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년 대구 피난지에서 나오던 〈만화신보〉에 처음으로 만화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1955년 〈동아일보〉에 연재만화 〈고바우 영감〉을 통해 해방 후 처음으로 본격적인 신문연재만화를 실었다. 1950년대에서 1970년대의 암울한 시대적 분위기를 서민의 애환과 더불어 코믹하게 묘사하여 신문연재만화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1958년 유명한 '경무대사건' 등 몇 번의 필화를 통해 일부삭제 또는 전면삭제의 어려움을 겪었다.
2차례에 걸친 유화전·데생전을 포함한 4차례의 개인전을 가졌고 만화와 회화의 벽을 허무는 데도 이바지했다. 만화집에 〈꺼꾸리군 장다리군〉·〈세모돌이 네모돌이〉·〈고바우와 함께 산 반생〉·〈고바우 세계방랑기〉가 있다. 그의 만화의 주인공인 고바우는 1959년 김승호 주연으로 영화화되기도 했다.
시카고 대화재/1871
1833년 겨우 150명에 불과했던 인구가 1870년에는 30만 명으로 급증할 만큼 시카고는 빠른 성장세를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40년 동안 일궈온 모든 것들을 하루아침에 물거품으로 만든 대형 화재가 발생했다. 1871년 10월 8일 저녁 9시에 발생한 불이 다음날 오전까지 계속돼 도시 전체를 삼켜버린 것이다. 화재가 아니라 재앙이었다. 이 화재로 약 250명이 죽었고, 9만 명가량이 집을 잃었으며 재산 피해액은 거의 2억 달러에 달했다. 이같은 대화재에도 불구하고 상수도·하수시설, 교통시설 등 시의 물리적 기본설비들이 많이 남아 있었던 덕분에 시카고는 이전과 비슷한 모습으로 재건되었다. 정확한 화재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불에 타기 쉬운 소나무로 보도(步道)를 깔았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그러나 시카고는 다시 일어섰다.
고대 로마가 불에 탄 뒤 새로운 도시로 탈바꿈한 것처럼 시카고에도 그런 기회가 주어졌다. 1개월 만에 5000채의 주택이 세워졌다. 어느덧 시카고는 새로운 건축기술의 경연장이 됐고, 미국 건축의 살아 있는 박물관이 됐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고층건물을 짓는 데 필수적인 철골 구조 건축이 바로 이곳에서 화재 후 10여년 만에 창조됐다는 사실이다. ‘마천루(摩天樓ㆍskyscraper)의 시대’가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제1회 경ㆍ평 축구전 열려/1929
조선일보는 1929년 들어 특히 스포츠 사업에 전력을 다했다. 침체해가는 민족정신을 스포츠로 되살려보자는 취지였다. 전(全)조선여자배구대회, 전조선여자농구대회, 전조선씨름대회 등이 그 해에 처음 열린 대회들이다. 그 가운데 ‘경ㆍ평(京ㆍ平) 축구대항전’은 단연 백미였다. 1929년 10월 8일, 제1회 대회 첫 경기가 7000명의 관중이 운집한 가운데 휘문고보 운동장에 열렸다. 첫 경기는 1대1 무승부였으나 9일ㆍ10일 경기에서 평양팀의 연승으로 첫 대회는 평양팀이 종합전적 2승1무로 경성팀을 앞섰다. 경기는 격투기를 방불케 할 만큼 거칠어 상대지역을 방문하는 선수들은 부상을 각오해야 했다.
응원전도 치열해 경기가 있는 날이면 경ㆍ평을 연결하는 기차는 언제나 응원 인파로 초만원이었다. 평양에서 경기가 있는 날이면 온 시가는 철시했고 경기장 주변은 기생들이 타고 온 인력거로 미어터졌다. 이듬해 2회 대회까지 치렀으나 급기야 응원과열과 두 팀간의 지나친 승부욕으로 1931년ㆍ1932년 2년간은 경기를 중단해야 했다. 1933년에 재개돼 1935년까지 이어졌으나 결국 판정시비가 불씨가 돼 1935년에 완전 중단됐다.
김정일, 조선노동당 총비서직 승계/1997. 10. 8
1997년 10월 8일 북한의 김정일이 조선노동당 총비서직을 승계했다. 김정일은 1942년 2월 16일 당시 항일 유격대 지휘관이었던 김일성과 대원 김정숙 사이에 태어났다. 1964년 3월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 정치경제학과를 졸업한 후 곧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에서 조직·선전 부문의 일을 담당했다. 1973년부터 전개된 3대혁명 소조운동을 조직·지도하고 1975년에 3대혁명 붉은기쟁취운동을 발기하는 등 새로운 대중운동을 주도했다. 1973년 9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5기 7차 전원회의에서 비서국 비서로 선임되었으며, 이듬해인 1974년 2월에 열린 8차 전원회의에서는 정치국 정치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92년 4월 김일성의 80회 생일에 북한군 원수로 지명되어 사실상 권력 승계를 확고히 했다. 1994년 7월 8일 김일성 사망 후, 3년 3개월 만인 1997년 10월 8일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및 중앙군사위원회의 추대를 받은 형식으로 당 총비서직을 승계함으로써 '김정일 시대'를 열었다. 북미관계와 남북관계에 새로운 변화를 꾀하고 있으며 예능 방면에도 상당한 관심과 재능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0년 6월 13일 김대중 대통령과 분단 이후 최초로 남북정상회담을 가졌다.
명성황후, 일본인들에게 시해(을미사변)/1895
1895년(고종 32)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주동이 되어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하고 일본세력 강화를 획책한 정변을 가리킨다.
1894년의 갑신정변을 통하여 깊숙이 조선 내정에 간여하게 된 일본은 청·일전쟁에 승리한 뒤 박영효(朴泳孝)·김홍집(金弘集)을 중심으로 한 친일내각을 만들어 세력확장에 힘을 기울였다. 이때 프랑스·러시아·독일 등 3국은 일본의 대륙침략 저지를 위해, 청일전쟁의 승리로 일본이 차지한 랴오둥반도[遼東半島]를 청나라에 반환할 것을 요구한, 이른바 '삼국간섭'으로 일본의 세력확장에 제동을 걸었다. 그동안 일본의 강압하에 내정개혁을 추진한 조선정부는, 러시아공사 K.베베르와 제휴하고 친일세력의 완전 제거를 위하여, 1895년 9월 6일 왕비시해 음모혐의로 전 내무대신 박영효에 대해 체포령을 내려 정계에서 축출하였다.
이미 8월에 민영환(閔泳煥)을 주미전권공사(駐美全權公使)로 등용한 동시에, 친일계인 어윤중(魚允中)·김가진(金嘉鎭) 등을 면직시키고 이범진(李範晋)·이완용(李完用) 등의 친러파(;이완용(李完用)·민영환(閔泳煥)·윤치호(尹致昊) 등 소위 '정동파')를 기용하여, 제3차 김홍집내각이 성립되어, 친미·친러세력이 우세하였다.
더구나 주한일본공사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가 조선정부에 약속한 증여금 300만 원을 일본정부가 제공하지 않자, 조선정계에서는 배일세력이 증가하였다. 이에 일본측은 이노우에 대신 무인 출신 미우라고로[三浦梧樓]를 주한일본공사로 파견하였다. 조선정부는 일본의 강압에 따라 제정한 신제도를 구제도로 복구하려고, 일본인 교관이 훈련시킨 2개 대대의 훈련대도 해산시키고, 미군장교 다이가 훈련시킨 시위대를 중용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대하여 미우라는 명성황후 시해계획을 세우고, 1895년 10월 2일 하수인으로서 한성신보사(韓城新報社)에 있는 낭인(浪人)을 이용하고자 사장 아다치[安達]를 공사관으로 불러 6,000원의 거사자금을 주고 왕비시해의 전위대로 삼아, 공덕리(孔德里) 아소정(我笑亭)에 있는 흥선대원군을 궁중으로 호위하는 일을 담당시켰다. 그리하여 미우라 등은 대원군이 궁중을 감독하되 내각에 간섭하지 않으며, 김홍집(金弘集)·어윤중·김윤식(金允植)을 중심으로 내각을 구성하고, 이재면(李載冕)과 이준용(李埈鎔)을 중용할 것 등을 조건으로 대원군 세력의 협조를 얻었다. 그 외 일본군수비대와 일본인 거류지 담당경찰관 및 친일조선인까지 동원할 계획을 세우고, 훈련대의 우범선(禹範善)·이두황(李斗璜)·이진호(李軫鎬) 등 3대대장과 전 군부협판(軍部協辦) 이주회(李周會)를 포섭하였다.
한편 정부에서는 군부대신 안경수(安壽)를 일본공사관에 보내어 훈련대해산과 무장해제, 민영준(閔泳駿)의 궁내부대신 임명을 통고하였다. 일본은 상황이 급변함을 직감하고 명성황후 시해계획을 10월 8일 새벽으로 결행하였다. 흥선대원군을 앞세운 일본인 자객들은, 서대문을 거쳐 우범선·이두황이 지휘한 조선 훈련대와 합류하여 광화문을 통과하였다.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洪啓薰)과 군부대신 안경수가 1개 중대의 시위대 병력으로, 이들의 대궐 침범을 제지하려다 충돌이 일어났다.
흉도(兇徒)들은 궁내부대신 이경직(李耕稙)과 홍계훈을 살해한 다음, 왕궁을 호위하던 다이 지휘하의 시위대들과 교전하여 패배시켰다. 폭도들은 고종과 민비의 침소인 건청궁(乾淸宮)에 난입하여 고종에게 미리 준비한 왕비의 폐출조서(廢黜詔書)에 서명을 강요하며 위협했다. 그러나 고종이 이를 거부하자 왕세자에게 칼을 휘두르는 등 극악한 만행을 저질렀다. 이어서 왕비의 침실인 옥호루(玉壺樓)에 난입하여 왕비를 살해하고, 시체에 석유를 뿌려 불사른 뒤 뒷산 녹원(鹿苑) 숲속에 묻었다. 이후 대원군을 고종과 대면시켜 미리 준비한 조칙 3개안을 재가할 것을 강요했다. 그리고 왕비학살을 일본인들이 하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한 위장처리방안을 세웠는데 그 내용은 "이번 사건은 훈련대와 대원군이 결탁하여 행한 쿠데타이며, 일본군은 고종의 요청에 의해 출동하여 훈련대와 시위대의 싸움을 진압했고, 민비시해는 아는 바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친일적인 김홍집 내각을 세운 다음, 8월 22일 민비의 폐위조칙을 위장 발표했다.
곧 새로 유길준(兪吉濬)·서광범(徐光範)·정병하(鄭秉夏)·김종한·권형진(權瀅鎭) 등 친일파를 중심으로, 제4차 김홍집내각을 수립하였다. 명성황후시해 현장에는 고종·황태자 및 미국인 교관 다이, 러시아인 기사 사바틴, 그외 많은 조선인이 있어 진상을 낱낱이 목격하여, 사건은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자세히 알려졌다. 이에 미국공사대리 앨런과 러시아 공사 베베르는 각각 군병들을 동원하여 시위를 하는 한편, 각국 공사의 회합 후 일본의 관여사실과 폐위 조치 불인정 등을 발표했다. 또 이들은 일본이 뒷받침하고 있는 김홍집 내각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렇게 구미열강이 강경한 태도로 일본인의 사건 관여사실을 주장하고 나서자, 일본은 이의 처리방안으로서 미우라를 해임, 고무라[小村]를 판리공사(辦理公使)로 임명하였다. 한편 미우라 등 관계자 48명을 히로시마[廣島] 감옥에 구치하고, 형식적으로 관련혐의자에 대한 취조를 하였으며, 결국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전원석방시켰다. 결국 을미사변은 항일의병활동의 원인과 아관파천(俄館播遷)의 계기가 되어, 한국은 러시아의 보호국과 같은 지위로 떨어졌고, 일본의 식민지화계획에 차질을 가져왔다.
한편 12월 1일 고종은 정식으로 민비가 승하했음을 발표했으나 일본인의 관련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하지 못했다. 오히려 정부는 사건을 은폐하여 이주회(李周會)·윤석우(尹錫禹)를 범인으로 몰아 처형하고, 대원군을 물러나게 한 후 이준용이 일본으로 망명하는 데서 사건을 매듭지으려 했다. 또 내외의 비난을 무마하기 위해 개혁정책을 추진, 단발령과 건양(建陽)연호의 사용, 친위대·진위대 등으로 군제 개편, 소학교령 공포, 태양력 사용 등을 시행했다. 그러나 왕비학살에 대한 국민들의 반일감정이 극도에 달한 상황에서 친일내각에 의해 추진된 개혁은 전국적인 반일의병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고전무용가. 충청남도 천안(天安) 출생. 1933년 3월 홍성(洪城) 갈미보통학교를 수료한 뒤 무용가 한성준(韓成俊)에게 춤을 배웠으며, 37년 승무(僧舞)로 무용계에 데뷔하였다. 46년 고전무용연구소를 설립하였고, 60년 국악예술고등학교 교사, 62년 서울시 문화위원, 66년 수도여자사범대학 강사, 67년 이화여자대학 강사가 되었다. 69년 승무가 무형문화재 제27호, 71년 학무(鶴舞)가 제40호로 지정되었다. 74년 수도여자사범대학 조교수, 83년 국립극장 종신단원과 무용협회 고문이 되었다. 미국 순회공연을 비롯하여 뮌헨올림픽·서울올림픽에서 공연하였다. 서울시문화상(1967), 대통령포장(1970), 국민훈장 동백장(1973) 등을 받았다.
2002년 황해도 송죽리 고분서 새 벽화 발굴
◇초생달 같은 눈썹과 붉은 입술, 까만 눈동자가 지금도 살아있는 것처럼 생동감 있다.
◇송죽리 고구려 벽화 무덤 앞 방 오른쪽 벽에 그려진 흰둥이. 꼬리털까지 세세하게 묘사했다.
◇부리부리한 눈의 고구려 호랑이. 훼손으로 인해 주위는 떨어져나갔다.
박경리(朴景利) 대하소설 '토지' 완간/1994
1969년 집필을 시작, 94년까지 제 5 부작 총 16권으로 완성되었다. 내용은 최씨 일가 3대에 걸친 가족사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제 1 대는 하동(河東) 평사리의 대지주 가문인 최참판댁 <윤씨부인>을 중심으로 조선말 사회적 전환기에 몰락하는 집안의 모습이 가문의 출생비밀과 얽혀 전개된다. 제 2 대는 윤씨부인의 손녀 <서희>를 중심으로 국권피탈 이후 간도(間島)에 이주하여 재산을 되찾고 가문을 일으키려는 그녀의 노력과 당시 간도의 독립운동·한인사회의 모습이 최씨 일가를 중심으로 폭넓게 묘사되고 있다. 제 3 대는 서희의 아들세대인 식민지 지식인층이며 3·1운동 이후 식민지화와 자본주의화가 함께 진행되는 서울 등의 도시에서 그들이 겪는 개인적·역사적 삶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 작품은 조선말에서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큰 변혁기의 한국 근대사 속에서 다양한 인물들이 겪는 운명과 고난, 민족의 한(恨), 역사의 상관성을 깊이있게 부각시켜 1970년대 이후 한국의 대표적 장편 대하소설로 꼽히고 있다.
조세 사라마구 노벨문학상 수상/1998
포르투갈 작가 조세 사라마구(75)가 1998년 10월 8일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상상력과 열정, 절묘한 아이러니로 뒷받침된 우화. 이는 조세 사라마구의 작품세계를 나타내주는 키워드들이다. 그는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문제의식을 독창적인 상상력과 우화적 기법으로 녹여내는 작가다.
그는 1922년 포르투갈 리바테조 지방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먹고살기 위해 학교를 중퇴할 정도로 어려운 형편에서 자라난 그는 25세 때 도덕적 위기에 빠진 농민들의 이야기를 다룬 '죄악의 나라'라는 첫 소설을 발표하지만 별로 눈길을 끌지 못했다. 그는 이후 문학보다는 우파 독재자 안토니오 살라자르에게 맞서는 공산주의 활동에 전념했다.
그의 사상적 기반을 이루고 있는 유물론은 이때 형성된 것이다. 1974년 군사 쿠데타로 살라자르 정권이 무너진 뒤 소설쓰기를 재개한다. 1977년 발표한 '회화와 글쓰기에 관한 지침서'에서는 전통을 따르는 것에 싫증을 느끼게 된 한 작가의 내면 고백 형식을 통해 글쓰기와 문학창작에 깃든 창조성의 문제를 파고들면서 그의 궁극적 관심이 '예술'에 있음을 내비쳤다.
세인트루시아의 시인 데레크 월코트, 노벨문학상 수상/1992
영국 연방 세인트 루시아 출신의 시인 데레크 월코트(62)가 1992년 10월 8일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월코트는 1930년 영국계 아버지와 아프리카 노예 혈통의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다. 1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사회사업가인 엄격한 어머니 밑에서 교육받았으며, 1953년 트리니다드로 이사했다.
1948년 첫 시집 '25편의 시'를 출간했고, 1962년 런던에서 '초록빛 밤 속에서'를 펴내 일약 카리브해 문학의 획기적인 시인으로 부상했다. 이 시집은 과거의 시와는 달리 단순한 영문학의 모방이 아니라, 카리브해의 매혹적인 정서를 현지인의 어법으로 생생하게 표현해보려 했다.
1985년부터 미국 보스턴대학에서 문예창작을 가르치기 시작했으며, '오메로스' (1990)로 1992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이 장엄한 서사시는 '복합적 혈통과 카리브 해에게서 얻은 감각과 리듬으로 카리브 해 현실과 풍광 속에 세계 문화의 모든 조류를 용해시킨'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탈옥수 지강헌 사건 발생/1988
서울 영등포 교도소에서 대전과 공주 교도소로 이감 중이던 지강헌 등 미결수 12명이 1988년 10월 8일 오전9시30분경 중부고속도로 일죽 인터체인지 3km 전방에서 호송버스를 탈취해 달아났다. 지강헌 등 7명은 16일 새벽 4시30분경 자살유혈극이 끝날 때까지 서울시내 전역을 누비고 다녔다.
마지막으로 서대문구 북가좌동 민가에 들어가 인질극을 벌리고 자수를 권하는 가족과 보도진을 향해 '돈있는 자들은 죄를 지어도 옥살이를 하지 않고 돈 없는 사람만 감옥에 남아 있다'는 뜻으로 '유전무죄 무전유죄'란 말을 남기고 안광술 등 2명은 자살하고 지강헌은 사살당했다.
살인마 김대두 검거/1975
55일 동안 전남 경기 서울 일대를 누비며 8회에 걸쳐 17명을 살해한 희대의 살인마 김대두가 1975년 10월 8일 검거됐다. 그는 이날 오전 수상한 청년이 피 묻은 청바지를 맡기고 갔다는 서울시 소재 세탁소 주인 아들의 신고로 검거됐다.
그는 폭력전과 2범으로 김영태 등의 별명을 사용하며 고향을 떠나 떠돌이 생활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나이에 비해 앳되보이는 얼굴에 차림새도 멀쩡한 그는 “교도소에 있다가 사회에 나오니까 할 일도 없고 배운 기술도 없었다. 친척이나 친구들도 전과자라고 해서 냉대를 했다. 남보다 끝발나게 살고싶었는데 집에서는 도와줄 형편이 못돼 일을 저질렀다”고 어처구니없는 범행동기를 밝혔다.
5월 17일 수원교도소를 나온 김대두는 8월 13일 용돈을 마련하기 위해 전남 광산군의 민가에 복면을 하고 침입, 살인행각을 시작했다. 경기도 시흥에서는 생후 3개월 된 어린이와 어머니를 살해하는 등 이날 검거될 때까지 칼과 망치, 심지어 돌로도 살인을 일삼았다. 그가 빼앗은 금품은 현금 2만6천원과 여자 손목시계 등이 전부였다.
고시 동기였던 재판장의 요청으로 국선변호를 맡게 된 이상혁 변호사가 구치소로 면회를 갔으나 김대두는 ‘검사 앞잡이’라며 대화를 거절했다. 다섯번째로 찾아간 이상혁은 ‘대두(大斗)라는 이름은 누가 지어준 것이냐’고 묻자 김대두는 ‘아버지가 지어줬다’고 대답했다. 이상혁은 “대두는 ‘큰 인물’이라는 뜻인데 네 아버지가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을 바랐던 것일 테니 얼마 남지 않은 생애 동안 소년수의 재범을 막는 등의 교화활동부터 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라고 타일렀고 마침내 김대두는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성실히 재판에 응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된 김대두는 동료재소자들을 위해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았고 ‘무기형으로 감형해 달라는 변론을 하겠다’는 이상혁에게 ‘나는 끔찍한 짓을 저질렀으니 죽어 마땅하다’고 담담히 말했다.
심훈종 판사(현 변호사)는 서울형사지법 부장판사로 재직하던 1975년 11월 27일 김대두에게 강도, 살인과 미수, 강간죄 등을 적용해 공범 김회운과 함께 사형이 선고하였고, 1976년 12월 28일 사형이 집행됐다.
교수대에 올라가는 순간에도 피해자의 원혼을 위해 기도하고 찬송가를 부른 김대두는 ‘내가 마지막 사형수이기를 진심으로 바란다’는 말을 남기고 웃는 얼굴로 죽음을 맞았다.
구세군 한국본영 창설/1908
구세군 창설자 윌리엄 부스 대장이 1907년 일본을 방문했을 때, 재일 한국 유학생들이 한국에서도 구세군 사업을 전개하여 줄 것을 부스 대장에게 요청했다. 평소 동양 선교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부스 대장은 한국 선교를 결심하고 G.S.레이턴과 J.롤리 두 사관을 한국에 파견, 답사하게 한 후 1908년 10월 1일 호가트 정령, 번윅(한국명 반우거) 참령, 밀턴 기관과 여자 독신사관 등 일행을 한국 개척 사관으로 임명, 서울 서대문에 처음 주재하게 했다.
10월 8일 이들은 구세군 혈화 군기를 서울 중심지인 황토현(현재 광화문 네거리)에 세우고 가로전도(街路傳道)로 구령(救靈)의 포문을 열었다. 이것이 구세군 한국본영의 기원이 됐다. 이색적인 군복을 입은 서양인들이 전하는 복음은 듣는 이들로 하여금 큰 희망을 갖게 하였지만 당시 한국 민중들이 구세군에게 기대했던 희망은 영적인 것보다는 민족적인 문제가 우선이었다.
이후 한국 구세군은 포교 7년 만에 선교사관 20여 명과 한국인 사관 수십 명으로 확장하였고, 서울-개성-해주-영동-대구와 전라도 각 지방 등 89처에 전도소를 설치했다.
쿠바 혁명가 체 게바라(Ernesto 'Che' Guevara) 볼리비아 정부군과 전투중 총상 입고 체포/1967
카스트로가 정권을 잡자 쿠바 시민이 되어 라카바니아요새 사령관, 국립은행 총재, 공업장관 등을 역임하여 ‘쿠바의 두뇌’라 불렀다.
그러나 1965년 3월부터 소식이 끊겨 사망설이 파다하였으나, 카스트로에게 작별의 편지를 남기고 새로운 전쟁터로 달려갔다는 사실이 그해 10월 밝혀졌다. 그는 볼리비아의 산악지대에서 게릴라 부대를 조직, 1967년 10월 볼리비아 산중에서 정부군에게 포위되어 부상을 당하고 사로잡힌 후에 총살당하였다.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은 독일의 생화학자 바르부르크(Otto Warburg, 1883~1970) 출생
1883년 10월 8일 프라이부르크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 E.G.바르부르크는 유명한 물리학자였다. 1903년 베를린대학교의 유기화학자 E.피셔에게서 생화학을 공부하였고, 부친으로부터 물리학과 광화학을 배워, 아버지와 함께 광합성 연구를 시작하였다. 1906년 화학으로 학위를 받고, 1911년에는 의학 학위도 받았다. 1913년부터 베를린의 카이저 빌헬름 생물학연구소(훗날의 막스 플랑크 생물학연구소)에서 1960년 가까운 연구생활을 했다.
1930년 이 연구소의 소장이 되었으며, 그의 지도하에서 이 연구소는 세계 생화학 연구의 중심지가 되었다. 1920년 오늘날까지 쓰이고 있는 검압계(檢壓計)를 고안하여 세포의 호흡을 조사하였다. 1924년 세포호흡에서의 철의 촉매작용을 발견하여 오늘날의 전자전달계의 기초를 닦았다. 또 세포호흡계의 중요한 조효소인 NADP(조효소 II), FMN(플라빈모노뉴클레오티드), FAD(플라빈아데닌디뉴클레오티드)를 발견하였다. 이 밖에도 암세포의 해당작용계(解糖作用系)의 연구와 광합성의 구조, 즉 광양자수량(光量子收量)의 결정의 연구로 유명하다. 1931년 내호흡(세포호흡)의 연구로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았으며, 그의 제자 중에는 후에 역시 노벨상을 수상한 H.A.크렙스와 A.H.테오렐이 있다.
바흐 이전의 가장 위대한 독일의 작곡가 쉬츠(Heinrich Schutz, 1585~1672) 출생
쾨스트리츠 출생. J.바흐보다 100년 먼저 태어난 그는 바흐 이전의 독일이 낳은 가장 위대한 작곡가로서 프로테스탄트 교회음악분야에 많은 명작을 남겼다.
곧 S.샤이트, M.샤인과 함께 17세기 독일의 3대 에스(S)로 불리며 1599년 카셀의 궁정 오르간 연주자가 되고 1617년 이후는 드레스덴의 작센선거후(Sachsen 選擧侯)의 궁정악장으로 지냈다.
그의 작풍은 독일적인 구성력과 프로테스탄트적인 종교감정, 그리고 이탈리아 유학에서 습득한 화려한 협주양식과 그의 탁월한 기술의 뒷받침으로 깊은 감정표현의 경지에 이르고 있다.
그는 《다윗시편곡집(詩篇曲集)》(1619) 《부활오라토리오》(23) 《신성가곡집(神聖歌曲集)》(25) 《신성교향곡(神聖交響曲)》(29, 47, 50) 《교회협주곡》(36, 30) 등의 일련의 교회작품에서 A.가브리엘리의 이중합창양식, C.몬테베르디의 극음악양식, 콘체르타트양식 등을 도입, 독일의 전통적인 폴리포니(polyphony)에 큰 변화를 준 최초의 작곡가로서도 유명하다.
그밖에
2002년 단말기 보조금 3년간 금지하는 '전기통신사업법 개정안' 국무회의서 의결
2001년 밀입국하려던 중국 동포 등 25명 시신 수장(水葬)
2001년 배리 본즈 박찬호로부터 미프로야구 사상 최다 홈런 수립
1998년 프로야구선수 타이론 우즈, 첫 외국인선수 MVP에 선정
1998년 원로 삽화가 김영주씨 별세
1992년 현승종 제24대 국무총리 취임
1992년 빌리 브란트 전 독일 총리 사망
1985년 남북체육회담, IOC주재로 로잔에서 열림
1984년 삼성반도체 256KD램 개발
1983년 중공, 신학대 개설
1983년 창경원 동물가족, 과천 서울대공원으로 이사 시작
1982년 폴란드 자유노조 해체
1980년 서울지검, 처음으로 순회법률상담제 실시
1978년 미국, 크루즈미사일 실험성공 발표
1977년 예비군, '쌍용 작전' 개시
1975년 김옥선 의원 파동
1973년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 사망
1970년 프랑스 소설가 장 지오노 사망
1968년 법관추천회의, 새 대법원장에 민복기 선출(21일 정식임명)
1967년 체 게바라 볼리비아 정부군과 전투중 총상 입고 체포
1967년 영국 정치가 애틀리 사망
1963년 유엔총회, 월남의 불교도박해 조사단파견 결의
1962년 이승만대통령, 미군의 철수연기를 요구
1959년 정부, 대일통상해제 원칙을 결정
1955년 국회, 한국통일방안 결의
1952년 한국휴전회담서 유엔측 무기한 휴전통고
1951년 역사학자 김성칠 작고
1951년 휴전회담장소 판문점으로 결정
1951년 한국-미국 재정협정 조인
1943년 총독부, 생산증강 노무강화요강 발표
1942년 인도서 반영국소요. 3천명 사상
1928년 장개석, 국민정부 주석에 취임
1910년 중추원 부의장에 김윤식, 고문에 이완용 등 14명 임명
1895년 후안 페론 아르헨티나 대통령 출생
1879년 독일-오스트리아 동맹
1735년 중국 청조 13대 황제 옹정제 사망
첫댓글 구슬님,아주 잘읽고있어요.날씨가 변덕스러운데 감기조심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