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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제주수양회 후기(4)
잔잔한 음성으로 진행된 옥 선교사님의 선교사역보고와 간증은 법환교회 교인들뿐만 아니라, 손님으로 간 우리에게도 큰 감동을 주었다. 의사로서,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로서 그의 삶을 하나님께 온전히 바친 것도 대단했지만, 그보다 먼저 선교사님의 부모님이 보여주셨던 믿음과 헌신은 감동 그 자체였다. 선교사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나도 저런 믿음을 내 자녀들에게 전해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깊이 해보게 되었다.
선교사역보고와 간증이 끝나자, 드디어 우리가 연주할 시간이 되었다. 먼저 염 집사님의 독창 “오 신실하신 주”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가 있은 후, 찬양대석에서 대기하던 우리는 줄을 지어 단에 올라갔다. 단에 올라서니 교인들의 눈빛이 온통 우리에게 모아졌다. 본당 안에는 한낮에 작렬했던 태양의 열기가 채 식지 않았고, 타 교회 교인들도 모여 본당이 거의 꽉 찬 데다가 환한 조명까지 쏟아지니 벌써부터 얼굴에 땀이 송글송글 맺히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법환교회의 신 목사님은 에어컨 소리가 연주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셨는지 조금 덥더라도 에어컨을 끄자고 부탁하셨다. 우리에게는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리였다. 하지만, 연주에 집중하기 위한 목사님의 배려라 생각하여 감수하기로 했다.
우리가 찬양하기 전에 윤태홍 집사님이 써준 김창선 장로님의 어릴 적 어머니 등에 업혀 법환교회에 출석하셨던 ‘동화 같은 이야기’를 신 목사님이 읽어내려 가시자, 법환교회 교인들은 마치 어릴 적 헤어졌던 옛 교우를 다시 만난 듯 크게 기뻐하며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그런데 아직 찬양하기 전인데도 불구하고 벌써부터 내 등에는 땀이 흘러 내렸다. 법환교회에서 마련한 연주단은 우리 교회의 단보다 ‘높이의 차원’이 달랐다. 우리 교회는 단에 올라서면 내 가슴에 앞에 서 있는 대원의 머리가 닿을 정도였는데, 법환교회는 앞 사람의 머리가 내 배에 와 닿을 만큼 높았다. 그러니 조명의 열기가 앞사람에 의해 가려지지 않고 뒷줄의 남자 대원들에 이르기까지 온 몸에 그대로 전달되었다. 하지만, 단이 높아서 좋았던 점은 내가 악보를 들어도 앞 사람의 뒷머리에 닿지 않아 편히 악보를 들고 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는 점이다.
전체적으로 찬양에 있어서는 소프라노와 테너같은 고음 파트는 제법 소리가 났지만, 알토나 베이스는 상대적으로 소리가 낮고 대원도 적어 음량에 있어서 고음 파트에 밀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래도 우리는 집중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곡을 실수 없이 불렀다.
모든 연주가 끝나자, 원래 우리가 찬양하기로 되어 있던 동홍교회 박창건 목사님이 올라와 인사말씀을 하시면서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하는 선언(!)을 하셨다. “원래 이 연주회는 우리 교회에서 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우리 교회 건축이 예정보다 늦어지는 관계로 계획대로 되지 못해 부득불 법환교회에서 하게 되었습니다. 법환교회와 신 목사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제 우리 교회의 건축이 끝나고 교회 설립 50주년이 되는 2020년에는 우리가 성도교회 예루살렘 찬양대를 다시 초청하겠습니다.”
그러자 법환교회 본당은 또다시 우레와 같은 박수로 가득 찼고 단에 서 있던 우리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박 목사님의 공식적 약속에 깜짝 놀랐다. 3년 후에 다시 찾게 될 제주도... 생각만 해도 꿈만 같다.
지금 교회에 나와 후기를 쓰는 내 머릿속에는 3년 후의 제주 수양회에 관한 작은 생각이 스친다.
3년이라면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다. 원래 다윗이 성전건축을 하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윗보다는 그의 아들 솔로몬이 성전 건축을 하도록 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아들 솔로몬이 성전 건축을 할 수 있도록 건축에 필요한 모든 자재를 완벽하게 준비했다. 그처럼 3년 후에 다시 찾게 될 제주도 동홍교회 연주회 역시 남에게 맡길 일이 아니다. 우리가 준비해야 한다.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제주 동홍교회 연주회를 그때의 임원들이 해야 할 몫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물론 3년 후에는 누가 찬양대 대장을 비롯해 임원을 맡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때 가서 그들에게 제주도 수양회 및 연주회를 계획하고 추진하도록 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초청의 이야기를 들은 당사자들이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 가운데 찬양대원이 아닌 사람이 생길 수도 있겠지만, 그럴지라도, 동홍교회에서의 연주회가 차질없이 진행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우리가 마음을 모아 철저한 계획과 준비를 하여 후배들에게 제대로 넘겨주어야 한다.
하여간, 수요예배의 선교집회와 연주회가 마치자, 옥인영 선교사님, 신관식, 이대원, 박창건 목사님이 강단으로 올라오셔서 우리와 함께 단체 촬영을 하였고, 이어서 옥 선교사님은 각 대원들을 보며 감사의 인사를 하셨다. 그리고 과거 예루살렘 찬양대의 이야기를 하셨는데, 우리 가운데 예루살렘 찬양대의 산증인 김옥자 권사님이 계시지 않는가! 김옥자 권사님이 우리와 함께 제주도에 오신 게 바로 이런 일 때문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노형근 집사님은 형님인 노영근 장로님의 이야기를 하시자, 선교사님은 몹시 반가워하시며 안부를 물으셨고, 김창선 장로님은 “제가 오건 장로님의 처남입니다”라고 본인 소개를 하시자 선교사님은 “아! 오건 집사님!”이라며 옛날 기억이 되살리셨다.
모든 순서가 다 끝났지만, 아쉬운 우리들은 교회 마당으로 나와 서로 이야기꽃을 피우며 교회를 떠날 줄 몰랐다. 한쪽에서는 곧 버스가 출발하니, 빨리 버스에 타라고 성화였지만, 목사님들과 선교사님에게 인사를 하며 서로 사진을 찍고, 찍히느라 정신이 없었다. 상황을 알아챈 신 목사님은 급기야, “여러분이 지금 버스를 타지 않으면 여러분은 오늘부터 성도교회가 아니라, 법환교회 성도가 되는 겁니다!”라는 유머로 우리를 재촉하셨다. 한편, 박진옥 집사님은 여성복 바지 80여벌과 티셔츠를 준비하여 동홍교회 박창건 목사님에게 전달하셨는데 박 목사님은 박 집사님이 준비한 선물에 감사의 마음을 표하셨다.
이제는 정말로 숙소로 돌아가야 하는 시간이다. 버스를 타고 숙소로 가는 내내 가장 신경 쓰고, 이번 수양회에서 큰 행사인 연주회가 끝나서인지 한편으로는 시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좀 더 잘 할 수 있었는데... 라는 진한 아쉬움이 남았다.
27일(목) 제주수양회 셋째 날이 밝았다. 어제 아침에 택시기사가 툴툴 대었다는 소리를 들었기에 우리는 좀 더 서둘러 로비에 내려갔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택시가 와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고, 우리는 시원한 아침 바람을 맞으며 교회로 향하였다. 그런데 택시 기사의 말에 따르 면, 우리의 베이스캠프인 100주년 기념교회는 새로 지은 교회라 내비게이션에 뜨지 않는단다. 염 집사님 부부와 우리 부부가 탄 택시는 정확한 경로를 모른 채 대강 어느 방향인지만 짐작하고 달릴 뿐이었다. 산으로 접어들면서 약간 방황하려는 순간, 우리보다 앞서 갔던 택시가 되돌아 나오면서 우리가 탄 택시를 보고는 조금만 더 앞을 가면 된다며 손으로 방향을 지시해주었다.
교회에 도착한 우리는 또 맛있는 아침 식사를 했다. 나는 왜 이리 아침 식사가 맛있는지 나 자신도 그 이유를 모르겠다. 아침이 되면 음식이 그냥 땡긴다. 집에서는 빵이나 시리얼을 먹고 싶어 일찍 일어나는 경우도 종종 있다. 하여간, 우유와 시리얼로 왕성한 식욕을 잠재우는데 어디서 낯익은 소리가 들렸다. 윤예슬 대원의 피아노 반주에 맞춘 김창선 장로님의 특송 연습이었다. 그것도 영어로... 어제는 독일어로 ‘보리수’를 부르시더니, 이제는 영어로 ‘Amazing grace’를 부르신다. 아마 저녁집회 때 부르게 될 특송을 미리 연습하시는 듯 했다.
한참 맛있는 아침식사를 하는데 나를 보는 사람들마다 조금만 먹으라며 말린다. 이유인즉슨, 점심이 11시 30분으로 예약이 되어있다나 뭐라나... 그러나 점심은 점심이고 지금은 내가 먹고 싶은 만큼 먹어야 했다. 든든히 배를 채운 우리는 버스를 타고 <광치기 해변>으로 가게 되었다.
따가운 태양을 맞으면서 버스기사에게 반갑게 인사를 하는데 어째 오늘따라 버스기사는 날 보는 둥 마는 둥이다. 분위기가 좀 이상하고 썰렁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잘 웃던 사람이 왜 이럴까?’ 생각했는데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기사의 심사가 좋지 않았단다. 어제 법환교회에서의 연주 때문에 밖에서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길었고, 연주 후에는 대원들을 각각의 숙소에 태워다주다 보니까, 자기가 너무 늦게 집에 가게 되었다는 게 그 이유였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이름도 생소한 <광치기 해변>이다. <광치기 해변>에 서니, 10시 방향으로 그 유명한 성산일출봉이 떡하니 버티고 서 있었다. <광치기 해변>은 지질학적으로는 약 7천 년 전에 바다에서 찬 바닷물이 마그마와 만나 생성된 지형이며, 퇴적층이 바다 속에 숨겨져 있다가 썰물이 되면 서서히 드러난다. 특히 겨울에는 바다 위로 모습을 드러낸 바위에 온통 초록색 이끼가 끼어 광치기 해변의 주위에 있는 모든 바위가 초록색으로 변하는 모습이 장관이라고 하는데 유감스럽게도 무더운 여름에 방문한 우리는 온통 바위에 이끼가 낀 장관은 볼 수는 없었다.
<광치기 해변>에서 사진도 찍고 바닷바람을 맘껏 들이마신 후, 다음 코스인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으로 향했다. 예전에는 ‘남산’을 ‘목멱산’이라고도 했던 것처럼 ‘두모악’은 한라산의 또 다른 이름이다. 사진이 취미인 남명관 집사님은 <광치기 해변>에서 좀더 오랫동안 머물며 바다를 즐기지 않고 왜 그리도 빨리 버스에 올랐냐며 이제 우리가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으로 갈 텐데 거기서는 제발 후딱 사진을 보고 나오지 말고 천천히 사진을 음미하며 감상하기를 부탁했다.
김영갑 선생의 사진은 특징이 있다. 그건 맑은 날 찍은 게 거의 없다는 점이다. 거센 비바람과 빠른 속도로 몰려드는 먹구름, 폭풍우 뒤에 검은 바다 위로 내리는 가느다란 빛줄기, 돌무더기 사이에서도 보란 듯이 풍성하게 자란 청보리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흔들리는 유채꽃밭 등은 그가 포착한 제주도였다. 그는 거칠고 척박한 자연 환경과 굴곡진 역사, 그리고 그것을 헤치고 견뎌온 제주도 사람들의 초연한 삶을 사진을 통해 표현하고자 애를 썼다.
처음에는 그의 작품에 별 관심이 없던 사람들이 점차 그의 사진에 관심을 갖기 시작할 무렵 안타깝게도 그는 당시에 이름도 생소했던 ‘루게릭 병’으로 3년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그때가 그의 나이 44세였다. 하지만, 그는 시한부 선고에 잠시 방황하기는 했지만, 남은 삶을 불꽃처럼 살고자 필사적으로 몸을 움직이며 갤러리를 완성시켰고, 3년이 아닌 5년을 더 살다가 49세에 생을 마감했다. 그래서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은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김영갑 선생에 대해 궁금한 나는 그곳 관리자에게 이런 저런 질문을 했는데 그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는 김 선생은 흑백 사진 같은 경우 직접 현상을 했지만, 큰 컬러는 서울 충무로로 필름을 보내 현상하도록 했다. 그리고 그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는데 나는 그의 사무실에 비치된 여러 대의 카메라와 파노라마 카메라 등을 볼 때, 다른 특별한 직업이 없으면서도 어떻게 이런 비싼 카메라를 구입했는지 궁금했다. 생활은 어떻게 했는지 물어보았더니, 관계자의 말로는 작품 판매로 생활비 등을 조달하면서 살았단다.
갤러리 탐방을 마치고 다시 버스에 오르니 남명관 집사님이 모든 대원들에게 김영갑 작가의 사진을 담은 엽서를 사서 하나씩 선물했다. 그러자 P집사님은 남명관 집사님의 이런 마음 씀씀이에 감동을 받았는지 내게 직접 이런 이야기를 했다.
“아, 남 집사님을 사위로 삼고 싶네...” “어허? 남 집사님은 유부남이예요. 유부남! 유부남을 어떻게 사위로...” “호호호, 남 집사님 같은 성품을 가진 남자가 있다면 당장에 사위로 삼고 싶다는 거예요.”
그러자 주위에 있던 다른 여 대원도 맞장구를 쳤다. “맞아 나도 남 집사님 같은 사람 사위로 삼고 싶어. 호호호”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에서 나온 우리는 이제 무슨 일을 해야 할까? 그렇다! 먹는 일이다. 오후에 올레길 제6코스를 걷기 위해서는 든든히 먹어두어야 한다. 식당으로 가는 차안에서 남명관 집사님은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전복죽과 회덮밥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다. 나는 전복죽도 먹고 싶기는 했지만, 그것 먹고 올레길 걷기에는 아무래도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아 그래도 씹을 게 있는 회덮밥을 선택했다.
우리가 향한 곳은 <일송수산>! 차에서 내려 약 50여 미터를 걸으니 식당이 나왔다. 날이 더워 땀이 흘렀지만, 식당 안에 들어가니 시원했다. 미리 메뉴를 주문했기에 식사가 나올 때까지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다. <일송수산>의 반찬은 모두 정갈하고 맛있었는데 특히 멸치 볶음과 호박튀김, 그리고 시원한 김치가 일품이었다. 혹자는 이 김치를 보고 대번에 중국산 김치라고 했다. 나는 ‘이게 중국산 김치인지를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더니 한국산 김치에는 파가 들어가는데 중국산은 아니란다. 그래서 자세히 보니 과연 파가 없었다.
아내는 전복죽을 선택했는데 옆에서 몇 입 떠 먹으니 그것도 별미였다. 내가 선택한 회덮밥은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싱싱한 회에다 그 양도 많아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김종아 권사님을 비롯한 여대원들은 식당 주인처럼 보이는 아주머니에게 식사가 참 맛있고, 반찬도 입에 잘 맞는다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건네자, 식당 아주머니는 자신은 주인이 아니며, 잠시 언니를 도와주러 여기에 왔단다. 그래서 ‘그럼 어디서 사느냐?’고 물으니 인천 송도란다. 아주머니의 이야기를 들은 김종아 권사님은 깜짝 놀라며(이번 수양회는 왜 이리 깜짝 놀라는 일이 많은지... 원) ‘송도 어디냐?’고 캐물으니 송도 ○○ ○○○아파트라는 답이 돌아왔다. 김 권사님이 “어머, 어머... 세상에... 그럼 몇 동이세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동이예요.”라고 하니 김 권사님이 “어머, 어머... 이럴 수가...”라며 입을 다물지 못한다. 이유를 알아보니 김 권사님 언니가 층수는 다르지만, 바로 그 아파트의 같은 동에서 사신단다. 두 분의 이야기를 통해 거주하는 동과 호수를 알게 되었지만 신변에 관한 문제라 여기서는 밝히지 않겠다. 양해를 바란다. ㅎㅎㅎ
하여간, 낯선 곳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거나, 알지는 못해도 내 삶의 한 자락과 연결이 되어 있는 사람을 만나면 드는 생각이 있다. “세상 참 좁다...” 그러니 어디 가서 도둑질도 못한다는 말이 맞는 말이다.
맛있는 식사를 한 후 우리는 두 조로 갈라졌다. 한 조는 큰 무리없이 유유자적하며 산책하는 ‘신선놀음조’이며, 다른 한 조는 제주 올레길 6코스를 완주하는 ‘극기훈련조’였다. 처음에는 약 10여 명이 ‘신선놀음조’를 지원했고, 나머지 20여명은 ‘극기훈련조’를 지원했는데 막판에 노미경 집사님은 이왕 제주도까지 왔으니 신선놀음은 너무 시시하다고 판단하여 고난의 행군을 자처하며 극기훈련조로 사상의 전향(?)을 하셨다. 물론 전향의 대가는 상당히 혹독했지만, 그래도 이런 기회가 아니었더라면 올레길 6코스는 경험하지 못할 뻔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