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신새벽.
이제 조금있으면 그 곳은 집집마다 깨어나 세배하고 제수음식 준비하는 손길로 부산스러워지겠네요.
설날이면 "동네 사람 먼저 세배 오기전에 빨랑 일어나라"며 서둘러 깨우시던 친정아버지 음성이 바로 들리는 듯 한데 가신지 벌써 한 해가 되었습니다.
설을 맞고보니 이국에서 썰렁하게 맞게 되는 명절이라서라기보다
작년 꼭 이맘때 돌아가신 친정아버지 생각으로,
더욱이는 마지막 가시는 길을 뵙지못한 자책으로 더 미어집니다.
새삼스레 당시 장례치르고 작은오빠가 제게 보낸 오래된 파일을 열어 다시금 정독해보았습니다.
다시금 염치없이 눈물이 납니다.
며칠 전 우리 형제들이 완도에서 모인 자리에서 들은 눈물 섞인 네 목소리는 너무나 안타까웠다. 같이 하지 못한 너나 오서방은 또 옆에서 얼마나 상심이 컸겠니. 이렇게 허망하게 돌아가실 줄 누가 알았겠나. 그럴 줄 알았다면 네가 아버님과 생전에 전화통화라도 하게 할 걸.
짧은 전화로 다하지 못한 궁금함을 풀어주기 위해, 그리고 향수나 그리움이 사무친 네가 자칫 마음과 건강이 상할까 염려하는 마음에 나는 감히 필을 들 용기를 내게 되었다. 아버님 장례를 치르기까지의 경과를 시시콜콜 여기 적어 보내마. 너의 외로움과 안타까움과 객고(客苦)를 달래도록 하자는 뜻도 있고, 또 이렇게 글로 적어보내다 보면 내 스스로의 마음도 정리되지 않겠나 하는 뜻도 있다.
오 서방은 잘 있는지. 아마 몸이 좀 나지 않았을까. 아니 살이 좀 빠졌으리 싶기도 하다. 무엇보다 음식걱정이 많이 된다. 아이들은 그쪽 음식 맛에 쉬 적응이 되겠지만 이미 입맛과 식성이 굳어진 사람이 물맛 다르고 기후도 다른 그곳에서 아무리 우리 식으로 음식을 해 먹은들 그 맛 그 향기를 느낄 수 있을는지. 아이들은 새 풍물에 접하여 재미가 있으리라 싶지만 너나 오 서방은 많이도 적적하겠지. 사람이 주체적인 일을 떠나 있으면 외롭고 쓸쓸한 법인데, 각오하고 떠난 길이라 잘 이겨내고 있으리라 믿는다.
물론 종명이 종갑이도 건강하게 잘 있겠지. 우선은 말이 낯설 텐데 잘 적응하고 있는지. 종명이는 키도 많이 크고 아주 의젓하게 동생을 잘 챙기리 싶다. 종갑이는 뚝뚝하지만 씩씩하고 재치있게 형이나 아빠 엄마를 즐겁게 해 주겠지. 두 녀석의 모습이 눈앞에 그림처럼 삼삼하다.
현정아, 오늘로써 아버님이 돌아가신 지 꼭 10일이 됐다. 지금이라도 해동 집으로 전화를 하면 당장 떠듬떠듬 흐릿한 아버님의 목소리를 들을 것만 같다. 아직 돌아가신 것이 실감이 나지 않는다. 두고두고 가슴 저리게 생각나겠지. 아버님이 우리들 곁에 없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머리를 스칠 때마다 다시금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구나.
현정아. 아버님의 장례식을 그야말로 무사히 치렀으니 우선 너의 마음을 잘 다스려라. 우린 홀린 듯 엄벙덤벙 열흘이 후딱 지나갔다. 산다는 것이 왜 이렇게 허망한 것인지. 살아있다는 것이 얼마나 불안전한 것인지. 보고 싶은데 볼 수 없다는 것, 만나야 하는데 이젠 만날 수 없다는 것, 번갯불처럼 왔다 갈 수 없는 너는 정말 너무 멀리 있구나. 반찬을 만들다가 말고 길을 걷다가 말고 눈시울을 적실 네가 생각난다. 아버님은 모든 걸 용서하신다. 눈물을 흘리고 울부짖는 것이 가신 아버님을 올바르게 보내드리는 것은 아닐 것이다. 기쁘게 축복하면서 보내는 것. 눈물이 아닌 새로운 맹세가 되고 출발이 되는 것. 그렇다고 가슴속에 새겨진 슬픔이 쉬 지워지랴. 세월이 가 먼 훗날에는 아마 엄마를 잃었을 때처럼 천천히 그리고 담담히 아버지를 추억할 수 있겠지.
다시 말하지만 아버님이 돌아가시기까지 그리고 돌아가신 후의 과정을 약간 소상히 적는 것은 너의 슬픔과 안타까움을 덜어주고 그쪽에서의 생활에 행여 빈틈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고, 너와 오서방은 이것을 읽음으로써 멀리 있었어도 장례에 같이 참예한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자책과 회오의 마음을 쓸어 내릴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우리 모두 바라는 바이다.
아버님은 잘 알다시피 네가 미국에 간 후에도 시난고난 계속 앓아왔다. 어머님의 얘기로는, 그전과 달리 작년에는 아버님이 화장실만 왔다갔다할 뿐 방안에서 틀어앉아 통 나오질 않고 계속 잠만 잤다고 했다. 동네 사람들 얘기로는 그것을 저승잠이래나.
겨울은 노인분들에게는 힘든 계절이다. 아버님의 병세가 결정적으로 악화된 것은 올해 설을 전후로 한 시기였다. 작년 11월 중순에서 11월 말경까지 보름 정도 순천향병원에 입원해 계셨으니 그때부터 아버님의 건강이 퍽 안 좋아지기 시작한 것 같다. 그래도 그때는 화장실을 걸어다니셨고 음식도 그런 대로 잘 드셨으니 그간의 병세와는 별로 다른 것이 없어 우린 크게 걱정하진 않았다. 폐가 좀 안 좋다고 했지만 쾌차하셨다. 그때도 형님 내외분이 간병하시느라 고생하셨다.
올해 1월 4일 경쯤에 나는 아버님의 병세가 심상치 않다는 어머님의 전화를 받고 함평에 갔다. 입맛이 없어 미음이나 미숫가루나 곰탕국물로 식사를 대신하고 있었다. 엄지발가락에 종기가 났는데 그게 낳지 않고 계속 커지는 것이 심상치가 않아 보였다. 병원에 입원을 시켜야 될 것 같아 형님과 상의한 결과 대학 원서관계도 있고 해서 영재가 아버님을 기차로 순천향병원에 모시고 가도록 했다.
그리고 1월 6일 어머님 제삿날엔 아버님을 병원에 두고 형님 집에서 제사를 모시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님이 기동을 잘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 날은 형식이가 병원에서 간병을 했다. 내가 제사를 모시러 형님 집에 들렀을 때는 형미가 전을 지지고 있었다. 대학에 (성심여대와 통합한 부천의 카톨릭대학 자연계열)에 합격해서인지 해낙낙한 얼굴로 약간 까불거리면서 말이다. 내가 여기서 까불거린다고 얘기함은 형미가 여자란 시집가기 전에 남자를 많이 사귀면 사귈수록 좋은 남자를 발견할 수 있다는 나름의 논리에 우리 모두 깜짝 놀랐기 때문이다. 많이 사귀지 않아도 좋은 사람을 단박에 만날 수 있는 실례로써 현정이 너와 오서방의 만남을 거론하는 것만큼 적절하면서도 효과가 있는 것은 없었다. 형미는 피, 유머도 못하나 하면서 자신의 의견을 철회해 결국 심각해 있는 우리 모두를 웃겨버렸다.
그날 제사에는 영심이누나, 영욱형, 신앙촌 작은어머니, 서울 작은어머니 내외가 참석했다. 칭찬이 인색하다 싶은 서울 작은어머니께선 훈이 색싯감 이야기가 나올 때면 입이 쩍쩍 벌어져 다물 줄을 몰랐다.
"갸가 서글서글햐. 얼굴은 좀 못 생겼다 싶어도 말하는 것을 들으면 맘에 쏘옥 든당게. 내가 생각혀도 내 성질은 내 참 싫은디, 야는 사납지도 않고 사근사근 붙임성이 있는 데다 그렇다고 순둥이냐 허면 그것도 아니랑게."
훈이는 올해부터 강원도 태백에서 서울 본사로 와서 근무를 한다 했다. 영심이 누나가 중매를 했는데 교회에서 제일 참한 색싯감이라나. 내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니면 장로의 따님이라지 아마. 맛난 것 먹여주고 싶으면 훈이는 빼놓고 고부끼리 만나 같이 외식을 할 정도라니 이렇게 재미진 고부간이 어디 있겠나. 네가 듣기에도 좀 어리둥절하겠지만 그러나 그것은 엄연한 현실이란다. 세상에는 이외의 즐거움이 이렇게 많이 널려 있나 보다. 작은어머니는 보석같이 작지만 큰 즐거움을 찾지 않았나 싶다. 올해 4월 7일 토요일로 결혼식 날을 잡았단다.
제사 다음날 우리 내외는 형님 차로 아버님 면회를 갔다. 눈이 펑펑 쏟아지는 거리는 온통 회색 빛이었다. 눈이 쏟아지면 좋기도 하겠지만 그날은 어째 그런 느낌이었다. 차창 밖에는 형님 말 표현대로 정말 붐비치듯이 눈이 내렸다. 형님은 어린 시절 학다리들에 내리던 눈을 생각했었나 보다. 아버님은 침대에 말간 얼굴로 조용히 누워 계셨다. 혈색은 좋으셨지만 숨차하셨고 그전처럼 의사표현을 잘 하지 못하셨다. 아버님을 떠나올 땐 어쩐지 가슴이 자르르 저려왔었다. 그 날의 일기장(2000.1.7일)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 아버님을 뵈었다. 파리하게 야윈 얼굴을 보니 마음이 아프다. 인간이란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이렇게 무력해지는 것인가.
그토록 엄격하고 강하신 분이 이렇게 작은 모습으로 야윈 얼굴로 자신의 몸도 잘 가누지 못하는 모습으로 누워 있었다.
어떤 말이라도 했으면 보는 자식들의 마음도 개운하련마는. 자신을 표현할 수 없는 인간이란 얼마나 안타까운가. 무슨 얘기도 하지 못하는 아버님. 이러다가 이러다가 정말 가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드는 것은 어쩐 일일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이렇게 제한되어 있다는 것이 너무나 가슴 아프다. >>
그날 난 짧은 서울 일정이라 씁쓸한 가슴을 안고 해남으로 내려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나는 글에 몰두한답시고 해남의 한 암자에 있었다.
금방 퇴원하실 것으로 생각했던 아버님께선 그때부터 구정인 1월 22일까지 병원에 계셨다. 그런데 아버님은 발가락의 종기가 문제가 아니었다. 폐는 얇아져 제 기능을 못한다 했으며 게다가 폐에 물이 차 있어 물을 빼내야 한다고 했다. 형식이 형미가 형수님을 교대하여 손자 손녀 노릇을 톡톡히 했다. 하지만 아버님이 대소변도 가리지 못해 형수님이 무척 고생하셨다. 부부지간이라면 모르겠지만 그게 누구나 쉽게 해낼 그런 일이 아니었던가 싶다. 우리는 형수님의 수고와 고충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형수님은 아마 형님, 시아버지 간병으로 정말 병원이라면 신물이 날 게다.
나는 그 당시 무리하지 말고 설 명절을 서울에서 쇠는 것이 어쩌겠느냐고 형님께 얘기했는데 형님께서는 아버님의 병세를 보아가며 결정하자고 했다. 나는 서울로 올라가든지 결정을 해야겠기에 구정 전전날 형님께 전화를 했더니 시골에서 쇠는 것으로 알라고 했다. 아버님이 자꾸 시골로 내려가자고 한다고 했다. 눈을 감더라도 고향에서 눈을 감고 싶어해서였는지, 병치레로 형수님을 고생시키는 것이 미안해서였는지, 명절에 대한 평소의 소신 때문이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아무튼 영선이가 자기 차로(소나타 중고차를 샀단다) 운전하여 아버님을 모시고 함평으로 내려와 설을 쇠게 됐다.
설날 아버님은 불편한 몸을 일으켜 세배를 받고 며느리 손자들에게 세뱃돈까지 챙겨주셨다. 집에서 차례를 지낼 때는 몸을 일으켜 앉아 있다가 차례가 끝난 뒷자리에선 그 좋아하는 술잔을 청해 입술을 축이셨다. 술 한 모금이 들어갔는가 싶은데도 아버님은 금방 얼굴이 벌게지시며 가쁘게 숨을 몰아쉬셨다. 자리에 누워 계시도록 했더니 천천히 안색이 좋아지시며 깊이 잠이 드셨다. 그때 아버님은 부축을 해야 겨우 걸을 수 있고, 앉거나 하는 것도 힘에 부쳐 하셨다. 음식도 미음이나 죽밖에는 못 드셨다.
설 연휴라 함평의 병원도 전문의가 나오지 않아 우리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형님께서 집에 남아 연휴가 끝난 1월 26일, 아버님을 서울로 모셔가야 할 지 어떨 지 함평의 성심병원에서 진찰을 받아보고 결정하겠다고 했다. 진찰결과 함평 병원에 입원해 치료해도 괜찮을 것 같다 해서 형님은 마음을 놓고 상경을 하셨다. 서울 병원이라고 해서 특별한 치료법이 있는 것도 아니기도 했고, 고향 병원에 입원하면 어머님이 계시기에 간병하기도 좋을 것으로 우리는 생각했다.
그 뒤 어머님의 말씀으론 함평 병원에서 아버님이 자꾸 집으로만 가겠다고 하여 집으로 모셔와서 간호원이 와서 약과 링게르를 놔주고 하면서 치료를 했다고 했다. 아무튼 설을 지내고 근 일주일 동안 (1월 26일부터 2월 4일까지), 아버님은 잠도 못 자고 계속 앓았나 보다. 환자와 함께 밤을 하얗게 밝히다 못한 어머님께서 형님과 나에게 연락을 했다. 내게는 가깝기 때문에 몇 번이나 연락을 했었나 본데 불행히도 나는 그 며칠동안 핸드폰을 꺼놓고 있었다. 하루라도 빨리 연락이 되어 갔었더라면.
내가 연락이 되어 함평에 간 날은 2월 4일 일요일이었다. 마당에 차를 멈추자, 눈이 퉁퉁 부은 목포 숙부님이 마루의 희부연 외등불빛 속에 망연히 서 계시다가 나를 반겼다. 나는 곧장 방안으로 뛰어들었다.
"아버님, 아버님, 저예요. 영관이에요."
불러도 아버님은 나를 알아보지를 못했다. 의식도 거의 없이 초점 없는 눈을 뜬 채 엎치락뒤치락 보채면서 마냥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그제야 주위를 둘러보니 조금 전에 도착한 형님의 거칫한 얼굴과 목포 작은어머니 얼굴도 눈에 보였다. 작은 어머님이 자꾸 밥을 먹기를 권했지만 밥이 입에 들어가지를 않았다. 형님과 나는 몇 술 뜨다가 말았다.
저녁 7시경 작은아버님 내외분이 학교 개학이기 때문에 해남으로 가시고, 우리만 끙끙 앓는 아버님 둘레에 벙벙하게 남았다. 어떻게 할 것인가. 운명하시길 기다릴 것인가. 한참 생각에 잠겨있던 형님이 앰뷸런스로 일단 서울 병원으로 모시자고 결단을 내렸다.
일단 함평 병원에서 서울로 올라갈 수 있을 지 여부를 진찰하고 만일의 불상사를 대비한 당 체크 등의 조치를 취했다. 운전해 내려온 피곤한 몸으로 형님은 다시 차를 몰고 뒤따라오고 나는 앰뷸런스에 동승해 서울 순천향병원으로 향했다. 차 속에서 아버님께선 한참 동안을 보채지도 않고 그냥 주무셨다. 그러다가 차가 천안쯤 오자 마치 백미터 달리기를 하고 난 사람처럼 다시금 숨을 가쁘게 몰아쉬기 시작했다. 삐뽀삐뽀 앵앵거리면서 앰뷸런스는 새벽의 고속도로를 번개같이 달려갔다. 밤 11시에 출발하여 다음날 새벽 3시도 되기 전에 순천향병원에 도착했으니 어지간히도 빨리 달린 셈이었다.
2월 5일 월요일.
입원수속을 하고 얼마 있으니 주치의가 왔다. 주치의는 설 지내고 왜 빨리 여기 병원으로 모시지 않았느냐고 꾸중이 서릿발같았다. 그리곤 X레이 사진을 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말했다. 전에는 한쪽 폐에만 물이 찼는데 이제는 다른 쪽 폐에 염증까지 있다고 하면서 상황이 위급하니 중환자실로 모셔야 한다고 했다. 빈 병실이 없다고 내둘거리던 원무과 직원도 니 언니의 전화 한 통화로 없던 병실을 금방 만들어내는 걸 보고 나는 병원이야말로 빽이라는 것이 직빵으로 통하는 곳임을 알겠더라.
나는 그런 경황이 없는 중에 무슨 냄새가 나기에 아버님의 엉덩이께를 들쳐 보았다. 그것을 치우며 그동안 어머니와 형수님의 고충이 얼마나 컸는지를 이해할 만했다. 얼마나 부대꼈는지 엉덩이 살이 벌겋게 벗겨져 있었다. 너와 나 우리 형제들에게 피를 나눠준 바짝 야윈 육신을 차마 찬찬히 뜯어볼 수 없었다.
새벽 5시경쯤에 형님내외와 영수형님 내외가 병원에 도착했다. 영수형님은 교통사고로 다친 다리의 쇠를 빼는 수술을 해야겠기에 인천에 있는 영도 병원으로 간다고 해서, 형수님은 내려오는 길에 형식이 반찬을 만들어준다고 전북 익산의 형식이 자취방에 있다가 형님 차로 같이 올라왔던 것이다. 아버님을 중환자실에 모시고 의자에 기대 잠이 깜빡 했는데 현숙이와 영선이가 왔다. 중환자실을 다녀온 니 언니는 눈이 빨갛게 젖은 채로 한숨을 쉬었다. 삶과 죽음의 확률이 절반쯤이라는 의사 얘기를 전했다. 그래도 우리는 희망이라는 것이 있었으므로 눈물을 삼키면서 기다리기로 했다.
점심때는 서울 작은아버님이 오셔서 눈물바람을 했다. 작은아버님께는 아버님이 언제 어떻게 될 지 알 수 없는 상황이므로 만약을 위해 가족회의를 해서 장지를 어떻게 할 것인가 논의를 하고 사촌의 범위에서 위문을 하도록 하자고 했다. 그날 저녁때는 숨도 골라지고 혈색 또한 좋아진 듯 싶었다. 하지만 우리는 시간만 가면 회복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우려 섞인 희망을 갖고 기다렸다.
2월 6일 화요일엔 상황이 더 나빠졌다. 하루종일 혼수상태로 있었다. 눈을 감은 채 사람을 알아보지도 못했으며 산소호흡기 또한 부착했다. 주치의선생 얘기로는 사실상 생존 가능성이 절반 이하라고 말했다. 당뇨가 있기 때문에 폐의 염증이 잘 낫지도 않고, 또 링게르로 약물을 투입하게 되면 심장에 부담이 되니 약을 쓸 수도 없고 약을 쓰지 않을 수도 없는 상황. 모든 신체의 기능이 떨어졌으며 신장 기능도 아주 떨어졌다고 했다. 우리는 안달을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2월 7일 수요일 아침엔 아버님은 의식이 돌아오고 눈을 떴다. 소변의 양이 다소 많아지면서 신장의 기능이 다소 회복되는 듯했다. 아버님은 부르터 빨갛게 핏자국이 선명한 입술을 달싹이며 말라붙어 갈라진 혀로 뭔가를 자꾸 이야기하려 했다. 하지만 밖으로 터져 나오는 소리는 알아들을 수 없는 끙끙 하는 소리뿐이었다. "아부지, 아부지" 하고 불러대면 고개를 돌리고 신음을 뱉어내다가도, 영선이 색싯감이 저녁 때 온다고 하자 자꾸 일어나려고 묶인 손을 들썩거렸다. 귀에 들려오는 낯익은 소리의 끈을 잡고 무의식과 의식의 세계를 넘나들고 있었던 것일까. 그래도 영선이 얘기를 하면 반응을 보이는 것은 그때까지 의식이 있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점심때는 의식으로나 소변량이나 한층 나아진 것 같았다. 보다 의식이 회복되어 기대를 걸고 주치의 선생을 만났는데, X레이 찍은 결과 폐에 염증은 그대로라며 나아지더라도 점차로 나아질 것이며 나빠지면 금방 나빠질 수도 있으니 아직 안심할 상황은 아니라고 했다. 면회시간 마다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고작 가제로 몸을 닦아드리고 팔 다리를 주물러드리는 것뿐 중환자실이란 원래 그런 곳이었다. 그래도 의식이 돌아왔다는 것만큼 기쁜 것은 없었다.
저녁 면회 시간 때는 작은어머님이 오시고 좀 있으니 영선이 색싯감이 왔다. 호리호리한 몸을 굽신 굽혀 인사를 했다. 첫인상에 똑똑한 여자라는 인상을 받았다. 자존심도 강하고. 면회를 마치고 난 후, 색시가 다른 약속이 있어서 저녁식사를 같이 하진 못했다. 주뼛주뼛하는 색시에게 작은어머닌 자신의 예를 들어 아버님이 이렇게 생겼으니 간략하게라도 결혼을 올리는 것이 어떻느냐고 집안에 얘기를 해보라고 했다. 여자는 얘기를 다소곳이 듣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작은어머니로선 건너들어 중매를 했지만 색싯감은 처음 본 셈이었다. 작은어머니께선 "난 이쁜 여자를 좋아하거든."하면서 여자가 이뻐서 참 좋다고 했다. 색싯감이 아버님을 보는 것은 이번으로 두 번째라 할 수 있었다. 구정 전 인사겸 병 문안겸 왔었다는데, 아버님은 그때는 어눌하지만 의사표현을 할 수 있었던 때라 내내 흡족해 하셨다고 한다. 그 자리에는 어머님과 형님도 계셔서 식사를 같이 했었는데 구정날 내가 어떻드냐고 물으니, 형님은 탤런트 박정수를 닮은 것 같다고만 했었다. 내가 그때 본 느낌으로 하자면 이목구비가 선명한 것으로 치면 형님의 그 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늘씬한 것과 눈부리가 부시부시한 것이 인상적이라고 할까. 제수씨는 다 이쁘다는 말은 접어두고라도 나는 영선의 선택을 믿으며 남몰래 웃었다. 현정이 넌 몹시 궁금하겠지. 기다리고 고대하던 동상아덕이니. 영선이가 전화로 알렸으면 중복이 될까 싶지만 색싯감에 대한 정보를 간략하게 여기 적는다. 아버님은 육군 소장 출신이며, 5공 시절 잘 나가던 허삼수와 동기라고 한다. 정치와는 무관하게 살아온 분이라고 했다. 그리고 여자는 이대를 나왔으니 너의 후배가 될 것이고, 하나뿐인 남동생은 서강대를 나왔다고 하지 아마. 아버님이 외국에 무관으로 나가 있어서 영어에는 능통하고 결혼을 하더라도 유학을 해 경영학을 더 공부하고 싶어한대나. 나이는 서른 셋인가 쯤 되고.
작은어머님과 저녁식사를 같이하고 있었는데 형님이 그곳을 찾아 오셨다. 영정은 맞춰서 집에 찾아다 놨다고 했다. 만일의 경우 불상사가 생기면 장례는 어머님이 반대하시지만 여기 병원에서 치르고 해동에서도 자리를 마련해 근동 사람에게 대접을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우리 사이에 얘기된 내용을 형님이 작은어머님께 물었다. 작은어머님도 별다른 얘기가 없었다. 형님은 혹시 모르니 사촌들 범위 내에서 아버님을 뵙도록 오늘부터 연락을 취하고 있다면서 현정이 너에게는 상황을 봐가며 연락을 하겠다고 했다. 지금 아버님의 상황을 얘기해도 현정이 네가 쉽게 올 수 있는 건너동네에 사는 것도 아니고, 얘기한 뒤로 올 수 없으면 네 마음은 얼마나 아플 것인가를 헤아린 것이었다. 그리곤 영선이 결혼 날짜에 대해서도 같이 얘기했지만 이쪽 사정이나 그쪽 사정이나 모두 유동적이니 아무튼 빨리 결혼식을 하도록 하자는 것 이외에 달리 결정할 만한 것이 없었다. 형님은 작년의 수술 뒤 매사를 분명하고 사려 깊게 챙기시는데 아버님의 생전의 모습과 매우 흡사하다는 생각을 나는 가끔 해본다. 하지만 의욕이 지나쳐 그러다가 건강이 나빠지지 않을까 걱정이 많이 된다.
2월 8일 목요일(운명하신 날).
점심 때 형수님이 정월 보름이라고 오곡밥과 반찬을 장만해 오셨다. 그 정신없는 와중에도 보름 음식을 장만해 오다니. 워낙 부지런한 형수님이시기도 했지만, 두 분 내외가 이젠 살아가는 맛과 멋을 아는 듯했다. 형식이나 형미를 보더라도 작년의 그 큰일을 치른 뒤로도 그늘이 별로 없다. 그런 것을 보면 가정에서의 평화란 것이 얼마든지 돈과 상관이 없을 수 있으며 아주 가까운 곳, 즉 마음에 있는 것임을 알겠더라. 없으면 없는 대로 같이 오손도손 타박타박 끌고 나가는 쌍두마차. 요즘 형님은 누구에게건 부족한 대로 풍족하게 마음을 낸다. 우리는 그것을 느끼며 자랑으로 삼는다.
형님은 나에게 빨랫감을 챙겨 집으로 가 좀 쉬었다가 오늘이 신앙촌 작은아버님 제사니 거기에 같이 참석하자고 했다. 나는 근 며칠 동안 병원 중환자 대기실에서 잠을 자고 밖에서 끼니를 사먹곤 했는데, 잠을 자도 잔 것 같지가 않고 해서 좀 쉬었으면 했었다. 근 며칠이 이러하니 그간 형님이나 아버님 간병을 해낸 형수님의 노고란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것이리라. 그리고 내가 없었던 오후에 영욱이형과 영천이형이 아버님을 문병했다고 전해 들었다.
형님 집에 와 내가 옷을 챙겨주니 형미가 세탁기를 돌렸다. 형미는 다음날 운전면허시험이 있었는데 짜증도 내지 않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빨래를 해서 널더라. (다음날 형미는 필기시험에 턱걸이로 붙긴 붙었다.) 한참을 쉬고 있는데 형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병원에 들리려고 하는데 눈이 와 차가 많이 밀린다면서 나에게 먼저 형미와 신앙촌에 가라고 했다. 우리가 신앙촌에 가니 방안 가득 가족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영심이 누나 매형이 예배집전을 하고 막 설교를 하는 참이었다. 마음이 뒤숭숭해서인지 설교의 내용이 지금은 생각나지 않는다. 좀 튀는 듯하지만 걸걸한 목청이 어울리는, 진실성이 우러나는 현실에 맞는 설교라는 생각을 한 것 같다. 우렁차고 진실이 뚝뚝 살아 넘치는 설교에서 낙혜를 잃은 지난 아픔을 찾아보기란 힘들었다. 꽃이 피고 지는 자연의 아름다움보다도 인간의 변화란 아름답다, 자신을 한사코 높이고 존중하는 인간이란 그렇게 아름답다라는 생각을 했다. 인간만이 고뇌를 하기 때문에 깨달음이란 값진 보석을 안게 된다고. 곰곰이 생각해보면 병이 그렇게 살지 말라고 육체가 정신에게 보내는 신호라면 아픔이란 하느님이 인간에게 보내는 어떤 충고가 아닐까.
예배가 끝난 뒤 우리가 도리도리 앉아서 식사를 하고 있을 때 영선이가 왔고 형님이 오셨다. 금심이 언니가 끓인 낙지볶음은 푸짐하게 맛이 있어 보였다. 그때 영선이의 핸드폰이 울었다. 아버님이 위독하니 지금 당장 병원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밥 한술 제대로 뜨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중환자대기실로 전화를 하니 형수님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환자의 연락처를 영선이 핸드폰 번호로 써넣었기 때문이었다. 형수님에게 빨리 아래층 아버님께 가보라고 한 다음 우리는 바쁘게 병원으로 출발했다. 영선이 차를 타고 가는 도중 마음의 준비를 해왔었지만 마구 가슴이 뛰면서도 서늘해져 왔다. 신앙촌에서 독산동 다리쯤 접어드는데 형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아버님이 운명하셨다."
망치로 맞은 듯 귀속이 멍멍했다. 영선이는 운전대를 잡고 소리내어 울었다. 나의 착각인지 눈발이 희뜩희뜩 내리는 듯 사방이 까마득히 내려앉았다. 땅도 미끄러운데 영선이는 침착성을 잃고 허둥댔다. 운전에 신경을 쓰도록 영선이를 다독이면서 달랬다. 마포대교를 건너는데 눈물이 마구 흘러내려 뿌연 안개가 낀 듯 눈앞이 하얗게 흐려왔다.
허겁지겁 병실로 뛰어들었다. 아버님은 하늘색 커튼 칸막이 안쪽에 반듯이 누워 계셨다. 현숙이가 이미 와 침대 살을 붙잡고 엉엉 울고 있었다. 아버님의 몸을 만져보니 아직은 따뜻했다. 겨드랑이도 가슴도 이렇게 따뜻한데, 돌아가셨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혈압, 맥박을 재는 전자 모니터의 불은 이미 꺼져 있고 흔들어도 아버님은 말이 없었다. 몸이 굳지 않기 위해선 지 의사들이 교대로 코엔가 커다란 공기 튜브를 쥐고 눌러댔다. 우리는 다른 환자들을 생각해서 크게 울지도 못했다. 그때는 맘껏 울 수 없다는 것이 얼마나 답답하던 지. 형님이 오시자 담당의사가 아버님이 (2001년 2월 8일) 저녁 8시 45분 경에 심장마비로 별세하셨다고 전했다. 아버님은 그렇게 조용히 이 세상과 작별하셨다. 인간이라면 피할 수 없는 그 길을 조용히 떠나셨다. 현정아, 고개 숙여 명복을 빌자꾸나.
아버님을 아래 영안실로 모시고 형님은 영안실 사람들과 계약을 했다. 형님 얘기론 수의나 관만 해도 수백만원 짜리까지 있는데 간소하고 아주 싸지 않은 것으로 맞추었다 했다. 곧이어 신앙촌에 모여 있던 사촌들이 오고, 좀 있자 명현이 당숙이 서울 친척들 전화번호 명부를 가지고 달려왔다. 밤이 늦어 일가친척들에게만 전화연락을 했다. 이때 너에게도 부음사실을 알렸던가 싶다. 밤늦게 돌아가셔서 3일장으로 치르려면 손님을 받는 것도 결국 하루시간밖에 없게 되었다. 우왕좌왕하는 사이 벌써 시간이 밤 11시가 훌떡 넘었다. 영안실에는 우리 두 형제와 영천형, 영욱형, 형식이, 동익이, 김서방만 남고 형님을 비롯한 나머지 사람들은 형님집, 현숙이집으로 나누어 우선 휴식을 취하도록 했다. 목포작은어머님은 서울로 올라오지 않고 해동에 남아서 필요한 장만을 하도록 했다. 목포작은어머님이 시골에서 혼자 장을 보랴 음식을 장만하랴 고생이 많으셨다. 새벽엔 김서방이 윤진이, 동익이를 데리고 나가 도매를 하는 마트로 가 손님을 300명으로 잡고 시장을 봐 왔다. 음식은 영안실에서 소개하는 식당에 주문하면 되었지만, 술이나 음료수, 과일, 수저 젓가락 등은 우리가 마련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형식이, 윤진이 동익이도 상을 치르는 동안 나름대로 한몫을 단단히 했다. 마침 윤진이는 방학 때라 서울에 올라와 있는 참이었고 지방의 중부대학, 영상사진관련학과에 합격했다는 동익이는 지 아버지보다 덩치가 훨씬 크고 일도 제법 잘 하더라.
어머니께선 밤 기차를 타고 올라와 새벽 5시경쯤 도착해 서럽게 마루를 치며 우셨다. 영재는 눈물을 감추며 그런 어머니를 달랬다. 현정아, 다 자기 몫의 슬픔이 있겠지만, 그래도 가장 서럽고 애통해 할 사람은 영재와 어머니가 아니겠나. 아버님은 가셨지만 영재와 어머님은 우리 몫으로 남았다. 영재를 보며 우리는 다시금 눈물을 머금지 않을 수 없었다. 목포작은아버님과 내 처는 아침 9시 비행기로 와 낮 12시경에 도착했다.
오전 10시경부터 밤 근무가 끝난 성국이매제 소방서 손님을 시작으로 드문드문 문상객들이 이어졌다. 낮 11시경엔가 입관을 했다. 영재는 나중에 말하길 끝내 낫지 못한 엄지발가락을 보니 제일 가슴이 아프더라고 했다. 아버님은 세속의 옷을 모두 벗고 삼베옷으로 갈아입고 칠성판에 누워 영원히 고통도 없고, 슬픔도 없는 그곳으로 그렇게 떠났다. 머리를 곱게 빗은 아버님의 얼굴은 청동으로 만든 거울처럼 아름답기까지 했다. 끝으로 이마를 만져보니 어제와 달리 차가웠다. 현정이 너 생각을 하며 울었다. 너 몫까지 울고 너 몫까지 보고 또 보고 했으니 안타까워하지 말라. 네가 자리를 같이 하지 못해 행여 자책과 설움으로 가슴을 친다면 그것은 돌아가신 아버님의 뜻이 아닐 것이다. 현정아, 아버님은 다 이해하고 다 용서할 것이다.
현정아, 우리는 의식치 못하지만 항상 죽음을 대면하고 있니 않겠나. 죽음이 항상 곁에 있음을 안다면 지금 살아있음을 감사할 줄 아는 넉넉한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러면 우애와 사랑과 평화는 우리 곁으로 다가올 것이다. 무리하게 욕심을 내거나 화를 내는 것도 다 부질없는 것이며, 죽음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한 것. 아버님께선 겸손함과 우애와 평화를, 어떤 교훈을 가르치고 돌아가셨다고 생각하자.
낮에는 영선이 주로 연수원 동기생들의 문상이 많았는데, 인맥과 학맥을 관리하려는 어떤 집요함에서였을까 아무튼 700명 중 3/1은 오지 않았나 싶게 많이 왔다. 오후 5시 이후엔 손님이 집중적으로 몰려 영안실 안이 발 디딜 틈이 없을 만큼 붐볐다. 날씨도 좋지 않아 진눈깨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었다. 그리 춥지는 않았지만 문상을 받을 날도 하루밖에 없었고, 아침에 겨우 연락을 취한 것으로 보면 생각보다 많은 손님이 왔다고 생각된다. 밖에 천막을 두 개나 쳤지만 자리가 꽉 차 밤 8시경에는 자리 나기를 기다리는 손님들도 많았으니 말이다.
화환도 많이 도착했는데, 소방서, 현숙이 부천병원장, 함평초등학교 55회, 58회, 60회, 연수원동기생, 성대연수원동기생, 병원 노동조합 등이었다. 새벽 3시경에야 겨우 손님이 뜸해졌다. 밤에 영선이가 다녔다는 약수사 비구니스님이 와서 독경을 했다. 우리는 유교식이냐 교회식이냐 불교식이냐를 따지지 않았다. 새벽 5시경쯤 형님이 다니는 교회에서 목사가 와 예배를 보았다. 아버님은 아마 천국으로 아니면 극락으로 잘 가셨을 것이다.
2월 10일 금요일 오전 6시경 예배가 끝난 뒤 영안 버스가 출발했다. 맨 앞에는 영정을 모신 승용차가 출발을 했는데 형식이가 운전을 했다. 그 뒤를 김성국 매제 차가 뒤따랐다. 난 그냥 버스 안에서 자다가 깨보니 백양사 휴게소였다. 여산에선가 한번 쉬었다는데 기억에 없으니 그냥 잤었나 보다. 서리 내린 우윳빛 아침 들녘을 영안 버스는 뭐가 그리 바쁜 지 쌩쌩 달려갔다. 해동에 도착하니 11시도 안 되었으니 사람들은 영안 버스치고 이렇게 빨리 달리는 버스는 처음 봤다고 사람들은 혀를 내둘렀다. 버스에는 우리 가족들과 사촌들 (영수, 영욱, 영천, 영국, 최서방, 영님이매형, 영금이누나 등)과 형님이 다니는 교회 목사님과 신도분들, 영선이 행소문학회 친구 한사람이 타고 왔다. 영수형님은 다리 수술을 한 불편한 몸으로 해동까지 같이 왔다가 다시 올라갔다. 아참, 영선이 색싯감은 니 언니들처럼 하얀 소복을 입지 않았지만 병원 영안실에서 손님들 상 심부름도 하고 하관하는 것까지 같이한 다음 3시 버스로 올라갔다.
버스가 동네 가게 앞에 서자 제일 먼저 달려온 사람은 고모였다. 고모님은 되똑거리면서 주위에서 부여잡는 손을 뿌리치고 한사코 영구버스 밑칸으로 들어가 관을 틀어잡고 어야태야 울어댔다.
"도옹상, 어째서 머언저 갔는가. 도옹상, 내 도옹상. 조온 시상 다 버리고 어째 허망허어게 간단 말인가. 도옹상, 내 동상. 어어허."
우린 그 모습을 보고 말리지도 못하고 함께 울먹였다. 눈물은 전염성이 있는 것이라 그 모양을 보는 사람마다 코를 훌쩍거렸다. 겨우겨우 진정시키고 주막에서 간단하게 노제를 지내고 트럭에 관을 옮겨 실었다. 고모님이 한사코 트럭에까지 올라 관을 붙들어 안고 우는 바람에 그냥 그대로 트럭을 운전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집 마당에는 이미 차일이 쳐지고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상여에 아버님을 모시고 간소하게나마 빈소를 차렸다. 서울 교회 목사님이 예배 집전을 했다. 좀 긴 듯한 예배시간 동안 숙인 우리어깨 위로 아침빛이 부시게 쏟아져 내렸다. 예배가 끝나곤 신풍할아버님이 축문을 읽었다. 아버님 전에 차례로 우리는 술잔을 올렸다. 그리곤 근처 동네 사람들이 문상을 했고 마련된 자리에 그분들을 접대했다. 전배, 옥배, 큰이모, 영광이모님을 비롯한 인척들 빼고 문상오신 분들 중에 니 올케언니가 재직하는 학교 교장선생님을 비롯한 선생님들, 목포동료 선생님들, 그리고 영선의 광양 친구들이 기억에 남는다.
12시경에 아버님을 실은 꽃수레가 마을 가게 앞으로 천천히 출발했다. 앞에 선 사람이 요령을 흔들며 소리를 매기면 뒤에서 후렴을 따라 불렀는데 서울에 사는 사람들로서는 오랜만에 구경하는 광경이었을 것이다. 근데 상두꾼들의 머리가 희끗희끗 한 것이 얼추 오십 육십객이 다 되어 보였다. 그것도 해동 사람들이 아니라 영화정 사람들이었다. 그만큼 농촌에 젊은 사람들이 없으니 상여와 같은 전통도 앞으로 십여 년이면 없어지지 않을까 싶다. 그분들은 근방의 상여를 매주고 그 돈을 동네기금으로 삼는다고 했다. 삼십만원을 주었다고 했는데 나중에 더 달라고 해서 조금 더 준 것으로 알고 있다.
맨 앞에 명정을 들고 김서방이 앞장을 서고, 대나무에 매단 공포(功布)가 그 뒤를 따랐다. 동네가게 앞에서 간략하게 노제를 지냈다. 형미가 그 광경을 카메라로 담았으니 니가 나중에 볼 수 있으리라. 그 옛날 어머님이 돌아가셨을 때는 눈이 참 많이 내리기도 했지. 근데 이번 아버님의 장례 날은 햇살도 포근한 좋은 날씨였다.
별뫼아재네 집 근방에서 상여가 쉬었다. 저승길이 팍팍해서 못 가겠다는 것이었다. 김서방이 주머니를 털어 상여 앞 줄 위에 노잣돈을 걸었다. 샘거리 근방에 와서는 다시 상여가 머뭇거리는데 오서방이 있었다면 아마 그때 노잣돈을 걸 차례였을 것이다. 큰집의 영진이형이 상여 위라 올라 천원 짜리를 줄 위에 하나씩 하나씩 걸면서 시간을 끌자 무게에 지친 상두꾼들이 빨리 가자고 되레 비명을 질러댔다. 모두 떠들썩하게 웃어댔다. 아픔이 축제로 승화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하여 상여는 뒷산으로 한 발짝 한 발짝 올라갔다.
산에 올라보니 어머님 오른 쪽에 관이 들어갈 자리가 이미 마련되어 있었다. 포크레인으로 파헤친 황토 흙은 체로 밭은 것처럼 보드라웠다. 황토는 우리 마음처럼 붉었다. 해동 교회 목사님이 하관 예배를 집전했다. 해동교회 목사님은 좀 마른 분이었는데 있어야 할 사람, 있어도 없어도 그만인 사람, 없어야 될 사람 등등 교장선생님 훈화 같이 익히 들어온 설교를 했다. 그리고 우리는 형님, 나, 그리고 영선이 색싯감에 이르기까지 차례로 흙을 한 삽씩 떠서 뿌렸다. 그렇게 아버님은 어머님 곁 붉은 황토에 묻히셨다. 내려오다 보니 집 뒤 할아버지 할머니 묘소에 여인네로 보이는 사람이 무덤을 쥐어뜯으며 울고 있었는데 아니나다를까 고모님이셨다. 아마 집 뒤 산소의 풀이 이번 참에 고모님과 목포작은아버님으로 인해 적잖이 뽑히지 않았나 싶다.
서울에서 내려온 장의버스는 오후 3시경에 서울로 출발했다. 서울숙부 내외, 영수형님 내외, 영욱이형 비롯한 사촌들, 영선이 색싯감, 교회 목사님 신도분들이 이렇게 돌아갔다.
그 날 저녁 가볍게 술상을 차리고 앉아 담소를 하다가 자연스레 가족회의를 하게 되었다. 형님이 서두를 꺼냈다.
"무사히 장례를 치르게 된 것은 주변 사람들의 노고가 있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돼요. 사촌들 작은어머니님도 많이 고생하셨어요. 서울에서 340여 분, 해동에서 140여분, 도합 480여 분이 아버님 가시는 길을 축복해 주었어요. 그리고 부조금은 우리가 나중에 두고두고 갚아야 될 빚으로 생각해야 되요. 부조금 내력을 참고삼아 부조금을 낸 이상으로 부조를 해 갚아야 하겠지만, 그 만큼만 내기 위해 돈을 적게 벌 필요는 없어요. 친목회 같이 대표로 이름을 써서 낸 분들이 많고 해서 근 600여 분이 아버님 가시는 길에 명복을 빌어주었다고 볼 수 있는데 전화로건 편지로건 고마운 인사를 해야 할 거예요. 정확히 결산을 해봐야 알겠지만, 도합 2700여 만원이 걷혔고, 사용 금액이 1300만원이니 대략 1400만원이 남았는디 이 돈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생각이 있는 분들은 이야기를 해 보세요."
형님이 이런 요지로 말씀을 하셨다. 우리는 부의금 명부를 둘러보며 얘기를 나누었는데 어머님이 마침내 의견을 냈다. 영선이 결혼이 닥쳤어도 우리 형편에 돈 한푼 주기 힘들다, 마음에 있어도 형편이 그러니 그동안 속이 많이 상했다, 어차피 아버님이 가시면서 남긴 것이니까, 영선이 결혼 몫으로 썼으면 한다, 라는 취지로 어머님이 말씀하셨다.
영선이한테 일단 1000만원을 주었으면 하는데 다른 의견이 없는지 형님이 우리의 의견을 물었다. 영선이 문제로 마음이 걸리는 우리로서는 이론이 있을 수가 없었다. 형님이 말을 마무리지었다.
"영선이 너는 지금 1000만원도 적을 것이다. 그쪽 요구에 따라 결혼식을 성대하게 혹은 무리하게 할 필요는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빚을 내서 결혼준비를 한다거나 돈을 우려내기 위해서 우리도 그만큼 예물을 준비해야 한다 이런 것은 문제가 있다. 형편에 맞도록 간소하게 시작하는 것도 좋은 일 아니겠냐. 살림을 많이 장만한다고 해서 잘 사는 것은 아니다. 영선이 너는 고시가 됐다고 너 자신을 특별하게 생각해서도 안 된다. 다시 말해 우리 역시 고시에 됐다고 그 쪽에 어떤 요구를 하거나 바라는 것은 옳지 않다는 얘기예요. 아무튼 별도로 영선이에게 도움을 주는 것은 말리지 않을 일이나 영선이 너는 우리 가족 형제들이 주는 돈이 이것뿐이다 생각하고 예식 준비를 해라. 아버님이 돌아가신 이상 빨리 결혼식을 올리는 것도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어요. 그러니 결혼식 날짜 문제는 현정이가 나오는 기간이 최대의 변수니 빨 리가 아니라 그것을 존중해서 결정했으면 헌다."
영선이도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러다가 형님은 아버님의 유산과 유물에 대한 처리에 대해 가진 바 의견을 밝히셨다.
"나는 아버님의 유산이 얼마인지 어떻게 처리됐는 지 하나도 알지 못해요. 집 땅 문제만 해도 어머님에게 이전했다는 것도 나중에 알았지만, 아버님이 생전에 이전한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이의를 제의하지 않겠어요. 자식에게 한마디 상의하지 않은 것이 서운하기는 하지만 그러한 아버님의 뜻을 존중하는 것이 아들의 도리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만약 아버님의 유산 중에 남아 있는 것이 있다면 우리 모두의 공동의 상속으로 했으면 한다. 그리고 아버님의 손때묻은 화투나, 약 봉지 하나라도 태우지 말고 잘 보관하여 마구간이 있던 방을 치워 아버님의 유물관으로 만들었으면 하는데 동생들의 생각은 어떤가."
우리도 어머님께서도 달리 이의가 없었다. 나머지 돈에 대한 처리에 대해 의견을 물었으나 대답이 신통치 않자, 형님이 자신의 의견임을 전제로 말했다.
"영선이 결혼식도 있고 하는 데 집 수리가 우선 급한데 나머지 돈은 집 수리에 썼으면 하는데 어머님의 생각은 어떠세요. 방 구들 꺼진 것도 고치고, 고장난 가스렌지도 새로 사고, 연못 위에 집도 헐어야 하고 비만 오면 질컥질컥하는 마당에다가 공구리도 치고 했으면 하는디, 동생들 더 좋은 생각이 있는가?"
더 좋은 제안이 없자 그것으로 부조금이나 아버님 사후 처리에 대한 문제는 일단락되었다. 그리고 덧붙여 현정이 니네가 어머님께 드렸다는 200만원까지 합하면 집수리 등을 하기엔 충분하리라고 본다.
그리고 부의금 장부는 형미를 시켜 컴퓨터로 옮기기로 했다. 다음날까지 형미가 잘 거 다 자면서도 부지런히 엑셀 프로그램으로 옮겼다. 여기 뒤에 그 장부를 첨부해 보내마. 참고하기를.
다음날, 2월 11일 일요일 오후 우리는 주포로 해수찜을 갔다. 그동안 몸이 찌뿌드드하기도 했지만 여기엔 다른 이유가 있다. 작년 추석에도 우리 형제들은 아버님 어머님을 모시고 음식장만은 뒤로하고 용천사로 꽃무릊(상사화)축제 구경을 하고 읍내 유명하다는 <화랑식당>에서 쇠고기 백반으로 외식을 한 적이 있었다. 무엇보다 결혼에 즈음한 영선이나 니 올케가 새로운 가족문화를 부추겼지만 아무쪼록 그것은 그간 우리 모두 바라던 바였다. 추석 음식마련에도 불구하고 어머니께서도 기꺼워 하셨다면 이것은 가족 내에 모종의 작고도 의미있는 변화라면 변화가 아니겠는가. 딱딱함보다는 편함, 형식보다는 우애를 중심에 놓는 새로운 문화, 사고의 전환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우리 내외, 현숙이내외, 영선이, 형식이, 형미, 영재 이렇게 돌머리해수욕장이 붙은 주포로 갔다. 가다가 니 성국이 형부는 듬벙같이 조그마한 물만 봐도 낚시 생각을 하는 통에 우리를 많이 웃겼다. 형수님은 나물을 캐느라 자리를 같이 하지 못했다.
칠산바다. 서해바다치고는 물이 정말 푸르고 맑았다. 조촐하게나마 잘 단장해 놓은 돌머리 해수욕장은 찾는 길손이 없어 쓸쓸했지만, 욕탕 안 뜨겁게 달구어진 바닷물은 손을 넣을 수 없을 만큼 뜨거웠다. 뒤끝이 개운한 목욕이었다. 다음에 현정이 너도 같이 할 수 있겠지. 뜨겁게 달군 바닷물로 몸을 적시며 가족끼리 담소를 할 수 있다는 것은 해수찜만이 가진 독특한 매력이라 할 만했다.
저녁 식사 후, 여인네들은 뜯어온 봄나물을 다듬기 위해 고모님 주위에 둘레둘레 모여 앉았다. 니 큰오라부덕이 얼마나 많이 나물을 뜯어왔는지 한 부대를 다 다듬고 이제 허리를 좀 펼 만하면 또 한 부대의 나물이 나와 니 언니 허리가 좀 아팠을 거다. 물론 그 자리에서 이어진 고모님의 얘기를 여기 빼놓을 수 없다.
고모님이 하시던 얘기를 부족한 대로 여기 적어 옮기면 다음과 같다.
"내하고 아부지하고 여덜살 사인디, 내가 시집이라고 열여섯에 갔응께 아부지가 여덜 살인가 아홉 살인가 묵었겄제이. 근디 아부지가 고절로 댕기로 왔어야. 며칠 쉬었다가 이제 갈 참이 되었는디 아무리 찾아봐도 아부지가 있어야제. 동네를 찾아봐도 없고 집 구석구석을 뒤져봐도 없는디. 찾다 찾다가 우리 시아바이가 변소칸 쪽으로 가보니까 칙간 한삐쪽에서 지게 작대기를 붙잡고는 아부지가 요렇게 손등으로 눈을 쓱쓱 씻으며 징징 울고 있기에, "도련, 어째서 우는가?" 이렇게 물어봐도 암말도 안허고 그냥 징징 울고만 있길래, 시아바이가 달래다 달래다 망단을 허고서, 꼴마리를 딱까서는 동전을 쥐어줌시러 "도련, 이것 줄 테니 울지 마라" 해도 울고.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내가 어떡허면 쓰끄나,' 하니까 '누님하고 같이 집으로 가야 허는디.' 하면서 계속 울어싸는 통에 결국 나도 같이 눈물바람을 했어야. 시아바이가 어린것이 기특허다고 동전을 손에 딱 쥐어주면서 신계리 저짝 너머까지 내바람을 나갔던 것이 엊그제 같은디... 금쪼옥 같은 내 도옹상을 차디찬 따앙 바아닥에 뉘어두고 나는 누운을 버언히 뜨고 살아 있으니 이것이 뭣이당가. 아이고 애고. 세상일이 물레살 돌듯해서 그 일이 바로 엊그제 같이 눈에 버언한디 내가 일찍 갔더어라아면 이 꼴 저어 꼴을 안 보고 좋기만 했을 텐디 어째 요리 오래 살아서 못 볼 것을 본당가. 아이고 흐흐."
고모님은 한참 사설을 늘어놓다간 눈물을 훔치며 또 마루의 명정으로 가서 마루바닥을 탁탁, 가볍게 치시며 울었다. 마루에다 우리는 명정과 젯상을 모셔두었던 것이다. 고모님은 우리들에게 이야기를 하다가도 쉬는 참이면 아버님 명정 옆 마루에 두 다리를 뻗고 앉아 담배를 피우면서 마치 옛얘기를 나누는 것처럼 두런두런 혼잣말을 하며 하염없이 앉아 있곤 했다. 그 뒤로도 고모님이 안 보인다 싶어 찾아보면 항상 거기 마루에 앉아 있었다. 평소에도 두 분의 우애는 각별하지 않았었나 싶다.
그날 우리가 밤기운이 차다고 방으로 모셔오니까, 쇠바우 줄바우 나던 얘기를 또 꺼냈는데, 수없이 들어왔어도 판소리조로 감칠맛이 났다. 우리는 둘레둘레 모여서 맥주를 한잔씩 하면서 고모님의 구수한 입담을 즐겼다.
"영배 남시러 어쨌다냐. 이레를 잘 넘긴다 싶으면 돌 무렵에 죽고, 돌을 잘 넘긴다 싶으면 두 살도 못 돼서 죽고 이러는디 할매나 어매가 오죽 속이 보타졌겠냐. 어머이가 니들로 치면 할머이가 행여나 복받을랑가 동냥치가 오더라도 동냥주머니에다 일성 한 되나 되는 곡석을 푹푹 퍼서 부어주고, 다신 밥을 먹여서 보내고 함시러 공을 들인 것이 어떻게 말로 다 허끄나. 작두 고두쇠를 맬강물(맑은 물)로 씻어다가 애기 호주머니에다 달아매 주면 명이 삼천갑자 동방삭이만치 길어진다고 해서 그렇게 해보면 돌을 못 넘기고 또 죽고, 금줄에 달린 고추를 돌라다가 갈아 마시면 된다기에 그렇게 해봐도 죽고, 애기를 거꾸로 매달아 놓고 엉덩이를 탁탁 세 번 때리면 된다기에 그렇게 해보면 또 죽고. 이렇게 여섯을 실패허니 세상에 이런 기맥힌 일이 어딨겄냐. 그럴 무두릅에 용헌 점쟁이가 하는 말이, 친정에서 애기를 받아라 근디 뒤도 돌아보지도 말고 휑하니 친정으로 가되 생개(향교) 친정 방문턱을 넘어가면서 바가지를 탁 깨고 들어가라 해서 딱 그렇게 했는디 과연 그때부터 줄줄이는 줄바우 현숙이 현정이 영선이 아들딸이 낳는 쪽쪽 잘 컸제. 그래도 안 잊혀서 쇠처럼 단단허라고 쇠바우, 줄줄 놔라 줄바우. 느그 할머이가 금이야 옥이야 땅바닥에 내려놓지도 않고 과일이나 과자를 사다 날랐는디 니들은 그 공을 잘 모를 거다. 그때는 집 문이 저짝편으로 나 있을 땐디 질을(길을) 지금 감나무 발로 내면 괜찮다고 해서 큰할무이가 살아계실 때니까 아이고 그래라 해서 나락 말을 주고 길을 냈는디 어째 두 집이 그 땅을 갖고 그리 염병을 했으끄나. 형 동상 지간에 누구 땅이면 어떻고, 아이고 애고. 내가 이렇게 서운해 우는 것이 딴 게 아니라 생각이 깊은 우리 동상 이리 마음 고상을 허고 간 것을 생각허면 복장이 미어져서..."
그리곤 고모님은 또 마루의 동생 사진 곁으로 갔다. 고모님의 얘기를 들으면서 우리는 현정이 너 생각을 했다. 고모님의 입담을 받아 잇는 것이 네나 형미가 아니겠나 허면서. 형미 고것이 수다와 재치 사이를 오락가락하긴 해도 제법 얘기를 만들어 낼 줄 아는 녀석이거든. 아무튼 고모님은 여든이 넘었어도 그 옛 얘기를 그렇게 총하시게도 기억하는 것을 보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2월 12일 삼우제날이었다. 점심께 너 시아버님 내외분이 오셨다. 서울까지 올라갔다가 헛고생만 하고 내려와서 들리는 길이라 했다. 시차문제로 날짜를 잘못 생각한 착오가 있었던 것이다. 고모님이 네 시어머니의 손을 붙잡고 놓지를 않으셨다.
"우리 현정이가 얼마나 가슴 아플 거나. 오서방은 얼마나 짠헐까이. 시방도 광주 그 집에 사시는가 모르겄오이? 내가 우리 현정이가 얘를 낳았다 해서 사장어른 집에 간 것이 엊그제 같은디. 그때나 지금이나 어째 이리도 고우께라. 현정이가 복이 많응께 이런 시어머니를 모시고 그라제라."
"고모님은 그때나 지금이나 어째 이렇게 정정하실게라. 우리도 생각허면 며느리가 안씨럽지만 어쩌께라. 멀리 있는디."
시어머님이 눈물바람을 했다. 시아버님은 눈물을 감추려는지 밖으로 나가셨다. 한참동안이나 고모님과 어머님과 시어머님은 그렇게 얘기하셨다. 현숙이가 어제 다듬은 나물을 챙기고 음식을 챙겼다. 고모님은 두 분이 가시는 길목까지 내바람을 하시겠다고 차를 세워둔 교회 옆 공터까지 되똑거리며 한사코 나오셨다. 고모님은 "사장어른 잠깐만 기다리쇼." 하고는 동네 가게 밑에 있는 우리 밭으로 파란 보릿잎을 뽑기 시작했다. 보리를 뜯어서 홍어 국을 끓이면 맛있다는 것이었다. 현숙이까지 얼른 달려들어 보리를 뜯었다. 보리를 뜯어 차에 싣는데 승용차 안에는 시누이가 있었다. 고모님이 호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시누이에게 준다고 승용차 안으로 돈 만원을 집어넣었다. 시어머님이 놔두시라고 돈을 밖으로 내던졌다. 다시 고모님이 돈을 집어 승용차 문틈으로 밀어 넣었다. 다시 돈이 밖으로 내던져졌다. 아름답고 눈물겨운 광경이었다. 고모님이 또 돈을 안으로 집어넣으려 하는데 시아버님이 서둘러 차를 출발했다. 고모님은 돈을 움켜쥐고 사라져 가는 차를 보며 말했다.
"서운해 갖고 어쩌꺼나. 딸을 봉께로 안씨라 죽겄네이."
고모님은 연방 혀를 차며 떨어지지 않은 발걸음을 옮기셨다.
오전에는 영선이가 읍내에 가서 의료보험이나 통장 관계를 알아보았다. 살아 있는 통장이 몇 개 있었지만 그리 큰 금액은 아니었다. 영선이가 그 결과를 어머님께 설명했다.
점심을 먹고 우리들은 산소에 갔다. 아버님이 돌아가셨다는 것이 그때야 실감이 났다. 묘는 어머님보다 30센티쯤 뒤로 물러서 썼다. 젯상을 마련할 자리 때문이었다. 한잔씩 술잔을 올리며 우리는 눈물을 삼켰다.
오후 4시경 형님내외와 형미, 현숙이 내외, 영선이, 우리내외는 완도로 출발했다. 우리 사는 것을 보자는 현숙이 주장이 받아들여진 것이다. 형식이는 익산으로 갔으므로 자리를 같이 하지 못했고 영재는 어머님을 위로해 드리도록 집에 남았다. 우리가 떠나려 하자 어머니께서 눈물바람을 했다. 그 큰집에 영재마저 기숙사로 떠나고 나면 정말 적적하기도 할 것이다. 그렇지만 어떡하랴.
가다가 나주군 반남면에 있는 마한 시대의 고분군을 구경했는데 완도에 접어들자 바다 풍경을 볼 수 없을 만큼 밖이 어두워졌다. 저녁은 형미의 주장대로 완도에서 잘한다는 식당에 가서 아구찜을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활어시장에 가서 큼지막한 농어와 개불을 샀다. 김서방이 한턱을 썼다. 우리로선 바다를 보여주고 싶었지만 상어 지느러미같이 늠실거리는 밤 물결 위로 빨갛고 파란 불빛만 번뜩이고 있었다. 안타깝지만 내일을 기약하기로 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집에 도착하자 형미는 집이 넓다며 폴짝폴짝 뛰며 탄성을 질렀다. 불과 전세 2500밖에 안 되는 집이지만 32평정도 되고 거실이 길쭉하게 넓으니 그럴 만도 했다. 서울과 시골의 차이란 이렇게 크다.
우리는 밥을 먹은 뒤끝이라 조금 쉬었다가 떠온 회를 중심으로 술상을 차렸다. 집에 모과주와 유자주 담근 것이 있었는데 독하지도 않고 달큼한 것이 마실 만했다. 현정이 너와 돌려가며 통화한 것이 그 자리에서였다. 아버님이 우리를 이렇게 모이게 했으리라. 따라서 이제는 우리 가족 모든 일이 잘 풀리리라 나는 믿는다.
대화 도중 짬짬이 형미가 지누션인가 뭔가 하는 가수 흉내를 내며 웃겼다. 니 형부도 그날따라 술을 제법 많이 마셨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니 언니가 부천 새 병원에 출근하고부터 불어닥친 애로사항에 대한 얘기가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가 생각해도 김서방의 애로란 보통이 아닐 듯 싶다. 함께 살고 있는 영선이가 그에 대해 우스갯소리를 했다.
"어느날 밤에 집에 들어오니까 내 방에 불이 번쩍하면서 꺼지드만요. 그런가 보다 하면서 무심코 방의 불을 켜고 컴퓨터 의자를 끌어당겼는데 아니 이게 뭐야. 의자 안에서 뭐가 불쑥 튀어나오는 거예요. 아니, 수환이 놈이 의자 안에 숨어서 요렇게 웅크리고 있는 거예요. 얼마나 놀랐던지. 그렇다고 매형이나 누나한테 그 얘기하면 얘들이 외삼촌을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허허 요놈들이 그 담날부터는 삼촌 말이라면 아주 잘 듣더랑게요. 허허허. 어떤 묵계가 성립된 거지요. 얘들이 내 방의 컴퓨터를 가지고 놀곤 하는데 아무튼 매형, 얘들이 오락에 지나치게 빠져 있어요. 그리고 누나, 내 말하기가 좀 뭐하지만 누난 집안을 치우려는 마음이 없는 거라요. 매형이 워낙 잘 챙기고 하니까 믿어버려서이기도 하겠지만 그게 문제예요."
현정아, 니 언니의 입장도 오죽 어렵겠나. 새로 부천 직장이 멀기도 하거니와 밤 12시에 들어와 새벽 5시면 나갈 준비를 해야하니. 아무튼 영선이는 누나 편만을 들진 않았다. 김 서방은 신년 초에 얘들과 이런 약속을 했대나.
"인제 니들 앞으로 안 치우고 살면 아빠는 나가서 살란다. 내가 나가서 살까. 니들이 치우면서 살래." 하면서 얘들의 약속을 받아냈는데 그 뒤로 많이 좋아졌다고 했다.
그런 저런 이야기로 밤은 유쾌하게 깊어갔다. 형님은 피곤해 하여 먼저 자리에 들게 했다. 형미에게도 예비 대학생 대접을 하여 술을 몇 잔 마시도록 했는데, 형미는 "전혀 안 취하네." 하면서 헤헤 웃어대며 겁도 없이 술을 마셨다.
"네, 그러면 안 된다. 여자가 못 이긴 채 하면서 술잔을 들어야지 너처럼 덥벅덥벅 술을 받아 마시면 남자들이란 술잔을 권하면서도 내심으론 너를 우습게 깔본단 말야." 하고 김서방이 점잖게 타일렀다.
그러자 형미는 꺼들거리면서,
"싫으면 싫고 좋으면 좋고 하는 거지. 뱅뱅 돌리고 하는 것은 저는 싫어요."
형미의 말처럼 숨김과 수줍어함이란 우리시대 여성의 미덕일 뿐이고, 요즘 세대들에게 그것은 솔직하지 못한 거짓이고 위선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자 요즘 사랑의 현실에 대해 자못 절박하게 경험을 했다 할 수 있는 영선이가 나섰다.
"형미야, 남여 관계에 있어서 말야. 네가 일방적으로 좋아하면 그쪽에서는 좋아할 것 같애? 니가 쫓아가면 그쪽에선 당연하게 싫어지게 돼 있어. 적당한 긴장감이 필요한 거야 임마. 사랑도 기술이야 기술."
사랑이 기술이건 예술이건 간에 나 역시 거기에 대해서는 할 말이 제법 많았다.
"야 야, 형미야, 니 황순원의 <소나기> 알지. 책에 나온 그림을 보면 여자가 갈대를 꺾어들고 달려가고 그 뒤를 남자가 쫓아가는 그림 있지. 그 그림을 자세히 보면 여자가 달려가면서 살짝 뒤를 돌아보거든. 바로 그거야. 사랑이란 아주 멀리 달아나지 않고 뒤에서 쫓을 만하게 달아나면서 뒤를 살짝 돌아보는 것. 사랑이란 그런 거야. 뒤도 안 돌아보고 그냥 달아나면 어떤 남자가 쫓아 가겄니."
그러자 형미가 여러 사람으로부터 충고 내지는 공격을 받게 되자 호호 웃으면서,
"내가 여기서는 허물이 없으니까 받아먹지, 그런 자리에 앉으면 호호, 전 술은 입도 잘 못 대는데요, 할 거예요. 나는 원래 내숭은 잘 떨거든요."
"조씨 아니랄까봐 술을 잘 마시는구먼." 현숙인가 누군가 그런 얘기를 했다.
2월 13일 화요일.
완도 바닷가는 아름답다. 완도의 산들은 더 아름답다. 굽이굽이 펼쳐진 주변의 섬들을 거느리고 섬 중간에 하마의 뒷 잔등처럼 펑퍼짐하면서도 넉넉하게 천황봉이 힘차게 솟아 있다. 몽돌이라고도 하고 청환석이라고도 하는 맨질맨질하게 달아진 돌들이 해변에 가득 널려 있는 정도리는 영화나 사진에 많이 등장하는 완도의 명소다. 그곳을 들러 해남 대흥사를 거쳐, 윤선도 생가인 녹우당을 탐방하고 형님 동생들은 돌아갔다. 해남 주변은 볼 것도 먹을 것도 참 많다. 보길도며, 신지도 명사십리며, 다산초당이며 영랑생가며, 백련사 동백나무숲이며, 강진 도요지며 짱뚱어탕이며 숭어 삼치회며, 이런 것들은 안타깝게 다음으로 미루었다. 현정이 너도 기회가 난다면 우리가 여기에 살고 있을 때 방문했으면 싶다. 여행이란 좋은 안내가 항상 필요한 법이다. 이 땅에도 아름다운 곳이 참 많다. 미국을 보고 느낀 다음에 다시 돌아와 느끼는 이 산하의 푸른빛이란 어떤 것일까. 강진 성전에서 모두 보내고 난 뒤 결국 나 홀로 남았다. 그날 나는 밤늦게야 완도로 돌아왔다.
나는 지금까지 아버님의 장례식을 마치기까지의 경과를 자못 장황하게 설명했다. 이렇게 기록하고 보니 너의 향수와 자책을 덜어주기 위한 것이기도 했겠지만 어쩌면 내 자신을 위한 것 같기도 하다. 이번 장례 과정에서 큰집에서도 많이 협조를 했다. 우리는 아버지 대에 일어난 일을 가지고 다시 마음을 끓여서는 안 되리라.
이렇게 아버님은 다시 못 올 곳으로 떠났다. 불교적으로 얘기하면 시방 삼세에 연(緣)이 모여서 형상을 이루고 인간을 이루지만, 연이 다하여 흩어지면 그것으로 공(空)인 것이니 뭐 슬퍼하거나 기뻐할 그 무엇이 따로 있겠는가. 헛된 욕심과 집착에서 자유로우면 나눌 것도 보탤 것도 없는 그곳에 평화가 있는데, 그것을 유교적으로 얘기하면 정심(正心)인 것이며, 불교적으로 얘기해서 부동의 마음 평상심일 것이며, 기독교적으론 사랑이 아니겠나.
현정아, 한동안 너는 너 몫으로 나는 내 몫만큼 가슴이 아플 것이다. 그리고 너는 너대로 아픈 추억이 있을 것이다. 나는 청량리에선가 하숙할 때 새벽에 찾아 드신 아버지가 신고 온, 굽이 다 닳아빠진 낡은 구두가 생각난다. 아들의 구두는 차라리 광이 나는데. 양파 장사를 했던 때지 아마.
내가 맘대로 영문과로 전과를 하자 재수한 셈치지 뭐 하시며 또 다른 희망에 자신을 걸던 아버지. 세월이 좋았다면 그때의 꿈 대로 교수가 돼 아버님을 기쁘게 해 드렸을 수도 있을 텐데. 하지만 그땐 이른바 80년대 초반 폭풍의 계절이었다. 아버진 29살에 나은 자식이 효도를 한다는데 하면서 자신을 달랬나 보다. 내가 현장에 들어갔어도 아버진 형과 달리 나에게 크게 꾸중을 하신 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난 늦게나마 그림마저 지워진 맨질맨질한 화투장을 보며 아버님의 이해와 사랑을 짐작하곤 했었다.
내가 현장에 있었을 때니까 88년인가 89년엔가의 일이다. 인천 4공단 공장에서 부위원장으로서 며칠째 파업을 주도하고 있었을 때의 일이다. 노래를 한참 부르고 있는데 밖에서 구경하고 지원하던 군중들 속에 아버님이 얼굴이 빼꼼이 보이는 게 아닌가. 나는 깜짝 놀라 대열에서 빠져나왔다. 아버님을 우선 갈산동 어디쯤에 있는 중국집으로 모셨다. 알고 보니 아버님은 회사 쪽에서 집으로 전보를 쳐서 새벽차로 부랴부랴 올라오던 길이었다. 공단 파출소 명의로 전보를 받았으니 아버님 역시 어지간히 놀라기도 했을 것이다. 아버님은 묵묵히 배갈을 드시다가 나의 머리를 가리켰다.
"이놈아, 그 머리띠나 풀어라."
난 <단결 투쟁> 뭐 그런 식의 글자가 새겨진 머리띠를 그냥 두르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머리띠를 풀자 나에게도 술을 따라 권했다. 나는 입이 타 술이 입에 넘어가지 않았다. 묵묵히 배갈 한 병을 거의 다 비우시던 아버님은 무겁게 입을 여셨다.
"내려가자. 그 꼴이 뭐냐. 내려가서 농사나 같이 짓자."
할 말이 없었다. 죄송스러운 마음이 컸지만 동지들을 배반할 수도 없었던 것도 그때의 실정이었다.
"아버님 그냥 내려가세요."
나는 살려달라는 듯이 작게 얘기하다가도 어줍잖게 이 나라 이 민족의 장래에 대해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내 얘기를 마냥 듣고 계시던 어버진 한마디 말을 불쑥 뱉었다.
"아들을 이겨 먹는 아버지는 없다더니......"
그때 아버님은 얼마나 속이 타셨을까. 그냥 내려가셨으면 싶은데 회사 쪽으로 가는 나를 아버님은 주척주척 따라오셨다. 내가 내려가시라고 안달을 하자,
"회사 사장을 만나서 할 얘기가 있어야." 하면서 자신의 고집을 굽히지 않으셨다.
사장실로 들어가신 아버님은 한참동안 나오지 않으셨다. 나는 밖에서 가슴을 졸였다.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시려는 걸까. 당시 현장 분위기는 뒤숭숭했다. 구사대들이 안팎으로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형국이었다. 나는 사장실에서 나오시는 아버님께 달려갔다. 조금은 화난 목소리였을 것이다.
"대체 뭔 얘기를 하셨어요?"
"뭔 얘기를 했겄냐. 저것들이 헛걸음을 시켰으니 차비를 받아가야제."
아마 왕복 차비를 받았나 보더라. 아버진 자신이 바라지 않은 길을 가는 아들을 그렇게 용서하고 힘을 북돋아 주셨다. 결국 아들을 믿고 용서한 것이다. 아무튼 끝내 조합은 지키지 못했지만 그때 파업은 승리했다. 어버지로선 그동안 땀 흘린 것들이 도로아미타불이 되는 순간이기도 했을 것이고 얼마나 억장이 무너졌겠는가. 하지만 아버님은 끝까지 자식을 믿고 포기하지 않았다. 허리를 잔뜩 웅크리고 돌아가시는 아버님의 그 긴 그림자가 아직도 뇌리에 박혀 지워지지 않는다. 언젠가 나는 무딘 글이나마 아버님에게 부치는 헌사를 하나의 책자로 써낼 날이 기필코 오리라 믿는다. 그러면 아버님께 대한 나의 빚은 갚아질 것인가. 부모 자식간에 무슨 빚이 있을까마는 나는 그런 희망을 버릴 수 없다. 내가 걷는 길이 비록 험하고 아직 힘이 부칠지라도 부동심으로 질기게 밀고 나가는 것만이 아버님에 대한 빚을 갚는 것이라고.
물론 아버진 탁월한 점도 많았지만 허물도 많은 분이셨다. 있는 그대로 아버지를 이해하는 것, 그리고 그 사랑을 자신의 귀중한 양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 자신들 각자가 조금씩은 다를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랑을 누군가에게 아낌없이 베푸는 것, 그것은 우리 스스로의 숙제라고 나는 생각한다.
현정아, 우리는 밤을 새어 이야기를 한다해도 못 다할 얘기가 여전히 많겠지. 긴 글이 이렇게 부족하니 말이다. 간략하게도 적었는데도 글이 길어졌다. 마음의 잣대가 항상 중요하다. 두 사람, 아니 네 사람 모두, 즐거움이 호주머니 속의 잔돈처럼 항상 가까운 곳에 있으니 크게 욕심 내지 말고 작은 일에 손뼉을 쳤으면 싶다. 오서방도, 종명이 종갑이도 새해에는 가진 바 모든 소망이 뜻대로 잘 되기를 빌어마지 않는다. 무엇보다 건강하기를 빈다. 다시 만날 때까지 그곳 그 자리에서 항상 웃음을 잃지 않고 화목하게 잘 살기만 빈다. 내내 건강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