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가득 세상 가득 흰 눈이
말없이 새색시 수줍어 하듯 내리지만
아낌없이 어쩌면 큰 누나처럼 아주 많이
내린다.-
눈에 대한 기억
출근시간 9시가 되기 전부터 함박눈이 기분 좋게 내린다. 출근 이후에 눈이 내려 다행이다.
지난 겨울 처럼 끝도 없이 마구 내릴 것 같더니 그치다가 다시 또 내리고 있다.
강릉에서 근무할 때이다.
그러니까 1990년도 1월과 2월에 내린 눈에 대한 기억이다. (입사 후 88년부터 93년 초까지 첫 발령지로 강릉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나이 많으신 강릉 토박이 분들도 그런 눈은 처음이라 했다. 인접지역인 대관령이나 산간마을에 눈이 1미터 정도 내리는 일은 자주 볼 수 있으나 강릉 시내에 1미터 50센티미터가 넘는 눈이 내려 온통 시내가 마비된 일을 겪은 것이다.
1월 31일 밤 동료 직원들과 눈도 내리기에 날궂이 삼아 저녁 퇴근 후 술을 마셨다. 막걸리부터 쏘주 그리고 파전과 매운탕 등 그 날 운치에 맞는 온갖 안주를 벗삼아 술을 마시는 사이 생각보다 눈이 많이 내리고 있는 것이다. 잠시 번갈아 화장실 다녀올 때마다 동료들은 한마디씩 이구동성이다. 눈이 좀 많이 내리고 있다고. 1시간 간격으로 바라본 눈의 수치는 정말 장난이 아니었다. 무서울 만큼 빠른 속도로 눈이 쌓이고 있던 것이다. 결국 그 날 밤 내린 눈은 다음날 아침까지 무려 150센티가 내렸다. 말이 150센티이지 웬만한 초,중등 학생 키 정도이고, 곳곳에 세워둔 자동차는 묻혀버려 자취를 감춰버렸다. 강릉에서 시외버스로 40분 거리인 삼척에 사시는 분은 당연히 발을 동동 굴렸다. 이대로 가면 술먹다 교통두절로 집에 못 들어갈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술자리 분위기에 취해버린 그 선배는 귀가에 대한 고민을 잊은지 오래다. 그런데 그게 문제였다. 그 형님은 그 날부터 며칠 집에 돌아갈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날은 일단 회사 부근 여관에서 잠을 잤지만 다음날 교통이 완전히 두절된 상태에서 또 집에 못들어간다니 황당해진 모양이다. 같이 술먹은 우리들이 주범이 된 것이다. 다음날 아침 겨울 등반 때 착용하는 아이젠을 등산화에 꼭 동여매고 살금살금 출근했다. 교통편은 온통 마비된 상태이니 걸어갈 수밖에... 10분 정도 거리가 1시간 가까이 걸어 가까스로 출근했다. 출근 시간 지키는 건 이미 바랠 수 없는 비상사태였다. 비교적 가깝다는 주문진 사람들도 천재지변의 덕분으로 3일간 출근하지 못했다. 아마도 삼척 사는 그 형님은 그 날 술 안 먹고 집에 갔으면 한 일주일 휴가낼 수 있었을 게다.
그 날의 천재지변(?)으로 인구 20만 강릉 시내는 지도가 많이 바뀌게 된다. 영동권 유일한 실내 롤러스케이트장 스레이트 지붕이 무너졌고 (이후 폐쇄), 강릉 최대 규모 극장인 신영극장(역시 슬레이트 지붕) 지붕이 무너져 약 2년 이상 개보수 했으며, 한국관이라는 나이트클럽 역시 같은 이유로 무너졌고, 강릉상고 강당 역시 같은 이유로 무너졌던 것이다.
내린 눈은 군부대 단 한 대 뿐인 제설제거작업차로 여러 날을 치운 결과 시내가 예전의 모습을 조금씩 회복해 갔는데, 남대천에 버려진 눈은 그 해 5월까지 녹지 않았다.
그 때 눈 내린 모습 앞에 찍어둔 사진을 지금도 보면 가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