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도 재일대한기독교회의 전국 하기 교역자 장로연수회가 일본 큐슈지방의 나가사키에서 있었다. 일찍부터 서양문명의 영향을 짙게 받아온 나가시키시에는 교회당을 비롯해 서양식 건물이나 외국인 묘지 등이 남아있었으며 동서문화가 융합된 이국적인 정서가 깃든 도시로 전체가 일종의 박물관과 같았다.
그런데 이미 2개월이 지났는데 아직도 가슴에 남는 인물이 있다. 聖母의 騎士修道院이란 곳에서 알게된 코르베신부이다. 그는 1894년에 폴란드에서 가난한 직물직공의 집에서 태어나 1930년 4월24일에 36세의 젊은 나이에 폴란드의 2명의 수도사와 함께 나가사키에 상륙하였다. 극빈의 상황하에 彦山라는 곳에 수도원을 세워서 선교사의 사역을 하였다. 1936년5월, 회의에 참석차 고국 폴란드에 귀국하였지만 이윽고 제2차세계대전이 발발하여 신부라는 것과 나치스에 비협력적이라는 이유로 체포되어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 수감되었다.
그는 원래 몸이 허약한 코르베신부였지만 강제노동에 종사하면서 수용자들의 상담역으로서 죽어가는 자들을 위해 기도를 드리며 사람들에게 희망을 안겨주는 존재였다. 그런데 어느날에 한사람이 살벌한 수용소에서 탈주를 하고 말았다. 수용소 내에서는 한사람이 탈주하면 남은 자들 가운데 대신 10명이 사형집행을 당하고마는 엄한 규칙이 있었다.
수용소 내에서 무작위로 10명이 뽑히는데 사형중에서 가장 엄한 굶어죽이는 餓死刑이 선고되었다. 그 때 코르베신부는 10명중에 포함되지는 않았었다. 아사형의 선고를 받은 10명의 죄없는 사람들이 지하의 아사실로 걷기 시작할 때였다. 그 중의 한 남자가 부르짖기 시작했다. “내게는 처자식이 있다. 여기서 죽기싫다.” 라고 울부짖었다. 그 때에 코르베신부는 “저 남자를 살려주길 바란다. 나는 신부요. 내가 대신 아사형을 받겠소”라고 나섰다.
지하의 아사실에 갇힌 10명의 사람들은 물 한모금도 마시지못하면서 하나하나씩 죽어갔다. 14일이 지난 후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있던 코르베신부를 석회수가 든 독약의 주사로 죽게했다는 설명을 들었다. 평온한 표정으로 자기의 팔을 내어 밀며 주사를 받으며 죽어갔다고 당시 담당자로부터의 증언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이윽고 4년후 1945년에 전쟁이 종식되어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가 개방되었을 때에 기적의 소리가 전달되었다는 것이다. “자기가 아사형으로 죽어야 할 것인데 코르베신부 덕에 살아난 자”라고 고백하는 이가 있었다는 것이다. 400백만명의 희생자가 있었던 아우슈비츠에서의 생존자 중에 처자식 때문에 죽을 수 없다고 부르짖었던 그가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그의 이름은 가이오니체크 씨인데 그는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코르베신부는 나 한 사람을 위하여서라기 보다도 극악비도의 나치스와 목숨을 걸고 싸워 승리하였습니다.”
그리고 극한의 고통 속에서 그리스도께 나아가 미움을 사랑으로 승화하며 말한 코르베신부의 말이 오늘 밤에도 무겁게 메아리쳐온다.
“미움으로는 아무 것도 낳을 수 없다. 사랑만이 창조한다.”
그렇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은 없다는 주님의 말씀이 기억난다.(요한복음15:13)
첫댓글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