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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종의 행장(行狀)
저자
신종호(申從濩)
자 차소(次韶), 호 삼괴당(三魁堂)
1456년 ~ 1497년
본관 고령(高靈) 저서(작품) 삼괴당집
대표관직(경력)
부제학, 동부승지, 도승지, 대사헌, 이조참판, 경기도관찰사
---------------------------------------------------------------------------------------------------------------------본관: 양천(陽川) 자 : 종경(宗卿), 종지(宗之)
호 : 상우당(尙友堂)
원전서지 국조인물고 권2 상신(相臣)
"공(公)의 휘(諱)는 종(琮)이고 자(字)는 종경(宗卿), 또는 종지(宗之)이며, 호(號)는 상우당(尙友堂)이다. 본관은 공암(孔巖)으로, 지금의 양천(陽川)이다. 원조(遠祖) 허선문(許宣文)은 재산으로 향리에 으뜸이었는데, 고려 태조가 백제를 정벌할 적에 재물을 보내어 도운 공로로 공암 촌주(孔巖村主)에 봉해졌으며, 8대조 허공(許珙)은 고려 충렬왕을 도와서 벼슬이 시중(侍中)에 이르렀는데 공렬(功烈)이 있어서 당시의 명재상이 되었다. 고조(高祖) 허금(許錦)은 호가 야당(埜堂)인데, 박학하고 시(詩)에 능하여 고려 말기에 전리 판서(典理判書)를 지냈으나, 수명이 길지 못하여 벼슬자리가 덕에 차지 않았으므로 시론(時論)이 아쉬워하였다. 증조(曾祖) 허기(許愭)는 통훈 대부(通訓大夫)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 증 자헌 대부(資憲大夫) 이조 판서(吏曹判書)이고, 할아버지 허비(許扉)는 중직 대부(中直大夫) 양양 도호부사(襄陽都護府使) 증 숭록 대부(崇祿大夫)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이며, 아버지 허손(許蓀)은 통훈 대부(通訓大夫) 재령 군수(載寧郡守) 증 대광 보국 숭록 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영의정 순충 적덕 병의 보조 공신(純忠積德秉義補祚功臣) 양천 부원군(陽川府院君)이시니, 모두 공의 현귀(顯貴)로 추은(推恩)을 한 것이다. 어머니 최씨(崔氏)는 정경 부인(貞敬夫人)에 봉해졌는데, 역시 벼슬이 많은 좋은 집안이다. 허씨가 허선문 이후로 무려 12대에 걸쳐 모두 급제를 하고 대마다 이름난 사람이 있어 오다가 공에게 와서 현귀가 극에 달하였으니, 참으로 선대에서 선을 쌓아 복을 길렀기 때문에 때를 기다려서 발복한 것이다.
공은 소싯적에 지기(志氣)가 깊고 원대하여 잗다란 세상일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문을 닫고 글만 읽었다. 늘 길을 가도 좌우로 눈을 돌리는 적이 없이 응시하며 무엇을 생각하는 사람과 같이 하다가 더러는 길을 잃기도 하여 사람들이 그 속을 헤아릴 수 없었다. 또래 아이들 몇 사람과 같이 있을 적에 밤에 도둑이 방에 들어와서 신과 옷을 훔쳐 갔는데, 잠을 깨고 나서 여러 사람들이 모두 원통히 여기며 한탄하였으나, 공은 전혀 개의치 않고 태연히 붓을 가져다 벽에 쓰기를, “나의 옷을 탈취해 갔으면 마땅히 나의 신은 훔치지 말아야지. 나의 옷을 탈취하고 나서 또 나의 신을 훔쳤으니, 선생을 위하여 못 마땅하도다.” 하니, 아는 이들이 비로소 그 아량에 승복하였다.
경태(景泰) 병자년(丙子年, 1456년 세조 2년)에 23세의 나이로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이듬해 천순(天順) 정축년(丁丑年)에 또 문과(文科)에 제3인으로 급제하였다. 그때 가뭄이 심하여 조야(朝野)가 모두 비를 바라고 있었는데, 급제한 자의 이름을 부르는 날에 일갑(一甲)의 이름을 부르고 나자마자 갑자기 비가 쏟아져서 조관(朝官)들이 모두 공을 지목하여 상림1)(商霖)의 징조라고 하였다. 계공랑(啓功郞) 의영고 직장(義盈庫直長) 겸 세자시강원 우정자(世子侍講院右正字)를 거쳐 무인년(戊寅年, 1458년 세조 4년)에 군기시 직장(軍器寺直長)으로 옮겼는데, 나머지의 관직은 종전과 같았다. 이듬해 기묘년(己卯年) 봄에 특별히 무공랑(務功郞)을 더 제수받았다.
이에 앞서 세조가 문신(文臣)을 가려 뽑아 천문(天文)ㆍ지리(地理) 등 학문을 나누어 맡겨서 익히게 하였는데, 공에게는 천문학을 맡기었다. 공은 보천(步天)의 법을 연구하여 비록 진작부터 감석(甘石)을 공부한 자도 다 뒤진 데 대하여 눈이 휘둥그래졌다. 이때에 마침 일식(日食)하는 것을 보고 공이 일식의 분수를 추산하여 써서 올리면서 말미에 상소(上疏)를 덧붙여 ‘이단(異端)을 배척하고, 언로(言路)를 열고, 사냥놀이를 끊고, 경연에 납시라’는 등의 여섯 가지 사항을 아뢰었다. 이는 모두 당시에 기휘(忌諱)하는 말인데도 공이 홀로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매우 날카로운 말로 써 올리니 보는 자들이 땀을 흘렸다. 상소가 들어가자 임금이 불러들일 것을 재촉하니, 이미 남다른 직언(直言)으로 기대가 있는 데다 또 풍채가 훤칠하고 의젓한 것을 바라보고 나서는 알 수 없는 마음에 크게 놀라 담력을 시험하여 보고자 상소에 쓰인 말 가운데, ‘백일 동안 돌아오지 않다.[十旬不返]’3)의 구절과 ‘면(麵)으로써 희생(犧牲)을 대신하다[以麵代犧]’의 구절을 지적하여 따져 묻기를, “나는 이런 과실이 없는데, 하(夏)나라 강왕(康王)과 양(梁)나라 무제(武帝)를 예로 들어 나에게 바라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며 거짓으로 위협과 노염을 가하여 끌어내어다 매질을 하게 하니, 곁에 있는 시자(侍者)들이 임금의 뜻을 예측할 수 없어서 다리를 떨며 몸둘 바를 몰라 하였다. 임금이 또 갑 속에 든 칼을 가져다 무릎 위에 빗겨 놓고 역사(力士) 최적(崔適)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내가 칼을 뽑아 갑 속에서 칼이 다 나오거든 곧 베어라.” 하고, 서서히 뽑는데, 칼의 섬광이 사람에게 비치며 칼끝이 거의 다 나오게 되었으나, 공은 오히려 확고부동하게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이 묻는 대로 대답하는데, 목소리가 한결같이 시원시원하였다. 이에 임금이 칼을 다시 갑 속에 넣고, “참으로 장사(壯士)다.” 하며, 큰 칭찬을 하고 늦게 만난 것을 한스러워하며 술잔을 들라고 명하였다. 공이 술통 앞으로 천천히 나아가 술을 뜨는데, 나아감과 물러남, 우러러 봄과 굽어봄에 온화한 용모가 볼만하였다. 뇌정(雷霆)같은 위엄을 당하여서 기개가 굳세고 뜻이 씩씩하지 않고서야 이처럼 당황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위엄에도 굴복하지 않는 것을 공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세상 사람이 평소에는 지조와 기절로 자부하다가도 조그마한 피해라도 당하면 심담(心膽)이 떨어지고 기식(氣息)이 멈추어 마치 저승으로 가는 사람과 같으나, 우리 공에게는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
임금이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뜻을 가다듬어 안으로는 정사를 닦고 밖으로는 외적을 물리치기로 하고 인재를 얻어서 외방(外方)을 맡겨야 한다는 생각에서 매양 자리에 바로 앉지 못하고 탄식을 일으켰는데, 공을 보자 마음속에 깊이 교감이 되어서 이로부터 대접이 날로 융숭하여 늘 선전관(宣傳官)을 겸하게 하고 또 군사를 사열할 적에는 반드시 명하여 위장(衛將)을 삼았으니, 장차 그로 하여금 미리부터 병법에 익숙하게 만들자는 것이었다. 임금이 여러 명신(名臣)들에게 불경을 나누어주고 외우게 하는데, 노유(老儒) 노사(老師)도 다 면하지 못하였으나, 공에게 이르러서는, “아무개 같은 사람은 불교를 좋아하지 않으니 나누어주지 말라.” 하였다. 공이 작은 벼슬에 있으면서도 인주(人主)의 경탄(敬歎)을 받음이 이와 같았다.
이해 가을에 선교랑(宣敎郞)에 오르고 이어 통례문 봉례랑(通禮門奉禮郞), 지제교(知製敎), 세자시강원 좌정자(世子侍講院左正字)로 옮기었다가, 경진년(庚辰年, 1460년 세조 6년)에 평안도에 건주적(建州賊)이 있다는 소문이 들리어 병마도절제사 도사(兵馬都節制使都事)로 나갔다. 이듬해 신사년(辛巳年)에 조정으로 돌아와 승의랑(承議郞) 성균관 주부(成均館主簿), 예문관 봉교(藝文館奉敎)를 제수받았다가 형조도관 좌랑(刑曹都官佐郞)으로 옮기었다. 임오년(壬午年, 1462년 세조 8년)에 봉직 대부(奉直大夫)에 승급하여 함경도 관찰사 도사(咸鏡道觀察使都事)로 나갔다가, 소환되어 정언(正言)을 제수받았고, 얼마 안 되어 훈련원 판관(川鍊院判官)으로 발탁되었다. 이듬해 계미년(癸未年)에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을 제배하였다가, 곧 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 겸 예문관 응교(藝文館應敎)로 옮기었다.
갑신년(甲申年, 1464년 세조 10년)에 사예(司藝)로 승진하였다. 이때 상당군(上黨君) 한명회(韓明澮)공이 좌의정으로서 관서(關西)에 개부(開府)하였는데, 막하(幕下)의 문무 관원 몇 백 명이 당시의 지극히 선발된 자들로 공이 그중에서 으뜸이었다. 조정에서 직접 건주위(建州衛)를 토벌하는데, 군사의 문서가 구름처럼 쌓인 것을 모두 공에게 처분을 책임지웠으나, 공은 이야기를 하고 술을 마시며 그다지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으면서도 다 핵심에 들어맞게 하니, 한공이 의지하고 중시하며 중대한 사안으로서 모름지기 임금께 재가를 받아야 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공을 보내었다. 공이 들어가서 아뢰면 내전(內殿)에 들라고 명하여 서방의 곡절(曲折)을 진계(陳啓)하도록 하였는데, 모두가 임금의 계획과 맞아떨어져서 임금이 수긍하며 이르기를, “더 말할 것이 없다. 네가 이와 같이 하니 나는 걱정할 것이 없다.” 하였다. 들어갈 적마다 반드시 직질을 올려서 내보내니, 1년 동안에 여러 번 승진되어 품계가 중직 대부(中直大夫)에 이르렀다. 이해 겨울에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로 발탁하였다.
을유년(乙酉年, 1465년 세조 11년)에 가선 대부(嘉善大夫)로 승급하여 함경도 절도사(咸鏡道節度使)로 나갔다. 하루 앞서 임금이 비전(秘殿)에 납시어 공과 좌의정 노사신(盧思愼)을 불러 앉히고 인재를 얻기가 어려움을 조용히 논의하며 공만을 앞으로 나아오게 하여 이르기를, “경(卿)은 이 관직에 오래 있지 못하게 될 것인데 경은 알고 있는가?” 하였다. 공이 움츠러들어서 미처 대답을 못 하자, 임금이 이르기를, “경을 이 관직에 둔 것은 출납(出納)할 만한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변방의 장수를 만들고자 하여 일부러 먼저 이러한 높은 관직의 제수가 있었던 것이다.” 하더니, 얼마 안 되어 이 발령이 있은 것이었다. 이때 공의 나이는 32세였다. 공이 일찍이 큰 뜻이 있어서 평안ㆍ함경 두 도의 막관(幕官)이 되었을 적에 비록 노쇠한 장교, 퇴출할 군병이라도 다 함께 다정스럽게 이야기를 나누고 무릇 제번(諸蕃)의 족장(族帳)과 부락(部落)의 강약, 산천과 도로의 우회(紆回)와 곡직(曲直), 조종(祖宗) 때의 관새(關塞)ㆍ성벽(城壁)ㆍ보오(堡塢)의 건설과 연혁(沿革)에까지 모두 익혀 듣고 속으로 기억하여 두었기 때문에 하루아침에 융숭한 위임을 받았어도 지휘하고 보살피는 과정에서 백성과 외이(外夷)들이 모두 굴복하여 한 지역이 편안하였다.
병술년(丙戌年, 1466년 세조 12년) 봄에 내간상(內艱喪)을 당하여 강효문(康孝文)으로 대신하게 하였는데, 강효문이 사치만 하고 아랫사람을 돌보지 않아서 신망을 크게 잃어 모든 사람이 반목(反目)하므로 거의 하루도 편안하지 못하였다. 이듬해 정해년(丁亥年)에 길주(吉州) 사람 이시애(李施愛)가 난을 일으켜 강효문을 죽이고 자칭 절도사(節度使)가 되니, 토호(土豪)들이 앞다투어 고을 수령을 죽이고 동참하였다. 반서(叛書)가 계문(啓聞)되자, 임금이 이르기를, “누가 능히 나를 위하여 이 변란을 평정하겠느냐?” 하니, 북방의 자제로서 도성에 와 기다리고 있는 자들이 모두 말하기를, “북방 사람들이 허종을 제 부모처럼 생각하고 있으므로, 참으로 허종을 장수로 삼는다면 적은 염려할 것이 못 됩니다.” 하였다. 그날로 공에게 절도사를 제수하니, 공이 막 도성 밖에서 집상(執喪)을 하고 있다가 급전(急傳)의 부름을 받고 들어와 임금을 뵈니, 임금의 말씀이 하도 간곡하여 공이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다.
이튿날에 하직을 하고 임지로 떠나니, 친구들이 나와서 전송하며, “적의 기염이 한창 치열하므로, 공은 조금 머뭇거리며 형세를 관망하여 보라. 지레 나아가는 것만이 상책이 아니다.” 하였다.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지금의 형세를 보면 바로 불에 타는 것을 끌어내고 물에 빠진 것을 건져내듯이 하여야 하므로, 하루에 천리를 달리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어찌 차마 1각인들 지체할 수 있겠는가? 맹세코 이 역적 놈과 함께 살지는 않을 것이다.” 하니, 듣는 자들이 장하게 여겼다. 가는 도중에 ‘관찰사 신면(申㴐)이 살해를 당하고, 체찰사(體察使) 윤자운(尹子雲) 역시 붙잡혀서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종자(從者)들이 얼굴에 두려운 빛을 띠고 모두 행군을 늦추려 하였으나, 공은 듣지 않고 이틀의 길을 하루에 달리어 안변(安邊)에 당도하니, 이시애가 군사를 이끌고 이미 단천(端川)에 당도하여서 정주(定州) 평양 이북이 모두 적의 소굴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공이 사태가 다급하다고 말하고는 드디어 군관(軍官) 차운혁(車云革) 등을 적의 진중(陣中)에 보내어 군세(軍勢)의 허실을 정탐하게 함과 동시에 지시하기를, “너희들은 다 본도 사람이므로 적이 귀순(歸順)하였다는 말을 들으면 반드시 의심하지 않을 것이니, 좌우를 주선하면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아우 이시합(李施合)이라는 자는 날쌔고 용맹하여 적이 믿는 것은 이 한 놈뿐이니, 이시합을 사로잡기만 하면 적은 저절로 낭패될 것이다.” 하였다.
공이 막료(幕僚)와 더불어 의논하기를, “영흥(永興)은 앞에 용흥(龍興)이 있으니, 강을 끼고 천험(天險)을 이용한다면 적이 남으로 내려오지 못할 것이고 또 우리 태조 대왕의 진전(眞殿)이 있는 곳이므로, 만에 하나 차질이 있다면 당연히 이곳에서 목숨을 바쳐야 한다.” 하고, 드디어 영흥으로 향하니, 일로(一路) 주관(州官)들이 모두 마중을 나와서 말머리에 절을 하고 울며 하는 말이, “공이 만약 며칠만 늦게 오셨더라도 우리는 적의 손에 가루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하여, 공이 한 동안 말을 멈추고 위로하여 보냈다.
본도(本道)는 인심이 어리석고 사나운 데다 또 속임수에 꼬여 넘어가서 미혹에 빠진 채 깨닫지 못하다가, 관군이 경내에 쳐들어온다는 소문을 듣고는 산골짜기로 도망을 쳐서 마을마다 인연(人煙)이 끊어져 적적하였다. 공이 손수 방문(榜文) 수천 자의 말을 지어 흩어진 백성들을 불러들이니, 부로(父老)들이 서로 거느리고 와서 병영 앞에 절을 하며 하는 말이, “과연 우리 공이로다.” 하였다. 적의 진중에서 도망쳐 오는 자가 날로 수십 명씩 늘어나니 군대의 사기는 크게 진작되고 적의 형세는 갈수록 약화되었다. 앞서 보낸 차운혁 등이 몰래 홍원(洪原)ㆍ단천(端川)의 군사와 연락하여 이시합을 잡아 포박하여 남으로 달려 오는데, 때마침 봉사(奉使) 최윤손(崔閏孫)이 적에게 빌붙어 유언(流言)을 퍼뜨려 군중을 현혹시켜서 온 군대가 생각을 달리하게 되어 차운혁 등이 그들에게 잡히고 홍원 이북에는 인심이 다시 동요되므로, 적이 육진(六鎭)의 정예 부대를 대대적으로 발동하여 밀고 나왔다.
이때 공이 강순(康純)ㆍ어유소(魚有沼) 등과 함께 전진하여 북청(北靑)의 남천(南川)에 진주하였는데, 적이 어둠을 타고 싸움을 걸어오다가 아군이 일제히 공격을 하자, 침범하지 못하고 드디어 물러갔다. 그리하여 아군도 홍원으로 돌아왔다. 강순이 외치기를, “듣자니 적이 군사를 증원하여 다시 온다고 하는데, 우리 군사는 이미 피곤하여 견디기 어려울 듯하고 군수품마저 이어대기 어려우므로, 함흥(咸興)으로 환군하여 다시 군사를 일으킬 계획을 하는 것만 못하다.” 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다 강순의 말을 옳다고 하였으나, 공만은 분연히 말하기를, “그렇게 한다면 적이 우리를 얕보아 더욱 날뛸 것이고 또 이곳의 인민이 다시 적에게 이용당하여 소탕할 기약이 없을 것이다. 종전에 북청에 있을 적에 적이 갑자기 침범하여 왔어도 우리 군사가 당황하지 않고 여유를 가지어 오히려 남은 힘이 있었는데, 더구나 지금은 보루가 튼튼하고 갑병(甲兵)을 휴식시켰음이겠는가? 문을 열고 적을 맞아 친다면 훌륭한 업적을 이룰 수 있다. 이러한 기회를 버리고 싸워 보지도 않은 채 한결같이 움츠리기만 하는 것은 좋은 계획이 아니다. 적은 거짓이 많아서 헛소리로 공갈을 하는 것인데, 진퇴를 경솔히 하여 그 술책에 빠져서야 되겠는가? 온갖 곡식이 들에 널려 있어서 군량이 없을 걱정은 없으니, 나는 나아가 죽을 줄은 알아도 물러나 살 줄은 모른다.” 하니, 여러 장수들이 그 의사를 돌리기 어려움을 알고 감히 다시 말하지 못하였다.
대군(大軍)이 흥원에서 한 달 동안 나아가지 않고 머무르다가, 공이 강순 등에게 이르기를, “흉포한 무리가 지금까지 날뛰고 있는 것은 바로 우리들이 용맹스럽지 못하여 군사를 끼고 도적을 구경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정에서 하나의 쪽지를 내려 문책한다면 어디로 죽음을 피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남쪽 군사는 추위를 겁내는데, 가을 기운은 날로 짙어지고 있음이겠는가? 제군들은 깊이 생각하여 보라.” 하니, 여러 장수들이 모두 그렇다고 하여 드디어 북청으로 돌아왔다. 이때 공이 오랫동안 몸이 여위는 병을 앓아서 사람들이 모두 남아 있기를 권하였으나, 공은 병을 무릅쓰고 떠났었다.
대군이 거산역(居山驛) 앞에 이르니 적군이 벌써 만령(蔓嶺)의 중봉(中峯)을 점령하고 있었다. 우리 군사는 쳐다보고 공격을 하다 보니 시석(矢石)이 모두 미치지 못하고 적군은 높은 데서 내려다보고 방어를 하여 화살이 비가 오듯이 쏟아져서 죽고 다치는 자가 너무 많았다. 공이 군중으로 들어가서 어유소(魚有沼)를 보고 채찍을 높이 들어 지시하기를, “바다를 베고 있는 저 한 봉우리가 우뚝 솟아서 만령과 연이어져 있으니, 만약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군사 수백으로 적이 뜻하지 않는 틈을 타서 올라가게 한다면 광적(狂賊)은 그대로 앉아서 포승을 받게 될 것인데, 공이 아니고서는 이 일을 제대로 해낼 사람이 없소.” 하니, 어유소가 그렇다고 하였다. 드디어 군사를 고기 꿰듯 줄을 지어 몰래 비탈을 타고 올려보낸 다음, 깃발이 나무숲 사이에 펄럭이는 것을 보고 공이 군중(軍中)에서 북채를 잡고 싸움을 독려하니, 적병은 모두 이쪽으로 눈이 쏠려 있는데, 어유소의 군사는 벌써 산봉우리 중턱에 도착하여 여러 사람이 일제히 고함을 지르고 솔바람과 바다 물결 소리가 또한 기세를 돋우니 적진이 동요되면서 버티지 못하고 인마(人馬)가 맞부딪치는 소리가 우레 소리가 울리는 것 같았다. 이시애가 뛰어 달아나는 것을 여러 장수들이 급히 추격하니, 공이 말하기를, “내 마음 속에는 이미 이시애를 포박하였다. 예로부터 원흉(元凶)이 세력을 잃으면 그 부하들이 서로 도모하여 부귀를 노리는 법이니, 이시애의 머리가 장차 저절로 손에 들어올 것이다. 협박에 못 이겨 따라간 자는 다 우리 임금의 백성인데, 어찌 무기를 마구 사용하여 많을 사람을 죽일 수 있겠는가?” 하였다. 수일 후에 이주(李珠) 등이 이시애를 포박하여 군문 앞으로 오니, 모두가 개선가(凱旋歌)를 부르고 공은 홀로 진영에 남아 있었다.
처음에 공이 북방으로 들어갈 적에 호랑이의 굴속을 필마(匹馬)로 쓸쓸히 출입하며 한갓 충의로써 분발하였으므로, 인심이 흡족히 따라 주어서 적의 호령이 다시 남으로 내려오지 못하였고, 적이 평정된 뒤에도 남은 잔당이 항상 흉흉하여 오히려 반란을 생각하였으나, 공이 조용히 환담하며 편안한 마음으로 대하여 주니, 북방이 이를 힘입어 안정을 얻게 되었다. 만약 공이 아니었더라면 반란이 재발할 뻔하였다. 공을 책훈(策勳)하여 정충 출기 포의 적개 공신(精忠出氣布義敵愾功臣)의 호를 내리고 숭정 대부(崇政大夫)로 올리어 양천군(陽川君)에 봉하였다. 무자년(戊子年, 1468년 세조 14년)에 어머니 최씨 부인이 병이 나서 조정으로 불러들여 양천군에 봉하였다. 이듬해 기축년(己丑年)에 나라에서 중국이 동쪽 3참(站)의 땅을 분할하여 진(鎭)을 설치한다는 소문을 듣고 드디어 공을 내보내어 평안도 관찰사를 삼았다가, 수개월 후에 불러들여 다시 양천군에 봉하였다. 이윽고 대사헌(大司憲)을 제수하니, 바른 말과 정직한 의논으로 풍채가 의젓하였다.
적(賊) 장영기(張永起)라는 자가 전라도에서 일어나 무뢰한들을 끌어 모아 도당이 날로 늘어나자 주현(州縣)에서 제대로 억제하지 못하였다. 평양군(平陽君) 박중선(朴仲善)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잡아오게 하였으나, 오랫동안 전공을 거두지 못하여 소환을 하고 공으로 전라 절도사를 삼아 토벌하게 하였다. 적이 공이 간다는 말을 듣고 섬으로 도망쳐 들어가서 틈을 보아 노략질을 하고는 금방 겁을 내어 바다를 건너 들어가 버리므로, 비록 백만의 정병이라도 그 힘을 펼 곳이 없었다. 공이 대책을 널리 마련하고 몰래 사람을 시켜 정탐하여 보니 적이 장흥부(長興府) 경계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이에 부사(府使) 김순신(金舜臣)에게 격서(檄書)를 보내어 군사를 풀어서 에워싸게 하였으나, 적이 김순신을 쏘아 맞히어 중상을 입혀서 김순신은 군사 행동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였고, 적은 포위망을 무너뜨리고 탈출하였다. 이때 공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달려가서 적을 사로잡아 베었으니, 이는 그 이듬해 7월이었다. 적이 평정되자 소환하여 양천군에 봉하고 얼마 안 되어 병조 판서에 발탁하였다. 신묘년(辛卯年, 1471년 성종 2년)에 순성 좌리 공신(純誠佐理功臣)의 호를 받고, 계사년(癸巳年, 1473년 성종 4년)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었으며, 병신년(丙申年, 1476년 성종 7년)에 도총관(都摠管)을 겸임하고, 이듬해 정유년(丁酉年)에 예조 판서로 옮겼다.
금상(今上)께서 창릉(昌陵)과 경릉(敬陵)을 알현하고 제사가 끝난 뒤에 사냥을 하게 되었는데, 공이 찬례사(贊禮使)로서 어가(御駕)를 수행하였다. 마침내 아뢰기를, “제사를 지낸 경건한 마음이 남아 있어 아직 흩어지지 않았는데, 또 사냥을 일삼으신다면 뒷날 자손들이 무엇을 보고 배우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전교하기를, “내가 짐승 잡는 일에 빠진 것이 아니라, 능침(陵寢)을 위하여 나쁜 짐승을 제거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공의 말이 매우 정대하니 이 뒤로는 당연히 하지 않겠다.” 하였다.
이해에 건주위(建州衛)에 흉년이 들어서 세 위(衛)가 결탁하여 요동(遼東)ㆍ애양보(靉陽堡) 등을 침략해 들어와서 도지휘사(都指揮使) 유총(劉聰)이 전사(戰死)하였다. 적이 뜻을 얻어 또 우리 강토를 침범하려 하므로, 가을에 공을 평안도 순찰사에 임명하였다. 공이 대궐에 나아가 하직을 고하니, 임금이 편전(便殿)에 납시어 친히 술을 따라 내려주고 또 붉은 활[彤弓]과 초피 갖옷[貂裘]을 내려주었다. 공이 의주(義州)에서 군막을 열자 열진(列鎭)에 많은 성원(聲援)이 되었다. 겨울에 군중에서 의정부 우참찬을 제수 받고 바로 좌참찬에 승진하였다. 무술년(戊戌年, 1478년 성종 9년) 봄에 조정으로 돌아왔는데, 임금이 장차 중전(中殿)을 폐위하고자 천위(天威)가 진동하여 사람들이 감히 말을 못 하였으나, 공이 한 무제(漢武帝)와 송 인종(宋仁宗)의 실책을 증거로 들어 불가하다는 것을 혼자서 극력 진달하였다. 가을에 할머니의 상을 당하였다. 경자년(庚子年, 1480년 성종 11년) 가을에 공을 기용하여 평안도 순찰사를 삼아 다시 의주를 진무(鎭撫)케 하였으며, 겨울에 복을 벗자 양천군으로 봉하였다.
이듬해 신축년(辛丑年) 봄에 돌아와서 가을에 호조 판서로 제배되었고 임인년(壬寅年, 1482년 성종 13년)에 의정부 우찬성으로 승진하였으며, 이듬해 계묘년(癸卯年)에 세자시강원 이사(世子侍講院貳師)를 겸임하였다. 당시 정희 왕후(貞熹王后)가 온양(溫陽) 행궁(行宮)에서 승하하여 재궁(梓宮)을 모셔다 도성 밖 영순군(永順君)의 집에 봉안(奉安)하였는데, 공이 아뢰기를, “지난날 세종 때 하윤(河崙)이 지방에서 죽었을 때 도성 안으로 들어와 본가에다 초빈(草殯)하도록 명한 것은 대신을 존중하였기 때문입니다. 지금 세속의 금기에 구애를 받아 대행왕비(大行王妃)의 재궁을 성 밖에 두게 한다면 그 잘못이 적지 않아 적이 원통하옵니다.” 하며, 되풀이하여 극력 아뢰니, 당시의 공론이 대단하다고 하였다.
을사년(乙巳年, 1485년 성종 16년)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정미년(丁未年, 1487년 성종 18년) 가을에 복을 벗고 이조 판서에 제배되었다. 이해 겨울에 명나라 천자가 새로 즉위하여 한림 시강(翰林侍講) 동월(董越)과 급사중(給事中) 왕창(王敞)을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보내오므로, 공을 원접사(遠接使)로 차출하여 국경에 나가서 맞이하여 오게 하였다. 무신년(戊申年, 1488년 성종 19년) 봄에 동월 등이 의주(義州)에 도착하자 몹시 뽐내며 사람을 멸시하고 좌우의 집사자(執事者)가 사소한 잘못이 있어도 반드시 욕설을 하고 성을 내어 꾸짓기를, “내가 네 나라의 환관(宦官)도 아닌데 감히 무례하게 구느냐?” 하였는데, 지난해에 사명을 받든 자가 모두 우리나라에서 중국 조정에 들어간 환관이였기 때문에 이 말이 나온 것이었다. 공이 훤칠하고 우람한 몸매와 의젓한 의관으로 들어가 인사를 하자, 두 사자(使者)가 놀라 일어서서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절을 하였다. 인사를 마치고 나서 공이 돌아 나오니 두 사자가 서로 눈짓하며 이르기를, “당당하다. 그 인물이여.” 하고, 이로부터 준엄하던 서슬이 점점 사라져서 좌우가 비록 뜻에 거슬리는 일이 있더라도 모두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불문에 붙였으니, 이는 공을 공경하여서 그런 것이었다. 그들이 공을 보면 반드시 오랫동안 조용히 서로 이야기하며 함께 경사(經史)를 토론하여 간혹 밤중에 파하기도 하였다. 하루는 함께 술을 마시다가 왕 부사(王副使)가 ‘일찍이 사명을 받들고 촉(蜀)나라에 갔었다’는 이야기를 하자, 공이, “촉 나라로 들어가자면 두 길이 있는데, 육로(陸路)는 포야(褒斜)를 통하고 수로는 형문(荊門)을 통한다. 공은 어는 길을 통하였는가?” 하고 물으니, 부사가, “강을 통하여 들어갔다.”고 대답하였다. 공이 또 묻기를, “듣자니 강은 민산(岷山)에서 발원하여 기주(夔州)에 이르러서는 산협으로 빠져나오므로 길이 매우 험준하고 이릉(夷陵)에 이르러서 비로소 물의 흐름이 완만하다고 하는데, 과연 그러한가?” 하고, 이어서 강이 아무 곳과 아무 곳에 이르면 무슨 물과 무슨 물이 되고 강을 따라 위아래로 양양(襄陽)ㆍ번성(樊城)ㆍ형주(荊州)ㆍ악주(鄂州)의 수천 리 사이에 산천의 멀고 가까움과 호구의 많고 적음과 고금의 영웅ㆍ호걸이 병탄하고 할거한 것까지 일일이 다 열거하니, 두 사자가 진심으로 승복하여 앞으로 나와 공의 손을 잡고 하는 말이, “공의 가슴속에 1만 권의 서적이 들어 있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하고 공이 중국의 전고(典故)를 묻자 비록 궁금(宮禁)의 은밀(隱密)한 것까지도 공에게 다 말하여 주었다.
이에 앞서 사신이 서울에 들어온 지 수일만에 예관(禮官)에게 조칙을 맞이하는 의식을 묻고서 의절(儀節)을 가져다 본 다음, 전하가 연(輦)을 타고 수행한다는 말이 들어 있자, 두 사신이 성을 내며 말하기를, “조서(詔書)를 맞이하는 경우에는 국왕이 면복(冕服)을 갖추고 도보로 수행하고, 칙서(勅書)를 맞이하는 경우에는 국왕이 면복을 갖추고 말을 타고 수행하는 것은 고황제(高皇帝)가 제정한 번왕(蕃王)의 의식인데, 연을 탄다는 말은 과연 어디에 근거한 말인가?” 하며, 내던진 채 돌아보지도 않고 이르기를, “반드시 연을 타고자 한다면 마땅히 다시 의주로 돌아가서 조정에 품달(稟達)하여 처리하겠다.” 하였다. 공이 들어가서 만나보고 말하기를, “고황제가 만세를 위하여 변경 못할 법전을 정한 것이 만약 두 대인(大人)의 말씀과 같다면 폐법(弊法)에 불과하다.” 하니, 두 사신이 얼굴빛을 붉히며 말하기를, “이조 판서가 성제(聖制)를 헐뜯자는 것이 아닌가?” 하였는데, 공이 손을 들며 말하기를, “인군(人君)이란 본래 깊은 궁궐에서 생장하여 행보에 익숙하지 못한데, 더구나 노쇠하여 다리 힘이 약한 이가 멀리 교외를 걸어 나간다면 장차 지쳐 쓰러져서 행례(行禮)를 제대로 못하게 될 것이다. 고황제가 오래 물려 줄 법전을 제정하시면서 사람이 행하지 못할 일을 억지로 행하게 하실 리가 있겠는가? 결단코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아침에 주나라에서 걸어오다[朝步自周]’라고 한 말이 어찌 보행을 말한 것이겠는가. 문구(文句)만을 가지고 원의를 손상하서는 아니 된다.” 하자, 두 사신이 웃으며 말하기를, “공의 말을 듣고 보니 다시 이치가 그럴 듯함을 깨닫겠다. 조서는 연을 타고 맞이하고 칙서는 말을 타고 맞이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공이 또 극력 다투어 말하기를, “조서와 칙서가 도착한 시기가 다르다면 그만이거니와 지금은 조서와 칙서가 함께 왔으므로, 조서를 맞이하면 칙서는 저절로 따르게 되는데, 어떻게 칙서를 맞기 위하여 별도로 말을 탈 수 있겠는가?” 하였다. 두 사신이 공의 말을 거의 따르려고 하는데, 임금이, “제사(制使)와 더불어 항변을 하여서는 아니 된다.” 하고, 드디어 자신을 굽혀서 억지로 따랐다. 말을 타고 칙서를 맞이하는 것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두 사신이 본국으로 돌아갈 적에 압록강 가에 이르러서 작별의 아쉬움을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하는 말이, “공이 하루 빨리 조정에 들어와서 중국으로 하여금 해외에 이런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하라.” 하였고, 조정에 돌아가서는 진신(搢紳)들을 대하여 극구 칭찬하며, “저 하늘 위는 알 수 없으나, 인간에는 둘도 없는 사람이다.” 하여 듣는 사람들이 누구나 풍채를 바라보기를 그리워하였다. 그 뒤에 예부 낭중(禮部郞中) 애박(艾璞)이 사명을 받들고 나왔는데, 사람이 오만하여 경상(卿相) 귀인을 만나도 모두 얕보고 예우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국경에 들어서면서 맨 먼저 공의 안부를 물었으며, 공을 만나보자 용모를 가다듬고 기를 죽여 송영(送迎)을 조심조심하는 것이 마치 감당하지 못하는 듯하였다.
병조 판서로 전직되었다가 이윽고 숭록 대부(崇祿大夫)로 가자(加資)되었다. 기유년(己酉年, 1489년 성종 20년)에 보국 숭록 대부(輔國崇祿大夫)로 승급하고 양천 부원군(陽川府院君)에 봉하여져 함경도 관찰사로 나갔으니, 이때 유언비어가 들끓어 난리가 거의 일어나게 되어서 공이 아니고서는 제대로 진정(鎭定)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자급보다 낮은 직위에 공을 보낸 것이다. 공이 수레에서 내리자마자 형벌의 위엄을 제거하고 도망친 죄를 탕감하여 주어서 어루만져 주고 따뜻하게 대하니, 민심이 서로 기뻐하여 한 지방이 편안하여졌다. 공이 막료(幕僚)들에게 말하기를, “북방 사람은 가장 다스리기 어려워서 무마하는 방법이 조금만 빗나가도 가슴속에 칼날이 돋아나는데, 이것이 어찌 타고난 품성이 달라서이겠는가? 배우지 못하여서 그런 것이다.” 하였다. 공이 대성전(大成殿)에 나아가 알성(謁聖)을 한 다음 퇴락하고 누추한 학사(學舍)를 둘러보고는, “이 일을 어찌 늦출 수 있겠는가?” 하며, 다시 예전의 학사 서남쪽에 새 터를 잡아서 공이 친히 나가 역사를 감독하니, 며칠이 못 가서 새 학사가 완성되어 성전(聖殿)과 강당(講堂) 그리고 스승과 제자의 거처하는 곳까지 구비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공이 제생(諸生)을 거느리고 친히 사채례(舍菜禮)를 거행하니, 선비와 백성들이 우러러보며 공무를 보고 난 여가에 경서(經書)를 가지고 찾아와 강독(講讀)하며 배움을 청하는 자가 자리를 메웠고, 각기 자질에 따라 가르침을 베푸니 누구나 가슴 가득히 지식을 채워 돌아가서 유풍(儒風)이 크게 진작되었으며, 육진(六鎭)의 사람까지도 모두 발이 부르트도록 달려와서 배웠다. 근년에는 8도의 관찰사로 하여금 각자 도내의 제생에게 시험을 보여서 뛰어난 작품을 뽑아 올리게 하여 다시 추려본바, 뛰어나게 두각을 드러낸 것은 모두 함경도 출신 유생의 작품이었다. 경술년(庚戌年, 1490년 성종 21년)에는 도내에 큰 가뭄이 들었는데, 공이 비류수(沸流水) 가에서 목욕 재계하고 글을 지어 비를 빌었던바, 곧바로 감응(感應)이 와서 온 도내가 큰 풍년을 이루었다.
신해년(辛亥年, 1491년 성종 22년)에 임기가 만료되어 당연히 교대하게 되어 있었으나, 장차 이마거(尼亇車)를 정벌하여야 되기 때문에 그대로 유임하도록 하였다. 드디어 어찰(御札)을 내리기를, “지금 듣건대 본도가 병마(兵馬)는 정강(精强)하고 인민은 부유한 곳으로 일컬어지고 있다니, 쥐처럼 훔쳐가고 개처럼 도둑질하는 좀도둑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거니와, 성을 공격하고 땅을 침략하는 대적(大賊) 역시 막아 낼 수 있을 것이다. 경진년(庚辰年, 1460년 세조 6년)의 전쟁을 겪은 이후부터 인민의 번성함과 병마의 강성함이 갈수록 전과 같지 않고 변장(邊將)이 된 자도 대개가 용렬하고 탐학(貪虐)하여, 국가의 무육(撫育)하는 은혜는 본받지 않고 시대의 태평에 젖은 나머지, 오로지 재물 모으기만을 일삼고 백성의 고통을 생각하지 않아서 인민을 유리(流離)하게 만든 것이니, 병마가 강성하지 못한 것도 반드시 여기에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고 못한다. 지금 만약 침략하여 오는 큰 적을 해를 이어 물리치지 못한다면 형세가 장차 방어하기 어렵게 될 것이다. 북방의 수병(戌兵)이 매우 한심스럽다고 하니, 내가 이 말을 듣고 우려가 바야흐로 깊다. 일찍이 방수(防戌)는 남방이 가장 약하고 북계(北界)가 조금 강성하다는 것으로 들었는데, 지금 보니 일이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일어나 이와 같이 극단에 이르렀으니 그 이유는 무엇인가? 실로 이는 임금이 밝지 못하고 정당성을 잃어서 이러한 것이다. 돌이켜보건대 일의 어려움을 바로잡고 백성의 위급함을 구원하려면 모름지기 대현(大賢)에게 의뢰하여야 하는데, 진실로 문무(文武)로 덕을 삼아서 충의(忠義)로 몸을 세운 자가 아니라면 어떻게 한 지역을 튼튼히 지킬 수 있겠으며, 어떻게 이로(夷虜)를 위엄으로 굴복시킬 수 있겠는가? 오직 경은 자질이 남보다 뛰어나고 오로지 국가의 경영에만 뜻을 둔 데다 다시 세상의 많은 경험을 쌓았고, 또 변방 정세를 익히 안지가 오래이므로, 비록 관료에서 중직에 선발하여도 경보다 나은 이가 실로 적다. 완전한 효과를 거두게 하려면 어찌 한 자리에 오래 두는 것만 하겠는가? 공자의 말씀에, ‘진실로 나를 써 주는 자가 있다면 3년에 성공할 수 있다’ 고 하였으나, 성인(聖人)이 정사를 하는 데 어찌 3년이라는 긴 세월을 기다리겠는가? 3년을 들어 말한 것은 아마 그 공부를 쌓고 또 쌓아서 치도(治道)가 크게 갖춘 것을 말함일 것이다. 지금 이미 대신과 의논하여 경에게 동북방을 위임하였으니, 먼저 진정할 규모를 세워서 변방을 다스리는 훌륭한 계책을 다하여 10년을 기약하기를, 마치 한(漢) 반초(班超)와 양호(羊祜)가 변성(邊城)에서 늙듯이 한다면 천리의 비옥한 들판에 상마(桑麻)가 풍부할 것을 또 어찌 의심하겠는가? 내가 만나보고 싶을 때는 당연히 부를 것이니, 나의 마음을 깊이 이해하여 곤외(閫外)의 노고를 꺼리지 말고 백성들을 편안히 하는 데 힘을 써서 큰 공적을 이루어 함께 태평성대를 누리도록 하라.” 하였다.
이마거는 여러 부족(部族) 가운데서 가장 강성하여 국가에서 본래부터 후하게 무마하였으나, 정해년(丁亥年, 1467년 세조 13년)에 변장(邊將)이 통어(統御)를 잘못하여 피묻은 이빨로 으르렁거려서 변방 백성이 비로소 곤욕을 당하게 되었고, 임진년(壬辰年, 1472년 성종 3년)에 또 대거 침략하여 들어와서 사람과 가축을 살상하여 온성 부사(穩城府使) 조종(趙琮)이 군사를 이끌고 추격하자, 적이 숲 속에 매복을 하였다가 사면에서 일어나 조종을 포위하여 겨우 몸만 빠져 나왔다. 이 뒤로부터 변방의 환란이 해마다 더 심하여져서 변장이 경보를 들을 적마다 성문을 닫아걸고 감히 화살 한 발을 쏘지 못하며 그저 무사하기만을 바랐다. 때문에 적이 침범하여 오면 반드시 마냥 유린하고 갔다. 이해 봄에도 조산보(造山堡)에 들어와 노략질하는 것을 그곳의 장수 나사종(羅嗣宗)이 야춘강(也春江) 가에까지 쫓아가서 싸우다 패하여 피살되고 전군이 섬멸을 당하니, 적이 침략한 이래로 이처럼 참혹한 일은 없었다. 여러 진(鎭)이 기가 죽어서 성밑의 알타리(幹朶里) 및 여진(女眞)ㆍ모련(毛憐)ㆍ속평(速平) 등의 여러 위(衛)는 본래부터 신복(臣服)하여 순종하였으나, 이때에 와서는 모두 관망할 생각을 품고 있어서 만약 불문에 붙이고 그냥 둔다면 이마거만이 더욱 커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여러 번(蕃)까지도 탄압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공이 사기(事機)를 낱낱이 파악한 다음, 역마를 달려 계문(啓聞)하니, 위로 임금의 신단(神斷)과 합치되어서 북정(北征)의 의논이 드디어 결정되었다. 공을 역마로 급히 불러들여 군사를 얼마나 가지면 토벌할 수 있는가를 물으니, 공이 대답하기를, “정병 2만 명만 가지면 만족합니다.” 하고, 드디어 방략(方略)을 개진하여 일일이 눈앞에 두고 보는 것 처럼 설명하니, 모두 좋다고 하였다. 장차 떠나려 하는데, 어찰(御札)을 내려 이르기를, “지금 북방을 정벌하는 일은 이것이 큰 일을 좋아하고 공(功)을 즐겨서 이러는 것이 아님에도 조정의 의논이 분분하여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내가 비록 몽매하나 어찌 싸움이 위태롭고 흉한 일이라는 것을 모르겠는가? 그러나 군사를 쓰는 큰 일은 형편상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조정에서 말하는 자가 더러 조그마한 침략은 예사로운 일이어서 더불어 계교할 것이 못 되므로, 도외(度外)로 제쳐두는 것이 마땅하다며 심지어 상(商)나라 고종(高宗)이 귀방(鬼方)을 친 고사와 주(周)나라 선왕(宣王)이 험윤(玁狁)을 축출한 고사 및 한(漢)나라 고제(高帝)가 백등(白登)에서 곤욕을 당한 고사와 한나라 무제가 사이(四夷)를 정벌한 고사를 들어서 이 일을 중지시키려 한다. 경계를 진주(進奏)하고 소회를 계달(啓達)하는 말은 비록 좋은 듯하나, 오늘날 군사를 출동하여 죄를 묻는 의리에 있어서는 자못 깊이 연구하지 않은 처사이다. 꿈틀거리는 저 북방 오랑캐가 자신의 힘을 헤아리지 못하고 침략하여 들어와서 대국을 업신여기며 함부로 봉채(蜂蠆)의 독을 내뿜고 시랑(豺狼)의 마음을 극도로 드러내어 까닭 없이 우리를 범하여 장수를 죽이고 군졸을 무찌르니, 이 어찌 천심이 좋아할 수 있는 일이며, 제왕이 주살(誅殺)하지 않을 수 있는 일이겠는가? 그러므로 군사를 일으켜 죄를 성토하는 것이지, 진실로 토지를 탐내고 싸워 이기기를 좋아하여 억지로 무고한 백성을 사지에 몰아넣는 자와는 같지 않다. 더구나 군사가 명분이 바르고 의기가 왕성하니, 명분이 바르고 의기가 왕성한 데다 백성이 또 잘못이 위에 있지 않아서 반드시 포학하게 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다면 오랑캐의 군사가 아무리 강성하기로서니 무엇이 두렵겠는가? 이른바 싸움을 아니하면 몰라도 싸우면 반드시 이긴다는 것이다. 예로부터 장수를 임명할 적에는 곤외(閫外)를 전제하게 하는 법이므로, 진실로 문무(文武)의 재능을 완전히 갖춘 자가 아니라면 어떻게 군중을 무마하고 적을 위압할 수 있겠는가? ≪ 시경(詩經)≫에 말하지 않았던가. ‘문무관 윤길보(尹吉甫)여 만방이 법을 삼았도다. 혁혁한 남중(南仲)이여 험윤을 물리쳤도다.’라고. 이는 오늘날 원수(元帥)의 임무이다. 동북 지방에 대한 일은 일체 경에게 위임하니 아무쪼록 힘을 쓰라. 지금 특별히 경에게 칼을 내리는데, 경인들 어찌 모르겠는가?” 하였으니, 이는 바로 송(宋)나라 태조(太祖)가 남방을 정벌하면서 조빈(曹彬)에게 준 말이다. 선정전(宣政殿)에 납시어 친히 술을 따라 주고 이어 여러 대신에게 명하여 충훈부(忠勳府)에 나아가 전별하게 하였다.
공이 돌아와 부서(部署)를 끝마치고 10월 15일에 군사를 일으키니, 병마는 구름처럼 뻗치고 깃발은 햇빛을 가리어 출병의 성대함이 근고(近古)에 없던 광경이었으며, 성 밑 부락에서 자청하여 약속을 받으려 온 자가 역시 수천 명이었다. 선봉(先鋒)이 하순강(何順江) 가에 이르러 꼬리가 흰 연어가 강기슭에 쌓여 있고 또 인마(人馬)의 종적이 땅 위에 종횡으로 매우 많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서 여러 장수들이 모두 말하기를, “오랑캐가 이미 우리의 행동을 알아차리고 반드시 험한 곳에 의지하여 우리를 요격할 것인데 장차 어찌한다는 말인가?” 하니,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제군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말라. 이전에 경성(鏡城)에 있을 적에 숙호(熟戶)가 와서 나를 찾아보고 출병하는 시기를 알려주면 하순강에서 물고기를 잡아 강기슭에 저장하여 두었다가 군사들에게 회식을 시키도록 할 것이라고 말하였으니, 반드시 그것일 것이다.” 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비로소 안심하였으나, 실은 그런 일이 없었으니, 공의 임기응변술이 이와 같았다. 군중에서 날렵하고 전공을 세우기 좋아하는 자들이 모두 군사를 몰래 출동하여 그들이 대비하지 않은 틈을 타서 습격하려고 하였으나, 공은 다 들어 주지 않았다. 적진에 당도하여 보니 오랑캐가 과연 도망치고 없어서 여러 장수들이 추격을 하려 하였으나, 공이 말하기를, “병서에, ‘해 볼 만하면 전진하고 어렵다고 생각되면 후퇴하라’고 하였다. 오랑캐가 이미 혼이 나서 들쥐처럼 숨었으니, 마땅히 서슬을 억제하고 예기를 자제하여 만전의 계책을 세워야지, 어찌 그 놈들의 수급(首級)을 얻자고 우리 군사를 오래도록 밖에 놓아둘 수 있겠는가?” 하였다.
드디어 회군하여 마을호리(麻乙胡里)라는 지점에 당도하니, 날은 저물고 앞에는 험준한 두 언덕이 가물가물하게 두어 리(里)를 대치하고 있는데, 길이 그 가운데로 나서 매우 좁았다. 여러 장수들이 모두 그곳을 지나서 숙영(宿營)을 하고자 하였으나, 공이 유독 아니 된다고 하며, “적이 반드시 험지에 의거하여 우리를 노리고 있을 터인데, 그 속으로 들어가다가 만약 저놈들이 건장한 병마로써 육박전을 한다면 어둠 속에서 우리 군사는 선두와 후미가 서로 구원하여야 될 것이다. 제군들이 만전을 보장할 수 있겠는가?” 하고 드디어 머물다가 이튿날 새벽에 행군하여 그 지역에 당도한즉 적의 기병이 과연 먼저 점거하여 대기하고 있어서 우리 군사가 힘을 다하여 싸워서 벗어났으니, 공이 아니었더라면 위태로울 뻔하였다. 울지(鬱地)에 당도하여 눈을 만났는데, 이 지역에는 눈이 내리면 순식간에 한 길이 넘게 되기 때문에 온 군사가 다 근심하였는데, 공이 말하기를, “하늘이 아는 것이 있다면 차마 1만 사람의 목숨이 오랑캐의 땅에서 얼어죽게야 하겠는가?” 하였다. 이윽고 눈이 개니, 모두 공의 정성의 소치라 말하였다. 임금이 군사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도승지(都承旨) 정경조(鄭敬祖)로 하여금 선온주(宣醞酒)를 싸 가지고 가서 영접하여 위로하게 하였으니, 특이한 은수(恩數)였다.
이마거가 사는 곳은 험준하고 멀어서 예전에 들어가 본 자가 없었는데, 이때에 와서 구멍을 뚫고 행군하여 들어가자, 오랑캐가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하며 산에 올라가서 우리 군사의 철기(鐵騎)가 수십 리를 뻗치어 그 끝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는 깜작 놀라서, “저것이 다 사람이라는 말인가? 어떻게 저다지 많을 수 있는가?” 하였다. 공의 이번 걸음으로 한갓 이마거만이 겁을 먹은 것이 아니라, 건주(建州)의 세 위(衛)도 소문을 듣고 역시 두려워하였다. 공이 처음 건의할 적에는 온 조정이 시끄럽게 다투어서 공이 서글프게 여기며 친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토벌이 있을 뿐이지 전쟁은 없을 것이며, 잠시의 노고로 길이 안일하자는 것이다. 만약 공을 노려서 일을 만드는 짓이라고 한다면 더불어 큰 계획을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후일에 마땅히 노부(老夫)가 잘못 계획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하였는데, 수년 이래 변방 백성들이 편한 잠을 자게 되었으니, 공의 말이 과연 들어맞았다.
임자년(壬子年, 1492년 성종 23년)에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綠大夫)로 승급하여 의정부 우의정(議政府右議政)이 되었다. 공이 조정의 중망(重望)을 짊어진 지 오랜 끝에 이때에 와서 등용(登庸)이 되니 조야(朝野)가 서로 치하하였다. 이때에 승금(僧禁)이 매우 엄격하다가 얼마 안 가서 파하였는데, 공이 그 불가함을 극력 개진하기를, “명령을 내렸다가 곧바로 파하는 것은 덕에 끼치는 누(累)가 적지 않습니다. 예로부터 부처를 받들어 복을 빌기는 하였으나, 지금까지 아무 이익이 없었습니다. 예전에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우리나라 세종께서도 승려가 되는 것을 엄금하여 검은 옷을 입은 자는 성안에 들어서지도 못하게 하였으나 만년에 내불당(內佛堂)을 창건하였으며, 세조와 예종이 섬기기를 더욱 삼갔으나 모두 복을 받지 못하고 왕위를 오래 누리지도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말이 매우 간절하고 강직하여 임금이 너그러이 받아들였다. 하루는 경연에 있다가 아뢰기를, “대간(臺諫)이 간한 말이 옳으면 가상히 받아들이고 옳지 못하더라도 또한 너그러이 용납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지금 대간이 바른말을 올리는데 전하께서 속으로는 옳다고 여기면서도 겉으로는 좌절시켜서 반드시 보류하고 선뜻 받아들이려 않으시니, 이것은 실로 간언(諫言)을 막는 발단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자식을 가르치는 데는 마땅히 의방(義方)으로 하여야 합니다. 세종께서 여러 왕자(王子)로 하여금 종학(宗學)에 나아가 글을 읽게 하였으니, 지금 비록 그와 같이는 못 하더라도 예로부터 반독관(伴讀官)과 찬독관(贊讀官)을 두었으니, 지금이라도 설치하여야 합니다.” 하니, 드디어 좇았다.
중외가 바야흐로 눈을 닦고 공의 병이 낫기를 바랐으나 차도가 없이 갑인년(甲寅年, 1494년 성종 25년) 2월 계유일(癸酉日)에 세상을 마치니 향년 61세였다. 바야흐로 공이 병들어 누웠을 적에 특히 어의(御醫)를 보내어 신묘한 약을 지어 치료하게 하고 어주(御廚)의 좋은 반찬을 내리어 끊이지 않았으며, 좌승지(左承旨) 이종호(李宗灝)에게 명하여 병을 묻게 하고 또 내관(內官) 안중경(安仲敬)을 보내어 후사(後事)를 물었는데, 공이 이미 병세가 위급하여 마침내 눈을 감고 입속말로,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종말을 삼가시기를 처음과 같이 하소서.” 하였다. 부음이 알려지자 임금이 매우 슬퍼하여 사흘 동안 조회를 폐지하고 부의(賻儀)를 하사함에 등급을 더하였다. 사옹원 제조(司甕院提調)가 육식(肉食)을 올릴 것을 청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대신의 죽음에 어느 누구인들 슬프지 않겠는가마는 허 정승 같은 이는 목숨을 받쳐 나라를 섬기고 불모지의 땅 깊숙이 들어가서 바람과 이슬을 무릅쓰다가 건강을 해쳤으니, 이것이 나로서는 더욱 슬프다. 차마 육식을 하겠는가?” 하였다. 공이 죽은 뒤에 조정이 텅빈 것 같고 사림(士林)이 서로 조문을 와서 목놓아 우는 자도 있었다.
공은 이조 정랑(吏曹正郞) 한서봉(韓瑞鳳)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 1녀를 두었으니, 장남 허확(許確)은 의금부 경력(義禁府經歷)이고, 차남 허광(許礦)과 3남 허추(許硾)는 모두 벼슬하지 않았다. 딸은 내섬시 봉사(內贍寺奉事) 신영화(申永和)에게 시집갔다. 내외손이 16명인데, 모두 어리다. 측실(側室)에서 3형제가 났는데, 장남 허상(許磉)은 겸사복(兼司僕)이고, 다음은 허염(許磏)이고, 다음은 아무이다. 이해 9월 아무 날 장단(長湍) 아무 마을에 안장하였다.
공은 얼굴이 크고 이마가 넓으며 수염이 아름답고 신장이 11척(尺) 2촌(寸)으로, 풍채가 천만 사람 위에 뛰어나서 바라보면 태산(泰山)과 교악(喬嶽)처럼 의젓하고 대하여 보면 따뜻하기가 상풍(祥風) 서일(瑞日)과 같아 성내지 않아도 사람이 저절로 두려워하고 말하지 않아도 사람이 저절로 승복하였다. 타고난 성품이 아주 고상한 데다 심오한 학문과 탁월한 식견을 더하여 일을 만나고 사물을 접하면 신기로운 계책과 묵묵한 판단이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하였으며, 기상이 옹용(雍容)하고 중후(重厚)하여 비록 창졸한 상황을 당하더라도 서두르는 말과 당황하는 기색을 보인 적이 없었다. 평생에 충직(忠直)으로 자인하는 데가 있어서 인주(人主)가 기뻐하고 성내는 것으로써 천취(遷就)나 향배(向背)를 삼지 아니하였으며, 국가의 대사를 의논할 때면 간담(肝膽)을 피력하여 말하되, 시행되지 않을 경우에는 연이어 눈물을 흘리었으니, 이야말로 도(道)로써 임금을 섬기는 사람이라 이를 수 있다.
공은 온갖 행실이 구비하였지만 효도와 우애는 더욱 남달랐다. 큰 도량이 다 포함해서 크거나 작거나 수용하지 않는 것이 없었으나, 사람의 간사함을 논하는 데는 숨김없이 바로 말하였으니, 이로써 세상의 정인(正人) 군자(君子)들이 더욱 쏠리었다. 조년(早年)에 벼슬하여 관력(官歷)이 혁혁하였으나, 치산(治産)에는 힘쓰지 않아서 청빈한 살림살이는 마치 쓸쓸한 농가와 같았다. 사는 집이 누추하여 사람이 견디기 어려운데도 공은 태연하게 처하였으며, 권력의 요직에 있으면서도 사사로운 청탁을 받지 않아서 대문 앞이 늘 적적하였다. 언젠가 말하기를, “부귀는 하늘에 달려 있는 것인데, 어찌 억지로 구할 수 있겠는가? 부질없이 분수 아닌 것을 바라다가는 마침내 해만 될 뿐이다.” 하였다. 자제들을 위하여 벼슬을 구한 적이 없어서 공이 죽을 때까지도 자제들이 오히려 보통 선비로 남아 있었다. 장수가 되어서는 대체(大體)만을 견지하는 데 힘쓰고 천근(淺近)한 공로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군졸들을 사랑하여 기쁨과 고생을 같이 나누고 죄가 있으면 친분 때문에 용서하는 일이 없으므로, 가는 곳마다 성공할 수 있었다.
서적을 널리 열람하여 삼관(三館)의 사고(四庫)에 소장된 책을 모두 섭렵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잡예(雜藝)에도 방통(旁通)하여 천문(天文)ㆍ지리(地理)ㆍ의약(醫藥)ㆍ역산(曆算)에까지도 그 묘리(妙理)를 정밀히 연구하였다. 특히 성리학(性理學)에 조예가 깊어서 염낙관민(濂洛關閩) 제자(諸子)의 은미한 말과 심오한 뜻을 마음속으로 꿰뚫어서 독보적으로 초연히 뛰어났으며, 몸소 수사(洙泗)의 연원을 밑바닥까지 밝히어 소견이 이미 고명하여서 그것을 발휘하여 사업에 응용함에 광명하고 정대한 것이 모두 후세의 법이 될 만하였다. 시(詩)를 지으면 청아하고 웅장하여 기운이 있고 문(文) 또한 웅건하였으며, 또 활쏘기와 말달리기에도 능하였으나 공에게 있어서는 여사(餘事)일 뿐이었다.
공은 자품이 문무를 겸비한 데다 인망이 조야(朝野)에 높아서 자기 한 몸에 국가의 경중이 매인 적이 30여 년이었으니, 개국한 백년 이래 필적할 만한 사람이 드물었다. 옛사람에게 비교한다면 아마 당(唐)나라의 배도(裵度)와 송(宋)나라의 한기(韓琦)ㆍ장준(張浚)이 유일 것이다. 하늘을 떠받친 기둥[天柱]이 기울어졌으니, 후생이 어디에 의지하겠는가? 공의 성대한 덕과 대단한 업적은 금궤(金櫃)와 석실(石室)에 소장되어 있어 오래도록 빛나고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에 들은 바를 적어서 그 경개(梗槪)를 위와 같이 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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