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추운 아침의 산책길에
한파경보가 발령중이라는 TV기상예보에
스마트폰에서 현재기온을 확인해 본다.
내가 사는 도시 안산의 기온이 무려 –17℃까지나 떨어져 있다.
대단한 혹한이다.
아마도 금년 들어 가장 추운날일 것이다.
이런 날의 바깥나들이가 을씨년스러운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늘 습관이 돼 온 산책길을 추위 탓을 하며
그만 둘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여니 날처럼 나설 준비를 한다.
물병과 간단한 간식을 챙기고 호빵봉지를
포장지 채 전자 렌지에 넣고 데운 후
여러 장의 신문지에 두껍게 말아 싼다.
그리고 그것들을 크로스배낭에 넣어 짊어진다.
방한 외투는 물론, 귀를 덮는 모자에 두꺼운 장갑으로 무장하고 나서
접이식 지팡이를 들고 현관을 나선다.
예상대로 차가운 냉기가 볼을 찌른다.
며칠 째 계속 된 추위로 군데군데 바닥이 얼어있어 조심스럽다.
집을 나서 십분 쯤 걸어 네거리 모퉁이에 있는 작은 커피숍으로 향한다.
근방에서 제일 일찍 문을 여는 집이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진하고 구수한 커피향이 좁은 실내에 가득하다.
실내에는 겨우 세 개 정도의 탁자가 놓였을 뿐이고,
바리스타가 직접 커피를 내리는 광경을 볼 수도 있는
작고 아담한 집이다.
그러나 커피 맛도 신선하고 늘 반갑게 손님을 맞는 탓에
꽤 많은 사람들이 찾는 집이기도 했다.
평소처럼 손안에 드는 작은 보온병을 내밀고 커피 두 잔을 시킨다.
그리고 가스스토브에 피어오르는 파란 불꽃을 바라보며
커피콩이 기계에서 갈아지는 둔탁한 소리를 듣는다.
길가로 연한 좁은 유리창은 뿌연 김으로 흐려있다.
L군의 생각이 떠오른다.
그와 우리 친구들 가족들이 함께 자주 어울린 지는 십여 년이 훨씬 넘었고,
그와 처음 만난 지는 이미 사십 년이 지났다.
우리는 서로가 오랜 고우(故友)였다.
지난 1970년대 중반에 내가 결혼하여
신접살림을 차린 시내의 한 변두리 동네에 그들이 살고 있었다.
같은 연령층인 골목길 새댁들이 먼저 인사를 트고
남정네들은 자연스레 만나 비슷한 처지에서 우정을 나누고
친분을 쌓아 온 사람들이었다.
그 중 L군이 두어 살 아래였고 동갑이 넷,
위로 형벌되는 친구 분이 한집,
해서 여섯 집이 서로 멀게 가깝게 여태까지 우정을 나눠 온 터였다.
제 각기 삶의 터전을 좇아 나중에는 모두 다른 지역이나
수도권일대로 흩어져 살게 되었지만,
어렵던 시절에 또래 아이들이 함께 어울려 자라기도 한
깊은 인연들을 가진 친구들이었다.
그런 우리가 노년을 맞아서는 더 자주 만나게 된 것이다.
함께 관광지로 버스여행을 하거나
승용차에 나눠 타고 수시로 어울렸으며,
때로는 며칠 씩 숙식을 함께하기도 하는 막역한 사이로 지내고 있었다.
L군은 우리 중 가장 젊고 건강하였으며,
밝고 의욕적인 친구였었다.
우리는 모두 그를 동생처럼 여기며 서로 사랑했다.
모두가 그를 미덥게 여기고 있었고
함께 어울려 떠나는 여행을 즐거워하던 터였다.
그가 처음 중병으로 입원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함께 모여 문병을 갔을 때는
그가 너무나 강건해 보여서 우리 모두가 믿기지 않았었다.
그리고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좋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몇 차례 문병을 가는 동안
그는 여러 차례의 수술을 나누어 받았고 항암치료도 받기 시작했다.
이때서야 비로소 그의 모습에 우리는 놀랐고 걱정스러워 했었다.
그 탄탄하고 당차던 그의 체구는 왜소하고 허약해 졌고
머리숱마저 듬성듬성해 진 모습에 우리는 당황했다.
L군에게 큰 일이 난 거야......
모두가 그 걸 실감하고 안타까워했었다.
그 후 L군은 어려운 치료를 착실하게 받으며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을 찾아 충청도 쪽으로 거처도 옮기고 나름,
병마를 극복하기 위해 무진 애를 쓰기 시작했었다.
우리가 그를 찾아가 다시 만났을 때는
병세를 회복하여 다시 건강해진 것처럼 보였다.
그의 눈빛은 전처럼 맑게 빛났고,
수북하게 자란 머리털과 다시 탄탄해 진 체구에 모두 찬사를 보냈다.
그가 몸소 농사지어 가꾼 채소와 고구마를 나누어 먹을 때만 하더라도
누구나 그의 재기를 의심하지 않았다.
우리는 몇 차례나 다시 함께 어울려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며칠 씩 걸리는 뱃길 여행도 큰 어려움 없이 다녀왔고,
강원도 산골 여행도 무탈하게 다녀왔다.
우리는 그와 함께 포옹하고 즐거워했다.
여행지에서 함께 찍은 사진 속 그의 모습에서 그는
천연스럽고 밝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바로 얼마 후 그의 소식을 다시 들은 건
그와 함께한 여행에서 돌아와 우리 모두가 안심하고 있었을 때였다.
“L군이 다시 입원했어요. 아마 병이 다 나은 게 아니었던 가 봐요.”
그런 전갈을 받고 우리는 모두 다시 모여 그를 찾았다.
바로 그의 병이 재발했다는 거였다.
당초 완치가 어렵다는 췌장암이 그의 병명이었다.
그의 병은 이제 거의 전신에 전이되어 더는 희망이 없다는 게
담당의사의 마지막 진단이라는 것이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우리가 그렇게 L군을 찾아 갔을 때,
그는 절망감이 깃든 어두운 미소로 우리를 맞았다.
그 때만 하더라도 우리를 보자 곧 감아버린
그의 두 눈과 어두운 미소를 제외하면
그의 모습 어디에도 절망적인 병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이는 건강한 동안(童顔)에
얼마 전 함께 다녀온 여행에서처럼 탄탄한 체구도 여전했었다.
“커피 나왔습니다, 손님!”
L군의 생각에서 깨어난다.
바리스타가 보온병에 담은 커피와
또 큰 종이컵에 담은 커피 한 잔을 내 준다.
보온병은 돌려 잠근 다음 크로스배낭에 담고
종이컵을 들고 커피숍을 나선다.
그리고 길 건너 근린공원을 향한다.
혹독한 한파를 맞아서도 빨간 빛을 띤 산수유열매가
얼음을 쓰고 곱고 탐스럽게 달려있다.
제법 학교 하나가 들어서도 충분할 공간이
이 작은 공원의 영역이었다.
이공원은 주변의 주택가와 차도를 경계삼아 작은 언덕으로 둘러싸여 있다.
인위적으로 만들어 진 언덕이었지만,
그 언덕은 소나무가 제법 빽빽한 숲을 이루고 있었다.
농구나 배구, 배드민턴 등 각종 경기시설에, 조깅코스에,
여러 개의 그늘 막까지 갖춘 작은 공원이다.
그 그늘막중 한 곳에 바람과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한 노숙자가 혹한의 추위를 견디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서 들고 온 커피 한잔을 내밀어 준다.
그리고 크로스배낭을 열어 신문지에 두껍게 싼 데운 빵도 꺼내놓았다.
그는 별 억양도 없이 담담하게 “고맙습니다.”라는 인사를 한다.
그 소리는 늘 공허하게 들렸다. 혹독한 추위에 떠는,
내 눈에 안돼 보이는 사람 하나를 품어 줄 능력이 못되면서도
괜한 짓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어떤 날은 내 자신의 미약하고 무능함이 그의 모습보다
더 초라해져서 얼른 자리를 뜨곤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하찮은 짓을 계속하고 있는 건
내가 건네준 더운 커피를 받아 든 그가 두 손으로 얼른 감싸 안고
곧장 자신의 얼굴로 가져가는 모습 때문이었다.
아마도 그는 밤이 깊어지면 공원의 공중화장실로 가서 새우잠을 잘 것이다.
그리고 이른 아침이면 관리인에게 쫓겨
늘 그 곳에서 추위와 허기를 견디고 있었을 것이다.
신문지포장을 뜯는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얼른 공원을 벗어난다.
그 길에 공원과 연해있는 천주교회가 있어
지나다닐 때마다 늘 교회의 높은 종탑이 올려다 보이곤 했다.
그때 마다 가엾은 노숙자가 변을 당하지 않고
용케도 이 혹한을 견뎌내는 건 아무래도 저 높은 곳에서
공원을 굽어보며 살펴주는 신이 계신 덕분이려니 여겼다.
한참을 걸어서 다시 큰 교차로를 지나 대형마트의 옆구리를 끼고 돈다.
그리고는 미술관이 있는 비탈길을 오르기 시작한다.
미술관 건물 바깥에는 넥타이를 매고 앉아있는 호랑이가 있고,
휴대폰을 들고 쓰러질 듯 서있는 젊은이도 있다.
또 속이 빈 채 껍질만 남아있는 뒤틀린 백마가 혐오스런 모습으로 서있기도 하다.
이외에도 여러 개의 조상(彫像)들이 미술관의 외관을 장식하고 있다.
이들의 대부분은 아마도 젊은 신인작가들의 작품들일 터였다.
이들도 모두 하얗게 얼어있어 보이는 건
아마도 내가 느끼는 추위 때문 일 게다.
이곳은 내가 향하는 산책길이 시작되는 곳이다.
미술관을 지나면 나지막한 작은 산을 한 바퀴 돌아 능선을 따라서
구불구불 오르락내리락하며 이어지는 산책로가 있다.
산책로의 여러 곳에서 산정(山頂)에 이르는 등산로가 있지만
보통은 잘 정비된 둘렛길을 한 바퀴 돌아가는 게 내 산책길이 되곤 한다.
3Km가 못되는 이 둘렛길은 산의 높이나 규모에 비해서
놀랍게도 많은 시설들이 산개해 있었다.
미술관과 대형슈퍼마켓은 물론 특별한 약수터와 장미원,
고등학교와 도서관, 청소년수련관과 인공폭포까지 품고 있다.
추운 아침의 산책로는 한산해서 거의 인적이 없었다.
아마도 너무 추운 탓일 게다.
둘렛길에 들어서 오늘은 오랜만에 산정에 이르는
길을 돌아 볼 요량이다.
한참이 걸리는 둘렛길을 돌아서 산정으로 가는 오르막길로 접어든다.
수많은 돌부리가 솟아있는 가파른 오르막길에서
이미 산을 내려오는 한 등산객을 만나 목례를 나눈다.
자꾸 갚아지는 숨결을 뿜어내며 서두르지는 않는다.
천천히” “천천히”를 계속해서 뇌며 산정을 향해 오른다.
이런 게 힘든 단 소리기는 하지만,
산 아래의 시가지는 본래 신도시개발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염전이었으니
낮은 산이라고는 하나 거의 해수면에서부터 산을 오르는 거나 다름없었다.
마침내 산정에 이르렀다.
나는 배낭을 열고 보온병에 담긴 뜨거운 커피로 목을 축인다.
누군가 붙여 준 노적봉이란 별명까지 있고 보면
오래 전부터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왔음이 분명하다.
불과150m도 체 못되는 낮은 산이지만 놀랍게도
내가 사는 시가지의 대부분이 내려다보이고,
동으로는 수원시의 일부와 서로는 멀리 서해바다 시화호방조제와
인천시의 송도지구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장관을 이루고 있다.
수천수만 년을 지나오며 단층(斷層)의 속살을 드러낸
산정의 날카롭게 솟아있는 바위에 기대선다.
L군을 마지막으로 보고 온 어저께는
그가 용인의 한 호스피스 병원으로 옮겨와 있었다.
그의 예견된 죽음은 이미 거역할 수 없는 운명처럼 굳어져 있었다.
그가 곧 생을 마감하게 되리라는데 여지가 없음을
그 자신도 그를 만난 모두도 알고 있었다.
불과 한두 달 사이에 그의 모습은 완전히 피폐(疲弊)해 있었다.
안타깝게도 늘 당당하고 자신에 차있던 그의 눈빛은 사라지고,
수척할 대로 수척하여 앙상하게 뼈마디가 드러난 모습이었다.
체념과 고통과 절망으로 쇄약해진 그를 만난 우리 오랜 지우(知友)들은
모두 가슴이 아팠다.
그를 위해 아무도, 그 무엇도 해 줄 수 없다는데 모두
안타까운 절망감을 느끼는 것이었다.
함께 찾아가 그를 만나는 아낙들이
서로 부둥켜안고 소리죽여 울었다.
남정네들은 병실의 천정을 쳐다보며
젖어오는 눈언저리를 말렸다.
이미 그의 생명력이 거의 다 소진(消盡)되었음을 누구나 직감하고 있었다.
우리는 거의 움직일 수조차 없이 쇄약해진 그를
휠체어에 태우고 휴게실(매점)로 갔다.
그리고 그가 휠체어에 앉아서 견딜 수 있는 동안 우리는 그와 함께
마지막 시간을 보냈다.
그가 역경을 이겨내며 형제와 자매들을 돌보고 가문을 이끌 만큼
성장해 온 그의 활기찼던 젊은 시절과,
우리가 함께한 그간의 추억들을 얘기하는 동안,
그는 진지하게 귀기우리며 고개를 끄덕여 공감했다.
그와의 마지막 만남은 길지 못했다. 그
는 곧 고통을 호소했고
약물에 의존해서라도 그에게는 휴식이 필요했던 것이다.
우리는 어둡고 숙연한 심정으로 그와
그의 가족들과 헤어져 각자가 귀갓길에 올랐다.
함께 만나고 온 친구들이 모두 이미 고희를 지났고
그 역시도 칠순이 턱에 받힌 처지이긴 했지만,
깊이 정들었던 추억과 그가 준비해 온 노년을
제대로 보내지도 못한 채 떠나보내기는 사실 너무 아까운 친구였던 것이다.
역경을 이기고 자수성가하여 겨우 편한 맘으로,
여행도하고 행복한 여생을 보내겠다고 했던 그였다.
그런 그와 더 이상 함께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가슴아파했다.
그를 떠나보내기 위해 마지막으로 만나는 우리에게도 그의 고통과 절망이
그대로 전이된 듯하였다.
산정의 칼바위에 기댄 채 올려다보는 하늘이 무척이나 파랗다.
그를 생각하는 내내 가슴이 쓰렸다.
신은 무소불위(無所不爲)하고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시다고 했던가?
이 청량하고 맑고 성당의 종탑보다도 높은 하늘 어느 곳인가에 계실 신은,
분명 L군의 운명과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의 심정을
헤아려 볼 수 있을 것이었다.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고들 하지만 반대로
“신이란, 인간이 창조해 낸 완벽해 보이는 환상일 따름이다.”
라는 생각 때문에 나는 평생에 몇 번도
진정성이 담긴 기도 같은 걸 해보지 못했던 것이다.
내 과거의 삶의 궤적(軌跡)에 새겨진 시련과 좌절,
그리고 신에 대한 실망감 따위가
나를 어리석게 뒤틀린 인간으로 만든 건지는 몰랐지만,
아무튼 그런 내가 이제 와서 기도 비슷한 걸 흉내 내며
중얼거리기 시작한다.
“어디엔가 당신이 실재하는 존재라면, 신이여!
이 못나고 초라한 인간의 기도를 들으소서.
감히 저 같은 자가 어찌 L군의 병을 낫게 해 달라고 기도할 수 있겠나이까?
또한 고통스런 그의 삶을 하루라도 연장해 달라고
기도 하겠나이까?
다만, 다만 신이여! 당신에게 비오니
제가 한 노숙자의 손에 건네 준 그 커피 한잔이
그의 손에서 식어 갈 동안.
그 짧은 동안만이라도 L군의 처절한 고통을 덜어 주소서.
그리고 그 절망과 분노에 찬 영혼을 평안케 하소서.”
짧은 기도 비슷한 걸 중얼거리고 나자,
스스로 격해져서 자칫 흐느껴버릴 것만 같았다.
이 위선은 또 무언가?
나는 숨을 들이켜 가슴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뿌옇게 눈앞이 흐려왔다.
이 추운 날 아침에 나는 다시 천천히 산길을 내려와
일상이 기다리는 귀갓길로 접어든다.
L군은 그로부터 며칠이 체 지나지도 않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설날을 꼭 나흘 앞두고였다.
사랑하던 가족들도, 그가 이루어 놓은 그 간의 범상(凡常)하지만
그 자신에게는 소중하기만 했던 그의 생업도 모두 버리고,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훨훨 날아서 다른 세상으로 떠난 것이다.
3월에 들어서 며칠이 지난 어느 날에는
내가 산책길에 지나다니던 근린공원의 그 노숙자도
어딘가로 떠나고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그는 더 나은 그의 삶을 위하여 다른 장소로
이동해 갔을 것이라 여긴다.
(2018. 3월 문예지)
첫댓글 오랜만에 읽어보는 수필에 푹 빠진 순간이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새공님
어지러운 긴 글에 머물러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밤,,,,
이곳에서 12년을 보내며 긴 글을 끝까지 읽긴
처음입니다 남자분인데 여성이 쓴 글같은,
골골 3년 이란말도있듯이
동안에 몸 좋은이가 먼저 떠난다는,,,,
주위에 암환자 수두룩
약이?좋아선지 2~3년 멀쩡하다가 급격히
매형이 호스피스 꽃방에서 마지막숨을 몰아쉴때
뛰쳐나온 남자는 접니다
누님이 전하는 말씀은 천사가 따로없더라
어쩜 그리도 이쁘게 입을 다물던지,,,
모든 노인들의 희망
자면서 편안히 떠나자는
숙면 하십시요,
터미널님
길고 어수선한 글에 끝까지 머물러 주시고
공감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늘 건강하셔서 즐거운 삶하시기 바랍니다.
삶에 이야기를 읽는데 왜 소설을 읽는것 같은 느낌이 드는지요.........
L 군의 짧다면 짧은 삶에서 허무를 보며 약하디 약한 우리, 결국은 신을 바라 보는 구나 합니다.
많은 감명을 주신 글 감사합니다.
쥴리강님 고맙습니다.
고백이너무 길어져 그런 것같습니다.
수필을 쓰면서도 소설의 표현방식을 자주
빌어다 쓰고있습니다.
생활수필에 편리한 방식인 것 같아섭니다.
늘 건강하시기 빌겠습니다.
몇일전에 노적봉에 다녀왔기에 글 초기에 바로 그곳임을 알았답니다.
같은처지로 옆지기를 먼저 보냈기에 안타까움으로 정독하며 님의 안타까운 마음도 떠나신분의 절망스런 마음도 또 그 아내분의 심정도 다 읽은듯 알수있어요.
그래도 마지막 추억여행도 함께 하셨으니 얼마간이라도 행복 하셨을것같아요.
가신분의 평안한 안식을 기도합니다.()
천상의별님 고맙습니다.
노적봉엘 다녀가셨다니 안산에 사시는 분 같습니다.
길고 어지러운 글에 머물러 공감해 주시니 정말 다행입니다.
저는 스스로 감상에 빠진 거라 나이를 부끄러워하고
있었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즐거운 날 되십시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월랑님 고맙습니다.
어수선해 진 긴글에 공감해주시니 다행입니다.
월랑님도 늘 건강하시고 즐거운 날 되시기 바랍니다.
넘 길어서 패스
시간날때 다시 읽어야겠어요
고맙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글을 잘 쓰시는 군요. 모든 인간이 가는 길이지요
그런 사정들을 보면, 우리는 늘 마음이 허무러져 내리지요
그래도 신은 인간에게 망각(잊혀짐)이라는 좋은 약을 주셨지요
삶에서 다른 것을 통하여 위로 받으시길,,,,^^
회노애락님
고맙습니다.
고희를 넘긴 자신은 이미 달관했다는 건방진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게 그런 게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위로의 말씀 새기며 나잇값에 어울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늘 간강하시고 즐거운 시간되시기 바랍니다.
인간은 누구나 생로병사의과정을 겪습니다
저도 1년전 엄마의 죽음을겪고 요즘 몇달새 두명의 친구를보낸 상실감이 컸기에 님의글 많이 공감합니다
따뜻한커피를 나누며 올리는 간절한기도는 애절했네요
긴글 쓰시느라 애쓰셨읍니다
잘 읽었어요~
라이미님
길고 어수선한 글에 머물러 공감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절대로 다시 만날 수 없는 유명의 경계영역에 서면
나이에 상관 없이 허트러지는 게 보통사람인 모양입니다.
늘 건강하시고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