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법음루]에는 법고가 있다.
나한상이 봉안되어 있는 석실과 세 개의 홍예문
석실앞에 맷돌
[오백나한]과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다고 하는 33관음보탑
부처님의 누워 계신 모습의 와불전은
[마애석불좌상]을 보러 간다. 계단을 오르고 공덕비를 지난다. 즐비하게 걸린 연등이 곱고
백일동안 소원을 담아 100일 후 축원과
"그 이름을 듣고
일심으로 그 이름을 부르면
곧 음성을 살피시어
모든 소원을 이루어주시다'란 마애불 소원지의 나무데크에는 소원을 염원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더이다.
가족건강,
소원성취
서해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산중턱 눈썹바위에 마애석불좌상이 새겨져있다.
[마애석불좌상]은 1928년에 금강산 표훈사의 승려인 이화응이 보문사 주지 배선주와 함께 조각한 것으로 높이 9.2m, 폭 3.3m이다.
석불좌상의 상부에는 거대한 눈썹바위가 있고 좌측에는 비명(碑銘)이 있으며 불상앞에는 석등이 있다. 이 석불과 석굴에서 기도
를 하면 아이를 가질 수 있다고 하여 찾는 여인의 발길이 그치지 않는다고 한다.
마애석불좌상앞에서 바라본 서해바다를 바라 보며 삼산면에 살던 한 어부가 바다 속에 그물을 던져 그물에 건져 올린 돌덩이 이야
기를 기억한다. 버스안에서 회장님도 이 이야기를 해 주기에 미리 공부를 하였는가 했더니 누님이 강화도에 살아 몇 번 와 본 곳
으로 보문사의 이야기까지 알고 있었다.
대한불교조계종 직영사찰로서, 우리 나라 3대 관음영지(觀音靈地) 중의 한 곳이다. 이 절의 창건에는 다음과 같은 연기설화(緣起說話)가 전한다.
635년(선덕여왕 4) 4월, 삼산면에 살던 한 어부가 바다 속에 그물을 던졌더니 인형 비슷한 돌덩이 22개가 함께 올라왔다. 실망한 어부는 돌덩이들을 즉시 바다로 던져 버리고 다시 그물을 쳤지만 역시 건져 올린 것은 돌덩이였으므로 다시 바다에 던졌다.
그날 밤, 어부의 꿈에 한 노승이 나타나서 귀중한 것을 바다에 두 번씩이나 던졌다고 책망하면서, 내일 다시 돌덩이를 건지거든 명산에 잘 봉안해 줄 것을 당부하였다. 다음날 22개의 돌덩이를 건져 올린 어부는 노승이 일러준 대로 낙가산으로 이들을 옮겼는데, 현재의 석굴 부근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돌이 무거워져서 더 이상은 나아갈 수 없었으므로 “바로 이곳이 영장(靈場)이구나.” 하고는 굴 안에 단(壇)을 모아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
마애석불좌상을 내려와 바위 위에 1,000명이 앉을 수 있다고 하여 천인대라 명명하였다는 천인대와 "甘露茶院'이란 찻집앞에
나는 서 있었다.
대추차를 마실까.
쌍화차를 마실까.
매실차가 좋겠지
그와 곁들인 백설기까지
혼자 중얼거리다
함께 했던 통장님들이 보이지 않는다.
내려가자.
내 시간은 여기까진걸,
경밖 어느 주점에 있다.
막걸리와 도토리묵에 새우튀김이 나온다.
막걸리 한사발과 안주에
목을 타고 내려간다.
그렇게 보문사 경내를 나왔다. 1983년 어느 겨울날 혼자 보문사로 와 친구와 약속했던 그 자리에서 친구와 만나 경내를 둘러 보았
던 기억을 찾으려 했는데 30년이 흐른 시간은 눈썹바위에 새긴 마애석불좌상이 무뎌지고 불란으로 친구도 다시는 볼 수 없는 지금이
려니,
'성불하십시요, 보문사입니다. 온누리에 가득한 부처님의 자비를 알아가는 곳 보문사를 떠난다'
제석봉평화전망대에 도착, 이곳도 두 번째 와 보는 곳이다.
이곳 제석봉평화전망대는 실향민들을 위한 곳으로 아픔의 역사와 분단의 현장이기도 한 임진강 건너 북녘땅이 지척에 있다.
손에 잡힐 듯 산하가 보이고 북녘의 실생활을 직접 볼 수 있는 가까운 곳이다.
발길마저 먼저 평화의 전망대 옆에 세워진 제석봉앞에 서 있고 제석봉에 쓰여진 글에 눈이 간다.
애기봉에서 제석봉으로 고쳐부른 이유를 알게 되고 그 당시 민주공화당 의장이었고 국무총리를 지낸 김종필님의 친필도 알게 된다.
'연성대첩비'뒤에 새겨진
피한(彼恨)의 글을 옮겨본다
나의 조국 금수강산
두 동강이로 허리를 잘라
강화도를 휘감아
한강수는 유유히 흐르고
하루에도 두 차례
거슬러 오르고 다시 내려가는
피눈물 고인 짙은 물줄기
뚝 건너
한 많은 사연이 있어
애절한 신음소리 끊이지 않고
한 핏줄 내 형제를 바라보며
손짓해도 못 본채 외면하면
목놓아 다시 불러 보아도
메아리 조차 허공으로 빗겨가니
좁은 가슴에 스미는 설음일랑
이곳에 묻어 두고
찬란한 미래의 꿈으로
비둘리 나래를 펴리니
가까우면서도 멀고 먼
강 건너에
아름다운 무지개 다리 놓아
단숨에 가고 오며
통일의 찬가를 부르리라
1974년 11월 3일
강화도 최북단 7080p에서
북녘땅을 바라보며
해병 소령 김훈중
전망대로 올라가 박무가 끼어 흐릿한 북녘을 바라다 본다.
임진강을 건너야 되기에 못가는가.
하늘을 날 수 있다면
아까 보았던 갈매기라면 좋겠다.
'산중턱까지 밭을 개간한 농촌'도 보이고 묘지들도 보이고 있네요. 하는 말들이 뭉쿨하고
'밭일 하는 주민과 집앞에 빨래를 건조중'인 모습을 사진으로 보게 된다. 아주 오래된 집들이 산에 있고
'자전거로 이동중인 주민'들을 포착한 것도 그렇고 산위에 나무가 벌거숭이 되어 걱정스럽다.
또한 저것 뿐이랴.
북녘땅의 송악산이 가물거린다.
애써 저기를 눈에 넣으려 하는게 왠지 서글퍼서 그만 접어야 겠다. 북녘을 지워야겠다.
[제석봉], 김종필 공화당 의장의 친필이 걸려 있다.
[제석봉을 명명한 공정식 사령관의 수도탈환 32주년 기념 휘호]도 걸려 있고
그당시 제석봉 행사에 참가한 귀빈중 김종필 공화당 의장의 모습으로 지금 보니 젊었네.. 하기야 줄을 잘 서서 일찍
망배단 (望拜壇)
에는 그리운 금강산 노래비와 북녘땅 사진이 대신하고 있다.
전망대를 나와서도 이곳에서 근무하던 해병의 피한(彼恨) 시비가 꺼지질 않았다. 혼자서 저 먼길을 언제 갈 수 있으랴
하는 아련한 희망을 기약하며 버스에 올랐다.
나 혼자 버스에 앉아 같이 한 이들이 올때까지 먼 산을 바라 보았다. 우리는 전쟁이란 아픔을 모르기에 저 곳을 모르지
철조망이 쳐진 강을 따라 북으로 거슬러 갔다. 버스에서 검문을 통과하여 처음 와 보는 더 이상 갈 수 없는 곳까지, 논
과 강을 사이에 두고 버스가 도착한 곳은 보구곶리가 보이는 강화읍 연미정 월곶리였다. 유도는 행정구역상 우리나라
지만 갈 수 없는 한강의 아주 작은 섬이 바로 있었다.
'총살'이란 단어가 머리를 스친다. 한남정맥의 첫발을 딛던 어느 날 그곳을 생각하며 오리고기를 먹었다. 강화도는
기쁨보다 아픔이란 단어가 더 많이 떠오르는 곳이란걸 알기에 잠시 잊고 있었는가 보다.
버스는 달렸다. 내가 살고 있는 보금자리앞에 우리를 내려 놓았다. 오면서 질러대던 목소리가 강화도의 슬픈 역사를
그들은 목청높혀 부르고 있는것 같았다.
첫댓글 강화의 역사를 잘 표현했네요.
우리 모두의 아픔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볼거리가 많아 가 볼만한 곳이기도 하다는 것을...
글을보니 잘 지내고 있는것 같네요. 아무쪼록 건강관리 잘하소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