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과서 논쟁으로 뜨겁다. 대부분의 교과서에 교과부는 수정을 요구했다. 그리고 드디어 정부 멋대로 하겠다는 것이다. 논쟁의 요점은 무엇인가?
이른바, 근대화 시기와 근대화의 주체가 자발적인가 아니면 수동적인가, 그리고 거기에는 필연적으로 일제강점기에 대한 아픈 역사가 따라다닌다. 뉴라이트의 역사적 인식은 일제강점기를 근대화의 시점으로 보고 있다.
거기에 대해 좌파 민족주의 측에서는 근대화의 일본에 의한 수동적인 입장에서 스스로의 자발적인 시선으로 보고 싶어한다.
뉴라이트든 민족주의든 자발적이든 수동적이든, 그 모든 역사적 시선은 서양사에 머물러있다. 서양사의 근대화는 자본주의 발달사와 같다. 그래서 서양사의 근대시기에 동양은 근대화 되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발달사가 곧 근대사라는 서양사의 인식을 그대로 수용한다면, 우리의 근대사의 시작은 어디부터일까?
유럽을 예를 들으면, 첫째, 콜롬버스의 신대륙 발견에 방점을 찍어보면, 그 이후로 아메리카로부터 금을 노략질하여 화폐량을 극도로 늘리고 감자와 옥수수를 수입하여 흑사병으로 줄어든 유럽의 인구를 기아로부터 해방하여 인구증가에 기여했으며, 커피 등 기호식품의 플랜테이션 농업은 상품의 확대에 도움을 주었고 그것이 현대의 다국적기업의 원조가 되었다. 이른바, 화폐와 노동력 상품 그리고 기업의 자본주의의 여러가지 요소가 성립하였으며, 초기 자본주의의 가장 큰 특성인 전쟁과 노략질 강제적 통상요구의 특징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지점에서, 콜롬버스 신대륙 발견은 근대사의 시작점으로서 의미가 있다.
두번째, 영국의 엔클로져 운동이다. 시골 영주의 장원의 공유지를 프랑스 프로렌스 지방의 양모생산의 원료 공급지로서, 영주들은 농노들의 유일한 식량 공급원이었던 그곳에 울타리를 치고 양을 키웠다.
당시 프랑스는 스페인이 노략질한 금을 차지하기 위해 여러가지 산업을 부흥시켰는데 그 중 하나가 양모산업이었다. 그 후, 스페인은 빈털털이가 되었다. 프랑스의 산업발달은 스페인을 금을 차지했으며, 해상에서는 영국의 해군이 해적으로 위장하여 대서양에서 스페인이 노략질한 금을 다시 빼앗았으며, 급기야는 스페인과의 해전으로 영국이 승리하자 영국이 식민지 쟁탈전에서 우위에 서게 되었던 것이다.
영국의 시골 장원에서 쫒겨난 농노들은 전국을 떠돌아다니는 거지떼가 되었으며, 그것이 커다란 사회문제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로인해 영국왕은 구민법 빈민법으로 거지들을 수용하게 되엇으며, 거기에는 영국왕과 귀족 그리고 지방교구의 신부의 묘한 권력투쟁이 숨어 있었다. 그 후, 300여년에 걸쳐 영국 전역의 장원에는 양들을 키우기 위해 울타리가 쳐지게 되었으며 그로 인한 부랑자들로 인한 사회문제는 점점 확대되어 갔다. 그런 부랑자들에 대한 처리 문제가, 이른 바, 사회복지법의 효시라고 불려지는 영국의 구민법 빈민법인 것은 진정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엔크로져운동은 스페인에서 프랑스로 옮겨진 금이 영국으로 전파되고 그것이 영국 산업혁명의 기폭제가 되었다는 점에서 근대사로서의 시작점으로서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엔크로져운동과 산업혁명 사이에 영국왕과 귀족과 교회와의 권력투쟁이 민주주의 꽃인 의회를 탄생시켰으며, 사유재산을 인정한 권리장전 또한 그때 만들어졌던 것이다.
세번째는, 산업혁명이다. 장원에서 쫒겨난 농노들이 전국을 떠돌아다니는 거지떼가 되어 사회문제를 일으키고 영국왕은 그에 대해 고심하는 사이, 또 하나의 커다란 문제가 일어났다. 프랑스는 양모산업의 공급원이었던 영국을 더이상 필요치 않게 되었다. 스스로 양을 키우고 원료를 생산하게 되었고 가까운 유럽의 각국으로부터 더욱 저렴한 가격으로 원료를 공급 받게 되었던 것이다.
급기야 영국에서는 엄청난 사회문제가 터졌다. 전국에는 거지떼가 들끓었고 시골의 영주마저도 생산된 양모를 쌓아놓고 어찌할 바를 몰랐던 것이다.
그러다가, 석탄 채굴에 조금씩 이용하던 증기기관을 기계화하여 산업혁명을 일으켰던 것이다. 영국의 산업혁명은 무너져가는 영국사회에 겨우 숨통을 트이게 했다. 들끓었던 거지떼들은 상품 생산을 위한 프롤레타리아가 되었고 원료가 되는 양모는 넘쳐났으며, 해상을 장악한 영국은 스스로 금을 도둑질 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후, 식민지에 주도권은 영국이 주도하게 되었다.
네번째, 프랑스 대혁명이다. 유럽 절대왕조시대의 가장 강력한 왕권을 자랑했던 프랑스의 왕족은 사실 프랑스 토착민과 같은 족속이 아니었다. 따라서 그들과 언어도 달랐다. 로마제국 시절 로마군을 몰아낸 것은 게르만족이었다. 무력에 뛰어난 게르만족은 유럽 전역을 장악하여 지배층이 되었다. 실제로, 19세기까지 유럽각국의 왕들은 전부 독일어를 사용한 게르만족이었으며, 그 주축이 합스부르크가였다. 유럽의 왕들은 합스부르크가와의 친척이나 인연으로 전부 왕이 되었던 것이다.
게르만족이 지배층이 되고 처음에는 왕의 힘은 그렇게 크지 못했다. 제비뽑기 같은 것으로 귀족의 한 사람이 중앙정부를 운영하고 나머지는 지역을 지배했다. 그러나, 서서히 힘이 없던 중앙의 왕은 교회와 지역민들과 공모하여 자신들의 세력을 키워가게 되었고, 그것의 중심에는 흑사병을 관리하기 위해 만들었던 행정조직이 이었다. 프랑스의 왕은 지역민들을 교회로 보내 교회의 언어였던 라틴어를 배우게 하고 그것이 정부의 모든 행정 문서가 되었고, 그 어려운 언어는 무식한 귀족들을 속이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왕을 도와 행정을 장악했던 피지배계층의 사람들이 바로 부루조아가 되었던 것이다. 나중에 귀족들은 자신들이 속앗다는 것을 알게 되엇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부루조아들은 왕을 도와 프랑스의 거든 모든 산업과 행정조직을 장악했던 것이다. 무식한 귀족들은 자신들의 무지함을 알고 공부를 시작했다. 그것이 계몽주의엿던 것이다. 그러나, 무식한 귀족들의 계몽주의로 인한 교양은 또 다른 부루조아를 탄생시키는데 기여했을 뿐이다.
왕의 도우미였던 부루조아는 급기야 왕을 몰아내었다. 그것이 프랑스 대혁명이었던 것이다.
유럽의 중상주의는 프랑스가 주도하였다. 그 시기가 바로 프랑스의 왕이 부루조아를 이용해 귀족들을 무력케한 시절이었고, 스페인의 금을 산업을 부흥시켜 프랑스로 가져왔던 시기였다.
프랑스 대혁명은 유럽의 절대왕조의 중상주의가 부루조아 주도의 자본주의 시대로 넘어가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던 셈이다.
이런, 유럽 자본주의 발달의 여러가지 요소를 살펴보면서 한국의 근대화를 생각해보면, 역시 유럽 만큼이나 몇 가지 단계가 있다.
첫째는, 허균의 왕권전복 시도이다. 허균의 홍길동전은 허균의 스승이었던 손곡 이달이 모티브가 되었다. 조선시대 뛰어난 시인이었던 손곡 이달은 서자였다. 그래서 관리가 되지 못하고 중인의 신분으로 울분을 삼키며 전국을 떠돌아다니는 불운한 사람이었다. 허균은 그런 스승을 보면서 평등한 세상을 꿈꾸게 되었고 그것이 홍길동전으로, 마지막에는 왕권을 전복하려는 시도를 하다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던 것이다. 조선시대의 부루조아에 해당햇던 신분을 굳이 어거지로 말하자면 중인 정도가 되지 않을까. 그들은 양반들이 도외시했던 많은 실용적인 일을 하였다. 허균의 시도는 바로 그런 중인들을 위한 노력이었던 것이다.
프랑스 대혁명과는 비교 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허균의 시도를 근대사의 맹아 정도로 생각해 본다.
두번째는, 실학이다. 북경을 드나들던 사신들은 그때 유럽으로부터 전파된 많은 자본주의적 문물을 접하게 되고 중농주의의 정약용과 중상주의의 거두 박지원의 실학파가 탄생된 것이다. 중농주의에서는 농지개혁과 같은 사회주의와 같은 개혁을 주장했고 중상주의에서는 다른 나라와의 교역을 주장했다.
그 시기는 프랑스의 계몽주의 시기와 대혁명의 시기와 겹치는 시기다.
세번째는, 효명세자이다. 정조의 손자였던 횽명세자는, 세도정치에 시달렸던 나약한 아버지 순조의 명에 의해 섭정을 하게 되고, 박지원의 손자인 박규수와 함께 여러가지 개혁정치를 하였다.
조선 시대는, 유럽의 절대왕조와는 다르게 왕권과 신권의 대립의 시기였으며 그것의 단면 중에 최악이었던 것이 바로 세도정치였던 것이다.
효명세자는, 세도정치를 무력하시키는 일을 하며 왕권을 강화하기 시작했으며, 박규수로부터 배운 여러가지 실학의 이념을 정치에 쏟아넣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효명세자는 개혁을 시작한지 3년 만에 원인을 알 수 없는 죽음을 맏이 하게 되었다.
아마, 효명세자가 요절하지 않았다면, 일본의 메이지 유신보다 40년이 앞서 근대화를 성공 시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네번째는, 대한제국이다. 효명세자 이후, 조선 왕의 혈통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아 대비들이 억지로 양자를 만들어 철종과 고종을 세워서 대비들의 수렴청정을 하였으며 역시 세도정치는 끊이지 않았다.
효명의 부인이었던 조대비가 고종의 수렴청정을 하면서 대원군을 도와주다가, 자신의 남편을 도왔던 박규수를 고종의 스승으로 임명했다. 고종은 40년전 효명을 도왔던 실학파의 마지막 주자 박규수로부터 자연스레 개화파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고종은 아버지 대원군의 쇄국정책과 시아버지를 증오했던 부인 민비와의 엇박자로 개혁의 시기를 놓쳐버리고, 드디어,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여 스스로 황제에 오르나 때는 이미 늦었다.
서양과 일본이 제국주의를 흉내낸 것에 의미를 두자면 대한제국도 근대화의 맹아 정도로 봐 줄 수도 있겠다.
다섯번째, 일제강점기다. 뉴라이트들은 일제 강점기를 한국 근대사의 시작으로 보기도 한다. 비록, 강제적이고 수동적이기는 하나, 자본주의 산업들이 싹트고 그나마 민족 경제의 작은 초석이라도 생겼으니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뉴라이트들이 모르는 것이 있다. 자본주의의 완성은 절대적으로 침략적이라는 것이다. 스스로의 산업 발전을 위해 남의 나라의 자원과 노동력을 착취하는 것이 자본주의가 가지는 가장 큰 특징인 것이다.
이런 자본주의의 특징으로 보자면 지금까지의 다섯 가지는 절대로 자본주의적 시작점이 될 수 없다. 다만, 자본주의가 싹 틀 수 있는 여명 정도로 보면 될 것이다.
여섯째, 박정희 쿠테타다. 박정희의 쿠테타는, 삼백년간 일어났던 유럽 자본주의 발전의 거의 모든 요소가 결합하여 우리나라가 완벽한 자본주의 국가로 발돋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미국의 간섭으로 인해 종속적인 자본주의 국가가 되기는 했으나, 거의 모든 점에서는 유럽의 자본주의 제국주의와 닮아 잇었다.
새마을 운동은, 영국의 엔크로져 운동과 같이 수 많은 빈농의 아들 딸들을 도시로 보내, 마치 영국의 산업혁명 처럼 일어났던 수출 주도의 공업에 공순이 공돌이가 되는 이른바, 프롤레타리아를 탄생시켰다.
박정희 정부는 미국의 반대로 화폐개혁에 실패하고 일본을 본 받아 수출 주도의 중공업을 발전시키기에 이르렀다. 일본으로부터의 배상금과 월남전 참전으로 인한 전쟁특수와 외자유치로 화폐의 양이 늘어난 점은 마치 유럽의 아메리카 대륙으로부터 노략질한 금으로 유럽의 화폐량이 확대한 점에선 같았다.
수출 주도 정책은 상품의 확대를, 새마을 운동은 농지의 전용으로 이어져 전 국토가 마치, 영국의 엔크로져 운동에서 처럼 농지 본연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오로지 돈을 버는 것에 이용되었다. 그것이 부동산 투기로 이어졌던 것이다. 이처럼, 공순이 공돌이의 노동력, 일본의 배상금 월남전 특수 외자로 인한 화폐, 그리고 수출 주도의 산업의 상품, 드디어 자본주의의 삼 박자가 갖추어진 것이다. 그것이 한강의 기적으로 이어진 것이다.
일곱번째는, 610 항쟁이다. 610항쟁은 프랑스 대혁명과 많이 닮아 잇다. 그후 벌어진 노동자 대투쟁 역시 프랑스와 비슷하다. 박정희 시절의 프롤레타리아가 자본주의 상품생산의 시장에서 주도권을 장악한 것이 한국 부루조아의 탄생이다. 610항쟁은 바로 그런 부루조아의 혁명이엇던 것이다. 민주화 운동이라 불려졋던 그 운동은 사실 한국사회가 본격적인 자본주의 사회로 들어가는 전초전이었던 셈이다.
진정한 프롤레타리아였던 전태일과, 610항쟁 이후의 노동운동은 그래서 의미가 다른 것이다. 전태일 시절의 노동운동은 자신들의 억울한 삶을 스스로 벗어나기 위한 진정한 프롤레타리아의 노동운동이었다면, 610항쟁의 노동운동은 이른 바 민주화 인사들인 부루조아가 주도했던 부루조아 노동운동이었다.
지금, 한국의 진보정당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정치인들은 사실 전태일의 노동운동의 계승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그들은, 전태일을 이용하고 흉내냈을 뿐이다.
그것의 증거는, 현재 그들이 벌이는 엽기적인 행각에서 찾을 수 있겠다.
여덟번째는, IMF 이다. 516쿠테타를 완성한 군인들은 무지하거나 순진했다. 그래서 그들의 1차경제개발 계획의 1964년까지는 경제개발 정책이 국내 자급자족이 전부였다. 화폐개혁과 농지개혁은 심지어 북한을 흉내 내기까지한 좌파적 정책이기도 했다.
그것이 변하기 시작한 것이 일본으로부터 배상금을 받고 한일정상화 시점부터이다. 친일파였던 박정희가 일본과 접촉하면서 일본을 모방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박정희는 미국과 일본의 사주와 그 당시 대기업과 일부 고급관료의 설득으로 수출선도 정책으로 급변하게 된 것이다.
박현채 선생의 민족경제론은 김대중의 대중경제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박현채 선생의 논문 18편을 모아 한길사에서 책으로 펴낼 때, 한길사 사장은 자신 멋대로 책 제목을 민족경제론을 정했다.
그 민족이라는 단어 때문에, 그 후 NL들의 필독서가 되었다는 것도 웃기는 일이다.
민족경제론은, 뿔뿌리 경제의 확립과 국가 경제의 자급자족으로 인한 외세의 도움과 간섭을 받지 않는 정치적 자치와 독립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김대중은 IMF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경제적 스승이었던 박현채 선생과는 반대로 해결했던 것이다. 그후, 한국 경제는 김대중의 계승자인 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급격하게 외적 요인에 요동치게 되었다.
김대중의 변심은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왜 철저히 미국의 의도대로 한국 경제를 변화시킨 것일까? 김대중 당선의 결정적인 원인은 운동권 세력내의 NL들의 힘이 크다. 그를 도왔던 NL들 조차도 김대중의 실정을 눈여겨 보지 않았던 것이다. NL들은 박현채 선생의 책을 엉터리로 읽었던 것이다. 아니, 박현채 선생의 진심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책 껍데기의 민족이라는 말에만 집착을 했던 것이다.
그런 NL에서 이석기 같은 주사파가 탄생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김대중은 왜 변심했을까? 전두환 정부가 김대중을 사형시키려다가 미국의 도움으로 김대중은 미국으로 갔다. 거기서 김대중의 영원한 비서실장 박지원을 만나다. 박지원은 그 당시 뉴욕한인회장인가를 했을 것이다.
그 당시 미국은 레이건의 레이거노믹스 신자유주의가 막 시작 할 때이다. 혹시, 김대중의 변심은 그때 무슨일이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한국 자본주의 맹아와 발달사의 여덟가지 사건 중에서, 본격적인 자본주의 시작은 박정희 쿠테다이다.
그의 정적이었던 김대중은 박정희의 자본주의를 더욱 심화시켰다. 김대중을 좌파라고 여기는 박정희 계승자라고 자처하는 우파들은, 박현채 선생의 진실을 모르는 NL들의 주사파와 다름 없다.
박정희의 딸 박근혜는 과연 한국의 자본주의를 어디로 몰고 갈 것인가? 그녀는 꺼져가는 한국의 자본주의를 창조경제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갖다부치고, 경제 민주화라는 평등의 개념으로 사민주의 복지국가를 흉내내고 있지만, 이미 한국은 유럽의 제국주의 복지국가가 되기에는 노략질한 것들이 그들에 비하여 턱 없이 모자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 이제, 자본주의는 19세기와는 전혀 다른 막바지로 침몰하고 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