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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영적 성결규례
레 20:1-8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또 이르라 그가 이스라엘 자손이든지 이스라엘에 거류하는 거류민이든지 그의 자식을 몰렉에게 주면 반드시 죽이되 그 지방 사람이 돌로 칠 것이요
3 나도 그 사람에게 진노하여 그를 그의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 이는 그가 그의 자식을 몰렉에게 주어서 내 성소를 더럽히고 내 성호를 욕되게 하였음이라
4 그가 그의 자식을 몰렉에게 주는 것을 그 지방 사람이 못 본 체하고 그를 죽이지 아니하면
5 내가 그 사람과 그의 권속에게 진노하여 그와 그를 본받아 몰렉을 음란하게 섬기는 모든 사람을 그들의 백성 중에서 끊으리라
6 접신한 자와 박수무당을 음란하게 따르는 자에게는 내가 진노하여 그를 그의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
7 너희는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거룩할지어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8 너희는 내 규례를 지켜 행하라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이니라
레 20:1-8 / [우상숭배에 따르는 벌] 여호와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이스라엘 사람이나 그들 가운데에 몸붙여 사는 나그네나 할 것 없이 자기 자식을 몰렉에게 희생제물로 바치는 자는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런 자는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이 돌로 쳐죽여라. 3) 나 역시 그런 짓거리 하는 자들에게서 얼굴을 돌리고 공동체에서 제거할 것이다. 그가 자기 자식을 몰렉에게 내주어 나의 성소를 부정타게 하였고 나의 이름을 우습게 여긴 까닭이다. 4) 만일 어떤 사람이 제 자식을 몰렉에게 바쳤는데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이 그 사람의 그런 짓거리를 보고도 그를 죽이지 않고 그냥 두었을 경우 5) 나는 그런 짓거리를 한 사람과 그 일가붙이와 그런 짓거리 하는 사람을 좇아서 함께 그런 행위에 동참하는 사람들을 그냥 두지 않고 모조리 공동체에서 제거할 것이다. 6) 박수나 무당에게 쫓아가거나 점쟁이를 찾아가는 것들을 나는 공동체에서 제거할 것이다. 7) 너희는 너희 자신을 깨끗게 하여 부정 타지 않도록 하여라. 스스로 거룩하게 하여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이다. 8) 너희는 내가 가르쳐 주는 대로 내가 지키라는 규정과 법을 잘 따라야 한다.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이다.
20장에서는 우상 숭배를 하는 이들이 받을 벌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우상 숭배자가 받을 벌에 대해 언급함으로 이스라엘이 섬겨야 할 분은 오직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몰렉을 음란하게 섬기는(1-5) 몰렉은 어린 아이를 불에 태워 제사드리는 암몬 족속의 우상이었습니다. 후대에 가서는 어린 아이를 양편에 있는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는 상징적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몰렉에게 자식을 바친 사람은 그 사람이 이스라엘 사람이든, 거류민이든 관계없이 사형에 처해집니다. 우상 숭배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우상보다 못한 존재로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이런 행위는 하나님의 성소를 더럽히고, 하나님의 성호를 모욕하는 행위로 여겨졌습니다. 우상 숭배자들에 대한 사형 집행의 책임은 아이를 몰렉에게 바친 사람이 살고 있는 지방의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처형의 방식은 공동체가 함께 공개적으로 범법자를 돌로 쳐 죽이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처형 방법은 우상 숭배에 대한 경각심을 갖게 하려는 의도였습니다. 성경은 공동체에서 우상 숭배를 묵인했을 때에 일어날 하나님의 징계를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직접 나서서 자식을 몰렉에게 준 사람과 묵인한 그 지방 사람들을 벌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은 죄를 묵인하는 것도 동일하게 하나님께 대한 죄로 여겨집니다.
접신한 자와 박수무당을 따르는 자(6) 악령과 영교하는 자, 점을 치는 무당을 하나님보다 더 신뢰하는 자는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결국 이들은 세상의 풍속을 쫓아 물질, 명예, 부귀, 권력, 음란으로 추락할 무리들이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거룩할지어다(7-8)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여 구별하신 것은 그들이 세상 사람들처럼 살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주의 백성이 나타내야 할 마땅한 삶의 모습은 거룩함입니다. 거룩함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셔서 구별하셨다는 사실과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점에 기초하고 있습니다(7). 따라서 주의 백성은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거룩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주의 백성이 거룩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지킴으로 가능합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함으로 거룩함을 추구할 때, 하나님은 그들을 거룩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가 거룩함과 거리가 먼 삶을 산다면, 그는 자신이 구별된 자라는 것과 자신을 부르신 이의 부르신 목적을 부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성도의 삶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증명합니다.
적용: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으로서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에 대해 어떤 부담감을 갖고 있습니까? 일상생활에서 믿지 않는 사람과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중국 선교의 개척자 허드슨 테일러 목사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중국에서 있을 때 한 청년이 "신자가 되는데 몇 년이 필요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램프의 심지는 얼마 동안 타고 빛을 발합니까?" 테일러 목사가 반문하자 청년은 "그야 심지에 불을 붙이는 순간부터 빛을 내지요."라고 대답했습니다. 테일러 목사는 청년의 손을 꼭잡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로 그겁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시고 구원하셨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새로운 삶의 빛이 그 영혼에서 타오르게 된답니다.“
복을 부르는 길
레위기 20:1-9 / 이 한규 목사
1. 자발적으로 헌신하라
하나님은 자기 자식을 몰렉에게 주면 반드시 돌로 쳐서 죽이라고 했다(1-2절). 당시 가나안 땅에 몰렉 숭배가 퍼진 이유는 헌신의 의미를 오해했기 때문이다. 즉 짐승을 번제로 바쳐도 대속의 은혜를 입는데 사랑하는 자식을 번제로 바치면 더욱 큰 대속의 은혜를 입는다는 몰렉 숭배자의 미혹 때문이었다. 지금으로 말하면 위선과 겉멋에 사로잡힌 이단 교주의 헌신 선동에 미혹되었기 때문이다. 이단의 헌신은 보통 교회의 헌신보다 겉으로는 더 대단하게 보이지만 아무리 대단하게 보이는 헌신도 비윤리적이고 강요되면 이단적인 것이다.
발적 헌신과 강요된 헌신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다. 예를 들어 옛날에는 성 추행이 몇 년씩 감옥에 갈 정도의 문제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점차 성 인지 감수성이 중시되면서 성 추행이 큰 문제란 인식이 생겼지만 아직도 그런 인식이 부족한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남녀 사이에 매일 무수히 벌어지는 혼전자나 혼외자의 깊은 성적인 관계 사례도 범죄가 아닌데 그보다 훨씬 성적인 접촉 강도가 덜한 성적인 추행 사례가 무엇이 그리 큰 범죄냐고 생각한다.
두 사례는 자발적인 행위인가 아니면 강제적인 행위인가의 차이로 범죄 유무가 갈린다. 비록 도덕적으로 잘못된 깊은 성적인 관계라도 자발적인 행위는 범죄가 아니지만 옅은 성적인 추행이라도 강제적인 행위는 범죄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법정에서도 “자발적인 행위냐? 강제적인 행위냐?”라는 문제로 공방을 벌인다. 그때 거짓말을 해서 무고를 성 범죄로 몰아도 안 되고 성 범죄를 무고로 몰아도 안 된다.
미국에서는 고화질과 고해상도의 수백 만 건의 포르노 사진과 디스크가 길거리 상점에서 버젓이 팔리는데 그보다 훨씬 화질과 해상도가 떨어지는 몰카는 범죄로 취급해서 몰카를 찍거나 유포하면 몇 년씩 징역을 살린다. 왜 그런 차이가 생기는가? 자발적으로 찍은 것이냐 아니면 강제적으로 찍힌 것이냐의 차이 때문이다. 그런 사례들은 자발적인 것과 강제적인 것이 얼마나 큰 판단 기준의 차이를 낳는지를 깨닫게 한다.
헌신 문제에서도 마찬가지다. 자발적인 헌신은 내게도 기쁨이 되고 교회와 하나님께도 기쁨이 되지만 강요된 헌신은 기쁨이 되기보다 마음을 찜찜하게 만들고 나중에 정신을 차리면 영혼과 정신이 추행당한 기분이다. 그래서 부흥사의 강요적인 헌신 분위기에 휩쓸려 집을 팔아 건축헌금을 했다가 나중에 정신을 차린 후 부부 갈등이 생기고 재정 압박으로 믿음생활에 갈등과 회의가 생기면서 후유증에 시달리는 교회와 교인이 많다.
강요된 헌신은 대단할수록 나중에 정신을 차리면 영혼과 정신이 더 털린 기분이 들어 무의식적인 좌절감이 더 커지고 하나님도 기뻐하시기보다는 아파하신다. 이단 교주가 뱀 같은 혀로 강요하는 헌신에 미혹되면 영혼과 정신과 물질을 다 털릴 정도로 헌신한다. 그러면 이단 신자가 일반 교인보다 더 대단하게 헌신하는 것 같지만 사실상 강요적인 헌신은 대단할수록 이단 교주만 속으로 쾌재를 부르지 하나님은 더 마음 아파하신다.
몰렉 숭배자들은 자식을 바칠 정도로 대단하게 헌신해서 더 복을 받을 줄 알지만 그것은 큰 착각이다. 잘못된 헌신이나 강요적인 헌신은 아무리 대단해도 하나님의 마음을 더 아프게만 한다. 자기 것을 다 드리고도 교주의 배만 불리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면 그것처럼 불행은 없다. 이 땅에 살면서 다른 불행은 다 맞이해도 이단 교주에게 미혹되는 불행만은 없도록 간절히 기도하며 자기 영혼을 힘써 지키라. 헌신은 자발적이어야 한다.
2. 하나님을 명예롭게 하라
자식을 몰렉에게 준 몰렉 숭배자를 죽일 때는 그 지방 사람이 돌로 치라고 했다(2절). 그런 행위를 하나님의 성소를 더럽히고 하나님의 성호를 욕되게 한 행위로 여기셨기 때문이다(3절). 만약 자기 자식을 몰렉에게 주는 것을 그 지방 사람이 못 본 체하고 그를 죽이지 않으면 하나님은 그 사람과 그의 권속에게 진노하여 그와 그를 본받아 몰렉을 음란하게 섬기는 모든 사람을 그들의 백성 중에서 끊겠다고 하셨다(4-5절). 이렇게 엄중한 징벌을 내리신 것은 자기 영성과 헌신의 과시가 얼마나 주의해야 할 것인지를 잘 교훈한다.
사람이 높아지면 하나님이 낮아진다. 사람이 억지와 위선으로 칭찬 받으려는 행위는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행위다. 또한 상식적으로 헌신한다는 명목으로 진짜 자기 자식을 죽여서 몰렉 신에게 바치는 것은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도 상식에 벗어난 범죄다. 하나님은 상식에 벗어나고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잘못된 행위를 헌신이나 훈련이란 명목으로 행하는 것을 하나님의 성소와 이름을 더럽히는 것으로 여기셨다.
담대함을 가르친다면서 술집에서 소리치며 전도하다가 욕먹기, 인분 먹기 훈련 등을 하고 또한 가정에 얽매이지 말라면서 부모 뺨을 때리기 훈련 등을 하는 것은 훈련이란 명목으로 하나님의 성소와 이름을 욕되게 하는 행위로서 구약 시대에는 죽여야 할 죄였다. 기독교는 보편적인 상식과 윤리와 도덕을 말살하지 않고 존중하는 종교다. 헌신과 훈련이란 명목으로 보편적 상식과 윤리와 도덕을 말살하면서 “예수 이름으로 귀신아 물러가라.”라고 하는 것도 예수님의 이름과 교회를 더럽히는 반 기독교적인 이단 행위다.
성도는 상식과 도덕과 윤리보다 더 높은 기준의 삶을 살려고 해야 한다. 위선을 부리지 않으면서도 체면도 차릴 줄 알고 염치도 있어야 한다. 불신자 앞에서 내가 잘못된 모습을 보이지 않도록 거룩한 두려움을 가지고 살라. 부끄러운 행동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 거짓말과 거짓 행동을 부끄러운 줄 모르고 전도 방법으로 사용하는 것은 바른 믿음이 아닌 이단적인 믿음이다. 욕심에 젖어 살면서 ‘오직 예수’를 자기 영성 과시의 구호로 삼으며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지 말고 진실하고 충성된 삶으로 믿는 사람답다는 말을 들으며 하나님을 명예롭게 하라.
3. 스스로를 깨끗하게 하라
하나님은 몰렉을 숭배하는 것도 가증이 여겼지만 신비주의 신앙도 가증이 여기셨다. 그래서 접신한 자와 박수무당을 음란하게 따르는 자에게 진노해서 그를 그의 백성 중에서 끊겠다고 하셨다(6절). 하나님은 신비주의 이단 교주를 따르지 말고 스스로 깨끗하게 해서 거룩하라고 하셨다(7절). 왜 하나님이 규례와 말씀을 주셨는가? 성도를 거룩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선택된 백성을 말씀으로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다(8절).
말씀을 남을 비추는 거울이 아닌 나를 비추는 거울로 삼으라. 말씀으로 남을 함부로 비판하지 말라. 남의 도덕성 비판도 주의하라. 그 비판은 부메랑이 되어 내게 돌아온다. 내가 남을 공격한 말이 나중에는 올무가 되어 나를 얽어맨다. 가끔 방송 프로그램에 나온 토론 패널들이 남에 대해 비판하는데 어떤 때는 수위가 너무 높아서 나중에 틀린 사실로 밝혀져 명예 훼손으로 고소당하면 어떡하려고 저렇게 말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요새 정치를 보면 여야가 똑같이 누군가를 좌표로 찍고 그의 과거를 탈탈 터는 식으로 공격한다. 나와 가족의 오래 전 일까지 탈탈 털어 흠이 없을 사람은 없다. 그래서 남에 대해 비판을 많이 하면 나중에 나도 똑같이 털리고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심판 때는 더욱 샅샅이 털린다. 완벽한 잣대나 이중 잣대를 들이대어 남을 비판하면 나도 똑같이 당할 날이 온다. 남을 탈탈 털면 언젠가 혹은 최후의 심판대에서 나도 탈탈 털린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살라.
내가 한 말이 나중에는 올무가 되어 나를 얽어매기에 비판을 꼭 해야 하면 신중하고 지혜롭게 하고 비판 전에는 꼭 기도하라. “하나님! 잘 비판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고 저의 비판이 잘 수용되는 건설적인 비판이 되도록 상대의 마음도 열어주소서.” 특히 비판이 나의 질투심에서 나온 비판이 되지 않도록 내적인 이중 삼중의 제동장치를 잘 작동시키라. 남이 잘 되는 것이나 나를 앞선 것에 대한 질투심 때문에 비판한다면 너무나 못난 모습이다. 남에게 깨끗하게 살라는 말은 절제하되 내게 깨끗하게 살라는 자기 명령은 단호하게 하라.
4. 부모를 저주하지 말라
하나님은 부모를 저주하면 반드시 죽이라고 했다(9절). 부모를 저주하고 버리면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 죽는 형벌이 따르지만 부모를 축복하고 섬기면 복이 자기에게로 돌아가 최고의 보상이 따른다. 심은 대로 거둔다. 효자가 효자를 낳는다. 효의 씨를 뿌리면 이 땅에서도 열매를 거두고 하늘에서의 상급은 더욱 찬란할 것이다. 역사상 존경 받는 인물들은 대개 어머니의 깊은 사랑을 받고 자랐다. 그처럼 부모의 사랑을 받는 것도 복된 일이지만 더욱 복된 일은 부모를 사랑으로 섬기는 일이다. 만약 부모가 없다면 하나님과 교회를 부모처럼 사랑하고 섬기라.
십계명의 5계명에서 부모를 공경하면 잘 되고 장수한다고 했다. 쉽게 말하면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사업 성공과 건강 유지의 비결이란 뜻이다. 부모를 어떻게 공경해야 하는가? 기본적으로 부모의 마음을 편하게 해드리라. 그리고 감사하라. 세월이 흐르면 점차 부모가 힘이 약해지고 실수도 많아지고 생각도 짧아지고 마음도 편협해지면서 급변하는 세상에서 잘 적응하지 못해 힘들어할 것이다. 그런 부모를 불쌍히 여기면서 감사한 마음을 끝까지 잃지 말라.
부모의 기억력과 창조력과 적응력이 점차 약화되는 것도 잘 이해하고 행동하라. 내가 어렸을 때 부모가 나의 손을 붙잡아 주었듯이 이제는 내가 부모의 손을 붙잡아 드리라. 나중에 부모가 거동을 못하게 되면 그때는 최상의 효도를 할 기회다. 세상에서 제일 복된 일은 자식으로부터 공경 받고 사랑 받는 일이고 제일 저주스런 일은 자식으로부터 공격 받고 설움 받는 일이다. 나의 진실한 공경과 사랑으로 나의 부모를 지구상에서 가장 복된 존재가 되게 하라.
앞으로 효도할 수 있는 기회는 점차 줄어들 것이다. 부모가 살아있고 기억력이 있을 때 잘해 드리라. 나중에 부모가 기억을 점차 잃을 수도 있다. 그때도 잘 해 드리라. 나의 섬김을 부모는 기억하지 못해도 하나님은 기억해주신다. 모든 계명은 끝까지 잘 지킬 수 있는 기회가 있지만 5계명인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은 언젠가는 이 땅에서 지키려고 해도 지킬 수 없을 때가 온다. 그때가 되기 전에 최선을 다해 부모를 기쁘게 해 드리라.
무엇보다 부모가 나로 인해 하나님께 가까워지게 하라. 신실하게 하나님을 잘 믿는 모습을 보여줌으로 부모에게 힘과 기쁨과 보람을 주고 더 나아가 부모가 신앙생활도 기쁘게 하고 교회도 잘 섬기는 기회를 많이 마련해 드리고 또한 헌금도 많이 하는 뿌듯함을 누리도록 용돈도 많이 드리라. 성경과 역사를 보면 부모를 잘 섬긴 사람은 한결같이 축복 받았다. 효자가 못 되는 일이 없고 불효자가 잘 되는 일이 없다.
여호와 마카데쉬
레위기 20:7-8 / 피영민 목사
서 론
하나님의 이름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성품을 계시해 주시기 때문이고, 둘째는 하나님의 이름이 계시된 곳에 하나님의 임재도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 75편 1절에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께 감사하고 감사함은 주의 이름이 가까움이라 사람들이 주의 기사를 전파하나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나타내고, 하나님이 그곳에 함께 계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오늘 살펴볼 ‘여호와 마카데쉬’라는 하나님의 이름은 구약성경에 세 번밖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레 20:8, 출 31:13, 겔 20:12). 오늘은 흔히 들어보지 못한 하나님의 성호(聖號), ‘여호와 마카데쉬’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Ⅰ. 레위기 20장 8절에 나타난 ‘여호와 마카데쉬’
“너희는 내 규례를 지켜 행하라 나는 너희를 거룩케 하는 여호와니라.” 본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히브리어로 ‘여호와 메카디쉬켐’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 ‘켐’은 ‘너희를’의 뜻입니다. 그래서 ‘켐’을 제외하면 여기서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 마카데쉬’가 됩니다.
먼저 ‘여호와’의 의미에 대해서는 모세가 하나님께 그 이름을 여쭈었을 때 대답해 주신 말씀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3장 14절에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영어로 “I am who I am”(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입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은 세 가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첫째는 ‘No-Beginning’입니다. 시작이 없는 분이시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누군가로부터 출생된 존재가 아닙니다. 둘째는 ‘No-Need’입니다. 아무 부족한 것이 없고, 스스로 충족된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셋째는 ‘No-Change’입니다. 하나님은 변화하거나 소멸됨이 없는 분이십니다. 이 세 가지가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의 기본적인 의미들입니다.
그리고 ‘여호와’ 뒤에 ‘이레’, ‘라파’, ‘샬롬’, ‘삼마’와 같이 갖가지 단어가 붙어 하나님의 성품을 계시해 주시는 것입니다.
히브리어 ‘마카데쉬’의 기본 동사는 ‘카다쉬’인데, 이는 ‘거룩하게 하다’(Sanctify)는 의미입니다. ‘마카데쉬’는 ‘카다쉬’의 ‘피엘’(Piel) 분사형태로, 현재진행의 의미를 갖습니다. 그러니까 지속적이며, 점진적으로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히브리어 동사는 일곱 개 형태로 변화되는데, 그 중 피엘은 ‘강조’ 또는 ‘능동’의 의미를 갖습니다. 그러니까 ‘마카데쉬’는 하나님이 열정과 애정을 가지고 성도들을 지속적으로 거룩하게 하신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하나님이 성도들을 거룩하게 하시는 작업은 두 가지 방향으로 이뤄집니다. 첫째, 이방족속의 가증한 풍속으로부터 구별하십니다. 레위기 20장 23절에 “너희는 내가 너희 앞에서 쫓아내는 족속의 풍속을 좇지 말라 그들이 이 모든 일을 행하므로 내가 그들을 가증히 여기노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애굽 사람이나 가나안 일곱 족속은 몰렉을 숭배하고 자기 자식을 불 가운데 지나게 하며, 박수와 무당을 능력의 종으로 여겨 좋아했습니다. 그들은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기도 했고, 성적으로 부패한 짓을 자행했는데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이런 악으로부터 구별해 내신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6장 17절에도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로 떨어져서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의 거룩함이란 바로 이런 세상의 부패로부터 구별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둘째, 하나님을 위해서 구별하십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따로 부르셔서 구별해 놓으신 백성들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구별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구별된 존재들입니다. 레위기 20장 26절에 “너희는 내게 거룩할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로 나의 소유를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구별한 이유는 너희를 나의 소유로 삼기 위함이라”고 밝혀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고 순종하고 충성하여 그 분을 예배하고 영광 돌리는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구별하시고, 하나님을 위해 구별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성화입니다. 성화의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열정을 가지고 거룩한 삶을 살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성화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일입니다.
“성화는 성령의 은혜스럽고 지속적인 사역이다”라고 개혁주의 신학자 루이스 벌코프가 말했습니다. 벌코프는 성령의 성화 사역을 통해서 인간이 죄의 오염으로부터 벗어나고, 본성이 점진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갈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성도는 죄의 오염으로부터 벗어남으로써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며 선행을 하며 사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화를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행하시지만 이것이 성화에 있어서 인간이 수동적인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성도 역시 성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그래서 레위기 20장 8절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7절을 유념해야 합니다. “너희는 스스로 깨끗케 하여 거룩할지어다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깨끗케 하다는 표현 역시 히브리 동사 ‘카다쉬’가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동사 변형이 다릅니다. 여기서는 ‘히트파엘’(재귀형)로 사용되었습니다. 스스로 거룩하게 해야 한다는 의미로 사용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를 거룩하게 하시지만 성도들 역시 스스로 거룩하게 해야 합니다. 이것은 절대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신약성경에도 이러한 성화의 진리가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습니다. 빌립보서 2장 12~13절에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의 구원을 잘 가꾸어 나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성도들 안에 내주 하시며 지속적으로 성도를 거룩하게 하시는 일을 행하시지만 성도들 자신도 두렵고 떨림으로 스스로 거룩한 삶을 살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술과 담배에 중독되어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할 때, 예수님을 믿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술을 끊게 해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술을 많이 마시기 때문에 늘 술 냄새가 나고, 담배 냄새가 나서 예배 드릴 때도 주변 성도들에게 피해를 준다면 확실히 문제가 있습니다. 가정에서는 아내에게 잔소리를 듣고, 직장에 가면 교회 집사라는 사람이 어떻게 매일 그렇게 술을 많이 마시느냐는 소리를 듣고, 당신이 나와 다른 것이 무엇이냐고 말을 듣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술과 담배를 끊게 해 주시도록 기도하면서도 계속 술을 마시고, 계속 담배를 태운다면 그 사람은 술과 담배를 끊을 의지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금주나 금연에 성공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술을 끊으려면 기도도 해야 하겠지만, 술을 끊으려고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거룩하게 해 주십니다. 이것이 신비하면서도 위안이 되는 진리인 것입니다.
불신자는 노력해도 계획한 바를 이루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정말 강한 의지를 가진 사람이 아니고서는 술이나 담배를 끊을 수 없습니다. 병들어서 마실 수 없거나 피우지 못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성공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이 기도하고 최선을 다해 노력하면 여호와 마카데쉬의 하나님이 성공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를 점진적으로 거룩하게 하는 분이시기 때문에 계획한 일을 승리하게 하십니다.
2016년도에는 스스로 거룩케 하는 노력을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나쁜 습관도 끊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시면 승리할 수 있습니다. “너희는 내 규례를 지켜 행하라 나는 너희를 거룩케 하는 여호와니라”(레 20:8).
Ⅱ. 출애굽기 31장 12~13절과 에스겔 20장 12절에 나타난 ‘여호와 마카데쉬’
출애굽기와 에스겔을 한꺼번에 살펴보는 이유는 내용이 동일하고 연관되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31장 12~13절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로 알게 함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13절에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 마카데쉬’가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 마카데쉬임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 안식일을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안식일을 대대의 표징으로 주셨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안식일을 지킬 때 이런 의미를 잘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에스겔 20장 12절에도 “또 나는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알게 하려 하여 내가 내 안식일을 주어 그들과 나 사이에 표징을 삼았었노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여호와 마카데쉬이심을 알도록 하시기 위해 안식일을 주어 표징을 삼으셨다는 말씀입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심을 알게 하시려는 ‘영원한 징표’(Everlasting Sign)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은 없어지거나 폐지되지 않습니다.
구약시대에는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켰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속죄사역을 완성하신 부활을 기념하기 위해서 주일로 지키는 것입니다. 토요일에서 주일로 바뀌었습니다. 그것은 주인이 바꾸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12장 8절에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인이신 예수님이 토요일 안식일을 주일로 바꾸셨습니다.
주인이 마음대로 바꾸실 수 있는 것인데, 무엇이 문제가 되겠습니까? 성도의 안식일은 주일입니다. 마가복음 2장 27절에 “또 가라사대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면, 이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안식일은 하나님이 성도들을 거룩하게 하시는 일을 위해 존재하는 날이라는 것입니다. 십계명 제4계명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입니다. 안식일의 목적이 하나님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원래는 토요일인데 왜 바꿨느냐고 묻는 것은 헛된 논쟁만 일으킬 뿐입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실 필요가 있으셨다면 신약시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안식일은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종전에는 토요일로 지키던 것을 주일로 바꾸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안식일이 폐지되었다고 주장하는데, 십계명 가운데 어느 계명 하나 폐지되거나 무효화된 것이 없습니다.
안식일이 폐지되었다고 주장한다면 하나님이 성도들을 거룩케 하시는 일을 포기하셨다고 말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결코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안식일을 통해서 성도를 거룩케 하시는 일을 계속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 성도들은 안식일을 지킴으로 거룩해 지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일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읽고 듣고 묵상해야 합니다. 오늘은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날입니다. 집에 가셔서도 성경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또 주일은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진지한 자세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날입니다. 하나님 앞에 잘못한 것이 있다면 회개하고 또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면 도와주시도록 기도하고, 버려야 할 죄가 있으면 버리게 해 주시도록 간구하고 하나님과 대화하는 날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 기도로 아뢰고 또 성도들 간의 대화와 교제를 통해 서로 격려해야 합니다. 안식일은 격려하는 날입니다. 히브리서 10장 24~25절에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안식일에는 말씀을 읽고 기도하며 서로 격려하는 날인 것입니다. 지난 일주일간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복으로 돈을 벌었으면 그 중에 일부를 하나님께 십일조 헌금으로, 또는 감사헌금으로 드리는 것이 안식일에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안식일은 이 세상에 하나님의 일이 왕성하도록 복을 주시는 날이기도 합니다. 또 자녀들의 신앙과 믿음이 잘 성장하도록 말씀을 가르치도록 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려는 가장 중요한 목적을 가지고 하루를 구별해 놓으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이러한 은혜의 수단을 통해서 하나님이 여호와 마카데쉬이심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탁구를 잘 치고 싶으신 분은 제가 가르쳐드리는 대로만 해 보세요. 먼저 일주일에 하루를 구별하시고, 직장도 가지 말고 가게 문도 열지 마세요. 그리고 그 날이 되면 새벽부터 탁구만 생각하고, 밥만 먹고 온종일 탁구만 치는 것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1년만 하시면 반드시 저를 이기실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운동신경이 부족해도 최소한 저는 이길 수 있습니다. 저는 교수생활을 할 때도 탁구시합을 해서 이긴 학생에게는 무조건 A학점을 주었습니다.
탁구 하나를 잘 치겠다는 목적을 세우고 일주일에 하루를 구별해서 탁구만 친다고 하면 단연코 탁구 실력의 진보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안식일을 주신 목적이 바로 이와 일맥상통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안식일을 주신 것은 세상 죄로부터 자신을 구별하고, 하나님을 위해 구별되어야 한다는 성화의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들에게 성화의 필요가 있다면 안식일은 여전히 필요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안식일에 먹지 말라, 타지 말라, 가지 말라하면서 대단히 귀찮고 괴롭고 피곤한 날로 만드는데, 안식일은 그런 규정을 세우는 날이 아닙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이 여호와 마카데쉬이심을 경험하는 매우 유익한 날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에는 내가 어떻게 하면 거룩해 질 것인가에 목적을 두고 시간을 보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한 발, 하나님께 한 발씩 디디면서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사람은 세상에 둔 한 발을 들어 하나님께 두 발을 디디고 하나님께 헌신되어 살도록 결단해야 합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고 이를 위해 힘쓰고 애쓰는 날이 안식일인 것입니다.
주일에는 꼭 성경을 읽으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다른 날은 성경을 읽지 못해도 주일에는 꼭 읽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소설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인류역사 가운데 가장 귀중한 책입니다.
저는 한 번 읽은 소설책을 웬만해선 다시 읽지 않습니다. 소설은 다시 읽을 만큼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내용 전개와 스토리를 알면 다시 읽을 이유가 없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한 번 본 영화를 두 번, 세 번까지 본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한 번 본 영화는 아무리 재미있어도 다시 보고 싶지 않습니다. 기대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30년 동안 성경을 가지고 설교를 해 왔는데도 읽을 때마다 새롭고, 설교할 때마다 다릅니다. 그래서 성경은 확실히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주일에는 하나님과 일대일로 기도하는 시간을 갖고, 내가 하나님의 일에 얼마나 헌신되었는지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져야 할 줄 믿습니다. 또한 우리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 한 구절이라도 가르쳐서 믿음의 다음 세대를 세우는 일에도 헌신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Ⅲ. 우리 삶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가?
하나님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은 외면할 수도 없고, 외면해서도 안 되는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말씀과 관련해서 두 가지를 질문해 봐야 합니다.
첫째, “나는 지난 10년 동안 거룩의 관점에서 얼마나 진보해 왔는가? 아니면 퇴보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10년 전에는 거룩을 추구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부단히 애를 쓰며 살았는데, 이제는 다 포기하며 살고 있다면 그것은 거룩성에서 퇴보한 것입니다. 지난 날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기 위해 노력한 모든 것이 추억이 되고 있다면 하루 속히 돌아서야 합니다.
둘째, “나는 지난 10년 동안 어떤 자세로 안식일을 지켜왔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나를 거룩하게 해 주시려는 여호와 마카데쉬를 경험하는 날로 삼고 살아왔는가라고 질문해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께 얻어 터질까봐 두려운 마음으로 지켜왔거나 맹목적이고 습관적인 태도로 지켜왔다면 돌이켜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질문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질문들은 우리의 신앙생활뿐만 아니라 인생의 본분을 이루는데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질문들입니다. 안식일을 제대로 지키는 사람은 그만큼 거룩성에서 진보를 보이고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면 별과 같이 빛나는 스타가 되는 것입니다. 천국에서는 거룩한 사람이 가장 존귀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권세, 명예, 지식, 물질과 같은 것이 천국에서는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천국에서 별처럼 빛나는 스타가 되는 것은 우리의 거룩성의 정도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에 거룩의 진보를 이루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안식일을 어떻게 보냈는가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것입니다.
결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안식일은 참으로 소중하고 귀한 선물입니다. 이 날의 목적은 단순히 쉬는 것이 아닙니다. 육신적인 휴식만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계속 놀고 주일 아침에 일찍 예배를 드리고 와서 편히 쉬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안식일의 목적을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안식일의 목적은 육신적인 휴식이 아닙니다.
요즘은 교통체증도 금요일 저녁에 있던 것이 목요일 저녁으로 옮겨왔다고 합니다. 목요일 저녁부터 놀러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요일까지 계속 놉니다. 즐기고 노는 일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식일은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며 보내야 하는 날입니다.
어떤 성도님이 간증하시는데, 본인은 글자를 읽을 줄 몰라서 그저 성경을 넘기기만 했는데도 넘치는 은혜를 받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 것입니다. 스펄전 목사님의 전기를 보면 성도 가운데 글자를 몰라서 성경을 넘기는 것으로 경건생활을 했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주일에는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하나님께 진지하게 기도하고 세상일은 내려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일을 하지 않아도 복을 주십니다. 주일에 돈을 벌지 않아도 하나님은 주일에 벌 것까지 다 채워주십니다. 그러나 주일에 일을 하면 수입이 생겨도 이래저래 다 빠져 나갑니다. 주일에 돈을 벌려고 애를 쓸 필요가 없습니다. 안식하시기 바랍니다. 일을 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복을 주십니다. 오히려 일을 하면 복이 되지 않고 저주가 됩니다.
여호와 마카데쉬의 하나님이 주일을 구별해서 나로 거룩하게 하시는 구나 생각하고 안식일의 목적을 바로 깨달아 주일성수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안식일은 지상에서 천국을 맛보는 날입니다. 천국을 맛보는 날인데 엉뚱한 일만 하면 되겠습니까? 창세기 1~2장을 읽어보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는 6일 동안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라는 구절이 반복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안식일만큼은 이런 구절이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안식일이 영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에서 누릴 영원한 안식을 예표하기 때문입니다. 그 때가 되면 더 이상 고통도, 고생도, 질병도, 사망도, 슬픔과 눈물도 없는 영원한 안식과 기쁨과 평안이 있기 때문에 저녁이 될 필요도 아침이 될 필요도 없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 안식일을 여호와 마카데쉬의 하나님을 경험하는 복된 날로 삼아 영원한 천국에서도 기쁨과 평강과 영광을 누리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여호와 카데쉬)
레 20:7-8, 롬 6:13 / 이동원 목사
청교도 시대가 남긴 에피소드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당시의 시대에는 한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면 대부분의 지역 교회에서 그를 그 교회 회원으로 받아 드리기 위하여 교회 위원회와 입교 문답을 하는 관례가 있었다고 합니다. 한 자매가 교회의 나이 든 장로님으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았다고 합니다. “자매는 예수님을 믿기 전에 자신이 죄인이었다는 것을 인정하십니까?” 물론 이 자매는 “예”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자 그 장로님은 다시 묻습니다. “그러면 지금 예수를 믿은 후에는 자신을 어떻게 느끼십니까?” 자매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지금은 전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느끼고 있습니다.” 장로님은 다시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예수 믿기 전과 예수 믿은 후에 달라진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그 다음에 자매가 했던 대답이 아주 유명한 말이 되었다고 합니다. “전에는 제가 ‘죄를 향해 달려가는 죄인’이었지만(a sinner running after sin), 지금은 ‘죄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죄인’(a sinner running from sin)입니다.”
묻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아직도 죄를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죄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중이십니까? 그리스도인라고 죄 문제와의 싸움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참으로 누구인지를 깨닫고 예수를 믿고 그를 나의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한다면 죄사함 받고 구원받은 것은 확실한 성경적 사실입니다. 이것을 의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성경은 성도들에게 죄와의 싸움이 끝난 것은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아니 오히려 사단은 하나님의 자녀된 자들을 넘어뜨리고자 더욱 집요하게 공격하고 유혹합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전쟁인 것입니다. 이 전쟁에서의 승리의 가장 중요한 과제가 죄로부터 도망치는 것을 배우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좀더 적극적으로 표현하면 ‘거룩해지는 일’입니다. 신학자들은 예로부터 이 과정을 가르쳐 ‘성화(sanctification)의 단계’라고 불렀습니다. 신학자 헨리 할러먼(Henry Holloman)교수는 성화를 가르쳐 오늘날 ‘잊혀진 축복’(The forgotten blessing)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모두 행복하기를 원하지만 거룩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많은 것 같지 않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레위기서 입니다. 레위기는 구약에서 창세기, 출애굽기 다음에 나옵니다. 창세기는 시작의 책이고 특별히 인류에게 죄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출애굽기는 노예의 땅인 이집트에서 어떻게 떠나는 가를 보여주는 구원의 책입니다. 다음 책인 레위기는 죄로부터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거룩한 삶을 살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책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스스로 깨꿋하게 하여 거룩할지어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너희는 내 규례를 지켜 행하라.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니라”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또 하나의 이름을 만납니다. 그는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 곧 ‘여호와 카데쉬’(케데쉼)라는 것입니다. ‘카데쉬’라는 말은 본래 히브리어 단어 ‘카도쉬’(kadosh)라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영어의 ‘holy'에 해당되는 ’거룩하다‘는 뜻입니다. 자신이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는 무엇보다 그의 백성들이 거룩하기를 소원하고 계십니다. 문제는 오늘을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들의 삶에서 하나님의 소원인 거룩함을 실제로 이루어 드릴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롬6:13에서 그 실제적인 처방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1. 자신을 죄에게 드리지 말아야 합니다.
롬6:13에서 열쇠 단어는 ‘드리라’는 것입니다. 거룩의 열쇠는 우리가 스스로를 어떻게 드리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드린다’는 말의 원어는 ‘paristano'라는 단어인데 영어로는 ’present'(갖다 바친다) 혹은 ‘yield'(항복한다)의 뜻으로 번역됩니다. 그래서 이제는 자신을 죄에게 갖다 바친다든지 죄에게 항복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개역 개정판에서는 ’내주지 말라‘로 번역했습니다. 표준 새 번역은 ’내 맡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과 된 후의 죄에 대한 본질적인 차이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어서 죄를 지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구원받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면 우리는 죄를 안 지을 수 있는데 짓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죄에서 승리하는 거룩한 삶을 열망하신다면 무엇보다 죄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믿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죄에 내어주는 어리석은 자포자기의 굴종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한 가지 도움이 될 수 있는 처방은 우리가 죄 지을 유혹을 느낄 때마다 자신을 죽은 자로 여기는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롬6;11에서 바울이 가르친 바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 지어다” 사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내 죄를 대신하시고 죽으신 것이 사실이라면 그가 죽으실 때 죄짓는 나도 거기서 죽은 것입니다. 그리고 죽은 자는 더 이상 죄에 반응하지 않습니다. 시체가 미워하는 것, 화내는 것, 시기하는 것, 질투하는 것을 보신일이 있으십니까? 그래서 죄 지을 일 생기면 나는 죽었는데--하고 죽은 나를 그려 보십시오. 그렇게 ‘여기라’는 말은 일종의 mental exercise를 강조하신 것입니다.
어느 주일학교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사람이 착한 일을 많이 하면 천국 가나요? 아이들은 일제히 “아뇨”하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교회 열심히 다니면 천국에 가나요? 아이들은 다시 일제히 “아뇨”하고 대답을 하더랍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럼 어떻게 해야 천국에 가나요?”물었더니 아이들의 대답이 무엇인지 아세요? “죽어야 천국가요”했답니다. 정답이지요. 그러나 죽음은 천국 가는 길일뿐 아니라, 거룩의 길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옛 사람이 죽어야 새 사람이 삽니다.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어야 의에 대하여 삽니다. 나의 자아가 죽어야 내 안에 거룩한 예수님이 나타납니다. 그것이 바로 죄를 이기는 처방입니다. 우리 안에 거룩을 이루어가는 가장 중요한 첫째 처방입니다.
2. 자신을 다시 산자로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거룩은 무엇을 안 하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제 무엇인가를 하셔야 합니다. 거룩의 첫 처방은 죄를 향해 끊임없이 NO하는 것을 배우시는 일입니다. 그러나 둘째 처방은 하나님을 향하여는 끊임없이 YES하는 것을 배우셔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으로 말하면 십자가에서 죄에 관한 한 죽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주께서 십자가에서 다시 사심은 우리로 다시 산자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새 인생을 살게 하고자 함인 것입니다. 그래서 롬6:13에서 바울은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라”고 한 것입니다. 롬6:11의 표현을 빌리면 죄 지을 일에 대해서는 자신을 죽은 자로 여기지만 하나님 기뻐하실 일에 대해서는 생생하게 산자답게 열렬하게 반응하시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죄를 피할려고 만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거룩한 일에 자신을 드리셔야 합니다.
사실, 레위기에서 ‘거룩하다’는 단어를 원어에 가깝도록 다른 단어로 대치한다면 가장 원 의미에 가까운 단어는 ‘구별한다'(separate, set apart)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용되는 ’구별‘이나 ’분리‘라는 단어는 이중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속되고 더러운 것에서의 분리의 의미도 있지만, 이제 그 분리한 것(구별해 놓은 것)을 하나님의 목적에 사용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거룩하다는 말이 아주 광범한 의미로 사용됩니다. 성전, 성소라는 말을 생각해 보십시오. 단순히 그 장소에서는 죄가 범해지지 않고 분위기가 엄숙하고 깨끗해서 성소인가요? 더 중요한 것은 거룩한 하나님의 일에 그 장소가 쓰임을 받기 때문인 것입니다. 성일(안식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시간이 다른 시간과 구별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죄를 안 짓는 날 이이어야 하기 때문입니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일을 더욱 전념하는 날이기 때문 아닙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 된 우리들 스스로를 성도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왜 성도입니까? 단순히 죄를 짓지 말고 살아야 하기 때문인가요? 더 중요한 이유,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된 이유는 하나님의 거룩한 일,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에 쓰임을 받기 위해서 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섬김은 성도에게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사항입니다. 지난주 저는 예배의 중요성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예배는 축도와 함께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것이 참된 영적 예배라고 가르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일주일에 한 시간 드리는 예배로만 거룩을 이룰 것이라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리십시오. 봉사하십시오. 목자로 섬겨 보십시오. 전도하는 일에, 선교하는 일에, 가르치는 일에 몸으로 봉사하는 일(주차장 봉사, 엘리베이터 봉사, 안내 봉사, 예배 봉사, 찬양봉사, 다양한 팀 사역 봉사)에 자신을 드려 보십시오. 쓰임 받는 기쁨을 회복하십시오. 그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여호와 카데쉬이신 하나님을 온 몸으로 만나게 될 것입니다.
3. 자신의 모든 지체를 거룩한 도구로 드려야 합니다.
거룩을 이루는 첫째 처방은 죄에 대하여 NO를 하시는 것입니다. 둘째 처방은 하나님을 향하여 YES하시는 것입니다. 그 방법 중의 하나가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헌신이 진지한 헌신이 되려면 구체적인 드림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헌신을 가르칠때마다 마음으로 헌신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몸으로 봉사하라고, 몸으로 산제사를 드리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롬6:13에서는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드리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사용된 mele(melos)라는 원어는 신체의 구체적인 부분들을 나타내는 단어(지체)입니다. 여러분의 머리가 하나님의 의로운 일, 그리고 이웃을 세우는 일에 쓰여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이웃을 해롭게 하는 일에 여러분의 좋은 머리가 사용되고 있는지요? 여러분의 입술과 혀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 이웃을 세우는 일에 쓰여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이웃을 낙심시키고 중상하고 시기하는 일에 쓰여 지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손과 발이 이웃을 섬기고 복음을 전하는 일로 쓰여 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죄짓고 방황하고 인생을 헛되이 낭비하는 일에 쓰여 지고 있습니까? 그러면 이제 여러분의 머리와 생각, 입술과 혀, 손과 발 그 모든 지체를 하나님께 드리시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우리의 지체가 단순히 쓰임 받는 그 자체뿐 아니라 의의 도구(병기,무기)로 쓰임 받아야 함을 강조하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 말은 우리가 섬기는 일이 의로운 일이어야 할 뿐 아니라 또한 섬김의 태도와 동기 또한 의로운 것이어야 한다는 것도 잊지 마십시오. 일찍 리쳐드 포스터는 그의 명저 “Celebration of Discipline"(영적 훈련과 성장)에서 자기 의에 근거한 섬김과 진정한 의의 섬김을 이렇게 구별하고 있습니다. [자기 의의 섬김은 인간적 노력에만 근거하지만 진정한 섬김은 내 안에 계셔 나를 인도하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것이다. / 자기 의의 섬김은 소위 큰 일로 자기를 과시하려고 하지만, 진정한 섬김은 큰일과 작은 일을 구별하지 않는다. / 자기 의의 섬김은 외적 보상을 기대하지만, 진정한 섬김은 내면의 숨겨진 만족으로 충분히 기뻐할 줄 안다. / 자기 의의 섬김은 결과에만 집중하지만, 진정한 섬김은 그런 계산에서 자유롭다. / 자기 의의 섬김은 늘 편의에 따라 선택적이지만, 진정한 섬김은 사역을 차별하지 않는다. / 자기 의의 섬김은 기분에 따라 움직이지만, 진정한 섬김은 필요에 신실하게 응답할 따름이다./자기 의의 섬김은 한시적이지만, 진정한 섬김은 라이프 스타일이다. / 자기 의의 섬김은 무례하지만, 진정한 섬김은 언제나 상대를 배려한다. / 자기 의의 섬김은 공동체를 흔들지만, 진정한 섬김은 공동체를 세운다.]
이런 진정한 섬김으로 얻는 마지막 상급이 거룩의 열매이며 이 거룩의 완성은 우리 인생의 구주요 주님이신 예수님을 온전히 닮아감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자리가 주어지든 자리가 주어지지 않든 상관없이 성령의 역사하심을 따라 자신의 존재를 하나님과 이웃에게 내어줄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구세군의 창설자인 윌리암 부스(William Booth)가 말년에 안질로 고통하다가 진단을 받은 후 의사는 부스의 아들에게 부스가 시력을 상실하게 될 것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아들은 오래 주저하다가 어렵게 말을 꺼냈습니다. “아버님 눈의 상태가 좋지 않으시데요.” “그럼 내가 시력을 잃게 된다는 말이지” “죄송해요. 그런 것 같아요” 한참을 침묵하던 부스는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이런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그럼 지금까지 두 눈을 가지고 하나님과 이웃을 섬겨왔는데, 이젠 두 눈 없이 내 하나님과 이웃을 섬길 방안을 찾아야 하겠구나” 이런 삶이야 말로 거룩한 인생의 표본이 아니겠습니까? 누가 그에게 이런 인생을 선물했습니까? 하나님이십니다. 그의 이름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여호와 카데쉬이십니다. 그와 함께 밝아온 새해, 진정한 섬김의 길, 거룩의 길을 걸어가지 않으시겠습니까?
거룩함을 위하여
레위기 20:1-8 / 이진수 목사
레위기의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켜야 할 하나님의 명령, 규례, 지침이 기록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지키라고 하신 말씀은 결국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답게 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 받은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단번에 죄 용서함과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 속에 죄의 모습을 버리고 거룩하고 세상과 구별된 삶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고 철저하게 영적 전쟁에서 싸워 이겨야 하고, 죄의 유혹과 세상의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려는 애씀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레위기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거룩함의 모습, 우리가 지켜야 하고 따라야 할 거룩을 회복해야 합니다. 본문 20장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대로 순종하지 않는 자들에 대한 엄격하고 어떻게 보면 위협적인 경고의 말씀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2절부터 마지막절까지 자세히 보면 2절부터 각 절마다 우상을 섬기는 죄, 혼백을 불러내는 신접한 자를 찾는 죄, 간음의 죄를 짓는 자를 “돌로 쳐 죽이라. 반드시 사형에 처하라. 백성에게서 끊어지리라” 고 명하시고 경고하십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위협하는 것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강하게 경고하시는 것은 그만큼 자기 백성들이 죄에 빠지지 않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과격한 표현을 쓸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만큼 그 죄가 악하기 때문입니다. 몰렉에게 자기 자식을 제물로 바치는 일이나 신접한 자나 박수 무당을 추종하는 일이나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일이나 근친상간을 하는 일은 돌로 쳐서 죽일만큼 악한 일이고, 불에 태워 죽일만큼 악한 일이라는 것을 깨우치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만큼 자기 백성이 악한 죄악에 물들지 않기를 소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자녀들이 부모가 사랑하고 위하여 “하라 하지 말라” 라고 하는 말씀에 잘 순종하지 않습니다. 자기 생각이 부모의 생각보다 낫다고 생각하고, 부모가 하지 말라고 하는 일들이 사실 더 재미있고, 호기심이 가고, 해보고 싶은 유혹이 많은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분명 인생을 더 살았고 경험했기에 자녀가 무엇을 하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알고 하는 명령이고 경고이고 어떠할 때는 도에 지나칠 정도로 본문의 하나님의 말씀과 같이 “너 그렇게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 라는 말도 하는 것이 아닙니까?
분명 3절과 같이 자기 자식을 몰렉 우상에게 제물로 바치는 일은 해서는 안되는 악한 일이 아닙니까? 더 나아가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고, 하나님께서 명하신대로 제사의 목적은 죄에 대한 회개하는 마음과,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과, 하나님께 헌신하며 더 나아가 이웃과 하나 되어 화목됨을 위해 소나 양과 짐승의 피를 드리는 것인데 소의 머리를 가진 우상 몰렉를 예배하고 자식을 바치는 일은 성적인 욕심을 채우고, 자신의 이익만을 위하는 죄성을 채우는 죄이기 때문입니다.
자식을 몰렉 신에게 불에 태워 바친 사람들이 갑자기 그렇게 했겠습니까? 자신의 생명보다 더 귀한 자식을 그렇게 불에 태워 바치는 것은 영적인 분별력이 없이 점차 사단과 세상에 사로잡히고, 욕심과 유혹에 사로잡혀 살아갔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깨어 있지 않으면, 분별력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우리도 하나님께서 역겨워하시는 죄악을 아무거리낌 없이 행하는 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식들을 세상에, 사단에게 넘겨주는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나의 생각, 마음, 삶을 세상에 사단에 넘겨주는 일을 하게 됩니다. 그런 삶을 사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된 우리는 가나안의, 세상의 가증한 풍속을 분별할 수 있는 영적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레위기18:3절 “너희는 너희가 거주하던 애굽 땅의 풍속을 따르지 말며 내가 너희를 인도할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도 행하지 말라”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그 당시 애굽 사람이나 가나안 일곱 족속은 몰렉을 숭배하고 자기 자식을 불 가운데 지나게 하며, 박수와 무당을 능력의 종으로 여겨 그들을 찾아 갔습니다. 그들은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기도 했고, 간음과 성적인 죄를 당연하게 자랑하며 살았습니다.
우리는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영적으로 분별하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레위기에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시는 명령이 26절에 다시한번 나옵니다. “나 주가 거룩하니, 너희도 나에게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나는 너희를 뭇 백성 가운데서 골라서, 나의 백성이 되게 하였다”우리는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고 사랑하고 순종하고 충성하여 그 분을 예배하고 영광 돌리는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레위기 20:7절에 “그러므로 너희는 몸가짐을 깨끗하게 하고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나는 주 너희의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 성도들 안에 내주 하시며 지속적으로 성도를 거룩하게 하시는 일을 행하시지만 성도들 자신도 두렵고 떨림으로 스스로 거룩한 삶을 살려고 애쓰고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본받아 거룩한 성화의 삶을 승리하며 살아가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영적 성결규례
레 20:1-8
“세상 풍조는 나날이 변하여도 나는 내 믿음 지키리니 인생 살다가 죽음이 꿈같으나 오직 내 꿈은 참되리라(찬송가 490장 3절).” 개인적으로 참 좋아하는 찬양의 가사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꿈은 자아실현(自我實現) 혹은 자기가 세운 목표의 성취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꿈은 하나님과의 화평이고, 죽음이 임박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을 닮아가는 기쁨을 누리는 일일 것입니다. 주님을 닮아가기 위해 우리는 영적 어린아이의 일을 벗어 버리고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안정감을 찾아야 합니다. 안정감을 느낀다는 것은 내적 견고함을 소유하는 것을 말합니다. 내적 견고함이 없으면 세상 풍조에 떠밀려 다니게 됩니다. 사람들이 “좋다”라고 말하는 일들에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빼앗기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세운 목표를 이루려 하지 말고 주님의 뜻을 이루는 기쁨을 찾으면 하나님의 참된 역사를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2019년에 나온 ‘기생충’이라는 영화 속 중심 주제는 하나는 “선을 넘지 않는 것” 혹은 “선을 지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이 아무리 크다 해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명령이 무서워서 하나님이 정해 놓은 경계를 넘지 말아야 할 뿐만 아니라 자기 스스로 지켜야 할 선이 있어야 합니다. 레위기 20장에 소개되는 법들은 레위기 18~19장에 이미 소개된 법들과 상당 부분 유사합니다. 차이점이 있다면, 레위기 18~19장의 법들은 특정 행동을 금지하고 있지만, 이 명령을 어겼을 때 발생하는 결과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20장에 나타나는 법들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않았을 때 나타나는 결과와 형벌을 함께 소개하고 있습니다.
레위기 20장의 시작은 ‘몰렉 제사(레 18:21)’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레위기 18장에서는 몰렉 숭배를 금지했지만, 레위기 20장에 이르러서는 이 명령을 지키지 않은 자에 대한 형별이 명시됩니다. 성경은 구체적인 형벌 사례를 언급하지 않으므로 이 명령이 실제 지켜졌는지에 관한 의구심은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 집사의 죽음(행 7장)을 떠올려 볼 때, 형별이 실행되었을 확률을 매우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기 자녀를 몰렉에게 주는 사람들은 돌로 쳐 죽였는데(2절), 돌로 치는 사람은 그 지역 성읍 사람들이 행했습니다. 형벌은 돌에 맞아 주는 것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를 그 백성 중에서 끊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즉, 법적인 심판 외에 추가적인 형벌로서 가문에서 그 이름을 삭제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하나님만 섬기는 것이 아니라 몰렉까지 음란하게 섬기는 사람(5절)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었습니다.
곧이어 등장하는 접신(接神)한 자와 박수무당은 몰렉 숭배와 연결되는 것으로서 인간의 욕심과 욕망, 탐욕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드리게 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은 우리가 가진 탐욕을 알게 합니다(롬 7:7). 탐욕은 우리가 정욕에 빠지게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하려는 의지와 소망까지도 실패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나 자신, 내 육신과 관련되는 생각의 틀이 주님과 연합을 통해 날마다 새롭게 되어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자리 잡아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 우리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임재로 인해 공의와 정의의 생활 방식을 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생활 방식은 결국 하나님과 이웃과의 평안이라는 열매를 맺게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