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통제사 민공 묘갈명(統制使閔公墓碣銘)
[생졸년] 1671년(현종 12)~1729년(영조 5) / 향년 58세
공은 휘가 제장(濟章), 자가 회백(晦伯)이며 여흥(驪興) 사람이다. 선조 중에 문경공(文景公) 영모(令謨), 문인공(文仁公) 지(漬)가 고려 때 현달하였다. 증조 여관(汝寬)은 집의에 추증되었고, 조부 담령(耼齡)은 승지에 추증되었으며, 부친 후경(後慶)은 영장을 지내고 찬성에 추증되었다. 대대로 광주(光州)에 살았다. 모친은 함양 박씨(咸陽朴氏)이다.
공은 키가 아홉 자이며 힘은 다섯 섬 활을 당길 정도였다. 숙종 을유년(乙酉年,1705, 숙종31) 무과에 급제하였으나 창방(唱榜)하기 전에 상을 당하고, 상을 마치자 선전관에 임명되었다. 경인년(庚寅年,1710), 성상(聖上,임금) 이 춘당대(春塘臺)에서 무예를 시험하였는데, 공이 화살 세 발을 쏘아 모두 맞혀 특별히 훈련원 주부에 조용(調用)되고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로 옮겼다.
이듬해 통신사(通信使)를 따라 일본에 갔는데, 대마도(對馬島)에 정박하자마자 갑자기 태풍이 불어 짐을 실은 배가 뒤집어지려 하였다. 배에 탄 사람들이 울부짖으며 살려달라고 하였다. 왜인이 배 일곱 척을 몰고 와서 구해주려 하였는데, 파도가 덮치는 바람에 모두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공이 몸을 던져 바닷속으로 들어가 손으로 그 배를 끌었다. 해안에 다다르자 큰 소리로 외치며 끌어올리니, 배가 거의 선미까지 흙을 가르고 올라왔다. 이를 본 오랑캐들이 모두 몹시 놀라며 장군이라 불렀다. 일이 알려지자 성상이 몹시 기이하게 여기며 별군직에 소속시키라고 명하였다. 조정에 돌아오자 자주 불러보고 그 당시의 일을 묻고는 무릎을 치며 “장부의 일이로다.”라고 감탄하였다. 마침내 가자(加資)하고 순서에 구애받지 말고 발탁하게 하였다.
금군장(禁軍將)을 거쳐 무산 부사(茂山府使)가 되었는데, 치적과 행실이 제일이라는 이유로 가선대부[嘉善大夫,조선시대 종2품의 하계(下階) 문관의 품계)에 올랐다. 임기가 차자 다시 금군장이 되었다. 소강 방어사(所江防禦使)로 나가서는 무기를 대거 정비하여 전함을 일신하였으나 사소한 잘못으로 형리에게 회부되었다.
성상께서 그가 병들었다는 말을 듣고 약물을 하사하였다. 얼마 후 대구 영장(大丘營將)에 임명되고 전라 좌수사(全羅左水使)로 옮겼으며 체직되어 내승(內乘)이 되었다. 미처 돌아오기 전에 제주 목사(濟州牧使)에 임명되었다. 숙종의 부고가 전해지자 공은 기절할 것처럼 통곡하며 장사 지낼 때까지 소식하였다.
항상 눈물을 흘리며,
“망극한 은혜를 받았는데 어떻게 보답하겠는가?”
하였다.
임인년(壬寅年,1722, 경종 2), 충청 병사(忠淸兵使)가 되었다. 갑자기 큰 홍수가 나서 고을 사람들이 모두 달아나 피했다. 얼마 후 홍수가 더욱 심해지자 관리들이 달아나 산으로 올라갔는데, 공은 홀로 의연히 말하기를,
“내가 한 발짝이라도 움직이면 온 성안의 백성이 모두 물고기 신세가 될 것이다.”
하고, 초루(譙樓)에 올라가 큰 밧줄과 판자로 거대한 뗏목을 엮고 화살에 줄을 달아 쏘았다.
지붕에 올라간 자는 줄을 잡고, 나무에 올라간 자는 뗏목에 태워 죽지 않을 수 있었다. 충청 사람들이 지금도 그 덕을 칭송한다.
임기가 차자 부총관(副摠管,오위도총부에 딸린 정이품 벼슬)에 임명되고, 다시 외직으로 나가 전라 병사(全羅兵使)가 되었다.
을사년(乙巳年,1725, 영조 1), 통제사에 임명되었는데 저지하는 자가 있기에 대신이 아뢰어 예전 관직에 그대로 임명되었다. 이듬해 체직되어 통어사가 되었는데 치적이 소강에 있을 때와 한결같았다. 북병사(北兵使), 회령 부사(會寧府使)에 임명된 적이 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무신년(戊申年,1728), 역적의 변란이 일어나 경기 수령을 각별히 골랐는데, 공은 안성 군수(安城郡守)가 되었다. 공은 당시 병이 있었으나 그날로 혼자 부임하였다. 당시 관찰사와 수령 중에 한 사람도 적을 토벌하는 자가 없었는데, 공은 도착하자마자 군사를 일으키고 장계를 올려 아뢰니, 성상이 그 충성에 감탄하였다.
공이 또 사람을 모집하여 적진에 들어가 그 실정을 염탐하였다. 그 사람이 돌아와 적이 두 갈래로 나뉘어 하나는 죽산(竹山)으로 향하고 하나는 안성(安城)으로 향하는데 오늘 도착할 것이라 하였다. 도순무사 오명항(吳命恒,1673~1728)의 군대는 한창 직산(稷山)을 향하고 있었다.
공이 말을 달려 대군을 뒤쫓아 직산을 버리고 안성으로 가라고 청하였으나 오명항은 그렇게 하려 하지 않았다. 공이 하늘을 가리키며 맹세하고 또 서제(庶弟) 제만(濟萬)을 보내 힘껏 간쟁하자 비로소 길을 바꾸었다. 적이 안성에 왔다가 갑자기 대군을 만나자 모두 놀라 흩어졌다.
또 죽산에서 적을 만나 모두 평정하니, 논자들은 공의 공로가 으뜸이라 하였다. 얼마 후 황해 병사(黃海兵使)에 임명되었다. 공이 탄식하기를,
“난리를 일으킨 역적은 평정되었으나 남은 근심이 아직도 크니, 내게는 죽음이 있을 뿐이다.”
하고, 병든 몸을 수레에 싣고 감영으로 갔다가 기유년(己酉年,1729) 6월 7일 세상을 떠나니 향년 59세였다.
성상이 애도하여 상을 치르도록 넉넉히 돌보아주니, 9월에 영광(靈光,現 전라남도 영광군) 아무 마을의 해향(亥向) 언덕에 반장(返葬)하였다. 공은 부모를 잘 섬겼고, 상을 당해서는 시묘살이하며 애도를 다하였다. 또 형제와 우애하여 과부가 된 형수를 모시고 고아가 된 조카를 돌보며 곡진히 은혜를 베풀었다. 뜻이 강개하여 제 몸을 위한 계책을 세우지 않았다.
충청 병사를 지낼 적에 소인들이 한창 권력을 차지하였는데, 공의 생각을 알아보고자 지목하며,
“그대가 때를 만나는 것이 어느 때이겠는가?”
하니, 공이 말하기를,
“만약 급한 일이 생기면 손에 긴 창과 큰 칼을 들고 죽어서 나라에 보답할 것이니, 이것이 그 때이다.”
하였다.
그 사람이 무안해하며,
“장한 말이로다.”
하였다.
공이 평소 품은 뜻이 대개 이와 같았다.
공은 네 번 혼인하였으니 전주 최씨(全州崔氏), 남양 홍씨(南陽洪氏), 당진 한씨(唐津韓氏), 덕수 이씨(德水李氏)이다. 세 부인은 자녀를 두지 못하고 최씨만 딸 셋을 두었으니, 윤유서(尹裕緖,海南尹氏), 이중협(李重協,1681~?/慶州李氏), 유우(柳遇)가 사위이다. 종인(宗人) 진악(鎭岳)의 아들 태신(泰臣)을 후사로 삼았는데 태신은 아들 하나를 두었다. 명은 다음과 같다.
숙종 말년에 / 明陵季世
북소리 듣고 장수를 생각했네 / 聽鼙思將
공은 초야에서 일어나 / 公奮草萊
백 명을 당해낼 수 있었네 / 百夫之防
배를 끌어 해안에 올리니 / 盪舟登岸
오랑캐가 모두 놀랐네 / 一驚蠻人
왕은 감탄하며 / 王曰嘻嘻
내게 범 같은 신하 있다 했네 / 予有虎臣
공은 절하고 머리 조아리며 / 公拜稽首
신이 감히 죽지 않겠습니까 / 臣敢不死
자기 음식 준 은혜 깊어 / 恩深推食
따라죽지 못해 애통하였네 / 慟結褥蟻
역적이 창궐하자 / 逆竪猖獗
고을들이 줄지어 무너졌네 / 列郡風靡
공은 당시 명을 받고 / 公時受命
피눈물 흘리며 장사들에게 맹세했네 / 血泣誓士
경기와 호서 사이에서 / 介于畿湖
은연중에 하나의 나라 같았네 / 隱若一敵
마음속으로 묵묵히 생각하니 / 心籌默運
오랑캐가 내 눈앞에 있네 / 虜在吾目
가만히 대군을 재촉하여 / 坐速大軍
한번 북을 쳐서 평정했네 / 一鼓而平
재상과 장수들이 / 相乎將乎
공신각에 즐비한데 / 麟閣崢嶸
그 공적 살펴보면 / 夷考厥功
그대와 견줄 사람 없네 / 莫與汝京
《시경》에 〈토저〉를 노래했으니 / 詩歌兔罝
반드시 문왕에 근본을 두었네 / 必本文王
네 공적이 아니라 / 匪汝之績
선왕이 현명해서라네 / 先后惟明
먼 훗날 사람들아 / 有來千億
이 명을 보아라 / 視玆銘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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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脚註]
[주01] 통제사 민공 묘갈 :
이 글은 민제장(閔濟章)의 묘갈명이다. 민제장의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회백(晦伯)이다. 1671년(현종12) 태어나 1729년(영조
5) 6월 9일 세상을 떠났다.
[주02] 북소리 …… 생각했네 :
《예기》〈악기(樂記)〉의 “군자는 북소리를 들으면 장수의 신하를 생각한다.[君子聽鼓鼙之聲, 則思將帥之臣.]”라는 말을 인용한
것이다.
[주03] 백 …… 있었네 :
《시경》〈황조(黃鳥)〉의 “이 중항이여, 백 사람을 당해낼 만하다.[維此仲行, 百夫之防.]”라는 말을 인용한 것이다. 중항은 진 목
공(秦穆公)의 신하 자거중항(子車仲行)이다.
[주04] 은연중에 …… 같았네 :
후한(後漢) 개국 공신 오한(吳漢)이 강한 적과 대등하게 맞서자 광무제(光武帝)가 “오한은 은연중에 하나의 나라 같다.[吳公隱若
一敵國矣]”라고 하였다.《後漢書 卷18 吳漢列傳》
[주05] 오랑캐가 …… 있네 :
적의 형세를 파악했다는 말이다. 광무제(光武帝)가 외효(隗囂)를 정벌할 때 마원(馬援)에게 설명을 듣고는 “오랑캐가 내 눈 안에
있다.[虜在吾目中矣]”라고 하였다.《後漢書 卷24 馬援列傳》
[주06] 시경에 …… 두었네 :
《시경》〈토저〉는 문왕의 교화로 인해 토끼 잡는 그물을 치는 야인조차 재주가 쓸 만했다는 내용이다.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최예심 장유승 권진옥 이승용 (공역) |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