 숨죽이고도 남았다. 정세기 이사장, 이기철 시인과 반갑게 조우했다. 수준 높은 시낭송과 노래, 그리고 토크쇼 등이 끝난 뒤 반가운 벗들과의 막걸리 뒤풀이 또한 그러했다.
그날 밤 울산 공연에서 다재다능한 가수 이경민씨를 만났다. 작사, 작곡, 노래까지 하는 싱어송라이터 이경민씨는 관객을 휘어잡는 유머와 더불어 부드러운 음색에서 고음까지 무난하게 소화해 내는 가수였다. 우리 가요를 재해석하는 능력도 돋보였다.
창원에 사는 그가 내게 선물을 보내왔다. 졸시 ‘북극성’에 곡을 붙여 노래를 부른 것이다. 고음은 빼고 감미로운 목소리로 마치 자장가처럼 나지막하게 불렀다. 너무 고맙고 고마워 요즘 심취해 있는 ‘별나무 사진’ 시리즈와 더불어 동영상을 만들어봤다.
시노래 가수로 분류되는 서울의 유명 가수들과 더불어 시노래패 울림의 박제광씨, 그리고 솔로로 활동무대를 넓혀 온 박경하씨, 안동의 위대권-강미영씨 부부, 전남의 한보리씨와 더불어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끝없이 희망의 노래를 부르는 이들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울산은 아름답다’ 공연을 끝내고 막걸리 취기에 잠시 눈을 붙인 뒤 다시 모터사이클 시동을 걸었다. 무더위를 뚫고 울산에서 해남으로 동서횡단을 했다. 해남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 ‘저녁이 있는 삶’ 행사 때문이었다. 그곳에서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강진 토굴에 칩거하던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를 만났다.
2008년 한반도 대운하 반대 순례, 종교인들과 함께한 ‘생명의 강을 모시는 사람들’의 총괄팀장을 맡아 남한강을 걸을 때 만났으니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때 손 대표에게 진 빚이 있었다. 통합민주당 대표자격으로 온 그를 홀대했었다. 당시의 야당들이 적극적이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속으로는 그래도 고마웠지만, 무안해 하던 손 대표에게 끝내 마이크를 주지 않다가 묵묵히 걷던 그에게 딱 1분의 시간만 주었다. 그 민망한 순간을 잘 웃어넘기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정치인 관련 행사는 되도록 가지 않는데, 아직은 야인이니 마음이 홀가분했다. 손 전 대표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는 말로 실질적인 정계복귀 선언을 하면서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문화예술인들과 함께한 아름다운 녹차밭 ‘설아다원’의 밤, 물씬 사람냄새가 났다.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되면서 지리산도 휴가철 여행객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골짜기마다 만원이었다. 해마다 그러했듯이 미리 약속된 일정을 제외하고는 잠시 휴대폰을 끄고 탈출할 때가 된 것이다. 야영 장비를 챙긴 뒤 지리산을 떠나 해발 700m 이상의 경북 봉화나 강원도 오지를 찾아나섰다. 밤의 자작나무 숲이 나를 부르는 듯했다.
2002년인가, 아주 오래전에 바이칼호수 자작나무 숲에 들어간 적이 있다. 초원을 가로질러 알몸의 산책, 무장해제의 숲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어디선가 흙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그날 이후부터 자주 꿈을 꾸었다.
다시 가보고픈 시베리아는 가슴 깊이 묻어두고 강원도의 자작나무 숲을 찾아다녔다. 경남 양산에서 강원도 화천까지 한달음에 내달렸다가 지그재그로 내려오며 3박4일 동안 강원도 예저기를 둘러보았다. 한밤중에 스며들어도 좋은 자작자작, 자작나무 숲이 곳곳에 있었다. 바이칼호수 알혼섬에서 보던 밤 자작나무 숲의 별들이 내려와 있었다. 애마를 타고 밤새 은하수를 따라다니다 이른 새벽에 텐트를 치고 잠시 눈을 붙였다. 한여름인데도 한기가 스며들었다.
삼수령 지나 한강 발원지 가는 길에서 소나무 한 그루를 만났다. 한낮에 미리 봐두었다가 자작나무 숲을 지나 밤 11시에 다시 찾아갔다. 고랭지 배추밭 언덕의 향기 오묘한 노란 꽃밭에 우두커니 소나무 한 그루가 은하수를 품고 있었다, 자신이 마치 오작교라도 되겠다는 듯이. 멀리 산 너머 ‘바람의 언덕’ 풍력발전기도 잠시 멈추고 견우직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유성우 내리던 한여름 밤 정령치 주차장은 만원
강원도를 지나 내 고향 문경에서 1박을 했다. 고향 선배인 권갑하 시인이 주도하는 ‘문경새재 여름시인학교’ 때문이었다. 고향에서 참으로 쑥스러운 문학강연을 했다. 200명 이상의 문인들과 애호가들이 몰려와 성황을 이뤘다. 특히 우리 시 100편을 외운 사람들이 나와 치르는 전국 시 암송대회는 참으로 놀라웠다.
문경을 지나 일주일 만에 집에 돌아와 컴퓨터를 켰다. 강원도 밤의 자작나무 숲에 머물던 별들이 예까지 따라와 환하게 빛나고 있다. ‘그립다’는 말은 바로 이런 뜻이 아닐까. 올해 유난히 무더운 여름, 이 여름을 강원도 자작나무숲에서 잘 배웅하고 왔다.
하지만 여전히 너무나 더웠다. 막바지 무더위에 한반도가 바짝 달아올랐다. 연일 기상관측 이래 최고의 신기록을 세웠다. 폭염경보와 열대야에 지친 이들이 휴가철이 지났는데도 지리산으로 몰려들었다. 12년 만에 유성우가 내리는 밤, 정령치에 올랐다가 깜짝 놀랐다. 한밤중인데도 주차장은 만원이었다. 열대야를 피해 유성우를 보러온 인파들, 참으로 놀라운 풍경이었다.
나는 미련 없이 발길을 돌려 뱀사골 와운마을로 달려갔다. 이름하여 ‘지리산 천년송’을 뵈러갔다. 밤 11시부터 12시30분까지 나 홀로 지리산 천년송을 바라보았다. 천년송 너머 유성우가 내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멍하니 바라보던 밤하늘에 문득 문득 옛 사랑의 기억처럼 별똥별들이 스쳐 지나갔다. 제 아무리 팔을 내밀어도 도저히 잡을 수 없는, 후회막급의 날들처럼.
나름대로 삼각대를 설치한 뒤 타임랩스로 시간의 그물을 촘촘히 짜며 찍었지만 막상 별똥별이 잡힌 것은 단 한 장뿐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12년 만의 우주 쇼’는 아주 평범했다. 날마다 보던 수준의 별똥별들이었다.
‘솔바람 태교’하던 옛 여인들의 자세로 두 눈 감아
그래도 모처럼 지리산 천년송과 마주하며 ‘솔바람 태교’를 떠올렸다. 열대야를 잠재우는 천년의 바람소리를 들었다. 나의 태아(胎兒), 내가 꿈꾸는 세상은 내 몸속에서 얼마나 자라고 있는지, 되새겨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아주 오래 전에 ‘시인의 오지기행- 지리산 와운마을 천년송의 솔바람 태교’라는 제목으로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 부운리 와운마을의 천연기념물 제424호 지리산 천년송-.
나는 이 소나무를 남해의 왕후박나무, 송광사 천자암의 쌍향수, 산동의 산수유 시목 등과 더불어 내 정신의 신목(神木)이자 스승으로 삼고 있다. 특히 이 천년송은 내가 지리산 입산 뒤 계절마다 최소한 한 번쯤은 찾아뵙는 소나무 중의 소나무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피가 맑아지는 듯하고, 드러난 뿌리는 백두대간 끝자락이자 시작인 지리산의 기운을 담고 있는 듯해 나도 몰래 힘줄이 불끈 솟아나고, 용의 비늘 같은 껍질과 휘늘어진 가지는 승천의 기상을 담고 있어 문득 공중부양의 환상을 실감케 하고, 수천수만의 솔잎들은 내 몸의 세포 하나씩을 찔러 정신이 번쩍 들게 한다.
예로부터 아들을 낳지 못한 사람들이 몰려와 밥을 한지에 싸서 소나무 밑에 묻고, 왼새끼줄을 꼬아 소나무에 세 바퀴 두르고, 동동주를 세 군데에 나누어 뿌리는 치성을 드렸다는데, 이렇게 해서 지금까지 자식을 낳지 못한 사람이 없다고 한다.
마침내 천년송의 은덕으로 자식을 본 사람들이 수태를 하게 되니 어찌 다시 이 소나무를 찾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이른바 ‘솔바람 태교’의 원조가 된 셈이다. 세상의 그 모든 태교 중에서 말만 들어도 정신이 확 트이는 솔바람 태교야말로 신생아들에게 주는 지상 최고의 선물이 아닐 수 없다.
한여름밤 은하수를 찾아다니다 지리산 천년송 아래에서 두 무릎을 꿇었다. 무더위에 지친 몸을 천년의 솔바람 소리에 내맡기고, ‘솔바람 태교’를 하던 옛 여인들의 자세로 두 눈을 감았다.
이원규
한밤중에 홀로 노고단에 오릅니다.
노고단은 아무래도 탯줄로 이어지는 신화의 초입이지요.
아직 어린 구상나무로 서서 이미 져버린 원추리꽃을 생각하는데
한 여인이 희푸른 달빛을 타고 내려 왔습니다.
마고 선녀인지 그대인지 사뿐히 내려 앉아
다시 전설은 시작됩니다.
봄밤엔 홀로 처녀치마 꽃이 피고
칠월칠석엔 까마귀 떼들이
어깨 걸고 오작교로 올랐겠지요.
천 년 전에 그대의 어머니의 어머니가 달빛을 타고 내려오시고
아직 어린 구상나무의 아버지의 아버지가
천둥번개의 말을 타고 달려오실 때
비로소 노고단은 노고단이었고
임걸령은 임걸령, 반야봉은 반야봉이었겠지요.
신화는 지금도 계속됩니다.
신화는 비극적일수록 더 아름다운 법
온다던 그대 끝내 오지 않더라도 어쩔 수 없습니다.
이미 천 년 전에 그대의 어머니의 어머니는 망부석이 되고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는 천년의 주목이 되었으니
기다림의 자세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하겠지요.
하지만 노고단 아래 아직 어린 구상나무 한 그루
구름바다에 잠겨 눈썹이 하얘지도록 탑돌이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