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 김연아, 손기정, 히틀러 (上)
서호련
(올해는 1912년 손기정이 탄생한 103주년이고- 1919년 3.1에 발생한 기미년 3.1운동 96주년이며- 1936년 베르린 올림픽 마라턴에서 손기정이 우승한 79주년이다. 그리고 김연아가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일본의 아사다를 뭉개고 여자싱글프리스케이팅에서 금메달을 딴 5주년이다.)
2010년 2월 26일, 지난 5년전, 정확히 오늘이다. 3.1절을 3일 앞둔 날이다. 김연아는 캐나다 밴쿠버 퍼시픽 콜리세움에서 치러진 2010 세계 동계올림픽 피겨 여자 싱글 프리스케이팅에서 최고점인 150.06점을 얻어 쇼트프로그램(78.50점)을 합쳐 총점 228.56점의 역대 여자 싱글 최고점으로 감격의 금메달 땄다.
사람들의 생각은 같았다. 온세계가 김연아의 시상식을 지켜보면서 열광하고 일본열도가 숨을 죽일 때 필자는 손기정선수를 생각했고 사흘 뒤의 3.1절을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 가
3.1절을 이틀 앞둔 다음날 2월 27일자 미국의 NYT는 " 김연아는 2차 대전이 끝날 때 까지 한국을 36년간 점령 했던 일본의 경쟁자를 완벽하게 굴복시키고 승리자가 되었다‘고 보도 했다. 2월 27일자 L.A 타임스의 보도이다.
"보았는가? 스타디움을 흔든 태극기의 물결을! 그는 일본의 아사다 마오를 철저히 뭉개버리고 과거 일본의 식민지배에 앙갚음을 했다. 일제시대 베를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고도 태극기기를 올리지 못 했던 손기정의 한을 풀었다“고 썼다.그들도 일제하의 우리 민족의 3.1만세운동을 기억했던 것이다.
3.1절을 사흘 앞둔 오늘 2월 26일. 김연아의 우승은 한반도와 일본열도에 몰아친 감격과 비탄의 태풍 이었고 이는 반전의 역사가 필연하다는 세계사의 준엄한 순리이기도 했다. 이는 단순히 김연아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다는 사실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에게 당한 민족통한에 철퇴를 내리는 의미를 가진다.
3.1절 사흘 앞두고 연아가 딴 금 매달은 3.1 독립만세운동과 손기정의 베를린 우승과 함께 우리 한국 국민의 가슴속에 영원한 활화산으로 남아 있게 되었으며 조선민족의 불굴의 정신을 세계 만방에 드높이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결코 정신적이라도 그 누구에게 나라를 빼앗겨서는 아니 된다
역사의 날 1936년 8월 9일 한국의 손기정은 11 회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했다. 미 공개된 동영상에서의 당시 마라톤 생중계(오디오)의 역사적 실황은 다음과 같았다.
“ 여기는 올림픽 주 경기장의 결승선 지점입니다. 우리는 마라톤 우승자 일본선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12만 명의 관중들도 일어서서 그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승자인 일본선수 ”손“이 들어서게 될 주경기장의 정문인 검은 문을 조용히 주시하고 있습니다.(손기정 선수가 들어오고 우승이 확정된 듯 보이자) 그 한국 대학생(Koreanischer student)은 세계의 건각들을 가볍게 물리쳤습니다. 이제 그가 엄청난 막판 스퍼트로 질주하며 들어오고 있습니다. 트랙의 마지막 직선 코스를 달리고 있습니다. 대단한 선수입니다. 최고의 힘을 지닌 천부적인 마라토너입니다. 1936년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손“이 결승선을 통과 하고 있습니다. 한국인은 마라톤 구간 내내 아시아의 힘과 에너지로 뛰었습니다. 작열하는 태양을 뚫고 거리의 딱딱한 돌 위를 지나 뛰었습니다.”
75년 전 베를린 오림픽 마라톤대회의 생중계 장면이다.
1936년 8월 9일 오후 3시. 베를린 올림픽 스타디움에는 세계 정상급 56명의 마라토너들이 자리했다. 손기정도 그 가운데 한 명이었다. 당시에는 1932년 LA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후안 카를로스 사바라(아르헨티나)의 독주를 막는 것은 불가능한 것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손기정은 초반 중위권으로 처졌지만, 30km 비스마르크 언덕에서 속도를 내 사바라를 따돌렸다. 그리고 31km 지점에서 영국 출신의 하퍼까지 제치며 단독 선두로 나서 12만 관중이 운집한 스타디움 안에 가장 먼저 발을 내딛었다. 2시간29분19초 세계신기록. 마라톤 금메달을 거머쥐는 순간이었다.
손기정의 목에 금메달을 걸어준 사람은 다름 아닌 아돌프 히틀러였다. 히틀러도 손을 내민 '베를린 영웅' 손기정 이었다. 아리아인의 우월성을 과시하려던 그는 작고 다부진 체격의 동양인인 손기정의 활약에 크게 놀랐다.
장내 아나운서 또한 "한국인이 아시아의 힘과 에너지로 뛰었다"며 일본 국적의 손기테로 대회에 출전한 손기정을 '한국인'이라고 명확하게 알렸다. 그렇게 세계 전역에 '코리언 히어로'의 등장을 알린 가슴 벅찬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의 가슴엔 일장기를 달았고 시상대엔 태극기 대신 일본국기가 펄럭였던것이다. 나라를 빼앗긴 슬픔 이었다.
그러나 그는 암울한 일제 강점 하에서 민족의 자부심을 일 깨워준 영웅이었다. 그의 쾌거는 암흑 천지에 살던 조선인들에게 우리도 당당히 세계의 주역이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안겼다.
그 16 일 뒤 8월 25일 경천동지 (驚天動地) 할 사건이 일어났다. 동아일보 는 2면 전면에 손기정의 가슴에서 일장기를 지워버린 사진을 싣고 한국 손기정의 승리사실을 대대적으로 보도 하였다.
이 사건으로 동아일보는 폐간 되었고 이를 계기로 민족의식에 불이 붙고 열화와 같은 항일 독립운동이 계속 전개되었다.
그 56년 뒤 1992년 스페인 바로셀로나 올림픽 마라톤에서 몬주익 의 영웅 황영조가 일본 모리시타를 제치고 금메달을 땄다. 펄럭이는 태극기를 보면서 눈물을 흘린 황영조는 곧 관람석으로 뛰어가 손기정 옹에게 금 메달을 걸어주었다. 손기정은 아무 말도 하지 아니한 체 그를 껴안아 주었고 그들은 한참동안 눈물을 흘리며 포옹 하였다.
손기정은 2002년 지병으로 사망하기까지 살아생전 자신의 금메달을 우리 것으로 되찾기 위해 무척 애썼지만 일본 올림픽위원회의 거부로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2011년, 12월15일 IOC는 75년 만에 손기정의 손을 들어주었다. IOC는 일본의 식민지 시절 손기정이 한국 선수였음을 분명히 밝히면서 일본식 이름인 '손기태'에서 한국식 이름인 손기정으로 바로잡았다.
베를린 시상대 위에서 일장기를 달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손기정 선수와 3위 남승룡 선수의 사진에 나와 있는 모습은 너무 슬퍼 보였다. 베를린 스타디움에 일장기가 오르고 일본 기미가요가 흘러나오자 월계관을 쓴 두 영웅은 고개를 숙였다. 손기정은 월계수 나무로 옷에 새겨진 일장기를 살며시 가렸다. 그는 경기 후 한국어 이름으로만 서명했고, 그 옆에 한반도를 그려 넣기도 했다.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 붙여진 일장기는 계수나무 가지에 덮여 보이지 아니 했지만 남승룡 선수는 월계수를 받지 못해 그대로 일장기가 노출되어 있었던 것이다. 둘이는 슬픈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2위인 영국 하퍼는 기쁜 얼굴 이었다. 남승룡은 그때 손기정의 계수나무를 부러워했다고 한다.(下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