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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골3:12~17 제목 : "새 사람 2." 설교 : 이하빈목사 날짜 : 2010년 8월 15일 9시, 11시
"새 사람 2."
성자 어거스틴이 천국에 갔습니다. 천국 입구에서 천사가 “너는 누구냐?”라고 물었습니다. “내 이름은 어거스틴이며,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라고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그때 천사가 다가와 어거스틴을 막아서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어거스틴이긴 한데, 그리스도인은 아니구나. 네 머릿속에는 온통 키케로의 철학으로 가득 차 있어. 너를 그리스도인이라고 인정할 수 없다!” 천사는 호통을 치면서 다시 내려가라고 했습니다. 어거스틴이 놀라서 눈을 떠 보니 꿈이었습니다. 어거스틴은 스스로도 신앙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믿었고, 주위 사람들도 그의 신앙을 높이 존경했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인가?’라는 새로운 도전 앞에서 크게 회개하는 기회가 되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여러분~ 만약 오늘 내가 천국에 간다면, 그리고 천국 문 앞에서 “너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았느냐?”라고 묻는다면; 우리는 어떠할까요? 우리 마음과 머릿속에는 온통 주님만으로 가득 찬 삶을 살고 있습니까? 지난 주일에 골로새서 3장을 말씀드리면서, ‘그리스도인의 거듭남의 비밀’ 1단계는 ‘내려놓음’이라고 했습니다. ‘땅의 것, 옛 것, 아래에 속한 것, 세상적인 것들’에 대해 ‘반응하지 않는 신앙, 죽어버린 감각’이었습니다. 땅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우리 안에서 죽여야 하는 땅의 지체는 무엇이었습니까? ‘온갖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 그리고 악의와 비방과 부끄러운 말과 거짓들’이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택하셔서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는 땅의 것들을 내려놓고 ‘위의 것들을 생각하고 찾으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가 마땅히 생각하고 찾고 구해야 할 ‘위의 것들’은 무엇입니까? 바울은 그것에 대해 먼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이 땅의 사람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만 있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12절에서 구체적으로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 그리고 용서’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 그리고 용서’의 삶을 보인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완성된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고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도 이와 비슷한 말씀을 합니다. ‘우리가 방언을 하고 천사의 말을 한다 할지라도, 예언을 하고 하늘의 비밀과 지식에 박식하다 할지라도,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다 할지라도,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 할지라도; 그 안에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 아무 소용이 없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말하는 사랑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이렇게 복잡합니까? 긍휼을 베푸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자비와 겸손과 온유도 만만치 않습니다. 인내도 어렵고, 용서는 더더욱 어렵습니다.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을 행했다 할지라도, 사랑이 빠진 것이라면 ‘아직도 부족하다.’고 합니다. ‘방언을 받고 예언의 은사’를 받는 것도 내 맘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 ‘남을 위해서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구제와 섬김’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쉽지 않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사랑이 없으면 ‘꽝!’이라고 합니다. ‘속절없이 울리는 꽹과리’일 뿐입니다. 여러분~ 도대체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어떤 것입니까? 이런 사랑을 이루면 우리가 온전케 되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온갖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 그리고 악의와 비방과 부끄러운 말과 거짓들을 버리는 일은 예수 안 믿어도 할 수 있지 않습니까?”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 그리고 용서도 예수 안 믿어도 할 수 있지 않습니까?”라고 말입니다. 맞습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도 어느 정도 가능합니다. 전혀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사랑’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나아가서 15절에서 말하는 ‘평강’도 필요하고, ‘감사’도 필요합니다. 즉, 우리가 ‘위의 것을 찾는 삶’의 완성은 하나님 안에서 ‘사랑과 평강과 감사’를 통해 이뤄진다는 논리입니다. 이제부터 이 문제를 여러분과 함께 추적해 보겠습니다. 질문 하나 더 드리고 갑니다. “우리가 왜 위의 것을 찾아야 합니까? 우리가 왜 위의 것을 생각해야 합니까?” 이 땅에서의 삶은 말 그대로 전쟁입니다. 눈 뜨고도 코를 베어가는 세상입니다. 정신 차리지 않으면 자기 밥그릇도 빼앗기는 세상입니다. 온 신경을 이 세상에 집중해도 살까 말까인데; 이 세상 것에 대해서는 죽어 버리고, 도리어 위의 것을 찾고 생각하고 집중하라고 합니다. 우리가 왜 그래야 하느냐는 질문입니다. 왜 그래야 합니까? 이 질문은 이렇게 바꿔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왜 그렇게 위엣 것을 찾는 일에 날마다 실패하고 있습니까? 왜 우리는 아직도 이 땅의 것을 내려놓지 못하고 생각하고, 마음에 담고, 집중하며 살고 있습니까?”라고 말입니다. 여기에 대한 분명한 대답이 내 안에 있어야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을 손에서 내려놓고, 위의 것을 바라보고, 위의 것을 생각하고, 위의 것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 그래야 합니까? 우리의 ‘운명, 숙명’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우리는 장차 이 땅의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위의 세상으로 갈 운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장차 부활할 운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장차 썩지 아니할 운명이고, 천국에 들어가서 영원토록 살아갈 운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했습니다! 이 땅에서의 우리는 나그네지 주인이 아닙니다. 주인노릇은 하늘에 가서 해야 할 운명이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수요예배 시간을 통해 자그마치 9회에 걸쳐 고린도전서 15장을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고전 15장의 말씀이 오늘 우리가 왜 위의 세상을 생각해야 하고, 위의 세상을 찾고 구해야 할지에 대해 분명한 대답을 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완성케 하는 것이 ‘사랑이고 평강이고 감사’인지에 대한 힌트를 주고 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우리가 장차 부활할 것이다!’라고 가르치자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떤 몸으로 온다는 말입니까?” 헬라의 이원론 사상에 심취해있던 그들로써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몸의 부활’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의 몸을 ‘단순히 지고한 영혼을 가두고 있는 무덤’ 정도의 가치로밖에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영혼은 존귀한 것인 반면에, 육체는 썩을 것이고, 천한 것이었습니다. 몸은 쾌락의 도구였습니다. 죄를 짓는 도구일 뿐,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존귀하고 존귀한 영혼이 다시 부활을 하면서 ‘그 천하디 천한 몸을 다시 입고 부활한다.’고 하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활은 영생을 의미하고, 천국의 구원을 의미하는 것인데; 썩을 육신을 다시 입고 부활한다고 하니, 쾌락의 도구요 죄의 도구인 이 천한 육신을 입고 다시 부활을 한다고 하니 당연히 받아들일 수 없지요. 여러분~ 부활할 때 우리 몸은 어떤 몸으로 부활하겠습니까? 물론 영혼은 본래의 영혼으로 부활합니다만, 몸은 어떤 몸이겠습니까? 여러분~ 부활을 믿습니까? 분명히 대답해 보십시오. 주님 재림을 믿으십니까? 천국과 영생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그때의 우리 몸은 어떤 몸이겠느냐는 질문입니다. 그 때의 일에 대한 분명한 확신을 가지시라는 말씀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좀 길지만 우리 함께 한절씩 교독하도록 하겠습니다. 고전15:42~49절입니다.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사람이 아니요 육의 사람이요, 그 다음에 신령한 사람이니라.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무릇 흙에 속한 자들은 저 흙에 속한 자와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들은 저 하늘에 속한 이와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 심장이 두근거리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정리해보겠습니다. 시간이 없어 읽지 못한 고전15:35~44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밭에 뿌리는 것은 씨입니다. 그런데 그 씨에서 나오는 열매는 씨와 비교해서 전혀 그 모양이 다릅니다. 처음 보는 호박씨를 보면서, 호박잎과 그 열매를 상상할 수 있습니까? 처음 보는 겨자씨를 보면서, 겨자나무를 추측할 수 있습니까? 절대로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아시는 부분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우리의 썩을 몸을 보면서, 썩지 않을 영원한 몸을 상상하거나 추측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분명히 그 몸도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처음 창조 때에, 하나님께서 각종 짐승의 육체를 각각 다르게 주셨듯이 말입니다. 부활은 그런 것이라고 합니다. 썩어질 이런 몸으로 부활하는 것이 아닙니다. 썩지 않을 몸으로 부활하는데; 지금으로서는 구체적으로 모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상상과 추측을 뛰어넘는 몸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분명한 것은, ‘썩지 않을 몸’으로 부활합니다. 이렇게 아프고 늙고 병들고 시드는 몸이 아닙니다!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합니다! 이렇게 부끄러운 몸이 아닙니다. 육의 몸이 아니라 ‘신령한 몸, 영의 몸’으로 부활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는다는 약속입니다. 누구의 형상입니까?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처음 창조하시면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죄를 범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했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후손들에게 줄 수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5장 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더 이상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었습니다. 아담이 가진 죄의 형상과 모양이었습니다. 그 형상과 모양이 오늘 우리에게까지 이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부활 때는 달라진다는 말씀입니다. 더 이상 아담이 가진 죄의 형상과 모양을 입지 않습니다. 대신에 우리는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 아담이 처음 가졌던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할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좀 더 말씀을 드리면, 우리는 더 이상 썩을 혈과 육으로 유업을 받는 것이 아니라, 썩지 않을 몸으로 유업을 받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있을 때, 이미 죽은 자는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까지 죽지 않고 살아있는 자들은, 즉 살아서 주님의 재림을 맞이하는 자들은 변화되어 하늘로 올려갑니다. 죽은 자가 살아날 때, ‘썩었던 이 몸’으로 부활하겠습니까? 아닙니다. 이때는 더 이상 썩지 않을 몸으로 부활한다고 했습니다. 불구자로 부활하는 것이 아닙니다. 화장해서 몸이 없어졌다고 해서, 몸 없는 부활이 아닙니다. 새로운 몸으로, 그러나 이번에는 썩지 않는 몸으로 부활한다고 분명히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재림 때까지 살아있는 자들도 그렇게 똑 같이 변화됩니다. 더 이상 죄와 사망이 힘을 쓰지 못합니다. 더 이상 율법이 힘을 쓰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죄 된 몸이 아니라, 썩을 몸이 아니라; 썩지 않을 하늘의 몸으로 부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분명히 믿으셔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반드시 그럴 날이 올 것입니다! 제가 ‘위의 것을 찾는 삶’을 설교하면서; 왜 썩지 않을 영광의 부활과 하나님의 형상으로의 변화에 대해 입에 거품을 물고 말씀을 드렸습니까? 분명히 잡고 있어야 ‘위의 것을 찾는 삶’에 실패하거나 낙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 그리고 용서’의 삶을 살다가 실패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갈6:9 -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라고 했습니다. 그 위에 사랑과 평강과 감사를 더하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세상의 이기적인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자기를 위한 사랑을 할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온전케 하는 사랑은, ‘내어줌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평강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세상의 평강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평강’이라고 했습니다(빌4:6~7절 참조). 그래서 ‘하늘의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로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위의 것을 찾고 생각하는 삶은, 하나님 없이도 가능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 대한 신앙으로 온전케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정리하면, 우리가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 그리고 용서라는 ‘위의 것’을 찾고 생각하는 삶만으로 부족합니다. 그 위에 ‘하나님의 내어줌의 사랑, 그리스도의 평강, 하나님께 대한 찬양과 감사’가 더해져야 온전케 됩니다. 즉, 내 안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신앙, 미래를 바라보는 신앙, 부활과 영광과 천국에 대한 신앙 때문에 오늘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 그리고 용서’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마지막으로 항상 마음에 담아두고 제 인생에 채찍으로 쓰고 싶은 글을 읽고 마치겠습니다. 내가 배고플 때 당신은 인도주의 클럽을 만들어 내 배고픔을 주제로 토론을 벌였습니다. 내가 헐벗었을 때 당신은 마음속으로 내 벗은 모습의 도덕성에 대해 논쟁을 벌였습니다. 내가 병들었을 때 당신은 무릎을 꿇고 당신이 건강한 것을 하나님께 감사 드렸습니다. 내가 집 없이 떠돌아다닐 때 당신은 내게 하나님의 사랑의 은신처에 관한 설교를 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나를 집으로 데려다 주지는 않았습니다. 내가 외로울 때 당신은 나를 위해 기도하려고 나를 홀로 있게 했습니다. 당신은 너무나 거룩하고 하나님과 너무나 가까이 있지만, 나는 여전히 춥고 배고프고 외롭고 고통스럽습니다. 여러분~ 믿으십시오. 분명히 확신하십시오. 우리는 장차 썩지 않을 몸으로 부활할 운명입니다. 이렇게 약하고 늙고 병든 몸이 아닙니다. 시기하고 질투하고 자랑하는 헛된 영혼이 아닙니다. 온전한 몸으로, 영광의 몸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될 운명인 것입니다! 진정으로 우리의 운명을 생각해서라도, ‘위의 것’을 찾는 삶에 성공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