不忘女(5)
- 여강 최재효
첫눈이 내리는 날, 박달은 아침 일찍 주막을 나서기로 마음먹었다.
주모는 이틀 전부터 내부 사정으로 오늘 하루 손님을 받지 않는다고
미리 안내문을 써서 붙였다. 새벽처럼 일어난 주모는 정성을 다하여
박달이에게 아침을 차려주고 깨끗하게 다린 바지와 저고리, 도포
그리고 버선을 들고 박달의 방으로 들었다.
“서방님, 마음 편히 잡숫고 과거를 보셔야 해요. 너무 조급해 하시
거나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이제, 그 동안 서방님께서 갈고 닦으신
기량을 마음껏 발휘할 때가 오신 거예요. 아셨죠? 절대 조급한 마음먹지
마세요.”
“고맙소. 내가 당신 덕분에 호강을 하는 구려.”
“아닙니다. 저도 서방님 덕분에 새롭게 봄을 맞은 걸요.”
“고마워요.”
박달은 비록 뭍 남성들에게 술과 밥을 팔고 있는 여자이지만 자신에게
정성을 다하여 뒷바라지 하고 있는 주모가 너무 고마웠다.
“그럼, 내 다녀오리다.”
“아니에요. 서방님, 과거장인 성균관까지 서방님을 모실게요.”
“아니오. 당신은, 그냥 집에 있어요. 나 혼자도 충분히 찾아 갈 수
있어요.”
“서방님, 과거장까지만 갈 테니 함께 갈수 있게 허락해 주세요.”
주모는 이미 꽃단장을 마치고 박달을 따라 가려고 만반의 준비를 마친
듯 했다. 오지 못하게 하여도 뒤를 따라 올 것이 분명하였다. 박달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서방니임-.”
“그럼, 꼭 밖에서 기다려야 하오.”
“그럼요. 아녀자가 감히 과거장엘 어떻게 들어가요?”
“......”
“오늘 저녁, 서방님에게 최고의 밤을 만들어 드릴게요. 과거만 잘
보세요. 아셨죠? 호호호호......”
“......”
‘아아, 금봉이가 이런 나의 모습을 보면 얼마나 낙담할까? 이게
아닌데. 금봉이, 나를 용서하구려. 그러나 현실은 냉혹하다오.
내 그대와 약속했듯이. 과거에 합격하면 꼭 그대를 찾으리다. 꼭......’
눈이 내리다 말고 그쳤다. 아직 날이 밝기 전이라 거리에는 사람
들의 모습이 뜸했다. 마포에서 걸어 과거를 보는 성균관(成均館)
명륜당까지 가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마포에서 공덕동을 거처
애오개, 보신각 그리고 운종가를 관통하여 창경궁을 끼고 성균관
까지는 꽤 시간이 필요했다. 주모는 미리 단골손님 중 마차(馬車)가
있는 사람에게 부탁하여 새벽에 주막으로 오라고 하였다.
“자 서방님, 어서 오르세요. 성균관까지 가려면 서둘러야 하옵니다.”
“아니, 언제 마차를 다 준비하였소?”
“서방님은 다른 데 신경 쓰지 마시고 공부하신 내용만 잊지 않도록
하세요.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
“고, 고맙소.”
박달의 뛰어난 외모가 단단히 한몫 하는 순간이었다.
“이랴.”
박달과 주모가 마차에 타고 눈길을 헤치고 한양의 도심을 가로질러
달렸다.
“천지신명님, 오늘 우리 박달 서방님께서 과거를 보시는 날입
니다. 우리 박달서방님께서 꼭 장원급제 하도록 도우소서. 비나이다.
비나이다. 이 소녀, 이렇게 간절히 비옵나이다. 우리 박달 서방님을
굽어 살펴주소서.”
‘어이구 청승이다. 청승......’
새벽에 일어나 천지신명께 지성을 드리는 딸의 모습에 금봉이 어머니는
시큰둥한 얼굴을 하며 중얼거렸다.
‘그렇지, 오늘이 박달도령이 과거를 본다는 날이지. 꼭 합격해야
하는데. 그런데 왜 이렇게 몸이 찌뿌둥한가?’
금봉이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박달의 과거합격에 희망을 걸며 곧 박달이
어사화를 머리에 꽂고 벌말로 찾아오는 꿈에 젖어 있었다.
“천지신명님, 부처님, 조상신님, 우리 박달 서방님께서 장원급제
하시도록 도아 주세요. 이번에 꼭 장원 급제하셔야 합니다. 아니면,
소녀 너무 힘들 것 같아요. 제발, 우리 박달서방님께서 어사화를 꽂고
저희 집에 오는 모습을 꼭 보고 싶답니다. 제발 이 소녀의 소원을
들어 주세요. 비나이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며칠 전부터 몸이 무겁고 찌뿌둥한 느낌을 받으면서도 금봉이는 그것이
무슨 징조인지 알 지 못했다.
‘아아, 이상하다. 여태껏 이런 일이 없었는데 왜 몸이 이렇게 무겁지?
이상하네. 누구한테 물어 볼 수도 없고......‘
금봉이는 몸살이나 감기 기운이 있어 잠시 몸이 무거우려니 가볍게 생각
하였다. 간밤부터 시랑산에 내리기 시작한 눈이 벌말을 온통 하얗게
만들어 놓았다. 동네 사람들은 자신의 집과 이웃집간의 소통할 수 있는
길만 겨우 내놓고 하루 종일 집에만 있어야 했다.
“아, 어쩌나? 오늘은 이등령을 올라갈 수 없겠네.”
이삼일에 한 번씩 금봉이는 혼자서 이등령에 올라 맥없이 북녘 하늘을
바라보곤 하였다. 혼자서 이등령까지 올라가는 일도 쉽지 않았다.
아침 식사를 끝내고 출발하면 점심때가 되어야 이등령에 도착 할 수
있었다. 벌말 사람들은 그런 금봉이를 두고 열녀가 나왔다고 쑤군거리
면서 별의별 이상한 소문을 만들어 냈다.
“얘야, 오늘은 이등령에 가지 말거라. 눈이 내려 길도 미끄럽고 위험
하니 그냥 집에 있으렴.”
“......”
금봉이 아버지는 딸이 눈보라 속을 뚫고 이등령에 오를까 걱정이 되었
다. 그러나 금봉이에게는 웬만한 눈은 문제가 되지 못했다. 오늘도 금봉
이는 아침 식사를 마치면 이등령에 오를 참이었다.
“그래, 금봉아 오늘은 집에 가만히 있어야 한다. 이렇게 길이 미끄
럽고 날씨도 추운데 오늘은 집에 꼭 붙어 있거라.”
“네에-.”
금봉이는 부모의 걱정에 간신히 대답하였다. 아침을 들고 금봉이 아버
지와 어머니는 인근 동네에서 벌어지는 김초시 회갑 잔치에 참석하기 위
하여 집을 나섰다. 집을 나서면서도 금봉이 아버지는 금봉이에게 다시
한 번 금봉이에게 밖에 나가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부모가 집을 나서
자마자 금봉이는 옷을 단단히 껴입고 이등령으로 향했다.
‘집에만 있을 수 없어. 서방님과 마지막 이별했던 이등령에도 올라가
봐야 되고, 서낭당에도 가야해. 어서 가서 서낭신에게 서방님의 과거에
장원급제를 해달라고 빌어야해.’
집에 나오자 온통 백색의 세상이 펼쳐졌다.
“아아, 너무 눈이 부시다. 이렇게 서설(瑞雪)이 내린 날 우리 서방
님은 꼭 장원급제하시겠지. 천지신명님, 고맙습니다. 소녀의 소원을
들어주셨나 봅니다. 이런 날 소녀는 집안에만 가만히 앉아 있기가 뭐해
소원을 빌러 가옵니다.”
금봉이는 눈보라를 헤치고 이등령 가는 길에 있는 성황당에 들려 간절
하게 박달이의 장원급제를 빌고 빌었다. 산등성이에서 불어오는 눈보
라가 금봉이의 치맛자락을 휘감았다.
운종가에 들어서니 눈을 뒤집어 쓴 보신각(普信閣)이 박달 일행을 맞
았다. 이른 아침인데 불구하고 육의전은 사람들로 붐볐다. '명주전골',
'조개전골', '갓전골', '바리전골', '소금전골', '종이전골','벙거짓골'
등 한양의 유명 상가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었는데 상인들이 모두
나와 자기의 가게 앞 도로에 쌓인 눈을 치우느라 난리법석을 떨었다.
“이보우, 좀 더 빨리 갈 수 없겠수?”
“왜유? 늦었어유?”
“오시(午時)에 과거가 시작되기 때문에 사시(巳時)까지는 성균관의 명륜당
까지 들어가야해요.”
“알았수. 주모도 성질이 꽤나 급하시우.”
주모가 마부에게 채근하자 마부는 주모와 박달의 얼굴을 한번 힐끔 쳐다
보더니 채찍을 허공으로 높이 들더니 말의 엉덩이를 향해 내리쳤다.
이랴 -
이히히힝 -
말이 길게 울음소리를 내더니 속도를 내기 시작하였다. 창경궁을 끼고
마차가 경쾌하게 달렸다. 아직 잠이 덜 깬 상태의 창경궁 문을 지키는
문지기 들이 박달이 탄 마차를 바라보았다. 붉은색과 푸른색의 철릭을 입고
긴 칼을 차고 대궐 문 앞에서 왔다 갔다 하는 멋진 수문장의 모습을 박달은
그만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서설이 내려 온통 지붕이 하얗게 변해버린 창경궁이 바로 눈앞에 펼쳐
지자 박달은 만감이 교차했다. 조선의 권력을 상징하는 대궐이었다.
박달이 그리도 보고 싶어 하는 대궐이 눈앞에 있었다. 높고 길게 이어진
대궐의 담장이 감히 평민들에게는 출입이 허락될 것 같지 않았다.
궁궐 내에 이름을 알 수 없는 전각의 높은 용마루가 근엄하면서도
거만하게 보였고, 대당사부(大唐師傅) 삼장법사 하늘의 망나니 손행자(孫行者)
그리고 저팔계(豬八戒) 등 어처구니들이 추위에 덜덜 떨면서 먼 하늘을 올려다
보는 모습이 박달에게는 신비하게 느껴졌다.
‘아아, 과연 대궐은 굉장하구나. 내가 과거에 합격하면 대궐을 들락
거리며 나랏일을 볼 수 있을 테지. 그러기 위해서 오늘 과거에 꼭
합격해야 해. 합격하여 나중에 벼슬을 하게 되면 저 대궐에서 나라님,
왕자, 공주들 그리고 무수한 궁녀들을 볼 수 있겠지.’
박달은 스쳐 지나가는 궁궐의 모습을 보면서 즐거운 상상의 나래를
펴고 있었다.
이랴 -
마부의 채찍이 다시 한 번 허공에 마찰음을 내자 말은 속도를 더 냈다.
창경궁의 높은 담장을 끼고 어느 정도 달려가니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서 걸어가는 모습이 박달이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들은 모습은
한결 같이 추워 보이면서 무언가 쫓기는 듯 한 인상을 풍겼다.
박달이 그들을 가만히 살펴보니 괴나리봇짐을 메고 왼쪽 아니면 오른
쪽에 서책을 끼고 걸어가는 모습이 영락없이 과거를 보기 위하여 전국
에서 올라온 서생(書生)들이 틀림없어 보였다.
대부분의 과거를 보러가는 사람들은 혼자였다. 그러나 장옷을 뒤집어
쓴 여인과 다정하게 걸어가는 사내들도 있었다. 여인들의 옷차림으로
보아 부인이나 어머니들 같았다. 또 어떤 어린 유생(儒生)은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아버지로 보이는 사람과 함께 손을 잡고 걷는 모습도
보였다.
조금 더 가자 마차가 더 이상 비집고 들어 갈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인파가 길게 줄지어 서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 옆에는 과거를 잘
보라고 격려하기 위하여 친구로 보이는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며
수험생에게 용기를 북돋워 주는 것 같았다.
박달과 주모는 마차에서 내려 걷기로 하였다. 과거장에 남녀가 다정
하게 나타나자 많은 따가운 시선들이 두 사람의 등에 꽂히면서 이죽
거리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서방님, 저는 여기서 기다려야 할 것 같아요. 저기 길게 늘어서
있는 줄에 서 계세요. 저 줄이 아마도 과거를 보러 온 분들 같네요.”
“고마워요. 그대 덕분에 과거장까지는 잘 왔소만 내 실력으로 과연
좋은 결과가 있어야 할 텐데......”
“서방님,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해요.
서방님은 좋은 결과를 얻으실 수 있을 거예요."
"자자, 과거보러 온 사람들은 줄을 서시오. 그리고 함께 온 가족
이나 지인(知人)들은 열 발짝 이상 뒤로 물러서시오.“
과거를 보기 위하여 온 시험생과 함께 온 사람들이 뒤엉켜 있자 관리가
나타나서 주의를 주며 자리를 정리하느라 고래 고래 소리를 지르며
뛰어 다녔다.
“줄서서 기다리는 사람들은 호패를 꺼내 준비하시고, 서책과 지필묵
이외의 다른 물건은 반입이 절대로 금지되오니 이점 명심하시오.”
한 관리가 이리 저리 다니면서 과거를 보러 온 사람들에게 소리치며
뛰어 다녔다.
“서방님, 부디, 부디 과거에 합격하시어 박씨 가문을 빛내세요. 저는
여기서 서방님이 과거를 다 보고 나오실 때까지 기다리고 있을게요.”
젊은 주모는 박달의 손을 꼭 잡고 박달이에게 용기를 불어 넣어주고
있었다.
“아니오, 날씨도 쌀쌀하데 그만 돌아가요. 나는 대충 길을 아니 과거가
끝나는 대로 곧장 주막으로 달려가겠소.”
“아닙니다. 차가운 데서 과거를 보시는 서방님도 계신데요. 이까짓 서있는
게 무에 그리 힘들다고요?”
“서방님, 너무 염려 마셔요. 서방님은 밤낮으로 공맹(孔孟)을 만나고
성현(聖賢)들을 벗으로 두시다 시피 하셨으니 그리 걱정하실 필요가 없을거
에요.”
“저 많은 경쟁자들을 보니 가슴이 답답하면서 하늘이 노랗게 보이는
구려.”
“원, 서방님도. 이번 과거에 서방님은 따 놓은 당상이에요. 그리도
열심히 공부를 하셨는데요? 아무려면 하늘이 모른 체 하시겠어요?”
‘하늘이 과연 나를 도울까? 나 처럼 지조 없는 사내를 과연 하늘이
도우실까?’
박달은 옆에 주모가 있었지만 밤낮으로 자신의 장원급제를 위하여 지성
을 드리고 있을 금봉이를 생각했다.
‘이러다, 이러다 나는 하늘의 미움을 받을 거야.’
박달이 혼자 중얼거리자 주모는 불안해하는 박달의 손을 꼭 잡아주며
귓속말로 속삭였다.
“서방님, 오늘 저녁에는 제가 서방님에게 지상 최고의 잔치를 열어
드릴게요. 과거만 잘 보세요.”
“고맙소.”
“기대하셔요.”
“......”
주모가 박달이의 옆구리를 꼬집으면서 눈웃음을 살살 쳐댔다.
“그런데 그 멋진 행사가 뭔지 알 수 있소?”
“아니 되어요. 그럼, 김빠진 잔치가 될 수 있다고요.
‘김빠진 잔치? 헐, 그 멋진 행사가 무엇일까?’
박달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좀처럼 감을 잡을 수 수 없었다.
“서방님, 무조건 과거만 잘 보세요. 아니, 그냥 보시라고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답안지를 잘 작성하셔요.”
“최선을 다하리다.”
“서방님, 힘내세요.
박달은 주모를 남겨 두고 성균관 안으로 들어섰다. 다행히 눈이 그치고
햇살이 눈부셨다. 성균관 명륜당 앞뜰에는 전국에서 올라온 유생(儒生)
들로 가득 했다.
눈을 깨끗이 치워져있고 한 사람이 앉아서 과거를 볼 수 있는 멍석
같은 것이 깔려 있는데 앞뒤 좌우로 시험의 부정을 방지하기 위하여 어른
키 한배 반 정도의 간격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위에 지필묵(紙筆墨)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과거는 정확히 오시(午時)에 시작하여 미시(未時)가 시작되기 전에
마쳐야 했다. 과거장 앞에는 큰 북이 마련되어 있고 예조(禮曹)나온 수십
명의 관리들이 부지런히 이리 저리 바삐 움직였다. 박달은 시험 감독을
담당하는 관리들로부터 가운데 앉으라는 지시를 받았다. 박달의 전후
좌우로 잔득 긴장한 응시자들이 앉아서 시제(詩題)가 빨리 내걸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북이 울리더니 시제가 내걸렸다.
[ 今人不見古時月 ]
지금의 사람들은 옛 달을 보지 못한다
“자, 응시생들은 시제를 보고 각자 대책(對策),표(表),전(箋),잠(箴),
송(頌),제(制),조(詔),논(論),부(賦),명(銘) 중 1편(篇)을 저술하여
제한 된 시간 내에 제출토록 하시오. 감독관이 중간 중간 시간을 알려
주겠소. 또한 부정행위를 하다 적발될 시에는 바로 퇴장조치 시킬 것
이며 이후 과거에 응시할 수 없음을 고지하는 바이오. 자, 그럼 지금
부터 시작하시오.”
둥 -, 둥 -
드디어 과거가 시작되었다. 감독하는 관리인 시관(試官)들이 이리 저리 응시생들
사이를 누비며 시제를 들고 다니며 큰소리로 외쳤다. 응시생들이 두 눈을 크게
뜨고 시제를 적느라 잠시 웅성거림이 있었으니 이내 잠잠하였다. 시제를 본 어떤
응시생들은 한참동안 멍하니 앉아 있기도 하고, 어떤 응시생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무엇인가 감을 잡았다는 표정을 짓기도 하였지만 대부분은 한숨만 쉬고
있었다. 모두들 어떻게 답안지를 작성할까 고민하는 모습이 역력해 보였다.
박달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묘책이 생각나지 않았다. 예전에 출제
되었던 예상문제를 풀어보았지만 지금과 같은 아리송한 시제는 처음이
었다. 여기저기서 탄식소리가 터져 나왔다. 일찌감치 과거를 포기하고
나가는 응시생도 있었고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남들은 어떻게 답안지를
작성하는지 궁금해 하는 응시생도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감을 잡지
못한 박달은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것 같았다.
‘아아, 도대체 저 시제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천지신명
님이시어, 도와주소서.’
박달은 두 눈을 꼭 감고 속으로 기도를 올렸으나 뚜렷한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과장(科場) 맨 뒤에서 부정행위를 하다 적발된 응시생 하나가
관리들에 의해 강제로 퇴장 당할 위기에 처하자 한번만 봐달라고 사정
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그 유생은 곧 강제로 과장 밖으로 쫓겨나고
말았다.
‘고시월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고시월, 고시월......’
박달은 머리를 움켜쥐고 생각에 생각을 해보았지만 뚜렷한 감을 잡지 못
하고 있다가 평소에 달에대한 지론을 천천히 써내려갔다.
무릇 달이라하면 하늘에 떠있는 달을 연상하겠으나, 나는 하늘의 달을 보면
단순히 억조창생(億兆蒼生)을 먹여 살리는 영험한 신(神)으로 생각한다. 왜
그런고하면 세상에 달의 정기를 받고 태어나지 않은 사람이 있겠는? 보통 사람
은 부모의 인연에 의하여 생명이 잉태하는 순간부터 시작해 정확히 열 달 만에
출세한다. 해와 달은 우리 인간사에 있어서 공기와도 같다고 할 수 있다.
해가 없다고 가정해 보자. 이 세상은 암흑천지로 변할 것이며 곧 영원한 동토
(凍土)의 땅이 되어 인간은 살 수 없을 것이다. 아침에 해가 떠서 사해(四海)를
비추고 저녁이면 서천(西天)으로 들어간다. 해가 사라지면 사람들의 안위가
걱정되어 별이나 달이 나타나 해를 대신하여 뭍 백성들에게 살아갈 수 있는
의지를 준다.
한 하늘에 해가 둘일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한 하늘에 해가 둘인 경우를
본다. 동절기의 경우 해가 서산(西山)에 들기도 전에 동산(東山)에서 또 하나의
붉은 해가 떠오른다. 그 뿐만 아니라 그믐의 경우는 어떠한가? 해가 동산에서
뜨면 또 하나의 희미하고 나약한 해가 서산으로 기울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산해경(山海經)에는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천제(天帝)인 제준의 부인이며 태양
신인 희화(羲和)는 10개의 태양을 낳았고 다른 부인인 달의 신, 상희(常羲)는 12개
의 달을 낳았다. 제준은 일찍이 예(羿)에게 화살을 주어 땅으로 내려가 22명의
자식들로 인해 빚어질 인간세계의 재난을 구하게 했다. 제준(帝俊)이 낳은 열
태양이 번갈아가며 천상에 올라가 있는 동안은 태평하였지만, 어느 날 그들이
서로 의논한 끝에 장난삼아서 열 태양이 한꺼번에 하늘을 건너가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지상은 삽시간에 염열지옥(炎熱地獄)으로 변하여 농작물은 타고 초목
은 말라 비틀어졌으며, 하천은 말라서 먼지가 났다. 이에 제준은 활의 명수인
예를 하계에 파견하고 아무쪼록 온당하게 사태를 수습 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활 솜씨를 자랑하는 예는 지상에 내려서자마자 약간 높다란 언덕에 서서
때마침 타는 듯이 뜨거운 햇볕을 내리쏟고 있는 열 태양을 향해 활을 잡아
당겼다.
드디어 훌륭한 솜씨로 아홉 태양을 쏘아 맞춰서 떨어뜨려 버렸다. 그 뒤엔
단 하나의 태양이 남았을 뿐이었다. 그 덕분에 지상의 인간들은 다시 온화한
햇빛을 받아 평화롭게 살 수 있었다. 그러나 후예는 그 수습하는 방법이 너무
거칠었다고 해서 제준의 노여움을 사고 지상에 추방되는 운명을 감수하게
되었다. 인간 세상에서 보면 해와 달의 모습과 크기가 같다. 그래서 달이 해의
자리를 폐하는 일식(日蝕)이 일어나고 또한 해가 달을 삼키는 월식(月蝕)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렇다면 달의 역할은 정확히 무엇이라 할 수 있겠는가? 달은 인간에게 평화
를 가져다준다고 할 수 있다. 낮의 작열하는 태양에 비해 달은 은은한 빛으로
인간에게 무한한 상상력을 주는 동시에 안온함을 주기도 한다. 인간의 생로병
사(生老病死)를 달은 스스로의 모습으로 무언의 교시(敎示)를 하고 있었다.
수십억 년의 무상한 세월을 달은 끝없이 윤회를 반복하면서 지상의 모든 생물
과 무생물들에게 가르치고 또 가르쳐왔다.
그러나 사람들은 달의 가르침은 잊은 채 오락이나 여흥을 위하여 달의 이름을
함부로 사용하여 왔다. 달은 부처이며 창조주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알고 있는
부처란 깨달은 사람, 눈을 뜬 사람, 완전한 인격자, 절대적 진리를 깨달아 스스
로 이치를 아는 사람이란 뜻이다. 인간의 자궁(子宮)에서 태어난 분 중에는
석가모니(釋迦牟尼)가 유일하다. 또한 부처는 스스로 깨닫고 남을 깨닫게 해주
어 깨달음과 실천을 두루 갖춘 분으로서 진리, 즉 법을 증득하고 실천하는
분이다.
나는 어머니 자궁에서 열 달 만에 출세(出世)하였다. 달이 없다면 지상의 모든
생명들은 태어날 수 없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고 달도 차면 기운다고 했다.
세상에 무한(無限)한 것이 어디 있던가? 제행무상(諸行無常)이고 제법무아(諸法
無我)라 했다. 지금의 사람들이 옛 달을 보지 못함은 등록망촉(得隴望蜀)의 고사
처럼 끝없는 인간의 욕심에서 비롯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사람들은
세상에 나와 이성(理性)의 눈으로 최초로 달을 보았을 때의 환희, 즉 초심의
맑은 호수 같은 마음을 지녀야 한다. 대취한 상태에서 달을 바라보는 작금(昨今)
의 달은 달이 아니라 세속에 찌는 욕망의 화신이다.
공자께서도 교언영색(巧言令色)은 선의인(鮮矣仁)이라 하였다. 즉 교묘한 말과
아첨하는 얼굴에는 어짐이 부족하다고 하였으니 사람의 삿된 마음이 사라지게
되면 달의 본 모습을 볼 수 있으리라. 태조(太祖)께서 조선을 건국하였을 때도
유교를 국가통치의 이념으로 삼았으니, 이제라도 더 늦기 전에 조정(朝廷)에서는
관리들의 눈에 낀 티를 없애 만백성이 청천(靑天)에 뜬 전지전능한 달을 바라
보아야 한다.
- 朴達 -
박달은 장문의 논문(論文)을 작성하여 제출하였다. 박달이 과장을 둘러
보자 이십 여명만 남아 답안지인 시권(試券) 작성에 전념하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박달은 나름대로 시권(試券)을 작성하고도 마음이
찜찜했다.
과연 자신이 작성한 답안이 조정에서 요구하는 답안인지 아니면 엉뚱한
답을 지었는지 답답했다. 보통 과거를 보면 늦어도 당일 합격자를 발표
하였으나 이번에 치룬 과거는 응시생이 많은 관계로 이틀 후 발표할 예정
이라고 하였다. 과장을 나오자 주모가 알아보고 박달에게 달려왔다.
“서방님, 욕보셨어요. 많이 힘드셨지요?”
“아니, 그런대로 보긴 보았소만......”
“왜요?”
“......”
주모가 박달의 눈치를 살폈다. 박달의 안색이 썩 좋은 편도 나쁜 편도
아니었다.
“서방님, 이제 다 잊으세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고 하잖
아요. 그만큼 하셨으면 좋은 결과가 있을 거예요. 어서 가세요. 차암,
오늘은 주막으로 가지 말고 기루로 가요. 좋은 곳을 알고 있어요.”
“기루?”
“네에.”
“아니, 그대의 주막이 어때서요?”
“눈들이 너무 많아서요. 그래서 오늘은 서방님이 그동안의 노고를 해소해
드리고 싶어서요.”
“......”
“그러니 아무 말씀하시지 말고 따라오세요.”
“아, 알겠소.”
‘아니, 이 여자가 무슨 여우소굴을 데리고 가려고 그러나? 하여튼 가보지
뭐. 과거도 끝났고 마음도 홀가분하니까.’
한껏 멋을 낸 주모는 박달이 옆에서 걸으며 무엇이 그리 좋은지 연신
히죽거리며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웃음을 흘리기도 하였다.
비록 상민(常民)들을 대상으로 주막을 운영하는 여자이지만 생김새나
행동거지로 보면 여염집이나 사가(士家)의 여인이나 진배없었다. 남편이
과거를 보다가 죽은 관계로 과거에 한이 맺힌 여인으로 헌헌장부의
박달을 통하여 자신의 뜻을 이루고 싶었다. 동백기름을 발라 반지르르
하면서 윤기 있는 큰 머리로 치장하고 옥잠(玉簪)을 꽂아 멋을 낸 주모의
모습은 세련된 한양의 유행을 말해주고 있었다.
기분이 좋아 앞서 걷는 주모의 붉은 치마가 나풀거리며 그 안에 감춰진
튼실한 육신이 박달을 유혹하고 있었다. 오던 길을 다시 걸으며 박달은
아침에 올 때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던 한양의 번화한 모습에 넋을 잃었다.
창경궁을 바라보면서 박달은 다시 한 번 구름 위를 걷는 상상에 빠졌다.
‘꼭 합격해 저 궁궐을 드나들면서 나랏일을 봐야지.’
운종가에 들어서자 박달은 시장기를 느꼈다. 두 사람은 걸음을 재촉하여
드디어 피마골(避馬洞)에 도착하였다. 피마길은 넓고 긴 운종가에 인접해
지어진 집 뒤로 난 좁은 길인데 서민들이 대로를 걷다가 말을 탄 높은 벼슬
아치를 만나면 그 들이 다 지나갈 때까지 엎드려 있어야 했다. 평민등의
이러한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골목길이 있는 곳을 피마골이라
고 불렸다.
피마골은 선술집, 주점, 색주가, 장국밥집, 목로주점, 내외주점 등
일종의 한양의 대표적 서민 환락가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만큼은
양반 상놈이 따로 없었다. 무조건 돈 많은 사람이 대접 받는 아주 현실
적이면서 이해타산이 우선시 되는 지역이었다.
과거를 보러 온 지방의 유생이나 어쩌다 한양에 놀러 온 지방 사람
들은 목돈을 마련하여 들리는 곳이 이곳 피마골이었다. 물론 양반네들이
자주 애용하는 다동(茶洞)의 고급 기루촌(妓樓村)이 있지만 형편이 여의
치 못한 평민들이 쾌락을 즐기기 위하여 찾는 곳이 바로 피마골이었다.
“형님, 그 동안 안녕하셨지요?”
“응? 이게 누구야? 아지아녀? 아이고 이게 얼마만이냐?”
‘아지? 아아 주모의 이름이 아지였구나.’
박달은 혼자말로 중얼거리며 그동안 자신이 주모의 이름도 모르고 살을
맞대고 산 것에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주모가 극락(極樂)이란 간판을 단
어떤 집을 찾았는데 그곳에서 일하는 어떤 여인과 주모가 만나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얼싸 안고 좋아하였다.
“형님, 극락도 예전보다 더 번창한 것 같네여?”
“아니야, 늘 그대로지 뭐.”
“아니에요. 너무 멋지게 변하였네요.”
“아우님은 마포나루에서 주막집을 열었다는 소리를 풍문에 얼핏 듣기는
했는데?”
“형님, 맞아요. 지금도 주막을 운영하고 있어요.”
“그런데 한참 손님을 받아야 할 시간에 여긴 웬일이야?”
“박달님, 인사하세요. 이 언니는 이곳 피마골을 대표하는 상인이세요.
한양에서 언니를 모르면 왜놈이라고 의심 받아요. 호호 호호호호......”
“안녕하세요? 박달이라고 합니다.”
“어머나, 아지야? 이렇게 훤칠한 사내대장부를 어떻게 모시게 되었니?
넌 참 사내 복도 많다. 호호, 호호호......”
“아유, 언니도 한양에 내로라하는 멋진 남정네들을 모두 꿰차고 계시
면서 뭘 그러우?"
“아이, 쟤는 손님 앞에서 별말을 다하네. 호호호호......”
“언니, 우리 박달서방님 몹시 시장하세요. 지금 막 과거를 보시고 오시는
길이세요.”
“그래, 알았다. 아주 맛있는 것으로 준비하마.”
극락의 여주인은 박달과 주모, 아지를 안채에 있는 비밀스러운 방으로
안내하였다. 겉은 여염집 비슷하게 생겼는데 방안에 들어가니 묘한 그림
들과 장식들로 치장된 매우 낯선 곳이었다.
“서방님, 시장하시죠? 잠시만 기다리세요.”
“아니오, 괜찮아요.”
“이곳은 한양에서도 음식과 술이 맛이 좋기로 소문난 곳이에요. 오늘
과거도 끝났고하니 홀가분한 마음으로 한 잔 하시고 푹 쉬세요.”
주모 아지는 분명히 이번 과거에 박달이 합격하였을 거라고 믿고 있었다.
교자상이 들어왔다. 상위에 차려진 음식에 박달은 두 눈이 휘둥그레졌
다. 호박나물, 취나물, 가지나물, 고추조림, 취나물, 두부조림, 찐 달걀,
편육, 닭백숙, 돼지족발, 인절미, 설기떡, 차수수전병, 신선로, 약식,
사과, 배, 감, 약과, 유과, 구이, 튀김, 화채, 탕, 산적, 잡채와 이름을
알 수 없는 음식들로 가득한 상이었다. 또한 백자주(栢子酒)가 가득 담긴
주전자가 들어왔다.
“자, 서방님, 한잔 받으시어요. 과거보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아지도 한잔 받지요?”
“호호호호. 제 이름을 아셨군요.”
“아지덕에 내가 호강을 하네요. 고마워요.”
“아이, 서방님, 이게 다 서방님이 타고난 복이지요.”
“아니오. 내가 그대의 보살핌이 없었다면 무척 고생하였을 거요. 정말로
고마워요.”
빈속에 술이 한두 잔 들어가자 박달은 금방 취하고 말았다. 그런 박달
에게 주모 아지는 계속 술을 따랐고 심신이 해이해진 박달은 아지의
뜻대로 움직였다.
‘아아, 금봉이. 당신이 보고 싶구려. 오늘 과거를 보긴 보았지만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소. 빨리 과거 합격증을 가지고 달려가고 싶소.’
“서방님, 한 가지만 여쭤도 돼요?”
“두 가지 물어도 괜찮소.”
“어머? 호호호호. 다름이 아니고 금봉이가 누구에요?”
“아니, 아지가 금봉이를 어떻게 알고 있소?”
“서방님께서 잠꼬대하시는 것을 몇 번 들었어요.”
“그, 그랬군요.”
“누구에요? 그 금봉이라는 사람이? 이름을 보니 여인네 같은데요?”
“......”
“곤란하면 대답하지 않으셔도 돼요.”
박달은 아지에게 과거보러 한양으로 오는 길에 시랑산 아래 벌말에서 알게
된 산골처녀 금봉이에 대하여 모두 이야기 해 주었다.
“그, 그랬군요. 그럼, 그 금봉이 처자가 서방님을 기다리고 있겠네요?”
“......”
“저보다 먼저 서방님의 마음을 훔친 여자가 있었네요.”
“미, 미안하오.”
“아니에요. 미안해하실 거 없어요. 서방님이 이렇게 제 옆에 계신데요.”
아지는 금봉이에게 질투를 느끼면서 어떻게 해서든지 박달을 자신의 곁에
붙잡아 두고 싶었다.
‘그렇다면 과거에 합격하면 당장이라도 고향을 향해 갈 텐데. 그렇게
되면 나는 뭔가? 닭 쫓던 강아지 신세 아닌가? 안 돼. 절대 안 돼. 박달
서방님을 그 여인에게 빼앗길 수는 없어.’
박달이 과거에 합격하면 금방이라도 자신을 떠날까하여 아지는 마음이
우울해졌다. 착잡한 마음을 술로 달래고 싶은 아지는 자작으로 술잔을
연거푸 들이 켰다.
눈의 나라가 된 시랑산 아래 벌말에는 특이한 일없이 고요하다 못해
적막감마저 감돌았다. 금봉이는 점심때가 넘어 홀로 이등령 가는 길에
위치한 서낭당을 찾았다. 눈도 내리고 길도 미끄러운 상태였지만 금봉
이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서낭당 앞에 서서 그동안의 고마움에 대하여
기도하고 있었다.
“성황신님, 고마워요. 덕분에 우리 박달서방님께서 오늘 과거를 무사
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이제 합격자 발표가 나면 박달 서방님께서 좋은
소식을 가지고 빨리 소녀에게로 돌아 올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소녀
외로워 죽겠어요. 서방님께서 다른 곳에 한 눈팔지 않도록 도와주세요.
이렇게 비나이다.”
금봉이는 몸에서 이상 징후를 느끼면서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다. 박달이 떠난 지 두달이 넘어가고 있었다. 성황당에서 지성을
드린 금봉이는 혼자서 이등령을 향해 걸었다. 산길 좌우로 고목나무들
가지에 눈꽃이 만발하여 눈이 부실 정도였다. 어쩌다 바람이 불면 눈보
라가 뽀얗게 날리며 산길에 내려앉았다. 금봉이는 박달과 헤어지던 날을
생각하며 걸었다.
“내 과거에 합격하면 제일 먼저 그대에게 달려오리다.”
‘그래, 서방님께서는 금방 저 고개를 넘어 오실 테지. 그날은 어떻게
서방님을 맞이해야 하나? 옥색치마와 노랑색 저고리를 준비하고 노리개도
차야지. 그리고 서방님의 옷도 한 벌 준비해야겠어. 한양에 계시면서 입고
있는 옷이 다 헤졌을 텐데......’
금봉이는 박달을 만나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즐거운 상상을 하였다.
이등령을 걷던 금봉은 점점 높은 곳으로 오르다가 눈이 쌓인 곳을 헛디뎌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어머나-”
눈이 소복이 쌓인 구덩이에 발이 미끄러지며 그만 두 서너 바퀴 구르면서
구덩이에 쳐 박히고 말았다. 그 바람에 배에 충격이 가해지면서 통증을
느꼈다.
‘아아. 안 되겠네. 이러다 큰일 나겠어. 아쉽지만 그냥 내려가야지.’
아쉬운 마음으로 이등령을 향해 걷던 금봉이 다시 오던 길을 되돌아가며
게속해서 뒤를 돌아보았다.
“서방님, 죄송해요. 이등령에 올라 서방님이 계신 한양을 바라보고 싶
었어요. 곧 합격자 발표가 나겠죠? 그럼 얼른 벌말로 달려 오셔야해요.”
금봉이는 중얼거리며 마치 넋이 나간 사람처럼 혼자서 히죽 히죽 웃기도
하다가 긴 한숨을 쉬며 멀거니 북녘 하늘을 올려다 보기도하며 간신히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왔을 때 날이 저물기 시작하였다.
‘아니, 저 얘가 어딜 갔다 오는 거여?’
“얘, 금봉아 너 어디 갔다 오는데 그러니? 어디 아프니? 얼굴빛이 안 좋아
보인다?”
“성황당에 다녀왔어요?”
“성황당에는 왜?”
“그냥이요.”
‘저것이 박달이 때문에 갔다 온 게로군.’
금보이 어머니는 딸아이의 안색이 좋아 보이지 않자 불안해했다.
“얼른 저녁 들어라. 아버지하고 나는 이미 들었어.”
“네에.”
“얘야, 너 어니 아프니?”
“아니요. 아픈데 없어요.”
“......”
‘저 애가 분명히 뭔가 있는 것 같은데......’
금봉이는 저녁을 뜨는 둥 마는 둥하더니 피곤하다며 일직 잠자리에
들었다. 아무래도 느낌이 이상한 금봉이 어머니는 금봉이 방에 들어가고
한참 후에 살며시 딸의 방에 들어가 보았다. 잠든 금봉이의 이마를
만져 본 금봉이 어머니는 깜짝 놀랐다. 금봉이 이마가 불덩이였다. 식은
땀을 흘리며 끙끙 거리며 앓고 있었다.
“얘, 금봉아, 금봉아, 너 왜 이러니? 어디 아픈 거여?”
“......”
“애야, 말해보렴. 어디가 아픈 거여?”
“어머니, 아, 아무데도 아픈 데 없어요. 푹 자고나면 괜찮아 질 거예요.
그러니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금봉이 어머니가 끙끙 앓는 딸의 여기 저기를 살펴보았다. 발등이 퉁퉁
부었고 종아리에도 상처가 나 있었다.
“얘, 너 이거 어디서 다친 거니?”
“아까 서낭당 다녀오다가 눈길에 넘어졌어요.”
“어이구, 그러게 이렇게 길이 미끄러운데 거길 왜 가니?”
“박달 서방, 아니 박달님이 무사히 돌아오시라고 성황님께 빌러 갔다
왔어요.”
“이것아, 그 사람이 오늘 과거가 끝났다 하더라도 한참 더 있어야 한데.
안되겠어. 박씨를 불러야 겠다. 너 이렇게 열이 펄펄 나는데 어떻게 밤을
새우려고 하는 거야?”
“어머니 그냥 두세요. 한 잠자고 나면 좋아질 거예요.”
“이것아 밤새 끙끙 앓다가 큰일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어머니, 아버지 걱정하셔요. 그냥 두시래도요?”
금봉이 어머니는 딸의 건강이 염려되어 더 어두워지기 전에 대처 한의원
에서 오랫동안 근무한 적이 있는 박씨를 부르러 갔다. 어깨 너머로 배운
의술로 산촌에서는 의원으로 통하는 박씨였다.
과거를 보고 마음이 홀가분해진 박달은 운종가 색주가에서 대낮부터
술과 여인에 에 취해있었다. 앞에 있는 여인이 금봉이 인지 주모(酒母),
아지인지 분간도 못할 정도로 대취하였다. 그런 박달의 마음을 확실하게
잡아두기 위하여 아지는 온갖 애교를 떨어가며 박달이에게 아양을
떨었다.
“박달 서방님, 벌말에 있는 금봉이와 저 중에 누가 더 예뻐요?”
“......”
“서방니임 -.”
“그대가 한 만개한 모란꽃이라면 벌말의 금봉이는 아침 이슬 머금은 백목
련이라오.”
“호호호호호-. 저를 그리 표현해 주시니 고맙긴 합니다만 서방님, 누가
더 예쁘냐고요?”
“......”
아지도 술에 대취하여 발음이 부정확하였다. 가물가물한 박달의 시야에
들어 온 아지의 붉은 입술이 마치 한 여름 딸기 같았다. 박달은 그 딸기가
꽤 맛이 있을 것 같아 손을 들어 만져보았다.
“호호호호-. 서방님, 제 입술에 뭐가 묻었어요?”
박달의 행동에 음심(淫心)이 발동한 아지가 박달의 곁으로 바싹 다가와
앉았다.
‘아아, 꽤 탐스러운 딸기로다. 한 입 베어 먹으면 달콤하겠어.’
"아아, 서방니임-"
박달의 입술이 아지의 입술에 닿자 아지는 박달을 끌어안았다.
‘아아, 금봉이. 나를 용서하오. 내 어쩔 수 없이 이 여인을 안고는 있지
만 그대를 향한 내 일편단심(一片丹心)은 변함이 없소.’
박달은 아지의 따뜻하고 달콤한 입술을 지그시 누르면서 금봉이를 떠올
렸다.
“아아, 서방니임 -.”
아지는 박달의 넓은 가슴을 꼭 안았다.
‘금봉이, 용서해주오. 과거에 합격하면 한 걸음에 벌말로 달려갈 것
이오.’
“서방니임 -, 꼭 안아주세요. 더욱 꼭 -.”
극락의 여주인이 문을 열다가 대취한 박달과 아지가 한 몸이 되어있는
모습을 보고 얼른 문을 닫고 문틈으로 두 사람의 애정행각을 훔쳐보았다.
‘아아, 남들 사랑 놀음을 보니 나도 몸이 달아오르네. 염병, 저년은
하필 오늘 남자를 꾀어가지고 와서 내 가슴에 불을 지핀담.’
극락 여주인은 마른 침을 넘겨가며 아지와 박달의 뜨거운 장면을 계속
훔쳐보았다.
“저어, 금봉 아버지 나 좀 봅시다.”
금봉이에게 뜸을 뜨고 침을 놓은 박씨는 금봉이 아버지를 슬며시 밖으로
불러냈다.
“박씨, 왜 그러우? 금봉이가 뭐 잘못되기라도 했소?”
“......”
“박씨, 사람을 불러냈으면 무슨 말을 해보슈?”
“금봉 아버지, 내 이런 말을 해서 안 되었네만.”
“......”
“잘 듣게.”
“아, 이 사람아, 무슨 이야기인데 그리 뜸을 들여?”
박씨는 곰방대에 불을 붙이더니 오물오물 거리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담배 연기를 길게 뿜어내더니 박씨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자네 딸이 홀몸이 아니네.”
“뭣, 뭐라고? 그게 무슨 말인가?”
금봉이 아버지는 몽둥이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갑자기 정신이 몽롱
하면서 양쪽 다리에서 힘이 쭉 빠지는 것을 느꼈다.
“바, 박씨, 천천히, 천천히 말해보게. 우리 금봉이가 홀몸이 아니라니?
그게 무슨 말이여?”
다급해진 금봉이 아버지가 말까지 더듬으며 박씨 소매를 잡았다.
“자네 딸, 금봉이가 아기를 밴 것 같으이.”
“아, 아기?”
“......”
“그, 그게 정말인가? 시집도 안 간 처녀가 어떻게 아기를 밴단 말인가?”
“그러니 나도 그게 이상해서 아주머니 대신 자네를 불러 낸 게야.”
‘아아, 이 무슨 청천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리란 말이더냐? 시집도 안 간
금봉이가 아이를 가졌다니? 이건 말도 안 돼. 박씨가 잘못 진단하였겠지.
말도 안 돼는 소리여 이거는.’
“내가 알기로는 금봉이가 행동이 조신하고 얌전하며 매사 신중하게 행동
하는 처녀로 알고 있는데......”
“박씨, 박씨가 잘못 알고 있는 거 아냐?”
“글쎄, 나도 어깨 너머로 의술을 익힌지라 좀 찜찜하기는 해도 진맥을
짚어보니 분명 아이를 가진 진맥이 틀림없어. 만약 내가 잘못 알고 있다면
내가 큰 죄를 짓는 거고. 아직은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고 좀 더 지켜보
십시다.”
“분명히, 박씨가 잘못 진맥을 보았을 거요. 시집도 안간 아이가 어떻게
아이를 가진단 말이오?”
“금봉아버지, 하여튼 내가 짧은 의술로 잘못 진맥을 하였을 수도 있으니
좀 더 지켜보자고요. 너무 상심하지 마시고.”
“박씨, 부탁하오. 잘못 진맥을 했을 수도 있으니 절대로, 절대로 나와
당신 두 사람만 알고 있어야하오. 절대 남에게 발설하면 안 돼요.
아시겠소?”
“내 입은 무거우니 염려 마오.”
“고, 고맙소.”
“우선, 자네 딸에게 잘 대해주시오. 다리에 상처가 있는 것으로 보아
크게 넘어진 듯싶은데 거기에 몸살 기운도 있소.”
“알겠소.”
박씨가 돌아가자 금봉이 아버지는 딸의 방으로 들어왔다.
“금봉아, 좀 어떠니?”
“아버지, 이제 괜찮아요. 죄송해요. 걱정을 끼쳐드려서요.”
“아니야. 난 괜찮다. 그러나 저러나 어서 몸을 회복해야지.”
“금봉아버지, 박씨가 뭐래요?”
딸 곁에 앉아서 간호를 하고 있던 금봉이 어머니가 물었다.
“몸살 기운이 좀 있고 몸이 허해서 그런다고 하니까 당분간 푹 쉬라고
하던데. 그러니 금봉아 내일부터 당분간 집 밖 출입을 자제하고 집에서
있어야 한다.”
“그 말 말고 또 다른 말은 없우?”
“다른 말?”
“......”
“아니 뭐 다른 게 아니고 금봉이가 다른 데 아픈데 없답디까?”
“아 그깟 몸살이야 이삼일 푹 쉬고 나면 낫겠지. 멀쩡한 애를 병자 취급
하지 마오?”
금봉이 아버지의 목소리에 어딘가 모르게 불편함이 묻어 있는 듯 했다.
금봉이 아버지가 방에서 나가자 금봉이 어머니는 다시 한 번 금봉이에게
내일부터 절대 집 밖으로 나가지 말고 집안에 있으라고 신신당부하였다.
‘아아, 이일을 어찌한단 말인가? 맞아. 맞을 거야. 박씨의 진맥이 정확
할거야.’
금봉이 아버지는 동네 과수댁에 와서 탁주잔을 앞에 놓고 궐련을 빨아
대며 깊은 생각에 빠져있었다. 주막은 아니지만 동네 남정네들을 상대로
술을 담가 파는 과수댁은 늦가을부터 늦봄까지 농한기에만 한시적으로
주점을 열고 있었다.
“아니, 금봉 아부지, 뭘 그리 고민하우?”
“......”
“금봉 아부지, 술 안 드슈?”
“응? 드, 들어야지.”
“아니, 아까부터 뭘 그리 골똘히 생각하슈? 집에 뭔 근심거리라도 있수?”
“아무것도 아니오.”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데 뭔지 말해보슈. 혹시 아우 내가 도움이라도 줄지.”
“영수 어멈.”
“왜유?”
“영수 어멈은 아이를 낳았으니까 알겠지.”
“뭘 말이우?”
“여자가 아이를 뱄을 때 얼마정도 지나야 알 수 있우?”
“호호호 호호호호......., 아니 갑자기 아기 밴 이야기를 왜 허우? 마나
님이 늦둥이라도 뱄수?”
“그, 그게 아니고. 내 먼 친척 되는 조카가 있는데 시집간 지 삼년이
넘어도 아이가 안 들어서서 나한테 고민 토로하기에 내가 그런 걸 잘 모르
니 답답해서 영수 어멈한테 물어보는 거요.”
“그야, 꽃물이 끊기면 영락없이 애를 뱄다고 판단하면 돼유.”
“꽃물?”
“아이구, 그거 있잖수.”
“그거라니?”
“아이구, 망측해라.”
“그러지 말고 자세히 말해 보구려. 답답하오.”
“호호호 호호호호......”
“......”
“그게 그리 궁금하면 마나님에게 물어보면 될 거 아니겠수?”
‘아니, 이 여편네가 남의 속도 모르고 농담을 하나?’
“험-, 험 -, 꽃물이라면 여인들이 한 달에 한번 하는 달거리를 말하는
거오?”
“호호호 호호호호호......”
“......”
과수댁은 배꼽을 잡고 자지러지듯 웃었다.
‘원, 이런 빌어먹을 여편네가 다 있나?’
“맞수, 그런데 금봉 아부지가 그런 걸 물으니 내가 괜히 기분이 묘해
지는 구랴. 나는 꽃물 끊긴지 십년이 넘었수. 호호호 호호호호......”
“험-, 험-.”
금봉이 아버지는 장독대 뒤에 놋요강 두 개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나는 아내의 것이고 작은 것은 딸의 것이라는 것을 금봉이 아버지는
알면서 못 본척 해왔다.
아직도 한 달에 한번 달거리를 하는 아내는 무명으로 된 개짐을 쓰고
있는데, 한번 사용한 개짐을 요강에 물을 가득 채우고 넣어 두고 일정한
시간이 지나 핏물이 빠지면 깨끗하게 빨아 사용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또한 몇 년 전 부터 딸도 개짐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아내의 요강 옆에
작은 놋요강이 하나 더 생겼다.
집안의 유일한 남자인 금봉이 아버지는 요강 두 개가 놓여 있는 그 곳이
아주 신성한 장소라고 생각하면서 절대 그 요강을 열어 보거나 접근하는
것조차 금기시 했다. 또한 아내와 딸이 비슷한 시기에 월경한다는 것을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그래, 금봉이가 박씨 말대로 아기를 가졌다면 그건 분명 두 달 전
내 집에 닷새정도 머물렀던 박달도령의 씨앗이 분명할 거야. 박달이 한양
으로 떠나갈 때 금봉이가 ’서방님' 이라고 불렀었지.’
“과수댁, 술 반 주전자만 더 내오구려.”
“금봉 아부지, 너무 과한 거 아니우?”
“허허, 내 보통 세 주전자는 마시지 않소?”
“그런데 금봉 아부지, 오늘은 안색이 영 안 좋아 보이시유. 조금만 들어
유. 나야 술을 많이 팔면 좋지만 금봉이 아부지 건강을 생각해서 드리는
말이유.”
“허허, 내 걱정 말고 내오구려.”
“......”
‘그래, 그럴 거야. 그렇다면 금봉이가 사용하는 요강을 확인해 보면
알 수 있겠군. 그런데 금봉이가 정말로 아이를 뱄다면 어찌해야하나?
박달 그 사람이 과거가 끝났으니 머지않아 고향으로 갈 테지. 가는 길에
분명히 벌말에 들릴 테고.......’
“자, 내가 한잔 따라 드리겠수.”
“고맙소.”
“금봉 아부지, 혹시 마나님이나 금봉이가 아이를 뱄수?”
“아니, 영수 어멈, 그게 무슨 말이오? 시집도 안 간 처녀가 아이를
배다니?”
금봉이 아버지가 버럭 화를 내자 과수댁은 움찔하면서 비실거리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마치 자신의 속내를 들킨 것 같아 금봉이 아버지는 얼굴이
화끈 거렸다.
‘아아, 만약 이일이 동네에 소문나면 우리 금봉이는 소행이 못된
아이로 낙인찍힐 것이고 혼삿길은 막힐 것이다. 아니지, 박달도령이
과거에 떡하니 합격해서 찾아온다면 얼른 혼인을 시키면 되지. 그렇지,
그렇지, 박달도령과 짝을 맺어주면 되겠구나. 흐흐 흐흐흐......,
내가 괜한 걸 가지고 걱정을 했구먼.’
“꺼억 -, 술 맛 좋다.”
박달은 아침 일찍 주막을 나섰다. 오늘 합격자를 발표하는 날이었다.
주모, 아지가 따라오겠다고 하는 것을 박달은 억지로 떼어 놓고 혼자
가기로 하였다. 과거 보던 날 마차를 타고 가던 길을 혼자서 걷기로 하
였다.
“서방님, 합격자 발표를 확인하시면 얼른 오세요. 보나마나 합격하셨을
테니 잔치를 준비할게요.”
박달은 운종가에 피마골에 있는 색주가 '극락’에서 주모 아지와 뒤 엉켜
밤인지 낮인지 모르고 지냈었다. 주모의 얼굴은 방금 이슬 맞은 복사꽃처럼
화사하게 피어 있었다. 무엇이 그리 좋은지 연신 생글거리며 박달에게
의복을 정제해주었다.
“서방님, 빨리 오세요. 너무 기다리게 하지마시고요. 아셨죠?”
“알겠소. 내 얼른 오리다.”
“보나마나 에요. 서방님 오시는 대로 문을 닫고 잔치를 벌이려고요. 제가
아는 언니들과 동생들도 와서 축하해 주기로 했어요.”
“아지, 너무 일을 벌이는 거 아니오?”
“서방님, 걱정하지마세요. 오늘이 서방님과 제 생에 최고의 날인데 그까짓
하루 쯤 영업하지 않는다고 달라질 거 없어요.”
“그래도. 남들이 알면 비웃음을 살 거 같아서 그래요.”
“알았어요. 최대한 조용히 할게요. 어서 다녀오세요. 성균관까지 다녀오시
려면 시간이 많이 걸릴 텐데. 먼저처럼 마차를 타고 가시지 그래요?”
“아니오. 오늘은 천천히 걸으면서 한양 구경도 하고 사람들 구경도 하고
싶어서 그래요. 나 혼자 가도 충분하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그럼, 얼른 다녀오세요.”
“내, 얼른 다녀오리다.”
박달과 아지는 분명히 박달이 과거에 장원은 아니라도 충분히 합격하고도
남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아아, 제발 합격해야 하는데......’
운종가 피마길을 박달은 부리나케 걸었다.
점심 때 쯤 도착한 성균관 명륜당 앞뜰에는 이미 구름처럼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만세를 부르며 희희낙락하였고 대부분은
고개를 떨어뜨리고 침통한 표정으로 성균관을 빠져 나오고 있었다.
박달은 갑자기 다리에 천근 무게의 쇳덩이가 매달린 듯 더 걷지 못하고
그 자리에 멈춰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아, 차마 가슴이 떨려서 더 이상 못가겠다. 그렇다고 합격자 명단을
확인하지 않을 수도 없고.’
박달은 한 걸음 한 걸음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걸었다. 합격자
명단이 붙어있는 곳이 바로 코 앞인데도 십리나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박달의 심장은 요동쳤다.
‘천지신명이시여, 조상신이시여, 도와주소서. 박씨 가문에 영광을
주소서.’
박달은 명단이 붙은 곳까지 간신히 다가갔다. 차마 눈을 들어 바라볼 수
없었다. 크게 심호흡을 하고 박달은 합격자 명단을 쳐다보았다. 하얀종이
위에 빽빽하게 적힌 합격자 명단에 박씨 성을 가지 사람은 그리 많지 않
았다. 합격자의 상당수가 이씨와 김씨, 최씨, 윤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었다.
박달은 아무리 살펴보아도 박달(朴達)이란 이름을 찾을 수 없었다.
혹시 하는 마음에 사람들에게 합격자 명단이 다른 곳에 또 붙어 있느
냐고 물었지만 이 곳 밖에 없다고 하였다. 박달은 도저히 믿을 수 없어
예조(禮曹)에서 나온 관리를 찾아가 과거 합격자 명단에서 박달이란 이름을
확인해달라고 요청하였다.
“합격자 중에 박달이란 이름은 없소이다.“
“아아, 이럴 수가. 어찌 이럴 수가......”
박달은 앞이 캄캄해지면서 다리가 후들거려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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