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수성못 싸리비는 바람에 흩날리고 길 위에엔 비에 젓은 낙엽이 처량한 늦가을, 불현 듯 수성못엘 갔다. 근처에 사는 경묵이가 커피 한 잔 하자고 불러낸 데이트 장소였다. 또 경묵이냐고? 그렇다. 불러주는 동창이 경묵이 밖에 없으니 우짜겠노. 전에도 언급한 것처럼 주변에 경묵이만큼 여유롭고 팔자 좋은 사람도 없는 것 같다. 문화 프리랜서, 자유와 문화를 문자 의미 그대로 누리고 있는 인간이다. 
실로, 오랜만에 가보는 수성못이었다. 마지막 기억이 90년대 초반쯤으로 내려가는 것 같으니 한 20년 만에 다시 찾은 셈이다. 최소한 나들이로는 그렇다. 당연한 일이지만 못의 주변은 참 많이도 변해 있었다. 물을 제외하고는 전부 바뀐 것 같다. 누구는 같은 냇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고 했다지만 호수의 물이라 그런지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같은 물로 보였다. 못 주변은 예전에 비해 훨씬 정갈하고 세련된 모습으로 변해있었다. 하지만 왠지 옛날처럼 정다워 보이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그윽한 만추의 서정에 모든 게 아름답게만 보였다. 그 가을이 그 가을이건만 가을은 첫사랑처럼 언제나 가슴이 저린다. 가을은 아픔도 죽음도 순명으로 포용하는 게 비극적 구조를 닮은 것 같다. 추락의 산화가 아름다움으로 승화하는 것이 만추와 비극의 닮은 점이다. 사실 아무리 고운 단풍이라 해도 자세히 살펴보면 그 자체로 온전한 것은 거의 없다. 최소한 여름날의 푸르른 잎에 비하면 완성도는 현저히 떨어진다. 생명에너지의 소진이 단풍일진데 그 형식이 얼마나 온전하겠나. 그럼에도 그게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무슨 조화일까? 늙고 병들어 소멸해가는 것이 슬프긴 해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가을은 말하는 걸까? 인간의 마지막 모습도 그리 봐 주는 존재가 있을까? 하나님은 그러시겠지.
1.7km에 이르는 수성 못 둑을 걷는 사이 많은 추억이 떠올랐다가 가라앉고,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 내게 연애라 이름붙일 수 있는 첫 연애는 수성 못 둑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난생 처음으로 가 본 룸싸롱이 산기슭의 수성호텔 룸싸롱이었다. 술값 내는 사람은 따로 있었는데 여자들이 내게 관심을 보여 난감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착각엔 커트라인이 없다고? 착각 없이 이 험한 세상을 어찌 살아가겠노.
시내에서 수성 못으로 가는 삼거리 우축으로 608 전경대가 자리잡고 있다. 내가 50사단에서 신병훈련을 마치고 배치된 자대가 바로 608 전경대였다. 군대서라도 대구를 한 번 떠나 보는 게 소원이었는데, 세상 뜻대로 안 된다는 것을 또 한 번 절감한 순간이었다. 부대가 파견근무로 서울로 올라가기 전까지 1년 이상 복무한 곳인데, 아침마다 수성 못 둑으로 구보를 나갔다. 못된 고참들 아래서 꽤나 혹독한 세월을 보낸 곳이다. 훈련 중 휴식 시간에 팬지꽃 화단 옆에 쪼그리고 앉아 마시는 자판기 커피는 아주 처절한 것이었다.
수성못가에는 커피와 밥을 먹을 수 있는, 멋있는 레스토랑이 하나 있다. 이름만으로도 낭만적인 ‘호반’, 80년대를 통틀어 나의 인생 반경에서는 가장 낭만적인 데이트 장소였다. 하지만 실제로 가 본 것은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같이 갈 파트너가 없어서 그랬기도 했고 궁핍한 형편 때문에도 그랬다. 언젠가부터 3층 빌딩으로 신축된 호반은 여전히 호반으로 남아있지만 몇 번이고 들어가봐도 예전 기분이 나지는 않았다. 이렇게 호반은 개인사에서도 애틋한 곳이지만 문학을 통해 특별히 의미화 된 곳이기도 하다. 이렇게 말하면 혹 슈토름의 <호반 Immensee>을 떠올리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Immensee>, 이 소설은 ‘임엔 호반’이라고 번역해야겠지만 한국에선 그냥 '호반'으로 알려져 있다. 이 중편 소설에 대한 기억은 유난히 애틋하다. 내용의 애틋함도 그러려니와 이 책을 읽던 때의 기억이 그러하다. 대학 2학년 때인지 3학년 때인지, 어느 78학번 선배님이 DLF란 동아리를 만들어 방학에 후배들에게 독일어를 가르쳐줬다. 그때 읽은 작품이 바로 <Immensee>였다. 장소는 외국학대로 넘어가는 언덕에 있던 ‘찌이네’(?)라 불리던 식당이었다. 그때 <호반> 독해를 가르치던 선배님은 세련된 서울말 씨에 뽀얀 피부가 농부의 아들인 내게는 거의 이국적이었다. 독일어 발음은 또 얼마나 똑 부러지던지. 그 후 수성 못엘 가면 언제나 <호반>이 떠올랐다. 뒤에 어느 교수님도 수업시간에 이 작품을 다뤘지만 수성못의 기억에 한참 밀려나 있다. 하여간 독일 문학 중에 <Immensee>만큼 서정적이고 애잔한 소설도 많지 않을 것이다. 한마디로, 유년의 첫사랑을 평생 있지 못하는 한 노인의 회상을 그린 것이 그 내용이다. 
나는 아직도 수성 못 가의 ‘호반’이 실제로 슈토름의 <호반>과 연관이 좀 있는지 어떤지 모른다. 찾아가 물어보지 않았고 물어 볼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이미 혼자 다 의미화해 버렸는데, 아니라고 하면 실망이 클까봐 그랬을까. 하기야 그 관념 속에 계속 묻혀 있다고 나쁠 건 없지 않겠나. 수성못 둑을 몇 바퀴 돌고 나니 오후의 그림자는 짙어지고, 아쉬운 마음으로 떠나 왔다. 비는 그쳤지만 바람은 더욱 서늘해져 못을 찾는 발길도 뜸해져갔다. 사실 이 날의 수성못 나들이는 해인사로 단풍놀이 가려다 비가 오는 바람에 삼천포로 빠진 결과였다. 결과적으로 잊고 있던 청춘의 쓸쓸한 추억을 되씹게 해준 나쁘지 않은 탈선이었다고 생각한다. 가을은 어차피 쓸쓸하지 않겠나. 아, 그러나 시방 우리는 각각 홀로 있다. 홀로 있다는 것은
멀리서 혼자 바라만 본다는 것,
허공을 지키는 빈 가지처럼
가을은
멀리 있는 것이 아름다운
계절이다 오세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