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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불교와 여행을 사랑하는 사람들 원문보기 글쓴이: 관문
영어 공부와 불서 읽기의 묘미 - 불기 2557년(2013년) 11월 28일 후기
틱낫한 스님의 The Heart of the Buddha's Teaching (8)
서울경기강원지역방 2645번 글 http://cafe.daum.net/altlovebuddha/PEK/2645
의 후속타입니다.
<틱낫한 스님의 The Heart of the Buddha's Teaching>을 여덟 번째로 읽었습니다. 오늘 불서읽기 모임도, 지난주와 같이 보리연꽃 법우, 환희장엄 법우, 클나라 법우, 그리고 저 관문, 이렇게 4명이 참석했습니다.
오늘도 지난번에 모였던 장소 ‘Cafe 57th’에서 모임을 가졌습니다. 이곳은 지하철 3호선 안국역 1번 출구에서 나와 80 미터 가량 직진하신 후 풍문여고를 오른 쪽에 끼고 돌아서 약 60 미터 가면 보이는 곳입니다. 모이는 때는 매주 목요일 오후 7시입니다.
오늘은 우리의 교재 <Thich Nhat Hanh, The Heart of the Buddha's Teaching> 중 Part Two The Noble Eightfold Path: Chapter Eleven Right Mindfulness 마지막까지와 Chapter Twelve Right Speech 전반부를 읽었습니다. 관문이 가지고 있는 책으로 81페이지 16째 줄부터 90페이지 15째 줄까지입니다.
<틱낫한 스님의 The Heart of the Buddha's Teaching>을 읽는 동안의 후기는 저희가 그 날 읽은 부분의 영어 본문과 그 번역서인 <진현종 옮김, 틱낫한 스님의 아! 붓다, 반디미디어> 의 번역을 올리겠습니다.
PART TWO The Noble Eightfold Path
제2부 팔정도(八正道)
CHAPTER ELEVEN Right Mindfulness
11장 정념(正念)
Sitting and watching our breath is a wonderful practice, but it is not enough. For transformation to take place, we have to practice mindfulness all day long, not just on our meditation cushion. Mindfulness is the Buddha. Just as vegetation is sensitive to sunlight, mental formations are sensitive to mindfulness. Mindfulness is the energy that can embrace and transform all mental formations. Mindfulness helps us leave behind "upside-down perceptions," and wakes us up to what is happening. When Thich Quang Duc made himself into a human torch, people all over the world had to recognize that Vietnam was a land on fire, and they had to do something about it. When we practice mindfulness, we are in contact with life, and we can offer our love and compassion to lessen the suffering and bring about joy and happiness.
앉아서 호흡을 지켜보는 것은 훌륭한 수행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전환이 일어나게 하려면, 좌선용 방석 위에서만이 아니라 온종일 알아차림을 수행해야 한다. 알아차림이 곧 부처님이다. 바로 식물이 햇빛에 민감하듯이, 정신의 형성, 즉 심행은 알아차림에 민감하다. 알아차림은 모든 심행을 감싸 안고 전환시키는 힘이다. 알아차림은 ‘전도된 지각’을 떨쳐버리고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을 깨닫는 데 도움을 준다. 틱 쾅 죽(Thich Quang Duc) 스님이 분신했을 때, 전 세계인들은 베트남이 불타오르고 있으니 무슨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했다. 알아차림을 수행하면 생명과 접촉할 수 있기에 고통을 줄이고 기쁨과 행복을 불러일으키고자 하는 사랑과 자비의 마음을 발할 수 있게 된다.
Do not lose yourself in the past. Do not lose yourself in the future. Do not get caught in your anger, worries, or fears. Come back to the present moment, and touch life deeply. This is mindfulness. We cannot be mindful of everything at the same time, so we have to choose what we find most interesting to be the object of our mindfulness. The blue sky is wonderful, but the beautiful face of a child is also wonderful. What is essential is to be alive and present to all the wonders of life that are available.
과거에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 미래에 매몰되어서도 안 된다. 분노, 걱정, 혹은 두려움에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와서 생명과 긴밀하게 접촉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알아차림이다. 동시에 모든 것에 마음을 집중할 수 없는 노릇이므로 알아차림의 대상이 될 만한 것으로 가장 흥미롭다고 생각되는 것을 선택해야만 한다. 푸른 하늘은 멋지고, 아이의 귀여운 얼굴 또한 멋지다. 중요한 것은 지금 당장 접할 수 있는 삶의 모든 경이로움을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In many talks, the Buddha spoke about the Threefold Training of precepts, concentration, and insight. The practice of the precepts (shila) is the practice of Right Mindfulness. If we don't practice the precepts, we aren't practicing mindfulness. I know some Zen students who think that they can practice meditation without practicing precepts, but that is not correct. The heart of Buddhist meditation is the practice of mindfulness, and mindfulness is the practice of the precepts. You cannot meditate without practicing the precepts.11
부처님은 여러 가지 설법을 통해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을 말씀하셨다. 계(戒, Shila)를 지키는 것은 알아차림을 수행하는 것이다. 계를 지키지 않는다면 알아차림을 수행한다고 할 수 없다. 계를 지키지 않고서도 명상 수행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선 수행자들이 일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것은 올바르지 못한 생각이다. 불교 명상의 핵심은 알아차림 수행이고, 알아차림은 계를 지키는 것, 즉 지계(持戒)이다. 지계(持戒) 없이는 명상도 있을 수 없다.(주11)
11 See Thich Nhat Hanh, For a Future To Be Possible. See also chap. 13.
주11) Thich Nhat Hanh, For a Future To Be Possible을 보라. 또한 13장을 보라.
When we practice mindfulness, we generate the energy of the Buddha within us and around us, and this is the energy that can save the world. A Buddha is someone who is mindful all day long.We are only part-time Buddhas. We breathe in and use our Buddha eyes to see with the energy of mindfulness. When we listen with our Buddha ears, we are able to restore communication and relieve a lot of suffering. When we put the energy of mindfulness into our hands, our Buddha hands will protect the safety and integrity of those we love.
알아차림을 수행하면, 우리 안팎에 있는 불성(佛性)의 힘을 발현시킬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세상을 구할 수 있는 힘이다. 부처는 온종일 마음을 집중할 수 있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우리는 다만 이따금씩 부처가 될 뿐이다. 숨을 들이마시면서 알아차림의 힘을 가지고 부처님의 눈을 통해 사물을 보아야 한다. 부처님의 귀를 통해 듣게 되면, 의사소통이 다시 원활해질 수 있고 많은 고통을 경감시킬 수 있다. 알아차림의 힘을 손에 모으면, 부처님의 손이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안전무사하게 지켜줄 것이다.
Look deeply into your hand, and see if the Buddha eye is in it. In Tibetan, Chinese, Korean, Vietnamese, and Japanese temples, there is a bodhisattva with one thousand arms — it takes that many arms to help others —and in the palm of each hand there is an eye. The hand represents action, and the eye represents insight and understanding. Without understanding, our actions might cause others to suffer. We may be motivated by the desire to make others happy, but if we do not have understanding, the more we do, the more trouble we may create. Unless our love is made of understanding, it is not true love. Mindfulness is the energy that brings the eyes of a Buddha into our hand. With mindfulness, we can change the world and bring happiness to many people. This is not abstract. It is possible for every one of us to generate the energy of mindfulness in each moment of our daily life.
자신의 손을 깊숙이 들여다보고는 부처님의 눈이 그 안에 있는 것처럼 생각해 보라. 티베트, 중국, 한국, 베트남, 일본의 절에는 다른 이들을 돕는 수많은 팔을 의미하는 천 개의 손을 가진 보살상이 있는데, 그 각각의 손바닥에는 눈이 그려져 있다. 손은 행동을 나타내고 눈은 지혜와 깨달음을 상징한다. 깨달음이 없으면 우리의 행동은 남에게 고통을 일으킬지도 모른다. 설사 다른 이들을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바람을 갖는다 해도 깨달음이 없는 한, 행동하면 할수록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다. 사랑이 깨달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참된 사랑이 아니다. 알아차림은 우리의 손에 부처님의 눈을 낳게 하는 힘이다. 알아차림을 통하면 세상을 바꿀 수 있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다. 이것은 추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일상생활의 매 순간마다 알아차림의 힘을 발현시키는 것은 그 누구에게나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CHAPTER TWELVE Right Speech
12장 정어(正語)
"Aware of the suffering caused by unmindful speech and the inability to listen to others, I am committed to cultivating loving speech and deep listening in order to bring joy and happiness to others and relieve others of their suffering. Knowing that words can create happiness or suffering, I am determined to speak truthfully, with words that inspire self-confidence, joy, and hope. I will not spread news that I do not know to be certain and will not criticize or condemn things of which I am not sure. I will refrain from uttering words that can cause division or discord, or that can cause the family or the community to break. I am determined to make all efforts to reconcile and resolve all conflicts, however small." This is the Fourth Mindfulness Training,1 and it offers a very good description of Right Speech (samyag vac).
“무심코 뱉은 말과 다른 이의 말을 귀 기울여 듣지 않은 일로 일어나는 고통을 알고 있기에 나는 다른 이들에게 기쁨과 행복을 가져다주고 그들의 고통을 경감시키고자 사랑이 깃든 말을 하고 경청하는 자세를 기를 것을 서원합니다. 말이 행복이나 고통을 불러올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나는 자신감과 기쁨 그리고 희망을 불어넣는 말로 정직하게 말하리라 결심합니다. 그 진위를 확실하게 알고 있지 않는 소문을 퍼뜨리지 않을 것이며 확신이 가지 않는 일을 비판하거나 비난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분열과 불화를 가져오고 가족이나 공동체를 무너뜨릴 수 있는 말을 삼가겠습니다. 나는 아무리 작은 대립이라 하더라도 그냥 흘려 보지 않고 중재하고 해결하려고 모든 노력을 기울일 것을 결심합니다.” 이것은 네 번째 알아차림 훈련(주1)으로 정어(正語)의 아주 훌륭한 설명이다.
1 See Thich Nhat Hanh, For a Future To Be Possible. See also chap. 13.
주1) Thich Nhat Hanh, For a Future To Be Possible을 보라. 또한 13장을 보라.
In our time, communication techniques have become very sophisticated. It takes no time at all to send news to the other side of the planet. But at the same time, communication between individuals has become very difficult. Fathers cannot talk to sons and daughters. Husbands cannot talk to wives, nor partners to partners. Communication is blocked. We are in a very difficult situation, not only between countries but person to person. Practicing the Fourth Mindfulness Training is very important.
오늘날 의사소통 기술은 매우 정교해졌다. 지구 반대편에 소식을 전하는 데 거의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개인 간의 의사소통은 매우 어려운 지경에 놓였다. 부모는 자식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 남편과 아내는 대화를 하지 않고, 동료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의사소통이 막혀버렸다. 우리는 국가 간의 차원뿐만 아니라 개인 간의 차원에서도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 그래서 네 번째 알아차림 훈련을 수행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The classical explanation of Right Speech is: (1) Speaking truthfully. When something is green, we say it is green, and not purple. (2) Not speaking with a forked tongue. We don't say one thing to one person and something else to another. Of course, we can describe the truth in different ways to help different listeners understand our meaning, but we must always be loyal to the truth. (3) Not speaking cruelly. We don't shout, slander, curse, encourage suffering, or create hatred. Even those who have a good heart and don't want to hurt others sometimes allow toxic words to escape from their lips. In our mind are seeds of Buddha and also many fetters or internal formations (samyojana). When we say something poisonous, it is usually because of our habit energies. Our words are very powerful. They can give someone a complex, take away their purpose in life, or even drive them to suicide. We must not forget this. (4) Not exaggerating or embellishing. We don't dramatize unnecessarily, making things sound better, worse, or more extreme than they actually are. If someone is a little irritated, we don't say that he is furious. The practice of Right Speech is to try to change our habits so that our speech arises from the seed of Buddha that is in us, and not from our unresolved, unwholesome seeds.2
경전에 근거한 정어(正語)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1) 정직하게 말해야 한다. 녹색을 보면 녹색이라고 해야지 자주색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2) 한 입으로 두 말 해서는 안 된다. 이 사람에게는 이렇게 말하고 저 사람에게는 저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 물론 수준이 다른 듣는 사람들이 그 뜻을 이해하도록 진리를 다른 방식으로 설명할 수는 있지만, 늘 진리에 충실해야 한다. (3) 심한 말을 해서는 안 된다. 벌컥 소리를 지르거나 비방하거나 욕하거나 고통과 증오를 빚어내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심지어는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하는 착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조차 이따금 독기 서린 말을 내뱉곤 한다. 우리 마음속에는 불성의 씨앗이 들어있는 동시에 수많은 족쇄와 번뇌의 씨앗 즉 정신의 형성이 들어있다. 우리가 악의에 찬 말을 하게 되는 것은 대개 습관의 힘 때문이다. 말은 아주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말로 인해 사람은 강박 관념을 갖게 되거나 인생의 목적을 잃을 수도 있고, 심지어는 자살로 내몰리는 일까지 있다. 이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4) 과장되거나 그럴듯하게 꾸민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어떤 일을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좀 더 극단적으로 혹은 더 낫거나 더 나쁘게 들리게 하고자 쓸데없이 과장해서는 안 된다. 어떤 이가 약간 화가 났다고 해서 그가 미쳐 날뛴다고 해서는 안 된다. 정어(正語)의 수행은 우리가 하는 말이 신중하지 못한 불건전한 씨앗이 아니라 불성의 씨앗에서 비롯되게 하고자 습관의 힘을 바꾸려고 애쓰는 것을 말한다.(주2)
2 See Samyukta Agama 785 and Majjhima Nikaya 117. See also Thich Nhat Hanh, For a Future To Be Possible.
주2) 잡아함경 785와 Majjhima Nikaya 117을 보라. Thich Nhat Hanh, For a Future To Be Possible도 참조하라.
Right Speech is based on Right Thinking. Speech is the way for our thinking to express itself aloud. Our thoughts are no longer our private possessions. We give earphones to others and allow them to hear the audiotape that is playing in our mind. Of course, there are things we think but do not want to say, and one part of our consciousness has to play the role of editor. If there is something we think we will be criticized for saying, the editor will censor it. Sometimes when a friend or a therapist asks us an unexpected question, we are provoked into telling the truth we wanted to hide.
정어(正語)는 정사유(正思惟)에 기반을 두고 있다. 말은 생각을 목소리로 나타낸 것이다. 생각은 더 이상 개인의 사유물이 아니다. 우리는 다른 이에게 이어폰을 주고 우리 마음속에서 돌아가고 있는 오디오테이프를 듣게 하고 있다. 물론 우리가 생각은 하고 있지만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이 있기 마련인데, 그러자면 의식의 한 부분이 편집자의 역할을 해야 한다. 말을 했다가는 비판당할 거라고 생각되는 경우에는 편집자가 그것을 삭제할 것이다. 그런데 친구나 치료사가 예기치 못한 질문을 하면 숨기고자 했던 진실을 무심코 내뱉는 경우가 종종 있다.
Sometimes, when there are blocks of suffering in us, they may manifest as speech (or actions) without going through the medium of thought. Our suffering has built up and can no longer be repressed, especially when we have not been practicing Right Mindfulness. Expressing our suffering can harm us and other people as well, but when we don't practice Right Mindfulness, we may not know what is building up inside us. Then we say or write things we did not want to say, and we don't know where our words came from. We had no intention of saying something that could hurt others, yet we say such words. We have every intention of saying only words that bring about reconciliation and forgiveness, but then we say something very unkind. To water seeds of peace in ourselves, we have to practice Right Mindfulness while walking, sitting, standing, and so on. With Right Mindfulness, we see clearly all of our thoughts and feelings and know whether this or that thought is harming or helping us. When our thoughts leave our mind in the form of speech, if Right Mindfulness continues to accompany them, we know what we are saying and whether it is useful or creating problems.
마음속에 고통 덩어리가 있을 때 그것들이 생각을 거치지 않고 말이나 행동으로 나타나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특히 정념(正念)을 수행하지 않을 때 고통은 심해져가고 더 이상 억제되는 법이 없다. 고통을 표출하면 자기는 물론 남에게도 피해를 줄 수 있는데, 정념(正念)을 수행하지 않는 경우 우리는 마음속에 무엇이 쌓여가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럴 때면 말하고 싶지 않았던 것을 말하거나 글로 옮기고 나서는 그 말이 어디서 비롯되었는가를 알지 못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는 말을 할 의도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말을 해버리게 된다. 화해와 용서를 낳는 말만 할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해도 매우 심술궂은 말을 해버린다. 우리 안에 있는 평화의 씨앗에 물을 주고자 한다면, 걷고, 앉아있고, 서있고 하는 내내 정념(正念)을 수행해야만 한다. 정념(正念)을 통하면 자신의 모든 생각과 느낌을 분명히 파악할 수 있고 이러저러한 생각이 해로운 것인지 이로운 것인지를 알게 된다. 생각이 말이라는 형태로 마음을 떠날 때 정념(正念)이 함께 한다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고 그것이 과연 쓸모 있는 것인지 혹은 문제를 일으킬 것인지를 알게 된다.
Deep listening is at the foundation of Right Speech. If we cannot listen mindfully, we cannot practice Right Speech. No matter what we say, it will not be mindful, because we'll be speaking only our own ideas and not in response to the other person. In the Lotus Sutra, we are advised tolook and listen with the eyes of compassion. Compassionate listening brings about healing. When someone listens to us this way, we feel some relief right away. A good therapist always practices deep, compassionate listening. We have to learn to do the same in order to heal the people we love and restore communication with them.
경청(傾聽; 귀 기울여 듣기)은 정어(正語)의 토대를 이룬다. 마음을 집중해서 들을 수 없다면, 정어(正語)를 실천에 옮길 수 없다. 자기 생각만 늘어놓고 다른 사람에게 제대로 대꾸하지 않는다면, 무슨 말을 하건 간에 그것은 알아차림을 하는 자세가 담겨있다고 할 수 없다. 법화경(法華經)을 보면 자비의 눈으로 보고 들어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 자비가 깃든 듣기는 치유 작용을 한다. 누군가 그런 식으로 우리의 말을 들을 때면, 우리는 즉시 안도감을 느끼게 된다. 훌륭한 치료사는 언제나 다른 사람의 말을 자비심을 가지고 경청(傾聽)한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치유하고 그들과의 의사소통을 열려고 한다면 우리도 똑같이 해야 한다.
When communication is cut off, we all suffer. When no one listens to us or understands us, we become like a bomb ready to explode. Restoring communication is an urgent task. Sometimes only ten minutes of deep listening can transform us and bring a smile back to our lips. The Bodhisattva Kwan Yin is the one who hears the cries of the world. She has the quality of listening deeply, without judging or reacting. When we listen with our whole being, we can defuse a lot of bombs. If the other person feels that we are critical of what they are saying, their suffering will not be relieved. When psychotherapists practice Right Listening, their patients have the courage to say things they have never been able to tell anyone before. Deep listening nourishes both speaker and listener.
의사소통이 단절되면 우리 모두 고통을 받는다. 아무도 우리에게 귀 기울이거나 이해하려고 하지 않을 때 우리는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만 같은 폭탄의 상태가 된다. 단 10분간만이라도 우리의 말에 귀 기울여 주는 이가 있다면 우리는 태도가 바뀌고 입가에 다시 웃음을 띠게 되는 경우가 많다. 관음(觀音) 보살은 세상의 울부짖음을 듣는 분이다. 그분은 판단을 내리거나 반발하지 않고 귀 기울여주는 성품을 가지고 있다. 몸과 마음을 다해 경청(傾聽)한다면, 우리는 수많은 폭탄을 해체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가 그들의 하는 말에 트집 잡기를 좋아한다고 느끼는 한, 그들이 받는 고통은 줄어들 수 없을 것이다. 정신치료사가 올바른 듣기를 실천한다면, 그를 찾아온 환자들은 그전에는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것들을 털어놓는 용기를 갖게 될 것이다. 경청(傾聽)은 말하는 이와 듣는 이 모두의 정신을 기름지게 한다.
Many of us have lost our capacity for listening and using loving speech in our families. It may be that no one is capable of listening to anyone else. So we feel very lonely even within our own families. That is why we have to go to a therapist, hoping that she is able to listen to us. But many therapists also have deep suffering within. Sometimes they cannot listen as deeply as they would like. So if you really love someone, train yourself to be a listener. Be a therapist. You may be the best therapist for the person you love if you know how to train yourself in the art of deep, compassionate listening. You must also use loving speech. We have lost our capacity to say things calmly. We get irritated too easily. Every time we open our mouths, our speech becomes sour or bitter. We know it's true. We have lost our capacity for speaking with kindness. This is the Fourth Mindfulness Training. This is so crucial to restoring peaceful and loving relationships. If you fail in this training, you cannot succeed in restoring harmony, love, and happiness. That is why practicing the Fourth Mindfulness Training is a great gift.
우리 대부분은 가족 간에 귀 기울이고 사랑이 깃든 말을 하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다른 사람의 말에 귀 기울일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심지어 가족과 함께 있다 해도 심한 외로움을 느끼게 된다. 사람들이 심리치료사들이 자기 말에 귀 기울여주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그들을 찾아가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러나 심리치료사들 역시 깊은 상처를 안고 있는 경우가 많다. 때로는 그들도 자기가 하고 싶은 만큼 경청(傾聽)하지 못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스스로 귀 기울여 듣는 이가 되는 훈련을 해야만 한다. 한 번 심리치료사가 되어 보라. 자비가 깃든 경청(傾聽)의 기술을 습득하는 법을 알게 되면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최고의 심리치료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랑이 깃든 말을 써야만 한다. 우리는 차분하게 말하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우리는 너무 쉽게 화를 낸다.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은 죄다 모질고 신랄한 것이 된다. 그렇지 않다고 말하기 힘들 것이다. 우리는 친절하게 말하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이것이 네 번째 알아차림 훈련을 해야 하는 이유이다. 평화롭고 사랑이 깃든 인간관계를 재건하는 데 그것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 훈련에 실패한다면 조화, 사랑, 행복을 되찾는 데에도 성공할 수 없기 마련이다. 이 때문에 네 번째 알아차림 훈련의 실천은 커다란 선물이다.
So many families, couples, and relationships have been broken because we have lost the capacity of listening to each other with calmness and compassion. We have lost the capacity of using calm and loving speech. The Fourth Mindfulness Training is very important to restore communication between us. Practicing the Fourth Training on the art of listening and the art of loving speech is a great gift. For example, a family member may suffer very much. No one in the family has been able to sit quietly and listen to him or her. If there is someone capable of sitting calmly and listening with his or her heart for one hour, the other person will feel a great relief from his suffering. If you suffer so much and no one has been able to listen to your suffering, your suffering will remain there. But if someone is able to listen to you and understand you, you will feel relief after one hour of being together.
차분하고도 연민(憐憫)의 마음을 잃지 않은 채 서로에게 귀 기울이는 능력을 잃어버렸기에 그렇게 많은 가족, 부부, 인간관계가 파탄에 이르게 되었다. 우리는 차분하고 사랑이 깃든 말을 하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네 번째 알아차림 훈련은 우리들의 의사소통을 다시 여는 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귀 기울이기와 사랑이 깃든 말을 하는 기술과 연관이 있는 네 번째 알아차림 훈련을 하는 것은 커다란 선물이다. 예를 들어 가족 중 한 명이 아주 심한 고통을 받고 있다고 하자. 지금까지 가족 중에 그 사람 곁에 조용히 앉아 귀 기울여 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누군가 한 시간 동안 차분하게 앉아서 그 사람의 속내를 귀 기울여 들어줄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고통이 아주 많이 사라지는 느낌을 얻게 될 것이다. 우리가 심한 고통을 받고 있는데 그 고통에 귀 기울여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그 고통은 여전히 남아있게 된다. 그러나 누군가가 우리의 말에 귀 기울여주고 이해해 줄 수 있다면, 한 시간 동안 같이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안도감을 얻게 될 것이다.
In Buddhism, we speak of the Bodhisattva Avalokiteshvara, Kwan Yin, a person who has a great capacity of listening with compassion and true presence. "Kwan Yin" means the one who can listen and understand the sound of the world, the cries of suffering. Psychotherapists try to practice the same. They sit very quietly with a lot of compassion and listen to you. Listening like that is not to judge, criticize, condemn, or evaluate, but to listen with the single purpose of helping the other person suffer less. If they are able to listen like that to you for one hour, you feel much better. But psychotherapists have to practice so that they can always maintain compassion, concentration, and deep listening. Otherwise, their quality of listening will be very poor, and you will not feel better after one hour of listening.
불교에는 관음보살(觀音菩薩)이 있는데, 그 분은 자비심을 가지고 진실한 태도로 경청하는 위대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관음(觀音)’이라는 말은 세상의 소리, 즉 고통에서 비롯되는 울부짖음을 듣고 이해한다는 뜻이다. 심리치료사들은 그와 똑같이 실천하려고 애쓰고 있다. 그들은 커다란 자비심을 가지고 아주 조용히 앉아서 우리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그렇게 듣는 자세는 판단하고 비판하고 비난하거나 평가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환자의 고통을 줄이는 데 도움을 주고자 하는 단 한 가지 목적을 가지고 듣는 것이다. 그들이 그런 식으로 한 시간 동안 환자의 말에 귀 기울인다면, 환자는 훨씬 나아진 느낌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런데 심리치료사들도 자비심을 가지고 집중해서 경청하는 자세를 늘 유지하고자 한다면 수행을 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경청하는 능력이 매우 형편없게 될 것이고, 그러면 한 시간 동안 환자의 말을 들어준다 해도 환자는 더 나아진 느낌을 얻지 못하게 될 것이다.
You have to practice breathing mindfully in and out so that compassion always stays with you. "I am listening to him not only because I want to know what is inside him or to give him advice. I am listening to him just because I want to relieve his suffering." That is called compassionate listening. You have to listen in such a way that compassion remains with you the whole time you are listening. That is the art. If halfway through listening irritation or anger comes up, then you cannot continue to listen. You have to practice in such a way that every time the energy of irritation and anger comes up, you can breathe in and out mindfully and continue to hold compassion within you. It is with compassion that you can listen to another. No matter what he says, even if there is a lot of wrong information and injustice in his way of seeing things, even if he condemns or blames you, continue to sit very quietly breathing in and out. Maintain your compassion within you for one hour. That is called compassionate listening. If you can listen like that for one hour, the other person will feel much better.
언제나 자비심을 잃지 않으려면 마음을 집중해서 호흡하는 수행을 해야만 한다. “내가 저 사람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는 것은 그저 저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 알고자 하거나 충고를 해주고자 하기 때문이 아니다. 내가 저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다만 그의 고통을 덜어주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일러 자비가 깃든 경청이라고 한다. 듣고 있는 동안 자비심을 잃는 일이 없도록 하면서 경청해야만 한다. 그것이 참다운 기술이다. 듣고 있는 도중에 짜증이나 화가 일어난다면, 계속해서 들을 수 없게 된다. 짜증과 화의 힘이 치밀어 오를 때마다 마음을 집중해서 호흡을 하면서 자신 안에 자비심을 유지할 수 있도록 수행해야만 한다. 자비심을 가지고 있어야 다른 사람의 말에 귀 기울일 수 있다. 상대가 무슨 말을 하건 간에, 심지어 그가 사물을 보는 방식이 올바르지 못하고 허튼 소리를 줄줄 늘어놓는다 해도, 또 그가 당신을 비방하더라도, 아주 조용히 앉아서 호흡하는 것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그와 함께 하는 한 시간 동안 자비심을 유지해야만 한다. 이것을 일러 자비가 깃든 경청이라고 한다. 그런 식으로 한 시간 동안 경청할 수 있다면, 상대방은 훨씬 나아진 느낌을 얻게 될 것이다.
If you don't feel that you can continue to listen in this way, ask your friend, "Dear one, can we continue in a few days? I need to renew myself. I need to practice so I can listen to you in the best way I can." If you are not in good shape, you are not going to listen the best way you can. You need to practice more walking meditation, more mindful breathing, more sitting meditation in order to restore your capacity for compassionate listening. That is the practice of the Fourth Mindfulness Training — training oneself to listen with compassion. That is very important, a great gift.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듣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면, 친구에게 이렇게 부탁하는 것도 좋으리라. “친구, 며칠 뒤에 계속하는 게 어떻겠나? 기분 전환을 좀 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 같아. 최선을 다해서 자네 말에 귀 기울일 수 있도록 수행을 좀 해야겠어.” 자신의 상태가 좋지 않으면 최선을 다해 들으려고 하지 않는 법이다. 자비가 깃든 경청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되찾고자 한다면 걷기 명상, 마음을 집중하는 호흡, 좌선을 더 많이 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바로 네 번째 알아차림의 훈련, 즉 자비심을 가지고 경청하는 훈련이다. 그것은 매우 중요한 다시 말해 커다란 선물이라고 할 수 있다.
Sometimes we speak clumsily and create internal knots in others. Then we say, "I was just telling the truth." It may be the truth, but if our way of speaking causes unnecessary suffering, it is not Right Speech. The truth must be presented in ways that others can accept. Words that damage or destroy are not Right Speech. Before you speak, understand the person you are speaking to. Consider each word carefully before you say anything, so that your speech is "Right" in both form and content. The Fourth Mindfulness Training also has to do with loving speech. You have the right to tell another everything in your heart with the condition that you use only loving speech. If you are not able to speak calmly, then don't speak that day. "Sorry, my dear, allow me to tell you tomorrow or the next day. I am not at my best today. I'm afraid I'll say things that are unkind. Allow me to tell you about this another day." Open your mouth and speak only when you are sure you can use calm and loving speech. You have to train yourself to be able to do so.
눈치 없는 말을 했다가 다른 사람의 마음에 못을 박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때 우리는 이렇게 말하곤 한다. “그저 진실을 말했을 뿐이야.” 그 말이 진실이라 해도 그런 식으로 말하는 바람에 불필요한 고통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정어(正語)가 아니다. 진실은 다른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을 통해 밝혀야 한다. 남에게 상처를 주고 파멸로 이끄는 말은 정어(正語)가 아니다. 말하기 전에 그 말의 대상이 되는 사람을 이해해야 한다. 말을 꺼내기 전에 한마디 한마디를 신중하게 고려한다면, 그 말은 형식과 내용 모두에 걸쳐 ‘올바른’ 것이 될 것이다. 네 번째 알아차림 훈련은 사랑이 깃든 말과도 연관되어 있다. 오직 사랑이 깃든 말만 한다는 조건을 지킨다면 마음속에 있는 모든 것을 다른 사람에게 털어놓는다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차분하게 말할 수 없다면, 그날은 차라리 말을 해서는 안 된다. “미안하네, 친구. 내일이나 모레 이야기하는 게 어떻겠나? 오늘은 내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아. 혹 고약한 말을 하지 않을까 걱정된다네. 그 문제는 다음에 이야기하는 게 좋겠네.” 차분한 자세로 사랑이 깃든 말을 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 때만 말을 해야 한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스스로 훈련을 해야만 한다.
In the Lotus Sutra, a bodhisattva named Wondrous Sound was able to speak to each person in his or her own language. For someone who needed the language of music, he used music. For those who understood the language of drugs, he spoke in terms of drugs. Every word the Bodhisattva Wondrous Sound said opened up communication and helped others transform. We can do the same, but it takes determination and skillfulness.
법화경(法華經)에 나오는 묘음(妙音)보살은 모든 사람에게 그 사람의 관심사를 통해 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셨다고 한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음악을 좋아한다면, 보살은 음악을 통해 말씀하신다. 그리고 의약품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는 의약에 관한 용어를 써서 이야기하신다. 묘음(妙音)보살의 말씀 치고 의사소통의 장벽을 제거하고 다른 사람들이 처한 상태를 고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 없다. 우리도 똑같이 할 수 있기는 하지만, 그러자면 결단력과 숙련된 솜씨가 있어야만 한다.
When two people are not getting along, we can go to one and speak in a positive way about the other, and then go to the other and speak constructively about the first. When person "A" knows that person "B" is suffering, A has a much better chance of understanding and appreciating B. The art of Right Speech needs Right View, Right Thought, and also correct practice.
두 사람 사이가 좋지 않을 때, 우리는 그 중 한 사람을 찾아가 다른 한 사람에 대해서 긍정적인 방식으로 이야기한 다음에 다른 한 사람에게 가서 앞서의 사람에 대해 좋게 이야기해주는 경우가 있다. A라는 사람이 B라는 이가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A는 B를 잘 이해할 수 있는 더 많은 기회를 얻게 된다. 정어(正語)의 기술은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와 올바른 실천을 필요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