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말에 당나라에서 선을 전수하고 돌아 온 승려들은 자신들이
전수해 온 선을 널리 알리려고 노력하였으나
그 당시 신라는 선종을 받아들이기에는 교종의 자리가 너무도 컸습니다.
그래서 선승들은 자신들의 제자와 함께 지방으로 내려가
절을 짓고 선문(禪門)을 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구산선문이 시작된 이유입니다.
우리 나라에 들어 온 선종은 중국에 있던 남종선을 받아들인 것이며,
중국의 선종은달마대사가 인도로부터 와서 전하였습니다.
선종은 경전의 해석이나 말, 문자를 수단으로 삼지 않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 교외별전(敎外別傳)을 종(宗)의 골격으로 하고,
좌선(坐禪)으로써 자기 스스로를 관찰하는 수행을 함으로써
(내관자성(內觀自省) 자성(自性)을 깨닫고,
자증삼매(自證三昧)의 묘경(妙境)을 깨달는 것으로 합니다.
또한 선종이란 부처님의 교설(敎說)을
소의
(所衣: 의지할 바 대상이라는 뜻으로 부처님이 설하신
내용에 의지한다는 것입니다)
로 삼는 교종에 대하여 좌선을 닦는 종지라는 뜻입니다.
선종은 부처님에게서 정법(正法)을 유촉 받은
가섭존자(迦葉尊者)로부터 28조 보리달마(菩提達磨)가 있고,
28조(祖)인 보리달마(菩提達磨)가 중국에 건너와 2조
혜가(慧可, 487-593)에게 법을 전함으로부터 제
5조인 홍인(弘忍, 602-675)에 이르러
그 문하(門下)에서 혜능(慧能, 638-713)을
제6조로 하는 남종(南宗)과
신수(神秀, ?-706)를 제6조로 하는 북종(北宗)으로 나뉘어 졌습니다.
그러나 신수(神秀)의 북종(北宗)은 오래지 않아 맥이 끊어지고
혜능(慧能) 남종만이 5가(家) 7종(宗)으로 번성하였다고 합니다.
우리 나라에 선종은 신라 선덕여왕 5년(784)에
당나라의 서당지장(西堂智藏)에게서 법(法)을 받은
도의선사(道義禪師)가 돌아와 법을 전하기 시작한 것을
그 초조(初祖)로 하고 있습니다.
서당지장 스님은 마조도일 스님의 법을 이었고,
마조 도일 스님은 조계 혜능 스님의 법을 이었으므로
우리 나라의 조계종은 육조 혜능의
법맥을 이어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산문은 하나의 종파이며,
구산문으로 불리운 이유는 선문 가운데
선법을 널리 알린 아홉개의 선문이 있고, 이 선문을 말할 때
구산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산문은 선법을 크게 떨친 아홉개의 사찰을 말하는 것입니다.
당나라를 유학한 승려들에 의해 전래된 선종은 기존의 기반을 잡고 있던
교종과 갈등을 겪으면서도 한국불교의
사상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불교가 침체되어 말기에 이를 무렵 불교의
새로운 풍조라고 할 수 있는 선이 중국에서와 산문을 열고
자리를 잡기 시작한 것이며,
이 구산선문은 신라 말부터 고려 초의 선종계(禪宗界)를 망라하는
대표적인 개념입니다.
구산문은 구산선문 이라고도 하며, 그 하나 하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가지산문(迦智山門): 도의(道義)의 법손인
체징(804-880)이 보림사를 창건하고 도의의 종풍을 떨쳐
가지산파를 이루었습니다.
도의의 속성은 왕씨이며, 북한부 사람으로 그 법호는 처음
명적(明寂)이었으나 나중에 원적(元寂)이라고 하였습니다.
신라 37대 선덕왕 5년(784)에 당으로 건너가 마조도일(馬祖道一)의 제자
서당지장 에게서 법을 얻고 도의라 호를 고쳤다고 합니다.
헌덕왕 13년(821)에 귀국하여 선법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당시 신라에서는 선을 이해하지 못하고
마설(魔說)이라 비방하며 받아 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도의는 설악산(雪岳山) 진전사(陳田寺)에 칩거하여
그 법을 제자 염거(廉居)에게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염거는 그 법을 다시 체징(體澄)에게 전하였습니다.
체징은 당으로 건너가 떠돌아다니며 고승을 찾았으나,
그의 조사(祖師)인 도의(道義)가 물려 준 것 이외에 더 구할 것이
없음을 깨닫고 문성왕 2년(840)에 돌아왔습니다.
돌아 온 체징은 가지산에 보림사(寶林寺)를 창건하고
도의의종풍을 크게 떨치게 되었습니다.
(2)실상산문(實相山門): 전북 남원의 실상사가 실상산문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홍척(洪陟)이 흥덕왕 원년(826)에 귀국하여 실상사에서
선법을 일으켜 실상산파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홍척은 일찍이 입당하여 도의와 마찬가지로 서당 지장의 문하에서
법을 얻어 돌아왔습니다.
돌아온 홍척은 지리산 실상사에 있으면서 선법을 일으켜 많은
제자와 신도들이 귀의했고, 그 중에서도 흥덕왕과 태자
선강(宣康)이 홍척의 제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지금 실상사에는 홍척의 제자였던 편운(片雲)의 부도와
수철(秀澈, 817-893)의 탑비가 남아 있으며, 편운(片雲)의
부도에는 그가 홍척의 제자라고 되어 있으며 수철의
탑비에는 실상사에서 스승 홍척에게 법을 얻었으나
심원사(深源寺)에서 후진을 양성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홍척은 가지산문의 도의와 같은 스승인 서당지장에게 법을 받았으나
도의(道義)보다 늦게 신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산문(山門)의 터전은 가장 먼저 닦아 구산선문중 제일
먼저 개산한 선맥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3)동리산문(桐裡山門): 혜철(惠哲784-861)이 귀국한 후
문성왕 원년(839)에 태안사에 선지를 펴 동리산파를 이루었습니다.
혜철도 도의, 홍척과 더불어 서당(西堂)에게서 법을 받아
돌아와 선지을 펴는데 힘섰습니다.
(4)봉림산문(鳳林山門): 현욱(玄昱, 787-868)의 제자 진경
심휘(854-895)가 경남 창원에 봉림사를 세워 봉림산파를 이루었습니다.
현욱의 속성은 김씨이며, 일찍이 출가하여 헌덕왕 때 당나라로 가서
마조의 문인 장경(章敬) 회휘(懷暉)에게 배워 법을 얻었다고 합니다.
현욱은 희강왕 2년(837)에 귀국하여 처음에는
지리산 실상사에 안거하다가 혜목산(慧目山) 고달사(高達寺)로 옮겨
그의 법을 펼쳤습니다.
그래서 현욱(玄昱)을 혜목산화상(慧目山和尙)이라고 합니다.
현욱이 크게 선풍을 떨치다 경문왕 8년(808)에 82세의 나이로 입적하자
그의 제자인 진경 심희(眞鏡 審希, 854-923)가
봉림사를 세워 봉림산의 선맥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5)사자산문(獅子山門): 도윤(道允800-868)의 제자
징효절충(831-895)이 헌강왕 때 강원도 영월에
사자산사를 세워 사자산파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도윤은 헌덕왕 17년(825)에 입당하여 남천 보원(南泉 普願)에게서
법을 얻고 돌아와 동악(棟岳)에 머물다가 다시
쌍봉사(雙峯寺)로 자리를 옮겨 종풍을 크게 떨치게 되었고,
그래서 도윤을 쌍봉화상(雙峯和尙)이라고 합니다.
문경왕 8년(868)에 71세로 입적하셨고,
시호(謚號)를 철감(哲鑑)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제자 징효 석중(澄曉 析中, 831-895)이
흥령사(興寧寺)를 세우고 수 백명의
제자와 더불어 사자산파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6)성주산문(聖住山門): 무염(無染, 800-888)의 속성은 김씨이며
태종 무열왕의 8대손입니다.
일찍이 출가하여 처음 설악산 오색석사(五色石寺)에서
법성(法性)에게 득도하였고, 부석사(浮石寺)의 석징(釋澄)에게서
화엄경을 배웠습니다.
821년 당나라로 가서 마조도일의 제자인 마곡보철에게 법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곳에 있는 동안 사람들은 그를 동방대보살이라 존경하였으며,
귀국 후 성주사에서 법을 펴다가 경문왕과 헌강왕의 국사가 되었으며
무설토라는 독특한 선법의 법문으로 2천명의 문하를 이루었다고 전해집니다.
그의 제자 가운데는 심광, 현휘, 대통, 여엄 등이 뛰어 나다고 합니다.
(7)사굴산문: 사굴산문은 문성왕 때 범일(810-889)선사가
강릉의 하구정면에 굴산사에서 개창한 선문입니다.
범일은 태어날 때부터 육계가 정수리에 있었다고 합니다.
(육계란 부처님의 정수리가 솟아 상투모양을 이룬 모습을 말합니다.)
15세에 출가하여 831년 당나라로 가서 염관제안의 법을 전수 받고 847년에
귀국하여 굴산사에서 법을 폈습니다.
이곳에 살면서 40여년 동안 한번도 산문 밖을 나가지 않았다고 하며,
역대 국왕의 존경과 신임을 받았다고 합니다.
범일은 특히 특이한 진귀 조사설을 남겼는데 그것에 의하면
교는 석가모니 부처님에게서 나왔으나, 선법(禪法)은
진귀조사로부터 부처님이 받아서 전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중국이나 일본에는 없는 설(說)이며,
그 사실도 인정되고 있지 않았지만 조선시대 청허 휴정이
이를 인정한 후 조선후기 선논쟁의 근거가 되었고,
여래선보다 조사선을 우위에 두는 조사선의 사상적 근거가 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조선후기 선논쟁을 참고)
그의 제자로는 개청(835-930), 행적(832-916) 등이
유명하고 고려 때까지 번성하여 구산선문 중에서 가장 위세를 떨쳤다고 합니다.
(8)수미산문(須彌山門): 이엄(利嚴, 870-936)의 속성은 김씨이며,
12세 때 가야갑사(迦耶岬寺)에서 출가하였습니다.
그 뒤 진성왕 10년(896)에 입당하여 운거 도응(雲居道膺)의 문하(門下)에서
6년을 수행하고 법인(法印)을 얻었습니다.
그 후 널리 선지식을 찾아 보고 효공왕(孝恭王) 15년(911)에 귀국하였습니다.
고려 태조가 그의 법이 높음을 듣고 궁중으로 맞아 들여 법을 받았으며,
태조 15년에는 수미산(須彌山, 황해도 해주군 귀산면)에
광조사(廣照寺)를 지어 그를 있게 하였다고 합니다.
이로써 그의 휘하에 모이는 많은 학인들을 가르치며
도화(道化)를 떨치다가 태조 19년(936)에 67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는데
그의 시호를 진철대사(眞澈大師)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문하에 처광(處光), 도인(道忍), 정능(貞能),
경숭(慶崇)등 수 백명이 있어 그의 법을 전승하였는데
수미산(須彌山)에서 선의 일파(一派)를 이루었으므로 수미산이라고 합니다.
(9)희양산문(曦陽山門): 경북 문경의 봉암사 도헌(道憲)이
봉암사를 창건하고 법손인 경양(競讓, 878-956)이 봉암사를 중건하여
희양산문을 이루었습니다.
경양(878-956)은 속성이 왕씨이며, 일찍이 출가하여
공주(公州) 남용원 여해(如海)에게 득도하였습니다.
효공왕 4년(900)에 중국으로 가서 곡산의 도연(道緣)에게서
크게 깨달은 뒤 고려 태조 7년(924)에 돌아왔습니다.
강진 백엄사에사 법을 펼 때 경문왕이 글을 보내어 그 덕을 칭찬하고
봉종대사(奉宗大師)라는 호를 주었습니다.
그 뒤 법을 닦기에 좋은 장소를 찾아 나섰다가
두 호랑이의 안내로 도착한 곳이 희양산 이었고,
이 곳이 그의 법사(法師)인 도헌이 창건한 봉암사였습니다.
그는 여기서 많은 제자들과 선의 일파를 이루었으며,
이 산문을 희양산문이라 합니다.
구산선문의 완성은 종래 이엄의 수미산문 개산(태조15년, 932)로 여겨져 왔으나,
도헌을 개산조로 하는 희양산문이 경양대에 이르러 실질적인
산문의 형태를 띠게 된 것으로 보아(태조18, 935) 희양산문의
개산을 마지막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수미산문과 희양산문의 성립에 의하여 비로소
구산선파가 형성되었고 이후 많은 선사들이 배출되어
9산으로 이루어진 선문가풍을 이어 나갔습니다.
구산선문은 신라말에 다 완성 된 것이 아니라 고려 초까지 이어지지만
구산선문이라고 하면 신라의 선문을 말하는 것으로 통용되고 있습니다.
구산선문의 성격은 모두 육조 혜능의 법을 잇는
남종선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산문은 아홉군데로 나뉘어져 있었지만 모두 조계, 혜능을 조(祖)로 삼고
그 선법(禪法)인 조계선(曹溪禪)을
참구(參究)하였으므로, 고려초에 확립된 조계(曹溪)를 조(祖)로 하는
해동(海東)의 선종이라는 것입니다.
선종의 등장은 단순히 중국의 선불교를 옮긴 차원이 아니라
신라 말 고려 초의 사회, 정치적 격변의 시기에 우리 민족과
한국 불교의 새로운 사상으로 자리잡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선종은 고려에 접어들면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되며,
오교양종으로 자리잡아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달마대사(達磨大師)
달마는 중국 남북조시대의 승려로 중국 선종의 시조입니다.
범어로 그의 이름은 Bodhi-Dharma 라 하고 보리달마(菩提達磨)라고
음역하는데 달마는 그 약칭입니다.
남인도 향치국의 왕자로 성장하여 대승불교의 승려가 되었으며,
선에 통달하여 반야다라 존자의 법통을 이은 뒤 벵골만에서 배로 떠나
오랜 항해 끝에 중국의 광동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남경인 금릉에 가서 양무제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 때 달마의 나이가 130세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당시 중국은남북으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양무제는 남쪽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현세적인 일에
더 관심이 많아 달마를 만나자 마자
“내가 절을 세우고 경을 간행하며 승려들을 권장하오.
그러니 그 공덕이 얼마나 되겠오?”하고 질문을 했습니다.
달마는 대답하기를 “무공덕이오” 했습니다.
양무제는 달마의 말과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달마는 북쪽으로 가 소림산에서 9년간 면벽·참석 하였습니다.
달마는 사람의 마음은 본래 청정하다는 이치를 깨달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이 선법을 혜가(慧可)에게 전수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달마는 중국 선종의 시조로 숭앙받기 시작했습니다.
석존이 가섭존자에게 마음과 마음으로 전한 이른 바 삼처전심,
즉 영산회상에서 염화미소하고 다자탑 앞에서 자리를 나누며,
쌍림에서 관 밖으로 발을 내보인데서 시작하여 달마대사가
중국으로 건너와 소림산에서 9년 동안 수행한 후
혜가에게 법을 전한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구산선문..현대불교에서 퍼옴
신라 말 당나라 유학승들에 의해 전래된 선종(禪宗)은 신라말
고려초의 사회·정치적 격변의 시기에 불교의 새로운 사상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 시기에 들어온 선종 사상을 초석으로
아홉개의 산문(山門)이 형성 되니 이것이 바로 구산선문(九山禪門)이다.
처음으로 실상산문(實相山門)이 개설된 828년(신라 법흥왕 3)에서 부터
마지막 수미산문(須彌山門)이 만들어진 932년(고려 태조 15)까지는
실로 104년의 긴세월이 흐른다. 현재 우리 불교의 종가를 이루는
대한불교조계종의 종맥도 바로 이 구산선문에서 부터 비롯 되었다.
본사가 기획한 ‘구산선문 참선기행’은 한국 선불교의
근본 수행처를 찾아 선맥의 체취를 느끼며 재발심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점에서 관심을 모으고 있다.
‘구산선문 참선기행’은 번잡스런 도심의 일상에서 벗어나 천년이 넘는
역사를 지켜온 도량을 찾아 선불교의 향훈을 체험하는 테마 기행이다.
4월부터 찾아갈 오늘의 구산 선문을 지면을 통해 미리 가본다.
수미산문 광조사는 북한지역에 있어 기행에서 제외된다.
■실상산문(실상사)
구산선문중 가장 먼저 개창된 것이 실상산문이다.
개조(開祖) 홍척스님(?∼828)은 중국 서당의 법을 얻어
826년(흥덕왕 6)에 귀국해 산문을 만들고 “정(靜) 하였을 때는
산이 세워지고 움직일 때는 골짜기가 응한다”는 가르침을 전했다.
이는 그가 북종선의 영향을 짙게 받았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또 그의 제자로는 편운과 수철이 있었는데 단의장옹주의
도움을 받았던 것으로 보아 구산선문중
실상선문이 가장 왕실과 밀착 됐었음을 알 수 있다.
평평한 절마당 곳곳에 잘 보전돼 흩어져 있는
삼층석탑(보물 제37호) 2기와 석등(보물 제35호),
창건주의 유골을 모신 증각대사응료탑(보물 제38호)과
탑비(보물 제39호) 등은 실상사의 내력과 함께 고찰의 역사를 웅변해 준다.
단층 기단위의 탑신 전체에 난간·신중(神衆)·
주악천인상(奏樂天人像)들이 정교하게 조작돼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사를 연발케 하는
백장암 삼층석탑(국보 제10호)은
통일 신라 시대의 지혜와 향기를 맛볼 수 있게 해 준다.
인근에는 쌍계사와 칠불암이 있다.
■가지산문(보림사)
도의선사(783∼821)는 859년(헌안왕 3)에 왕의 청으로
보림사에 머무르며 김언경 등의 후원 아래
사원 세력을 확장시켜 가지산문을 형성했다.
이때부터 그는 성(性)과 상(相)이 다르지 않으며 마음이 족하면 뜻이 일어난다
(心足意興)는 화두를 강조했다.
이후 가지산문은 염거·체증·형미·진공 등에 의해 명맥을 유지해 왔다.
전라남도 장흥군에 위치한 보림사에서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각 사천왕상과 긴 세월 속에서
자태와 위용을 한껏 뽐내는 삼층석탑, 석등(국보 제44호)을 만날 수 있다.
또 왼쪽 어깨에 새겨진 8행의 기록을 통해
보림사의 역사를 증명해 주는 커다란 불상인
철제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117호)도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다.
근처에 있는 운주사와 쌍봉사도 가 볼만 하다.
■희양산문(봉암사)
구산선문 중 유일하게 중국에 들어가지 않고 산문을 성립시킨
희양산문의 개창자 지증선사(824∼882).
그는 다른 선문 개산조와는 달리 유학에 밝았고 선승으로서의
특별한 인연을 나타내는 탄생·금기·출가 등 6이(異)와
불사의 필요성을 나타내는 6시(是) 등을 주장했다.
봉암사는 사람들의 출입을 막고 1년내내 오직
참선으로 수행·정진하는 도량이다.
이 사찰의 최대 자랑 거리는 장중한 형태와 정교한 조각이
일품인 지증대사적조탑(보물 제137호)과 탑비(보물 제138호).
인근에 김용사와 대승사가 있다.
■동리산문(태안사)
중국 서당의 법을 받아 개창했던 또 하나의 산문이 바로 동리산문이다.
개조 혜철스님(785∼861)은 839년(신무왕 1) 중국에서 돌아와
처음에는 왕실과 연결해 산문을 이끌고 나갔다.
그의 제자로는 개성 중심의 풍수지리설을 제창한 도선이 있었는데
그의 사상은 왕건이 고려 국가를 건설해
후삼국의 혼란을 수습하는데 큰 몫을 했다고 전해 진다.
이 사찰에서 순례자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것은 맞배지붕
건물인 옛 누각 능파각. 긴 역사에 비해 절을 이루고 있는
건물수가 적어 전체적으로 단촐한 느낌을 준다.
선원이 있는 언덕에 오르면 동리산문을 개창한 적인선사
혜철의 부도탑인 조륜청정탑(보물 제273호)에 이르게 된다.
태안사는 부도 이외에도 1454년(단종 2)에 만든 대바라 한쌍
(보물 제956호)과 1581년(선조 14)에 제작된 명문이 새겨진
대웅전 동종, 해회당 마루에 걸려 있는 직경1m의 금고(金鼓) 등
많은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인근에는 화암사와 천은사가 있다.
■사굴산문(굴산사지)
사굴산문은 범일스님(810∼889)에 의해 개창됐다.
범일은 831년 중국에 들어가 마조의 제자인 염관의
법을 받아 846년(문성왕 8)에 귀국했다.
평상의 마음이 바로 도(道)라 말한 그는
“석가가 보리수 아래에서 깨친 것은 진실한 것이 아니고
그 뒤 진귀대사를 만나 깨친 것이 바로 조사선의 경지다”고 설해
여래선보다 우월한 조사선을 주장했다.
그의 제자로는 행적·개청·신의 등이 있으며
이 산문은 강릉과 오대산 일대에 세력을 미쳤다.
굴산사는 851년(신라 문성왕 13)에 범일 국사가
창건한 사찰로 신라말에서 고려초까지는 매우 유명했던 사찰이다.
전성기때에는 승려 수만도 2백여명이 넘었으며 쌀 씻은 뜨물이
동해에 까지 흐를 정도로 큰 가람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소실돼 세인의 관심 밖에서 사라졌었다.
이후 1936년 강릉지방의 대홍수로 6개의 주춧돌이 노출됐고
이때 부근 주민이 ‘사굴산사’라는 한문 글씨가 새겨진
기와를 발견함으로써 이절이 굴산사였음이 밝혀지게 됐다.
현재 민가가 들어서 있는 절터에는
통일신라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높이 5.4m ‘굴산사지 당간지주’(보물 제86호)가 마주 보고 서 있다.
또 이 절터에는 ‘굴산사지 부도탑’(보물 제85호)과
‘굴산사지 석조 비로자나 삼존불상’이 남아 있다.
인근에는 등명낙가사와 보현사가 있다.
■봉림산문(봉림사지)
봉림산문의 개창자는 현욱선사(787∼868)이다.
현욱은 824년 중국에 들어가 마조의 제자인 장경의 법을 받아
837년에 귀국한 뒤 봉림산문을 만들었다.
그의 제자 심희는 김해지방의 가야계 김율희와 연결해 봉림사를 열었고
이어 918년에는 왕건의 권유로 고려 왕실에 나가기도 했다.
이어 심희의 제자 찬유는 “동일한 진성(眞性)이 일심(一心)이며 일심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 했고 천태사상을 받아 들이기도 했다.
현재 봉림사 절터에는 남아 있는 문화재가 거의 없다.
봉건사지에는 본래 보월능공탑(보물 제362호)과
탑비(보물 제363호) 그리고 3층석탑(지방유형문화재 제26호)이 있었는데
탑과 탑비는 일제시대때 경복궁으로 이건됐고
석탑은 1960년 사지 3㎞ 밑에 있는 상북초등학교 교정으로 옮겨졌다.
인근에는 성주사와 장위암이 있다.
■사자산문(법흥사)
사자산문의 개창조인 도윤스님(798∼868)은 825년(헌덕왕 17)
중국에 들어가 마조의 법제자인 남전의 법을 받아 귀국했다.
먼저 화순 쌍봉사(雙峰寺)에서 산문을 열었지만 번성하지 못했다.
이후 그의 제자 징효가 영월 흥녕사로 옮겨오면서 부터
가장 번성한 문파가 되었다.
법흥사는 신라 선덕여왕때인 7세기 중엽에 자장 율사가
문수 보살 진신을 친견하기 위해 강원도 세 곳을 돌며
사리를 봉안하고 기도를 하다가 맨 마지막에 이곳에 들러
적멸보궁을 지었다는 성스러운 곳.
사자산문이 문을 닫은 이후 명맥만 유지해 오다가 1902년 비구니
대원각스님이 중건을 하면서 흥녕사에서 법흥사로 절이름을 바꾸었다.
옛날 흥녕사 시절에는 구산선문으로서 이름을 떨치며 전국의
도속(道俗)들이 구름처럼 몰려왔었다.
하지만 오늘의 법흥사는 적멸 보궁 도량으로서 수많은 불자들이
바치는 ‘나무석가모니불’ 정근 소리가 사시사철 그칠날 없이
도량에 메아리 친다. 월정사, 구룡사, 정암사 등이 가깝다.
■성주산문(성주사지)
성주산문은 무염국사(801∼888)에 의해 개창됐다.
무염국사는 821년(헌덕왕 13) 중국으로 들어가 마조의 제자인
마곡의 법을 받아 845년(문성왕 7)에 귀국,
남포지역의 호족인 김흔과 결합해 성주산문을 열었다.
이 산문은 나말 여초에 가장 번창했으며 무염국사는
여엄·대통·심광·자인·영원 등 많은 제자들을 두었다.
특히 이 산문은 선종의 입장에서 화엄을 융합하려는 사상 경향을 가졌다.
성주사는 백제때의 오합사(烏合寺)가 통일신라때에 개칭되면서 크게
중창된 사찰이다.
<숭암산 성주사 사적>에서는 성주사의 규모를 불전 80칸, 행랑 800여칸,
수각(水閣) 7칸등 성주사의 규모를 거의 1천칸으로 적고 있다.
하지만 임진왜란때 소실돼 그 장엄하던 절이 송두리째 자취를 감췄다.
성주사터에는 오층석탑, 금당터의 석조 연꽃대좌,
세 기의 삼층석탑 등 돌로된 것들만이 그 형체를 간직하고 있다.
특히 신라시대 부도비중 가장 큰 것으로 성주산문의 개창조사인
무염국사의 부도비 ‘대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국보 제8호)는
거의 완전한 형태를 유지하며 옛 명성을 자랑하고 서 있다.
인근에는 무량사와 장곡사 등이 있다.
■수미산문(광조사지)
구산선문 중 가장 늦게 성립된 수미산문의 개창자는 이엄스님(870∼936)이다.
그는 896년 중국에 들어가 운거의 법을 받아 911년(효공왕15)에
귀국해 산문을 열었다.
이엄의 제자로는 황보 제공과 왕유·이척량 등 전현직 고관이 있었으며
이들의 사상 경향은 대체로 왕정을 보익하는 성격을 띠었다.
광조사는 진철대사 이엄을 아끼던 태조에 의해 932년에 창건됐다.
그때 이엄의 나이가 63세에 이르렀으나 선풍을 사모해 모여든
구도자(求道者)들의 수가 꾸준히 늘어나며 선풍을 진작시켜 나갔다.
이러한 가운데 수미산문의 전통이 확립 됐으며
이 전통은 고려 왕정을 비치는 등대로 발전했다.
산문의 중심 도량인 광조사는 오래전에 소실됐고 이엄
즉 진철대사의 보월승공비(寶月乘空碑)와 오층석탑이 남아 있는 것으로
<황해도지>에 기록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