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김순임 작가의 전시철수후 그리고 김성남 작가의 작품 설치전 막간을 이용한 공연이 있었습니다.
공연은 즉석에서 이루어져 많은 분들을 청하지는 못하였으나 아주 긴장되고 새로운 경험이였습니다.
관객은 김순임 작가와 저.
부토댄스가 뭔지를 궁금해하던 히라노 아끼히로씨는 공연에 오라고 청하였으나 아쉽게도 홍대공연에는 늦어서 못봤답니다.
어제 화랑에서 다시 만난 히라노씨는 차를 마시던 중 갑자기 부토댄스를 하겠다고 말을 꺼내서 즉석공연이 이루어졌답니다.
부 토
모더니즘을 초월한 실험으로 떠 하나의 방향이 있었다. 포스트 모더니즘이 탈근대적이라며느, 부토는 전근대에로의 환원이었으며 이것도 역시 동양적 심신 일원론을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그 출발은 60연대 초반이기 때문에 이미 20년 이라는 세월을 경과하고 있다. 포스트 모던댄스가 60연대 중반이었으므로, 그보다 수년 빨리 부토는 출발해있었다. 1980년 낭시 연극제에서 오오노 가즈오, 산까이쥬크의 유럽에서의 등장은 "부토"가 세계 현대무용의 주역이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 이전에는 산발적인 공연스타일이었으나 80연대 이후의 인기는 실로 놀랄 만한 것이었으며 파리 오페라극자의 티켓은 살 수 있었으나 부토의 티켓은 거의 매진되었다. 1983년의 아비뇽 페스티발은 오오노를 비롯해 오오가와라가 처음으로 유럽에 등장했으며 다음 해 유럽 6개국 페스티발에는 쯔찌가따의 그룹이 참가하였다.
부토의 외견적 특징은 어느 정도 있다고 생각되지만 서로 다른 육체로의 변신을 꼽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부토의 무용가들은 몸에 하얗게 칠을 한다. 부토의 발생당시는 석탄을 풀어 하얗게 발랐지만, 갑각류 동물처럼 요철이 있고 묘한 느낌을 주었다. 최근에는 백분을 몸에 풀어 사용하므로 하얀농도는 가부끼 배우와 같은 정도이다. 이러한 하얀칠이 어떻게 부토에서 공통의 특징이 되었는지 오오노에게 물어보면 기술이 미숙하므로 하얀칠에 의존했다라고 하지만 그렇게 되면 부토를 하는 사람들은 입잔이 안처하다. 오오노 정도의 인물은 충분할 기술을 갖고 있기 때문에 별상관이 없지만, 그외의 인물들은 미숙자라는 것이 된다. 실제 오오노의 이러한 의견은 어느 정도 사실이라고 볼 수 있다. 부토는 개념이 확실한 것이기 때문에 테크닉이 불충분하더라도 성립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하얀칠은 현재 영국의 호모섹슈얼 무용단 린지켐프나 브라질의 맥 메이너 무용단에서도 볼 수 있다. 켐프의 무용단은 쟝 쥬네의 "꽃의 노트르담"에서 하얀칠을 하고 전나로 연기했으며, 멕 메이너 무용단은 브라질 산골의 나체족의 페스티발에서 하얗게 바르고 연기했다. 브라질의 흑인이 하얗게 바르며, 피부가 하얗게 되는 것이 아니라 재색이 되어 버리는게 무척 이상했지만, 어쨋든 하얀색을 바른 것은 사실이다.
민족 무용중에서는 오스트리아의 아폴로 신처럼 하얗게 바른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자연의 위험에 대한 공포로부터 숨기기 위해서 가면을 대신해 하얀칠을 했음에 틀림없다. 하얀칠에 의한 개성의 소멸이 행해져 그들은 평준화된 하나의 종족으로 환원되었으며, 공동체적 구성원이 된다.
부토의 하얀칠은 아마 끓어 오르는 정념의 억제와 다른 형태로 전환하려는 변신의 의지에 의해 지켜져왔다고 생각된다. 60연대 초기의 히지가따는 항상"none"이라고 계속 외쳤으며. "다르다"라고 토해내어 버리승이 말을 하고 있었다 그는 무용에 관해 사고를 계속 하면서도 부정을 계속해 자신의 의지가 돌출해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무용가는 정념을 토해내기 보다는, 억제하는 것을 선택한다. 감정보다는 형식을 취하는 것이다. 히지가따는 정념과의 싸움속에서 비뚤어진 형식을 간신히 선택했다.
그것이 하얀칠이었으며 눈을 부라리며 서 있는 부투의 형식이었다. 나는 농담으로 "부토의 특색은?"하고 질문 받았을 때 , "작품의 마지막부터 만드는 것이 부토입니다"라고 대답한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거기에는 더욱 깊은 의미가 있었다. 무용의 시간적인 구성으로부터 보면 휘날레와 마지막 인사는 시간의 짙은 화장이라 할 수 있으며, 그때까지 진행해온 무대상의 진행을 하얀칠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스토이 학파적인 기분과 정념의 자의적인 유출을 보여서는 안된다는 상류신사주의가 히지가까에게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오오노가 여장한 "디뷔에느", 히지가따의 "육체의 반란"이나 "장님" 그리고"미개인 집의 나비" 이들의 여러 가지 화려한 변신,오오가와라의 축제적인 외양에 무신경한 흐트러짐은 각각 몸의 변형을 추구하고 있는 것들이다. 하얀칠 뿐만이 아니라 머리를 완전히 깎아 버리거나 하는 것도, 그들의 변신에 대한 바램의 표출이라 할 수 있다. 어떤 형태이든지 간에 "부토"의 기본적인 태도는 자기육체의 부정이었으며, 강인한 변형이었다. 모더니즘을 초월, 극복하려는 전후사정를 보면 육체의 바보스러움까지 제도에 침잠된 인물이 부정을 거듭한 끝에 다시 재기하기에는 자신의 육체에 대한 폭력적 혐오가 없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60연대 초기의 히지가따는 폭력적인 부토를 만들어 호모섹슈얼의 주제를 취급했으며 육체에 상처를 내고, 육체의 해체를 향한 강한 의지가 보였다, 남자는 여자가 되는 것을 강요당했으며, 무용가들은 무엇이든지 상상의 괴물이나 야수가 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육체에 대한 이러한 폭력성은 당연히 세속적 윤리가 수용하지 않았으며 부토는 긴세월에 걸쳐 지하의 연극취급을 받았다.
부토의 변신은 "닥치는 대로 빼앗기는 육체"를 자신에게 반복 실험하는 과정속에서 출현한 것으로 바로크적인 변신과는 다른 것이다. 궁정발레가 어떤 장치를 이용해 등장인물의 이중성이나 끊임없는 변신을 장대한 구조로 만들어 누가 누구인지 해독 불가능한 실체상실의 공간을 나타내는 것은 에너지 불변의 법칙에서 보여지는 것같은 바로크의 사상이 배우에 있었기 때문이다. "부토"의 변신은 더욱 윤리적인 것이었다. 오오가와라의 "무용의 실험적 기계"처럼, 실험적 황당무계함을 강조하면 할수록 기본적 태도로서의 자기 해체의 욕망이 선명하게 부상해 온다.
유럽의 관객중에는 감동한 나머지 울기까지 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우리는 이러한 반응을 전혀 예상치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적잖이 놀랐다. 관객의 고층을 강화시키는 육체, 변형불곡을 감수하고 있는 육체, 그들 스스로는 불가능한 소우주를 해체함에 의해 세계를 부정하려 하는 의지를 본 것은 아닐까.
전근대적인 일본의 풍경같은 것이 아니다. 이러한 근대를 체험하고 있는 자가, 근대의 종말을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교차점에서 만난 감동이었던 것 같다고 생각한다.
이찌가와 미야비 작,최성옥 역 "무용의 코스몰로지" 중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