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까지 많은 예언가들이 예수님의 재림 또는 세상의 종말을 점쳤으나
헛수고였다.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서는 아마 일선의 선교사야말로 가장
민감한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선교가
끝이 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 그 죽음의 대명사를 지니고 살았던 초대교회 성도들과 사도 바울은 임박한 재림사상이 저들의 힘이요, 소망이었을 것이다.
일제시대의 억압과 6·25동란의 소용돌이 속에 힘겹게 살아가던 믿음의 선조들도 "먼 하늘 이상한 구름만 떠도 행여나 고대하는 주님이 오시는가" 하면서 예수님의 재림을 사모하였단다. 얼굴이 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사회적으로 압박과 설움을 삼켜야만 했던 이곳의 흑인들도 'He is coming'이라는 영가를 통해 힘과 위로를 받았음이
분명하다.
90년대 초 전국을 떠들썩했던 다미선교회의 10·28 재림 사건 때에 주변의
잘 믿는다는 분들도 혹시나 그들의 믿음대로 진짜 예수님이 재림한다면
어떡하나 걱정하는 것을 보았다. 언젠가 일간 스포츠의 해외 토픽에
예수님이 공중 재림하는 것과 같은, 그럴듯한 사진과 해설기사가 실렸다.
그때 많은 교인들이 그 한 장의 사진에도 혹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러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고 말씀하신 지도 어언 2000년이 흘렀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여전히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고 말씀하신다.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벧전 3:8)고 하셨다.
따라서 인간의 상식적인 시간 개념으로 '속히'라는 의미가 2000년 이상이
될 수도 있다는 해석은 상상할 수 없는 이야기이지만, 이 말씀에 문자
그대로 비추어 본다면 이제 겨우 이틀이 지났을 뿐이다.
예수님은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24:14)고 하였다. 이 말씀에 근거하여 종말론적인 비상전도운동이었던 'AD 2000년까지 모든 민족의 복음화, 제자화' 운동을 기억한다. "2000년까지 전세계를 복음화하자" "주의 재림을 앞당기는 길은 선교이다"라고 하여 균형 잡힌 성경적 재림관을 제쳐두고 재림의 임박성에만 초점을 맞추어 선교를 강조하였거나 교회 봉사의 열심을 강조한 교회는 아마 2000년이 지나면서 조금은 딜레마에 빠지고 말았을 것이다. 이런 구호나 발상이 자칫하면 재림의 진리 자체를 불신할 수도 있고, 선교를 약화시킬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통계적으로 50억의 세계 인구종교 분포도를 보면 대략 카톨릭 및 동방정교가 11억, 이슬람 9억, 흰두교 7억, 불교 3억, 개신교 4억(8%), 기타로 대별되고, 매일 약20만여 명이 죽고, 약35만여 명의 예수를 알지 못하는 신생아들이 출생을 한다. 무슬림 국가에서 선교사 한 사람이 실제로 연간 한 영혼을 건지는 것도 어려운 현실을 생각해보라.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인구 폭발과 현저하게 기독교가 쇠퇴하여 과거에 선교국에서 피선교국으로 전락하고 있는
서구 유럽의 기독교의 추세를 감안한다면 세계복음화는 묘연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믿음 없는 소리 같지만 산술적으로 세계복음화는 전혀 가능성이
없는 미해결의 숙제로 던져질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꼭 그런 부정적인 견해만 있는 것도 아니다. 일례로 2020군(軍)
선교전략에 따르면 연 장병 22만 명에게 복음을 전하고 사회 연계파송 단계를 거쳐 연 25만 명을 십자군병으로 사회에 파송하면 2020년에는 남한의 75% 민족복음화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략이다. 사실 이런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도 있는 전략이기도 하다.
교회의 내일은 오늘의 어린이 선교에 달려 있다. 5-10 윈도우 전략은 연령별 전도 전략의 하나로 가장 접근하기 쉬운 아이디어이면서 가장 소홀하기 쉬운 사역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어떤 면에서 무한정 투자만 있고 이렇다 하게 눈에 보이는 것도 없고 손에 잡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아무튼 유아원에서 초등학교 저학년을 대상으로 공략하는 이 어린이 주일학교 사역은 요즘 핵가족 시대에 가정에서 왕초 노릇을 하는 아이들에게 전도의 초점을 두는 것이다. 이 왕초들을 잡아 천국의 아름다운 왕초들을 만들고, 더 나아가 이들을 통해 불신 가족에게 효과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매우 흥미 있는 맞춤 전도전략이다.
랄프 윈터가 주창했던 미전도종족 선교전략과 더불어 와그너의 10/40 윈도우라는 아이디어가 한동안 히트를 쳤다. 요즘은 다시 전방선교(frontier mission)라는 옷을 갈아 입고 등장하고 있지만, 말 바꾸기일뿐 같은 전략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전략이 남은 과업에 대한 구체적인 선교 정보와 목표를 제시함으로 기도와 관심을 불러 일으켰으나 선교의 실제 면에서는 종족 입양이나 선교지 정탐 정도의 수준에서 만족해야만 하는 현실과 상당히 거리가 있는 이론이라고 할 수도 있다.
세계선교대회 때마다 단골 메뉴로 각광을 받았던 이 운동의 결과라 할 수
있는 미전도종족을 대상으로 일하는 실제 선교사가 전체 선교사의 2.4%밖에 안 된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미전도종족을 입양하고 정탐했다면
그 다음 후속 단계는 뭘 해야 하는가? 이쯤에서 겸손하게 그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 양식 있는 전략가다운 바른 자세다.
도대체 남은 과업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세계선교전략(수6장) 이라는 측면에서 충분히 예측 가능하고 타당한 것인가? 왜 지금까지 미전도종족이 남은
과업으로 남아 있는가? 이런 지역들은 아직 문이 닫혀 선교가 불가능하거나 선교사의 생존 자체가 어려운 특수지역이다. 이런 특수지역이 바로 현대
선교전략이니 그렇지 않은 곳은 마치 선교지가 아니거나 별볼일 없는 것인 양 오도하는 것은 선교지를 어렵게 생각하도록 함으로 선교의 동기를 위축
시켜 결과적으로 교회의 선교를 축소시키는 또 하나의 장벽이 아니었는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
예컨대 적과 대치하고 있는 곳을 전방이라고 할 때 전방(前方)에만 군인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후방에도 필요하고, 전후방이 있는 육군, 해군이 있어야 하고, 전후방에 관계없이 어느 곳에나 날아갈 수 있는 공군이나 해병대가 필요하듯, 다양한 전략에 의한 다양한 전력(戰力)이 필요한 것이다. 차라리 전방(前方)보다는 복음이 필요한 그 어디나 동서남북 전방위(全方位, Ubiquitous, 제3의 정보혁명) 전략이라도 도입한다면 오히려 낫지 않을까.
미전도종족이라는 변별도가 분명한 선교지는 소명과 목표의식이 남다른 선교단체나 개인을 중심으로 이 일을 밀도 있게 끌고 나가면서 관심 있는 분들이 따라 올 수 있도록 모델을 보여주고 동기를 부여하는 방향으로 나가면 된다. 이런 특수지역을 위한 특수전략을 보편적인 전체 선교사나 전 교회에 적용시키려 하는 것은 전략의 한 난센스다.
그것이 대표적인 선교 전략의 하나일 수는 있지만 결코 전부는 아니다. 그렇게 되어서도 안된다. 이런 특수전략이 마치 현대 세계선교전략의 마스코트인양 획일적으로 몰고 가는 것은 여전히 내부에 잠재된 군사문화적 발상인 것이다. 개인이나 선교단체가 받은 소명을 깡그리 무시한 채 "이것이 최선의 전략이니 나를 따르라"고 윽박지르고 아무런 평가나 비판도 없이 거기 장단을 맞추는 선교단체들도 가관이다.
AIM은 100년이 훨씬 지난 오늘 날에도 아프리카에서 묵묵히 복음을 전하고 있다. 한 스코틀란드장로교 선교부는 60년이 지난 지금도 선교 현지 교단과 신학교를 물심양면으로 전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미국 남침례교 선교부에서도 이곳 침례교신학교에 교수요원을 파송하고 교회를 개척하고 있다. 영국의 한 선교단체는 최근 이곳에 10개의 유치원을 세우도록 지원하였다. 미국의 한 선교단체는 한 농촌지역에 신학교를 세워 교회 지도자들을 양성하고 있다. SIM 역시 나름대로 무슬림 전도라는 특수한 사역과 함께 교회 개척도 활발히 전개하고 있다. SGM이라는 단체는 아주 다양한 언어의 다양한 전도지를 무료로 공급하는 사역을 계속하고 있다.
한국의 내로라하는 선교 전략가들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대로 한다면 미전도종족이나 인적이 드문 오지로 가는 선교사를 제외하고, 아프리카나 중남미 러시아 같은 이른바 기독교 복음화율이 높은 곳에서 일하는 선교사는 있으나마나한 천덕꾸러기 선교사로 낙인 찍히기 십상이다.
한국 교회의 선교 전략이 성령께서 요청하신 다양한 특성을 무시하고 다양한 부르심과 다양한 선교지의 소명을 도외시한 채 어떤 한 미국 선교전략가의 이론이 전부인 양 여과 없이 일방적으로 국내 선교의 전략에 주입하려는 그런 단세포적인 발상을 계속한다면 더이상 설득력이 없다.
세계선교는 선교 전략가들의 컴퓨터와 날렵한 손끝으로 두들기는 계산기나 요란한 구호 속에서 나온다기보다는 선교의 대가이신 성령의 이끌림에 순종하여 한 생명을 건지기 위해 가라는 곳에 가고, 살라는 곳에 살고, 죽으라는 곳에서 죽고자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의 무릎에서 나온다.
예수님의 재림이 앞으로 2000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 할지라도 이것은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 그것이 영혼 구원의 긴급성을 저해하거나 세계선교를 후퇴시키는 동기일 수는 결코 없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재림과 세계선교의 완전과 성취는 인간이 예측 불가능한 하나님의 신비한 절대 주권이다(행 1:7). 그럼에도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벧후 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