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 55. ( 다산초당에서 백련사 가는 길)
완연한 봄날이다. 어디든 떠나자. 그동안 남편이나 아들과 동행했던 여행이 지난해 아들아이의 결혼과 함께 이제는 어디를 가든지 남편과의 동행은 당연한 일이다. 한편 오늘처럼 주일에 남편이 근무를 하게 되면 혼자서 멀리 떠나는 것이 다소 부담스러워진다. 그렇다고 멈출 수 없는 계획을 세우면서 늘 생각했던 것처럼 외로움의 단위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멀리 계획을 했다가도 다시금 주변을 살피며 가까운 곳으로 목적지를 정하여 오늘은 다산초당에서 백련사 가는 길을 택했다. 그 길은 가볍게 둘러오기 좋은 거리이며 숲은 물론이거니와 느낌이 참 좋은 곳이다. 해남 윤씨 집안의 정자였던 다산초당은 다산의 학문적 연구를 집대성하고 제자를 키우는 곳이 되었다. 해남윤씨는 다산의 외가이며 공재 윤두서가 다산의 외증조부였다한다. 그래서 일까? 다산초당에서 백련사를 둘러 다시 되돌아오면 마치 외갓집이 가까워지는 듯한 느낌으로 발걸음이 바빠지곤 한다. 다산초당 주차장에는 대형버스와 승용자가 즐비하게 세워져있다. 벌써 내려오는 사람들의 타 지역 사투리로 주변은 북적거리고 있었다. 예전에는 그냥저냥 다녀가는 정도였으나 오늘은 내가 걷는 길의 걸음걸음을 남기고자 카메라와 거치대를 챙겨 오르기로 하였다. 이곳 다산초당과 백련사 그리고 정약용선생과 혜장스님을 떼어 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 곳이다. 다산초당 오르는 길 오른편에는 다산의 제자였던 윤종진의 묘가 있다. 오르다보니 예전에는 뿌리의 길이라 하여 나무뿌리가 갈비뼈처럼 드러나 있던 길이었는데 돌계단으로 정비가 되어 있었다. 사실 이곳에 오르면서 뿌리의 길을 걷는 매력이 기억에 많이 남았던 곳인데 아쉬움과 함께 세월의 흐름과 요구에 따라 어쩔 수 없는 일인 듯하다. 단정하게 정비된 돌계단을 올라보면 왼편에는 동암이 보이고 그 옆으로 다산초당이 보인다. 한편 다산초당은 1957년 다산유적 보존회에서 복원한 곳이다. 원래 초당의 의미 그대로 초가로 복원할까 하였으나 사람이 살지 않은 초가는 1년마다 지붕을 이어야 해서 오랜 논의 끝에 기와로 복원하였다고 한다. 초당 앞의 넓적한 돌은 다조라 하여 찻물을 끓이던 차 부뚜막이라는 의미라 한다. 다산초당의 현판은 추사 김정희 선생의 글씨를 집자해서 만든 것이라는데 동암은 다산이 머물고 집필을 한 곳이며 서암은 제자들이 머물렀던 곳이란다. 오늘은 동암의 긴 마루에서 편안히 두 다리를 뻗어 사진 한 장을 남겨본다. 그렇게 동암을 빠져나와 백련사로 향한다. 물론 동암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천일각에서 구강포를 내려다보며 또 한 장의 사진을 남긴다. 다산의 유배시절에는 없었던 건물이지만 바다를 보며 생각에 잠겼을 다산을 생각하며 그 자리에 만든 정자라고 한다. 천일각의 분위기는 고즈넉하고 아름답다. 잠시 올라가 먼 구강포를 바라다보며 상념에 잠겨보니 꽤나 운치가 있다. 뿐만 아니라 왠지 가는 곳마다 정자를 보면 사진을 남겨두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렇게 천일각에서 보이는 바다 풍경을 뒤로하고 백련사로 향한다. 다산초당에서 백련사까지는 약 1Km인데 정약용선생이 다산초당과 백련사를 잇는 1킬로 남짓한 오솔길을 하루가 멀다하게 오가며 학문적 교류를 하였다고 하니 한겨울 깊은 밤이거나 한여름 숲길을 넘었던 다산과 혜장스님의 깊은 우정은 짐작하고도 남음직하다. 초당에서 한참을 오르다 보면 잠시 쉬어가기 좋은 곳에 자리한 해월루가 있다. 물론 해월루의 정각도 바다가 보이는 곳에 자리하고 있어 풍경이 참 좋다. 초당과 백련사 근처의 숲은 울창하고 빽빽할 뿐더러 그 길은 참 아름답고 그윽하다. 오르고 내리고가 적당하며 혼자서 사색하기에도 손색없는 길이다. 휴일이라 여기 저기 널찍한 자리마다 삼삼오오 또는 단체관광객이 서로의 정담과 웃음소리로 다산초당에서 백련사 다다르도록 시끌벅적하다. 어쩌면 이맘때 쯤 이었을까? 다산은 “나도 늙었구나. 봄이 되었다고 이렇게 적적하고 친구가 그립다니.” 하며 오솔길을 걸어 혜장선사를 찾아갔다고 한다. 두 사람은 수시로 기약도 없이 서로를 찾아 학문을 토론하고 시를 지으며 차를 즐기기도 하였다고 하니 열 살의 나이차와 유가와 불가라는 종교의 벽을 뛰어넘어 보편적 진리를 추구하는 그 진솔함이 문득 현재의 시국에 이 나라 정치인들을 떠올려보게 한다. 그 아름다운 길을 따라 백련사 가까이에 도착할 즈음 주변에는 천년고찰 백련사와 천연기념물 제151호로 지정된 동백림이 주변경관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경을 뽐낸다. 백련사의 규모는 크지도 작지도 않다. 지금은 사찰보다 동백숲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수령 300년 정도 된 3000여 그루의 동백나무가 백련사 산자락을 촘촘히 덮고 있다. 올해는 동백도 늦는다니 아직 피울 생각도 없는 듯 입을 앙다물고 있다. 그렇게 백련사를 한 바퀴 휘돌아 다시 다산초당으로 되돌아오기로 한다. 한번 왔다가 되돌아가는 길도 이토록 익숙하고 정겨운데 다산과 혜장법사가 차와 시국담을 나누며 거닐었다는 이 숲길은 얼마나 정겨웠을지 상상 속에 두 사람의 풍경까지 넣어 혼자 걷는 길에 동행하는 느낌으로 피식 웃어본다. 초당 오른쪽에 있는 적송과 연못 그리고 비천일각이 서 있는 동쪽 산마루는 다산이 틈틈이 올라 바람을 쐬고 흑산도로 귀양 가 있던 형 정약전을 그리며 먼 바다를 내다보던 그의 눈길이 닿던 곳이라는데 어쩌면 그 그리움을 혜장법사와의 돈독한 우정으로 견뎌냈는지도 모를 일이다. 내려오는 길에 초당 위 바위에 선명하게 새겨진 정석 丁石을 둘러본다. 다른 수식어는 없다. 자신의 성 정자와 석 만이 새겨진 바위는 유일한 말벗 혜장선사를 먼저 떠나보내고 유배지에 홀로 남은 외로움을 바위에 새긴 것이라고 하는데 역시 함께하다가 떠난 이가 생김으로 인하여 외로워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니 외로움의 단위는 혼자가 아니라는 나만의 생각에 한층 무게감을 두어본다. 이곳에 오면 다산초당에서 백련사 가는 길의 운치와 풍경도 훌륭하지만 그보다 먼저 사람의 곁에 사람이란 늘 즐거움과 견딤은 같은 비중으로 지배한다는 생각을 깊게 하면서 3월 쯤 늦은 동백을 다시 한 번 만나러 오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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