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순(朴喜順) 루치아는
1801년(순조1년) 부유한 집안의 딸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성격이 순진하고 상냥하였으며
자색이 또한 겸전하였으므로,
일찌기 궁중에 불려 들어가 왕후의 시녀가 되었다.
그는 타고난 본성으로 인하여 궁녀가 된 후에도
누구에게서나 칭찬을 많이 받게 되었고,
다른 궁녀들보다 한층 높은 지위에 오를수 있었다.
또한 한문과 국문에 능통 하여
순조의 차녀인 복온공주(福溫公主)에게
글을 가르치도록 선발되었으며 공주가 결혼하자
그의 처소인 창녕위궁(昌寧尉宮)의 나인을 맡기도 하였다.
루치아가 아직 15세가 채 못되었을때에
순조임금의 나이 16,17세 쯤 되었을때
그녀의 매력에 이끌려 유혹하려고 별별 수단을 다썼다고 한다.
그러나 이 어린 처녀는 외교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찌기 들어보지 못한 용기로 모든 유혹을 물리쳤다.
이렇게 비범한 덕을 가졌었으므로
그녀는 입교의 은총을 받기에
남보다 공이 있었다고 할수 있다.
서른 살이 되어 루치아는
처음으로 천주교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이 교리를 곧 믿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궁중에 매인 몸이요,
김대비(金大妃)의 깊은 총애를 받으며
다른 궁녀들을 보살피는 상궁의 자리에 있었고,
승하하신 선왕의 위패(位牌)를 모시고 있었기때문에
궁궐을 빠져 나오기가 그만큼 어려웠다.
하지만 천주교를 신봉하기 위해서는
궁궐의 모든 미신을 피해야만 하였으며,
이 모든 장애는 오직 그녀의 소원을
더욱 간절하게 할 따름이었다.
이리하여 그녀는 마침내 병을 칭탁하여
궁중에서 빠져나올수 있었다.
그러나 박희순 루치아 아버지는 외교인이어서
천주교를 대단히 반대 하였으므로 집으로는 가지못하고
남대문 밖에 있는 조카의 집에서 살았다.
궁에서 나온 이후로 루치아는
그동안 궁중의 영화와 쾌락 속에서
많은 세월을 허송한 것을 후회하고
더욱 열심을 배가하여 교리의 본분을 정확히 지켜나갔다.
특히 옷과 음식에 있어서 많은 극기를 행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모범을 보임으로써
그녀는 오래지않아 조카와 그녀의 가족을
입교시킬 수 있었으며,여기에서 언니인
박 큰애기(朴大阿只) 마리아와도
함께 살며 열심히 수교하였다.
그후 전경협(全敬俠) 아가타라는
훌륭한 교우를 알게 되어 서로 가깝게 지내고,
그의 집으로 이사하여 함께 생활하였다.
아가타도 루치아처럼 궁인 출신으로
기해년에 순교한 사람이었다.
1839년 박해가 일어남을 보고 루치아는
서울의 큰살리뭇골이라는 동네에 집을 한 해 장만하여
아가타와 그녀의 몇몇 교우들과 함께 생활하였다.
며칠후 4월 15일
그들이 박해를 피할 방법을 의논하고 있을 때
갑자기 포졸들이 그곳으로 들이닥쳤다.
루치아는『이는 천주의 성스러운 뜻이다』라고 말하며
집안에 있던 사람들을 진정시키고
조용히 나아가 술과 안주를 내다
포졸들을 대접한 다음 순순히 옥으로 끌려갔다.
나이 어린조카 박 베로도 루치아와 함께 체포되었었는데,
그는 나중에 석방되어 이 사건을 상세히 증언하였다.
포청에 이르러 처음으로 심문을 받을때
포장은『궁녀는 다른 여자와 달리 높은 교육을 받았는데
이러한 사학(邪學)을 믿을수가 있단말이냐』고 꾸짖었다.
이어 루치아는『우리 종교는 절대로 사학이 아닙니다.
천주께서는 하늘과 땅이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모든 사람이 그로부터 생명을 받았으니
천주를 공경하고 섬기는 것은 사람의 의무입니다』라고
올바르게 답변하였으며,
『배교하고 동교인들을 대라』는 포장의 억압에도
그렇게 할 수 없음을 교리로써 명백히 설명하였다.
오래지않아 공포와 고통과 외교인 친척들의 강권으로
다른 사람들은 부끄럽게도 배교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가타와 루치아만은
혹독한 고문에도 꿋꿋하게 견디어 냈으며
할 수 없이 포청에서는 이들을 형조로 보내고 말았다.
형조에 이르러 루치아는 형관 앞에 세번 불리어 갔으며
그 때마다 곤장 30대 씩을 맞았다.
그리하여 다리뼈가 부러지고 골수가 흘러나왔으나
그는 이를 머리털로 잘라내며,
『이제야 우리 주 예수와 성모 마리아의 괴로움이
어떠하였는지를 조금 깨닫게 되었다』고 말하여
조금도 어려워하는 빛이 없었다.
이러한 상처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루치아가 다음 문초 때에 제발로 걸어서 출두하니,
그것을 본 사람들은 모두 이상하게 여겼으며
그의 변함없는 인내심에 탄복하였다.
이 후로는 루치아가 천주교의 도리를
너무나 명백하게 설명 하였으므로
형관도 감히 이를 반박하지 못하였다.
옥중에서 루치아는 교우들에게 편지한장을 보냈는데,
불행히도 이 편지는 후에 분실되었다.
그러나 다른기록에 의하면 그것은 교우들에게
인내와 불굴의 정신을 갖도록 권한 것이었고,
특히 천주의 은혜에 대하여 쓴 말은
지극히 감격적이어서 읽는 이로하여금
눈물을 금치 못하게 하였다 한다.
실제로 그녀는 함께 갇혀있는 이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근심하는 이를 위로하며, 약한이를 붙들어주었고,
언제나 누구에게나 사도로서의 일을 행하였다.
형조에서는 이러한 루치아를
도저히 배교시킬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결국 판서는『희순이 밤낮없이 사교에 깊이 빠져서
요사하고 허황한 것만 입으로 중얼거리고
손으로 가리키는것이 다 사술(邪術)이며,
이를 위하여 죽기를 맹세하면서 뉘우치지 아니하니
이는 불대시참(不待時斬)의 죄인입니다』라고 보고한 후
참수의 판결을 내리었다.
기해년 5월 24일
루치아는 형장으로 떠나면서도
옥중의 교우들에게 순교의 길을 걷자고
권면하고 위로한 다음 수레에 올랐다.
서소문 밖 형장에 이를때까지도
그녀는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끝내는 동료 교우들과 함께 칼을 받았으니,
이때 그녀의 나이 39세였다.
언니 마리아도 그녀와 함께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한날에 형제를 죽이는 것은
국법에서 금하고 있던 터라 할 수 없이
동생과 이별해야만 했던것이다.
박희순(朴喜順) 루치아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가톨릭신문 김옥희 수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