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 연혁
강양(江陽)은 경상남도 합천군(陜川郡)의 옛 이름으로 신라 초기에는 대양주군(大良州郡) 또는 대야군(大倻郡)으로 불리었다. 565년(신라 진흥왕 26)에 대양주(大良州)를 설치하였으며, 661년(무열왕 8)에 압량주도독(押梁州都督)을 옮겨왔다. 757년(경덕왕 16)에 강양군(江陽郡)으로 개칭되었다. 고려 현종 때에는 왕비 이씨의 고향이라 하여 합주군(陜州郡)로 승격하였으며, 거창군(居昌郡), 삼기현(三岐縣), 야로현(冶爐縣) 등 11개현을 속현으로 두었다. 조선 태종 때 합천군(陜川郡)으로 개편되었고,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진주부 합천군이 되었고, 1896년 경상남도 합천군이 되었다. 1914년에 군면 폐합으로 삼가(三嘉)·초계(草溪)·합천의 3개 현을 병합하여 합천면이 되었다가 1979년 합천읍으로 승격하였다.
성씨의 역사
강양이씨(江陽李氏) 시조 이초(李超)는 고려시대에 사재령(司宰令)을 지냈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는 합천이씨의 시조 이개(李開)의 후손이라고 되어 있으므로 합천이씨와 강양이씨는 근원이 같음을 알 수 있다. 강양군(江陽君) 이개는 합천이씨의 도시조(都始祖)인 문선공(文宣公) 이알평(李謁平)의 39세손이다. 그는 신라 말의 충신으로 고려가 건국되자 태조에게 불복하여 관직이 가수현장(嘉樹縣長) 및 합천호장(陜川戶長)으로 강등되었다. 이후 합천읍 중흥동(中興洞)에 만서정(晩捿亭)을 짓고 여생을 보내다가 경순왕의 흉보를 듣고 순국하였다. 고려시대에 정몽주(鄭夢周)·이색(李穡)의 건의로 문충공(文忠公)의 시호를 받았다.
분적종 및 분파
강양이씨는 합천이씨에서 분적한 성씨이다. 강양이씨는 9세손과 10세손에 이르러 11개파로 분파되었다.
참지공파(參知公派): 이양실(李良實)·이양진(李良眞)
전객령공파(典客令公派): 이림(李琳)
전서공파(典書公派): 이수전(李守全)
병사공파(兵使公派): 이기(李起)
교리공파(校理公派): 이필(李䟆)
첨사공파(詹事公派): 이공실(李公實)
목사공파(牧使公派): 이공주(李公柱)
부사공파(府使公派): 이세방(李世芳)
제학공파(提學公派): 이원경(李元慶)
상서공파(尙書公派): 이춘계(李春啓)
주요 세거지
경상남도 합천시 합천읍 금양리
경상남도 진주시 일대
경상남도 사천시 일원
경상남도 의령군 일원
경상북도 금천시 일원
경상남도 김해시 이북면 장방리
인구분포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강양이씨는 582가구 총 1,903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