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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명상길을 오전에 걷고 난 후 숙소에 돌아와서 3시까지 휴식을 취하고 오후에 박물관과 송산리 고분군을 둘러보기 위하여 다시 길을 나섭니다. 그런데 국립공주박물관에 도착하여 깜짝 놀랐습니다. 오늘이 휴관일이라고 하더군요.
아니 무슨 휴관?
요즘 박물관이 1월 1일과 설날, 추석날 빼고 휴관하는 날이 있나?
서울과 경주에는 월요일에 휴관하지 않는데. 그러나 공주박물관은 월요일이 분명히 휴관일이었습니다. 몇 번을 답사를 해도 으레 그러려니 하고 주의를 하지 않아서 점검을 하지 않아 낭패를 당한거지요. 지난번 답사를 올 때 개관시간이 10시로 늦춰졌다는 안내문을 보고 '아, 여기도 휴관을 하지 않으니 개장 시간을 한 시간 늦췄구나.'하고 내멋대로 지레짐작을 한 것입니다. 하는 수 없이 송산리고분군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무령왕릉에 들어가기 전 아이들에게 무령왕릉 발굴에 관한 여러 가지 일화를 소개합니다. 죽음과 무덤에 관한 이야기라서 그런지 아이들은 비교적 집중하여 이야기를 잘 듣습니다. 송산리 6호분을 발굴한 일본인 역사 교사 가루베 지온의 이야기, 그리고 1971년 무령왕릉 발굴 당시 상황과 17시간만에 발굴을 종료한 사실들 그리고 무령왕릉 발굴의 의의 등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이제 모형 전시관으로 들어갑니다. 전시관에는 송산리 5호분과 6호분 그리고 무령왕릉 모형이 전시되고 있습니다. 이곳을 둘러보면 세 무덤의 차이점을 선명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무령왕릉은 발굴되기 전까지는 7호분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출입구 가장 가까운 곳에 5호분 모형이 있습니다. 5호분 모형 맞은 편에는 송산리 고분군을 소개하는 홀로그램 영상이 상영되고 있었습니다. 웅진시대 백제의 고분들은 보면 경사가 심하지 않은 산을 이용하여 무덤을 조성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고구려와 신라는 평지에 무덤을 조성한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5호분은 굴식돌방무덤이라고 부르는 무덤 양식입니다. 한자로는 횡혈식석실분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모양은 조금씩 다르지만 삼국시대에 나타나는 지배 계층의 무덤 양식입니다. 삼국시대 후반 6세기 이후에는 가장 보편적인 무덤 양식이 됩니다. 그리고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까지 이 무덤의 양식은 이어집니다. 조선시대에 오면 비로서 돌방무덤은 사라지고, 땅을 파서 광을 만들고 그 안에 관을 안치하는 움무덤(토광묘)이 보편화됩니다.
굴식돌방무덤의 구조. 돌을 쌓아서 널방(묘실)을 만들고 그 안에 관을 들여 놓은 다음 입구를 돌이나 흙으로 막습니다. 굴식돌방무덤은 입구만 열면 널방 안으로 관을 더 넣을 수 있으므로 합장묘나 가족묘로 아주 좋은 구조입니다. 그러나 또한 입구를 열면 바로 도굴이 될 수도 있는 구조여서 도굴을 당하기 쉬운 무덤이기도 합니다. 실지로 굴식돌방무덤 가운데 도굴이 되지 않고 온전한 것은 백에 한둘에 지나지 않습니다.(이 사진은 이해를 돕게 위하여 합성한 자료입니다.)
돌로 널방을 만들어 그 안에 관을 안치하는 돌방무덤은 관을 들여 놓는 방범에 따라 두 가지로 나누어 집니다. 위에서 관을 내리고 그 위를 덮개돌로 덮는 구덩식돌방무덤과 널길을 만들어 옆에서 관을 밀어 넣는 굴식돌방무덤입니다. 구덩식돌방무덤은 땅을 파서 구덩이를 만들고 구덩이 가를 돌로 쌓아 널방을 만든 다음 관을 넣고 그 위를 큰 덮개돌로 덮고 난 뒤, 흙으로 봉분을 만듭니다. 따라서 구덩식돌방무덤에서 관은 대개 땅속에 있게 마련입니다.(사진_대가야박물관)
위 사진은 고령' 대가야왕릉전시관'에 전시된 지산리 고분 44호분 모형입니다. 구덩식돌방무덤의 대표적인 무덤입니다. 가야 지역에서 많이 발견되는 양식으로 땅을 파서 돌로 널방을 만들고 그 위에 덮개돌로 덮고 봉분을 만드는 양식입니다. 이 무덤에는 순장의 풍습을 잘 볼 수 있습니다. 죽은 임금이나 주인을 저승에 가서도 시봉하기 위하여 산사람을 무덤에 같이 묻는 것을 말합니다. 위의 그림에서는 가운데 관에 묻힌 시신이 주인이고, 그 아래 위로 관이 없이 묻힌 사람들은 주인을 따라 죽은 사람들입니다.
무덤을 조성하는 방법은 시대에 따라 변천되어 왔으며, 죽음과 사후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는가에 따라 그 형식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무덤 조성 방법을 보면 그 무덤이 만들어진 시대를 추정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청동기 시대에는 무덤이 지금과 같은 봉분 형식이 아니라 고인돌의 형식이었습니다. 고인돌은 물론 제단의 역할도 하였지만 기본적으로는 사자의 무덤이었습니다. 고인돌에도 두 가지 양식이 있습니다. 긴 굄돌을 쓰는 탁자식과 짧은 받침돌을 쓰는 바둑판식이 있는데 . 탁자식의 경우는 무덤방이 땅 위에 있고 바둑판식은 무덤방이 땅 속에 있습니다.
삼국시대 고구려나 백제, 신라의 왕족이나 귀족들은 땅을 파지 않고 널방을 만들어 그 안에 관을 넣는 매장법을, 가야는 땅을 파고 관을 넣은 다음 그 위에 봉분을 만드는 매장법을 선호하였습니다.
이 무덤은 중국 지린성에 있는 유명한 장군총입니다. 장수왕의 무덤일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런 무덤 양식을 돌무지무덤(적석총)이라고 합니다. 돌로 계단을 쌓듯이 무덤을 조성했습니다. 무덤을 표시하기 위하여 둥글게 흙을 쌓아 올린 것을 봉분이라고 하는데 장군총은 따로 봉분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널방을 아래에 두지 않고 상단부에 둡니다. 이것이 고구려 무덤의 특징입니다. 고구려의 경우는 널방 안벽 4면을 벽화로 장식하는 것으로 이름이 높습니다.
한성시대의 백제 왕릉 조성하는 모습입니다. 돌로 무덤을 만드는 것은 고구려의 무덤 조성 방법과 동일합니다. 같은 돌무지무덤(적석총)입니다. 단지 장군총은 할석(깬돌)으로 쌓았고 한성시대 백제 왕릉은 강돌로 쌓았습니다. 웅진으로 천도하기 이전의 백제의 지배계층의 무덤은 고구려와 같았습니다. 공부를 하는 김에 이번에는 신라를 한 번 보겠습니다.
천마총 내부를 복원한 모형입니다. 이런 무덤을 돌무지덧널무덤이라고 합니다. 앞의 고구려 백제의 돌무지무덤과는 약간 차이가 있습니다. 우선 관을 보호하는 나무곽(덧널)을 만들고 그 위에 강돌을 넣고 또 그 위에 흙으로 봉분을 만들었습니다. 여러 가지 무덤 양식 가운데 이보다 튼튼한(?) 무덤은 없습니다. 저렇게 무덤을 만들면 도굴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일제시대 고이즈미가 황남총을 발굴하다가 파도파도 강돌이 끝 없이 나와 결국은 포기한 적이 있습니다. 정식으로 한 발굴 작업도 불가능하였으니 도굴범의 장비로는 아예 시도할 엄두조차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경주 지역에는 발굴이나 도굴되지 않는 고분이 많이 있습니다.
위 그림을 보면 돌무지덧널무덤에 대하여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이 무덤의 양식은 주로 삼국시대 신라 왕족이나 귀족들의 무덤 양식에 많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돌무지덧널무덤도 그 규모가 작으면 쉽게 도굴이 되고 맙니다. 도굴이 어려운 것은 왕릉급 무덤으로 그 규모가 엄청나기 때문입니다.
6호분은 벽돌무덤이며 또 드물게 벽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서쪽 벽 백호가 그려진 흔적이 보입니다. 그림은 오랜 시간이 지나는 동안에 퇴색되었고 다만 벽돌 위에 그림은 그리기 위하여 점토를 칠한 자국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송산리 6호분의 경우 백제 최초의 벽화무덤인데 1933년 발굴 당시에는 비교적 그 모습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석실 내부를 공개하고 난 뒤부터 공기의 오염이 심하여 안료가 상하면서 그림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삼국시대 벽돌무덤은 이제까지 송산리 6호분과 무령왕릉 외에 발견된 것이 없습니다. 백제 왕릉에서 사신도가 그려진 예도 아주 귀합니다. 6호분 외에 사비 백제시대의 무덤인 능산리 2호분에서만 발견이 됩니다. 벽돌무덤은 중국의 남조에서 유행한 무덤양식입니다. 중국 남방에는 벽돌을 굽기 좋은 흙이 많이 생산됩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도자기 공예가 발달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벽돌을 구울 수 있는 흙을 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 대신 산이 많아 돌을 구하기가 아주 쉬웠습니다.
벽돌무덤은 무령왕릉 당대에만 축조되었고 이후로는 다시 굴식돌방무덤 양식으로 회귀합니다. 삼국시대 후기 그러니까 6세기 이후에는 한반도 전역에 굴식돌방무덤이 일반화됩니다. 지금 우리는 6호분에 와 있습니다. 이 사진의 위치가 여기 맞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이 사진이 6호분에서 찍은 것인지 무령왕릉에서 찍은 것인지 정확히 알고 있는 학생이 있으면 아래에 댓글을 달아 주세요. 개학하는 날 선물을 준비하겠습니다. 단 근거를 제시하여야 하고 그것이 타당하여야 합니다.
무령왕 흉상. 물론 상상한 인물상입니다. 6호분을 돌아 나오면, 발견 당시 무령왕릉 내부 모습을 재현한 전시실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앞에 무령왕 흉상이 서 있습니다. 무령왕은 백제 제 25대 왕으로 501년에 즉위하여 62세로 523년에 사망하였습니다. 재위 기간은 약 23년이었습니다. 무령왕에 대한 정보는 백제역사문화관에서 자세히 볼 수가 있습니다. 무령왕은 462년에 탄생을 하였으니 475년 백제가 고구려에게 패하여 개로왕이 참수당한 때에는 12~3세의 어린 나이였습니다. 아마도 이때 아버지 곤지를 따라 일본에 있었을 거라 추정합니다. 만약에 한성에 있었다면 고구려 군에 의하여 살아남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위 사진은 발굴 당시 고사를 지내는 모습입니다. 5,6호분 배수로 공사를 계기로 발견된 무령왕릉 널길 입구입니다. 입구를 가린 흙을 걷워내니 출입구를 막고 있는 벽돌들이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북어와 간단한 제수로 부랴부랴 위령제를 지내고 곧바로 발굴에 들어 갔습니다. 우리나라 최대의 성과를 낸 발굴 작업이자 동시에 가장 졸렬한 발굴 작업으로 역사에 기록될 사건이었습니다. 후일담이지만 발굴에 참여한 사람들이 불의의 사고를 당한 경우가 많아 투탕카멘의 저주를 떠올리며 무령왕의 저주가 시작된 것이 아닌가 하는 세간의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무덤 내부를 재현한 무령왕릉 묘실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묘지석을 만납니다. 묘지석에는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 나이 62세 되는 계묘년 5월 7일에 돌아가셨다. 을사년 8월 12월에 안조하여 등관대묘하고 그 뜻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고 적혀 있습니다. 여기서 계묘년은 서기 523년이며, 을사년은 서기 525년 입니다. 그러니까 바로 안장하지 않고 2년 3개월 동안 빈전에 안치하였다가 3년 상이 끝나고 이곳에 묻힌 것입니다. 묘지석은 국보 163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무령왕비는 병오년(526년) 12월에 임종하여 빈전에 모셔졌다가 기유년(529년) 2월에 이곳에 합장되었습니다. 굴식돌방무덤은 이와 같이 합장하거나 가족 단위로 시신을 안치할 적에 편리한 무덤 양식입니다. 발견 당시 유물들이 왜 저리 어지럽게 흐트러져 있느냐고 하자 김원룡박사가 '지진이 몇 차례 있어서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합니다.
발견 당시의 유물이 어지럽게 널려져 있습니다. 무령왕릉은 1971년 7월 7일에 발견되었습니다.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장인 김원룡박사등 발굴단 네 사람이 석실에 들어가 유물을 정리하고 17시간 만에 발굴을 완료하였습니다. 발굴 당시는 108종 2,600여 점의 유물이 발견되었다고 발표하였습니다. 지금은 108종 4,600여 점의 유물로 정리되고 있습니다. 맨 앞에 진묘수가 무덤을 지키고 있습니다. 진묘수는 국보 162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 가운데 국보로 지정된 금으로 만든 공예품을 모아 전시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전시되고 있는 것은 복제품입니다. 진품을 보려면 국립공주박물관에 가야 합니다. 위로부터 무령왕 금제 관꾸미개(국보 154호), 아래 좌축은 무령왕 금귀걸이(국보 156호), 오른쪽은 무령왕 금제 뒤꽂이(국보 159호)가 전시되고 있습니다.
여기는 왕비의 유물이 전시되고 있습니다. 맨 위에 있는 것이 무령왕비 금제 관꾸미개(국보 155호), 그 아래 중앙에 있는 두 쌍의 금귀걸이가 무령왕비 금제 금귀걸이(국보 157호), 귀걸이 좌우에 있는 것이 무령왕비 금 목걸이(국보 158호)' 왼쪽에 있는 목걸이는 일곱 마디로 되어 있고 오른쪽에 있는 것은 아홉 마디로 되어 있습니다. 맨 아래 왼쪽에 있는 것이 무령왕비 금팔찌, 오른쪽에 있는 것이 무령왕비 은팔찌(국보 160호)입니다. 그러고 보니 여기 전시된 것 가운데 유일하게 금팔찌가 국보로 지정되지 않았습니다.
중앙에 무령왕 허리띠 장식이 있고 양 옆에 청동거울이 있습니다. 이 세 점 모두 국보 161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오른쪽에 있는 것이 의자손수대경(국보 161-2호), 왼쪽 위에 있는 것이 신수경(국보 161-1호) 왼쪽 아래 있는 것이 수대경(국보161-3호)입니다. 이 중 왕비의 관에서 출토된 것은 161-3호 수대경입니다.
아이들이 무덤 공간을 둘러보고 나와서 퀴즈놀이를 하고 있습니다. 요즘 어느 박물관에 가더라도 이런 컴퓨터 그래픽을 이용한 게임을 할 수 있는 것이 있어 약간은 지루할 수도 있는 박물관 견학을 흥미롭게 만들어 줍니다.
이건 퍼즐 맞추기 게임인 듯합니다. 은호와 동일이가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이제 무령왕릉 모형 무덤 안으로 들어갑니다. 아이들이 앞서 들어가갔다가 나옵니다. '왜 벌써 나오냐' 하니 '안에 아무 것도 없어요.' 하고 대답합니다. '너희들이 보니 아무 것도 없지만 내가 설명해 주면 볼 것이 많다'하고 다시 데리고 들어 갑니다.
무령왕릉은 입구에서 널길을 통과하면 바로 널방(묘실)을 만날 수 있습니다. 널길은 그리 좁고 낮은 편이 아니어서 허리만 살짝 굽혀도 충분히 들어갈 수 있습니다. 묘실 안 천장은 터널형으로 만들었으며 바닥에도 역시 벽돌을 깔았습니다. 관을 올려 놓는 관대는 높지 않게 남북으로 길게 놓았습니다.
벽돌은 4평 1수법이라 하여 네 줄은 가로로 한 줄은 세로로 쌓았습니다. 벽돌마다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것이 있고 무늬가 있는 것이 있습니다. 벽돌의 종류는 모두 28종으로 조사되었습니다. 이런 무덤의 양식을 굴방벽돌무덤이라 하는데 이제까지는 송산리 6호분과 무령왕릉밖에 발견된 것이 없습니다. 굴방벽돌무덤은 중국 남조(양자강 이남에 세워진 왕조)에서 유행하던 무덤 양식이었습니다. 백제는 당시 남조의 양나라와 교류하면서 양나라의 문물을 많이 받아들였습니다.
내부에서 본 널길. 6호분은 널길의 천장이 층이 져 있었는데 무령왕릉은 천장의 높이가 같습니다. 두 기의 왕릉급 무덤으로 돌방벽돌무덤은 끝이 나고 사비시대의 백제의 왕릉은 다시 굴식돌방무덤 양식으로 돌아갑니다. 아마도 벽돌을 굽기가 만만치 않았을 것입니다. 탑도 중국에는 벽돌탑이 많지만 우리나에는 돌탑이 많습니다. 분황사 3층탑처럼 돌을 벽돌처럼 다듬어서 만들거나 아니면 돌로 탑을 만들었습니다. 그만큼 우리나라는 돌이 많았고 또 돌을 다루는 기술이 뛰어나 구태여 벽돌을 구워 무덤이나 탑을 조성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아무것도 없다는 무령왕릉에서 한참을 설명을 하였습니다. 벽돌의 종류라든지, 등감과 가창, 그리고 터널식 천장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또 4평1수법이 무엇인지. 아이들이 다 못 알아 들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이런 유적과 유물에는 그냥 눈으로만 보아서는 볼 수 없는 어떤 것들이 있다는 인식만 하여도 답사는 성공한 것입니다.
이제 모형관을 나서서 고분군을 둘러보러 문을 나섭니다. 문을 열자 열기가 확 끼쳐 옵니다. 그러나 이곳은 주위가 숲이어서 더운 바람이 따갑지는 않습니다.
무령왕릉 앞에 섰습니다. 송산리의 모든 고분은 지금은 폐쇄되어 내부 관람이 불가능합니다. 경주의 천마총의 경우 워낙 무덤의 크기가 방대하고 돌무지무덤 방식이라서 관람객이 들어와도 크게 상관이 없지만 이곳은 사람이 드나들면서 돌방에 균열이 가고, 또 평지가 아닌 구릉에 무덤을 조성하여 땅이 기울어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어서 영구 폐쇄를 결정했다고 합니다.
오후 4시가 넘었지만 날씨가 수그러들 줄 모릅니다. 그래도 아이들은 점심도 먹고 좀 쉬어서 그런지 크게 힘들어 하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오후에 합류한 정민아빠와 해완이 때문에 어제와는 다른 분위기입니다. 특히 정민아빠가 아이들이 잘 어울려 분위기가 아주 쾌활하여졌습니다.
고분길을 따라 송산을 한 바퀴 돕니다. 길바닥에는 묘를 지키는 진묘수를 그려 놓았습니다.
무령왕릉을 지나 1~4호 고분 쪽으로 오르는 길은 제법 경사가 있습니다.
전망대에 서서 공주시 전경을 들여다 봅니다. 금강과 금강철교, 그리고 공산성과 석장리박물관 등 어제 우리가 둘러보았던 곳을 찾아 봅니다.
동쪽으로 공산성이 보입니다. 나무 사이로 성곽이 그 윤곽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송산리 고분군을 돌아보고 이제 웅진백제역사관으로 갑니다. 여기는 큰 자료는 없지만 무령왕에 대한 정보와 웅진시대 백제에 대한 정보를 잘 정리하여 놓아서 아이들이 백제 문화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4D영상관도 있는데 시간이 맞지 않아 볼 수가 없었습니다.
나선형 계단을 돌아 내려가 입구에 도달하였습니다.
전시실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무령왕을 만납니다. 무령왕은 23년을 왕위에 있으면서 백제를 다시 강국에 반열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러나 백제의 강성이 역설적으로 이곳 웅진을 버리고 더 넓은 지역을 찾아 사비성(부여)으로 가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의 아들인 성왕은 웅진에서 사비로 천도를 단행합니다.
백제 왕의 옷을 입고 폼을 잡아보는 윤석이. 한성에서 장수왕에게 무참히 패한 백제는 한성을 포기하고 웅진에 도읍을 정합니다. 그러나 패전하여 왕이 참수를 당했으니 왕권이 강할 리가 없습니다. 문주왕은 동생 곤지를 일본에서 불러들여 내신좌평에 임명을 하지만 곤지는 석달만에 의문의 죽음을 맞이합니다. 일설에는 병관좌평인 해구에게 암살을 당했다고도 합니다. 해구는 백제 왕인 부여씨와 함께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진 해씨들의 우두머리였습니다.
해구는 다시 문주왕까지 암살을 합니다. 그리고 문주왕의 맏아들인 태자를 왕으로 세웠습니다. 그러다가 이번에는 스스로 반란을 일으킵니다. 그러자 삼근왕의 명을 받은 진남, 진로 등 진씨들이 중심이 되어 난을 평정하고 해구를 처형합니다. 그러나 삼근왕도 그 다음에 죽습니다. 아마도 진씨 일족에게 살해 당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역사학자들은 말합니다. 삼근왕이 죽자 곤지의 아들인 동성왕이 왕위에 오릅니다. 동성왕은 비교적 오래 왕위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성왕도 위사좌평인 백가에 의하여 암살을 당합니다.
501년 동성왕이 백가가 보낸 자객에 의하여 암살되고 이어 백가가 반란을 일으키자 동성왕의 동생(일설에는 둘째 아들)인 무령왕이 즉위하여 백가의 난을 진압하고 귀족들의 권력을 축소시키고 왕권을 강화합니다. 웅진시대 백제의 왕들이 귀족들의 권력을 축소하는데 모두 실패하여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지만 무령왕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무령왕 당시 왕권은 다시 강력해지고 국력은 신장되었습니다. 중국 남조의 양나라와 교역을 하고 일본과도 활발하게 교류하여 명실공히 과거 백제의 명성을 되찾았습니다. 그 다음 왕인 성왕의 사비 천도는 이러한 백제의 자신감의 결과였습니다.
공산성 금서루 퍼즐 맞추기에 아이들이 열중하고 있습니다. 무령왕의 뒤를 이은 성왕은 538년 수도를 웅진에서 사비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고 하였습니다. 이로써 475년에 시작된 웅진백제는 538년 봄 사비백제의 등장으로 64년 동안의 수도로서의 구실을 다하게 됩니다.
웅진시대 백제의 문화는 무령왕 때 꽃을 피웠습니다. 그 결과가 바로 무령왕릉입니다. 무령왕릉 발굴로 웅진백제는 비로소 자신의 명예를 되찾았다 할 수 있습니다. 백제 패망 후 승자에 의하여 기록되고 발췌된 역사에서 백제는 초라한 모습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문자의 기록만이 역사의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무령왕릉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발굴사에서 무령왕릉의 발견은 최대의 사건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도표로 정리하여 놓은 한성시대, 웅진시대, 사비시대 백제에 대하여 아이들이 열심히 읽고 있습니다.
도표로 제작한 웅진시대 백제의 중요한 사건들입니다.
백제인들과 함께. 뭔가 이질적인 듯한데 잘 어울립니다. 은호의 표정이 아주 미묘합니다.
아이들이 모두 나올 때까지 로비에서 쉬고 있습니다. 이제 오늘 걷기 일과는 끝났습니다. 이제 숙소로 들어가 맛있는 저녁을 먹을 차례입니다. 이날 저녁으로 바비큐를 준비하였습니다. 아이들도 기대로 잔뜩 부풀어 있습니다.
이 여행기는 앞의 글 능산리 고분군( http://cafe.daum.net/pungmulnuri/96hU/291)과 같이 읽어 보시면 더욱 좋습니다.
첫댓글 은호에요.송산리6호분입니다.벽돌이 가로로 4개 세로로 1개로 되어있고 벽화가 있기때문입니다.
처음으로 은호가 응시하였군요. 개학하는 8월 29일까지 기다렸다가 정답을 발표하기로 하겠습니다. 그 전에 다시 한 번 검토해 보시고 수정하셔도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