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렌체 여행6 - 시뇨리아 광장의 베키오 궁전에서 메디치 가문의 영광을 생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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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 시내 두오모 남쪽 “단테의 집”을 나와 강변쪽으로 골목길을 세블록을 걸으니
별안간 넓은 광장이 나오는데, 이른바 피렌체의 중심 시뇨리아 광장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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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시뇨리아 광장 Piazza della Signoria 에 있는 베키오 궁전 Palazzo Vecchio 은
중세 피렌체 공화국 당시 피렌체의 정치와 행정의 중심지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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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시뇨리아 광장은 시민의 공공 집회장이었는 데,
물의 요정에 둘러쌓인 넵튠의 분수와 코시모 메디치의 기마상과 여러 조각상 사이로
미켈란젤로 의 다비드상 과 사비니 여인 이 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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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 Firenze 는 예술의 도시요 꽃의 도시라 불리는 데,
멀리 에트루리아 시대 부터 기원을 가진 도시로 르네상스 가 태동한 곳이며
그 유명한 단테와 마키아벨리 가 살았던 도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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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뇨리아 광장 한켠에 있는 베키오 궁전 앞에는 여러 조각상이 서 있는데
그중에서도 압권은 단연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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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을 하던 초기에 한 소녀가 왜 그렇게 계속 돌을 두드리냐고 물었단다. 그러자
“저 바위는 그냥 돌이 아니란다,
난 그 속에 잠자는 천사를 깨우는 중이란다”라고 말했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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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에서는 메디치가의 후원 으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및 브루 넬레스키, 보티 첼리, 도나첼로등 예술가들이 남긴 많은 건축물들을 볼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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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치가 는 1434년부터 1737년에 걸쳐 피렌체에서 약종상으로 출발해
은행업에 진출해 성공한 명문가로
르네상스 시대에는 통치자로서 학문과 예술의 강력한 후원자 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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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반니 디 비치 는 1,420년경에 교황청의 은행가로서 거금을 모으자
정치계에 투신하여 활약하였고
아들 코시모 메디치 는 구 지베층에 의해 추방된후 민중의 지지로 복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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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교묘한 처세술로 정치, 외교에 업적을 올렸으며
유럽 16개 도시에 은행을 세우는등 상업자본에 힘입어 미술가를 보호 하고
문화의 기초를 다졌으니 "피렌체 국부의 칭호" 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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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9년 손자 로렌초 데 메디치 가 승계하여 경쟁자 인 파치 가를 누르고
조부의 치적을 발전시켜
학자들을 지원하고 고대미술을 수집했으며 국왕들에게 대부업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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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주의적 교양을 폭넓게 지녔던 그는 학예와 철학 연구를 장려하였으나
뒤를 이은 피에로 는 프랑스왕 샤를 8세의 침입을 받아 굴복하자 시민들의 반발을 사서 추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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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치가는 1512년 피렌체로 복귀하여
교황 레오 10세, 클레멘스 7세와 레오 11세 를 배출 하였으며 독일의 황제 카를 5세 가
이탈리아로 남하했을 때 "로마의 겁탈" 로 피렌체에서 쫓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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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곧 정치력을 발휘해 황제의 힘을 빌려 복귀하였으며 가문을 이은
방계의 코시모 1세 는 1569년 민주 공화국을 폐지하고 토스카나 대공 이 되어 군주의 지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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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프란체스코 는 과중한 세금 징수로 경제를 파탄지경에 몰고 갔으나 예술과 과학의 후원자인 데,
메디치 가문은 1737년 7대 대공 잔 가스토네의 죽음으로 단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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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앞서 로렌초의 딸 카테리나(카트린) 는 종조부인 교황 클레멘스 7세의 정치력으로
프랑스왕 앙리 2세의 왕비 가 되어
역사상 카트린 드 메디시스 ( 이탈리아어로는 메디치 ) 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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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트린 드 메디치가 프랑수아 1세의 둘째아들 앙리에게 시집간 것은 1,534년인 데,
앙리는 형이 죽는 바람에 왕이 되었으나
20살 연상인 애첩에게 휘둘리니 왕비 카트린은 숨죽이고 인고의 날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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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갈 때 이탈리아 요리사들을 데려가 "포크" 를 소개하고 프랑스 요리를 다양하게 발전 시킨 이외에
마키아벨리 의 “군주론”을 가져가 밤낮으로 읽으며 참고 또 참았단다.
마흔살 남편 앙리 2세가 마상 창시합에서 죽으니
그녀는 기다린 보람(?) 이 있어 세아들을 차례로 왕위에 올리며 섭정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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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기즈 공작이 신교도를 학살하면서 내란 이 일어나니 수습을 위해
신교도 위그노 나바르 왕국의 여왕 진달브레와 협상해서 그 아들 앙리를 사위로 맞았으나
파리의 결혼식에 참석한 신교도 는 "성 바르톨메유의 학살" 로 수천명이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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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을 주도한 기즈 공작 의 세력이 너무 커지자,
연금하고 있던 사위 앙리를 탈출시켜 세력의 균형을 이룬후 아들 앙리 3세를 조종해
기즈공작을 죽이고 사위를 후계자 로 정한다.
카트린이 죽은후 앙리 3세 왕이 가톨릭 세력에게 암살당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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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위 앙리는 가톨릭으로 개종해 앙리 4세 로 왕이 되어 "부르봉 왕조" 를 여니
군주론에 심취했던 카트린이 설계한대로 된 것이라!
여기 수백년을 서 있던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는 지금은 아카데미아 미술관으로 옮겨 졌으니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모조품인데 진품이나 다를바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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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옆으로는 메두사의 목을 벤 첼리니가 만든 페르세우스의 청동상 이 보이는 데,
메두사 는 바다의 괴물로 폭풍을 지배하는 고르곤 자매중 하나인데 미인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메두사는 바다의 신 넵튠에게 강간 당한후
아름다운 머리카락은 뱀으로 변하고 얼굴은 흉악해 졌으며 누구든지 보는 사람을 돌로 만들어 버렸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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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머큐리 (헤르메스) 와 미네르바 (아테네) 가
페르세우스에게 거울 방패를 주고 거울에 비치는 메두사를 칼로 베라고 일러
그 머리는 아테나여신의 방패 에 장식물이 되었다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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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는 1,494년에 민중들을 선동해 메디치 가문의 피에로를 추방하고 피렌체의 통치자가 되었던
수도승 사보나롤라 는 이 광장에서 알렉산더 6세 교황에 의해 처형된다.
그러니까 4년후인 1,498년 반프랑스 외교정책을 취하라는 로마 교황의 명을 거부한
수도승 과 피렌체를 파문에 처하니 시민들에 의해 화형당한 것인데 그 돌비석 은 찾을수가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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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시청사인 베키오 궁전 Palazzo Vecchio 은 높이 94m 의 종탑이 있는
고딕 건축물로 14세기 초에 시청사로 건축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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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시모 메디치 1세가 개보수한 2층 “500년 홀”은 화려한 벽화가 있으며 조각과 직물도 볼만한 데,
지금도 일부는 시청사로 사용하고 있어 개방하지 않는게 아쉽다.
그런데 1,563년 조르조 바사리가 궁전 벽에“마르치아노 전투”를 그렸는데
최근에 그 벽 뒤의 원래 벽에 레오나르도 다빈치 가 “앙기아리 전투”라는 벽화를 그렸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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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세라치니 박사팀은 바사리의 그림에서 “찾으라, 그러면 발견하게 될 것이다 Cerca Trova”라는
깃발을 보고 구멍을 통해 내시경과 초음파 및 자외선 장비를 동원해 찾았단다?
베키오 궁전의 숨겨진 벽에서 검출된 안료에서 망간과 철이 발견됐다며
이것은“모나리자” 같은 다빈치의 그림에서만 볼 수 있는 소재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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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이 이중으로 세워진 이유는 바사리가 다빈치에 대한 존경의 뜻에서 작품을 보호하려고 했기 때문이라나?
1440년 피렌체, 베네치아와 교황령 연합군이 밀라노의 군대를 물리친 전쟁에서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1503년 다빈치에게 앙기아리 전투를 제작해 줄 것을 요청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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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빈치는 1년간 작업 하다가 새로운 유화기법이 실패해 그만두고 밀라노를 떠난 것으로 알려졌는 데,
이제까지는 말 탄 전사들이 모습이 그려진 다빈치의 스케치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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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피렌체공화국은 1500년대 초 다빈치와 미켈란젤로에게 베키오 궁전 내
“500년의 방” 양쪽 벽에 각각 그림을 그리도록 했는데.....
미켈란젤로는 피사에 대승한 “카시나 전투”를 주제로 받았으나 교황의 부름을 받고 로마로 떠나면서
두 사람의 맞대결은 무산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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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을 떠나면서 되돌아보니 피렌체는 1532년 메디치가의 세습체제가 확립되어 토스카나 공국의 수도가 되었고
메디치가는 돈으로 유럽 국왕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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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치가 는 재력을 배경으로 민중을 조종하며 건축과 예술을
자신들의 매스미디어로 이용 하면서
피렌체의 정권을 잡았는데 코시모 일 베키오는 최고시민이라는 가면 뒤에 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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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코시모 는 그리스 플라톤의 숭배자가 되어 아카데미 를 되살렸으며
피렌체 대학은 700년간 교회의 박해로 사라졌던 이교도의 언어 그리스어 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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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로마 성 베드로 성당의 라파엘 방에 “아테네 학파”의 그림이 그려진 이유이다.
이런 일로 코시모 는 인문주의 운동(르네상스)의 주도자 가 되었다.
오스만제국 술탄 메흐메드 2세의 허가를 받아 동방에도 사람들을 보내어 수집한 아랍어로 된
옛 그리스 문헌들은 손자 아름을 딴 “로렌초 도서관”의 핵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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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와 우리나라의 첫 인연은 임진왜란 때 납치된 10만여명의 조선인 중에
( 이 중에서 10% 인 만명 가량은 도쿠가와 정부와 교섭해 송환되었다!
10만명이 많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그후 병자호란 때는 총인구의 15% 인 50만명이 청나라에 잡혀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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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 노예시장에서 포르투갈령이었던 마카오로 팔려간 조선인 들이 있었는 데....
메디치가의 집사 피렌체의 상인 카르레티 가 한국소년 다섯 명을
마카오에서 헐값으로 사서는 인도의 포르투갈 식민도시인 고아 로 데리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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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 중에 한 명만을 여기 피렌체 로 데려왔는 데,
이 아이가 안토니오 꼬레아 로 서양 "꼬레아성(姓) 의 시조" 가 되었으니
현재 이태리 남부 칼리브리아주 카탄자로 인근 알비 Albi 시는 이사람들의 고향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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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년에 네데란드 화가 피터 루벤스가 코레오네 인을 그렸는 데,
제목이 A Man in Corean Costume 으로
잡혀온지 10년이 흐른 이때 까지도 한복 을 입고 있는 모습을 그렸다.
그림은 1,983년 런던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드로잉 부문 최고가인 6억5천만원에
미국 LA 폴 게티 미술관이 낙찰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