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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26 - 신하에게 뺨을 맞고도 포상한 5대 2번째 왕조 후당 황제 이존욱!
돌궐계 사타족 이존욱은 백전백승의 뛰어난 무장으로 후량을 멸하고 오대 십국의 두 번째
왕조인 후당을 세웠는데.... 어느날 경신마 라는 신하로 부터 갑자기 "뺨을 얻어"
맞고는.... 그 연유를 물은후 납득이 되자 신하를 벌하기는 커녕 오히려 포상을 내렸습니다.
주전충이 당나라를 멸망시키고 후량을 세우니 5대 10국의 시작으로 중원의 오대 왕조들을 단명했으니
후량(後梁, 907년 ~ 923년), 후당(後唐, 923년 ~ 936년), 후진(後晉, 936년 ~ 946년), 후한
(後漢, 946년 ~ 950년), 후주(後周, 951년 ~ 960년)로 햇수로는 5년에서 긴 나라도 17년에 불과합니다.
나무는 가을이 되어 잎이 떨어진 뒤라야
꽃피던 가지와 무성하던 잎이다 헛된 영화였음을 알고
사람은 죽어서 관뚜껑을 닫기에 이르러서야
자손과 재화가 쓸 데 없음을 안다
樹到了秋天落葉了 花枝茂盛嘅葉子係虛空嘅電影 人死咗到了關上棺材蓋 我知道子孫和貨物無處可用
"채근담" 에 나오는 구절이니..... 오대십국의 제왕들은 이런 세상의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자기들이 누리는 영화가 백년, 천년은 갈줄 알고 오만방자하고
자존망대하며 허세를 부린 때문에... 5개 왕조들이 모두 단명한 것이라 여겨집니다!
2번째 왕조 후당(後唐)
오대십국 시대에 중국 화북지방에 2번째로 존재했던 나라로 당나라를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동일한
국호인 당으로 지었는데..... 앞서의 당나라와 구별하기 위해 보통 후당(後唐), 또는 북당(北唐),
호당(胡唐), 진당(晉唐), 사타당(沙陀唐) 이라고도 부르니 이극용의 아들 이존욱이 세운 나라 입니다.
이극용(李克用) 은 설연타 지도자 이국창(李國昌) 의 아들로 당나라 말기 돌궐계 사타족
(沙陀族) 출신 최대 군벌이자 군사 지도자이니..... 갈가마귀군(鴉軍) 이라고 불리는
정예병을 이끌고 "황소의 난" 을 평정하는 최대의 공적을 세워 당나라 조정으로 부터
진왕(晉王)에 봉해졌으며 동료이자 라이벌인 주전충과 격렬한 권력 쟁탈전을 벌였습니다.
이극용은 태어날 때부터 한쪽 눈이 작아서 그 때문에 주변에서 그를 ‘독안룡(獨眼龍)’ 이라고
불리게 되었는데 작호(綽號)는 아아(鴉兒)이고 군대에 있을 때 불리던 명칭은 비호자
(飛虎子)였으니.... 어릴 적부터 날쌔고 용맹했으며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해 15살의
나이에 전쟁에 참가했는데 대동(大同)방어사 단문초(段文楚)를 살해했고, 하동절도사
강전규(康傳圭) 를 죽이고는 태원을 점령했으나 그후 당나라군에게 패해 북으로 도망칩니다.
그런데 일본에도 ‘독안룡(獨眼龍)’이라 불리는 무장이 있으니 사케인 正宗(마사무네)이라는 이름의
출처로 잘못 알려진 다테 마사무네(伊達 政宗, 1567년 ~ 1636) 이니, 그는 센고쿠 시대 데와와
무쓰의 센고쿠 다이묘이며 17대 다테가의 당주이자 에도 시대 무쓰 센다이 번의 초대 번주 입니다.
휘(諱) 인 '마사무네(政宗)' 는 다테가 중흥의 선조라고 알려진 무로마치 시대 초기의 제9대 당주
다이센다이부(大膳大夫) 마사무네와 같기 때문에 구별하기 위해 도지로 마사무네라 부르기도
하는데, 관직도 선대와 달리 사쿄다이부(左京大夫) 였으며 그는 20년만 일찍 태어났더라면
도요토미 히데요시나 도쿠가와 이에야스 대신에 일본을 통일할 수도 있었던 인물로 여겨집니다.
세살 때 천연두로 오른쪽 눈을 잃어 독안룡(獨眼龍)이란 별명을 얻었으며, '도호쿠왕'(東北王) 또는
'오슈의 용' 이라 불렸는데, 다테 마사무네는 센다이시를 건설한후 태평양을 넘어 "에스파냐
와의 통상" 을 꾀했으니..... 1613년 센다이 영내를 방문한 에스파냐 국왕 펠리페 3세
의 사절 세바스티안의 협력을 받아서는 서양 갤리온선인 "산 주앙 바우티스타호" 를 건조합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승인을 얻은 다테 마사무네는 프란시스코회 선교사 루이스 소테로를 사절로
명해 가신 하세쿠라 쓰네나 등 180명이 탄 배는 1613년 태평양을 건너 멕시코 아카풀코에
상륙한후 내륙을 걸어서 베라크루즈에 도착해 이번에는 스페인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넜습니다.
다테 마사무네의 실질적인 사절인 하세쿠라 쓰네나가는 로마 교황도 알현했는데, 17세기에 일본인이
유럽까지 가서 로마 교황을 알현한 사실은 일본의 외교사에서도 특필되고 있는 실적으로 7년후
귀국하니 그 사이에 "천주교 금지령" 이 내린지라 그의 이름은 과자 하세쿠라 야키 로만 남았습니다.
지금도 스페인 세비야 근교 코리아 델 리오(Coria del Rio) 에는 그때 하세쿠라를 따라갔다가 일본
으로 돌아오지 않고 머무른 센다이 번사의 후예 800여명이 살고 있으며 그들은 “일본”을 뜻하는
“자폰” 을 성씨로 삼고있는데..... 다테 마사무네는 1636년에 죽으니 함께 죽어 무덤에 묻힌
"순사자는 가신 15명에 배신 5명" 이었으니, 이후 일본은 쇼군의 지시로 순장(殉葬)을 금지합니다.
후당은 사타족 출신으로 이극용을 계승한 아들인 장종 이존욱이 뤄양(낙양. 洛陽) 에 도읍하여
세웠으니, 그는 부친 처럼 군사적 재능이 출중하여 전쟁에서는 항시 승리해 후량을
멸하고 화북을 차지하였으나.... 지나치게 높은 세수와 폭정으로 민심을 잃어 친위 부대의
쿠데타로 인해 비참하게 시해당하고 이극용의 양자인 명종 이사원(李嗣源)이 제위를 이었습니다.
이극용의 아들 이존욱은 돌궐족 분파인 사타족 출신으로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보이며 천하
의 반을 평정하고 황제의 자리까지 올랐으며, “뺨을 때린 신하에게 오히려 상을 내린 일”
로 유명하지만 내치에서는 대체적으로 무능한 모습을 보이며 부하와 백성들의 신망
을 잃었으니 결국 자신의 근위병들이 일으킨 반란에 살해당하여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당 말기의 군벌인 이극용은 주전충과의 대립에서 패배해 실의에 빠져서 908년 사망하는데, 죽기
전에 아들 이존욱에게 화살 세개를 하나씩 손에 쥐어주면서 말했으니 이것은 유인공(劉仁恭)
부자의 몫이니 나를 배신했다. 두번째는 거란의 야율아보기의 몫이니 나와의 맹약을 무시했다.
세번째 화살을 넘겨주면서 "주량(주전충)" 은 나에게는 원수와도 같은 존재이니 셋을 다 죽여라!
908년 이극용이 죽었을 때 이존욱은 24세였으니 이극용의 세력은 본인의 카리스마와 능력 덕분이었던
만큼..... 큰 위기임과 동시에 후계자 이존욱에게는 몹시 부담이었으며 거기다 후량의 대군은 여전히
노주를 포위하고 있었고, 군부는 이존욱의 나이가 어린 탓에 모략을 꾸미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위협은 삼촌 이극녕(李克寧)이었으니 오랜 시간 형과 함께 싸우며 병권을 손에
쥐고 있었고, 본래 이민족의 풍습으로는 동생이 형의 자리를 대신하는게 이상한 것도 아니니
이에 이존욱은 두려워 하며 이극녕에게 자리를 넘겨주려고 하였지만 이극녕은 거절하며 말합니다.
너는 총사(冢嗣)다. 거기다 돌아가신 왕이자 형님의 명령을 누가 감히 어기겠느냐? 그후 이존욱
은 슬퍼하며 곡을 하면서 나오려고 하지 않자 이에 장승업이 이존욱을 부축하면서 억지로
밖으로 데리고 나왔으니... 최대의 효도는 기업을 실추시키지 않는 것인데 더 울어 무엇
한단 말입니까? 그리하여 이존욱은 지위를 계승하니 "하동 절도사겸 진왕(晋王)" 이었습니다.
908년 후량(後粱)의 군대는 협채라는 요새를 짓고 노주를 공격하고 있었으니 노주를 지키고 있던 장군
은 이사소였는데 근성있게 버티고 있었지만 양식이 떨어지고 있었고, 병사들은 불안해했으니 이에
이사소는 허장성세를 보이기위해 성벽 위에서 장수들과 연회를 즐기는 모습을 보이다 적군에게
화살을 맞았는데, 병사들이 동요하지 않기 위해서 조용히 처리하여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주전충은 계속해서 이사소에게 사람을 보내 항복을 권했지만 그때마다 이사소는 전령을 베는 것으로
화답했을 뿐이었는데 이때쯤 이극용이 죽었다는 사실을 들은 주전충은 마음을 놓고 있었으니....
그때 이존욱은 부하들을 소집해서 말했으니, 지금 노주를 잃어버리면 하동 울타리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주전충은 선왕이 죽었다고 안심하고 있으니 지금 공격하면 우리가 필히 승리할 것이다.
이 계획에 장승업도 동의를 하니 이존욱은 야율아보기와 이무정(李茂貞) 에게 호응하라고 권하였고, 본인은
주덕위(周德威)등을 대장으로 삼아 정예군을 이끌고 진군하니 군대가 출발한 것이 908년 4월 24일이었
는데, 5월의 초하루에 이존욱은 협채에 도착할 수 있었으니.... 그때는 아침이었고 안개가 자욱하게 끼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는데, 이존욱의 대군이 벼락같이 공격하자 자고 있던 후량의 병사들은 놀라 당황합니다.
이존욱은 명장 주덕위를 서쪽으로 보내고, 이극용의 양자이자 이존욱에겐 형이 되는 이사원
(李嗣源)을 동쪽으로 보내 각각 공격하게 하고는 크게 북을 치고 소리를 지르며 적을
공격하였는데, 무려 1만이나 되는 적이 제대로 싸움 한번 못해보고 죽어버렸으니 협채를
무너뜨린 장군 주덕위는 곧바로 힘겹게 버티고 있는 노주로 달려가 이사소에게 소리칩니다.
선왕은 돌아가셨고 지금의 왕께서 협채를 무너뜨렸소. 속히 문을 여시오! 이사소는 애시당초 이극용이
죽었다는 것도 믿지 않았기에 이 말을 듣지 않고 버텼으니 이 말도 안 되는 소리는 그대가 싸우다
포로가 되어, 이제 나를 기만하고자 함이 아닌가? 그리고 주덕위에게 화살을 쏘려고 하다가
주위 사람들이 만류하자 그만두고는 이사소는 일이 이렇게 되자 반신반의하며 주덕위에게 요구합니다.
왕께서 오셨다면, 지금 뵐 수도 있겠지? 주덕위는 도리가 없는지라 잠시후 왕위를 계승한 이존욱을
데려왔으니.... 이존욱은 그때 흰색 옷을 입고 있었는데 부친 이극용을 애도한다는 뜻이라
이사소는 그 모습을 보고 미친 듯이 울면서 기절하였고 다른 사람들도 통곡하면서 문을 열었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에 주전충은 몹시 놀라고 두려워서 탄식하였다고 하는데... 이극용은 죽었으나
이아자(이존욱의 아명) 같은 아들이 있으니 죽었다고 할 수가 없구나, 아들을
낳으려면 마땅히 이아자 같은 아들을 낳아야 하거늘, 우리 아이들은 개·돼지와 같을 뿐이니....
911년, 협채의 대승 이후로 후당(後唐) 군의 진군은 파죽지세로 많은 성과를 올렸고 하북성의
백향현을 공격하게 되었는데, 적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지만 이존욱은 여유 만만했으니....
저들은 시끄럽기만 하고 군율이 부족하다. 우리 군사들은 군율이 잡혀 있으니 승패는 정해졌다.
그리고 상황을 보다가, 후량군이 배가 고파서 밥 먹으러 돌아 가려고 할 때 주덕위
등이 "저들이 달아난다!" 고 외치며 전군을 동원해 공격하자.... 적은 그야말로
대패해 참수당한 병사만 2만이 넘었으니 이제는 확실히 대세가 바뀌게 된 것입니다.
일전에 이극용은 유언으로 하북의 유인공 부자를 처리해줄 것을 원했는데 유인공의 아들
유수광(劉守光)은 아버지를 가두고 스스로 절도사가 되어 형을 잡아다 죽였으며 온갖
해악과 악행을 멈추지 않았으니... 이런 인물들이 항상 그렇듯 욕심은 터무니없이 컸습니다.
911년 8월 13일, 유수광은 국호를 “대연(大燕)” 이라 칭했으며 연호를 응천이라고 바꾸고
수하들을 어사대부니, 좌상이니 하고 삼으니 연의 사람들은 놀라워하고 당황하였는데
이존욱은 이 말을 듣고 그렇게 웃긴 일이 없다는 듯 한참을 크게 웃고는 말했으니....
저들이 햇수로 점치는 것을 기다렸다가 내 마땅히 그 점이 얼마나 되는지 물어볼 것이다.
주(周)나라 무왕이 상(商)나라를 정복하고 나라의 운명이 몇년이나 갈지를 점친 것을 빗댄 말로, 얼마나
저 황제 노릇이 갈지 지켜보겠다는 뜻이었는데, 그러자 이존욱의 수하 장승업은 이를 듣자 아예
사신을 파견해 치하하자는 의견을 내었는데 적을 교만케 하자는 것이라 이존욱은 이를 받아 들입니다.
황제가 된 유수광은 2만의 군사를 이끌고 용성을 공격했으니 의무 절도사인 왕처직은 이존욱에
구원을 요청했고, 이존욱은 수하의 명장 주덕위에게 3만의 군사를 주어 왕처직을 도와주게
했는데 주덕위는 왕처직을 구원함은 물론 연나라 땅인 탁주를 포위해 항복시키는 공을 세웁니다.
그러자 겁을 먹은 연나라 황제 유수광은 영토 내의 모든 장정들을 소집해 얼굴에 글자를
새겨 병사로 삼는가 하면, 후량(後粱)에도 지원을 요청하였으니 이에 주전충은
스스로 50만의 대군이라 일컬으며 이존욱을 물리치기 위해 군대를 모두 동원하였습니다.
이때 후량은 국지전에서 계속해서 패배하고 있었고, 주전충은 극도로 민감해져서 사람을 마구 죽여
부하들은 공포에 떨었으며 주전충은 6군을 통솔하며 이존욱을 물리치려고 했는데..... 밤중에
땔나무를 하던 사람들이 공포에 질려 돌아와서 소리쳤으니 진왕(이존욱)이 온다! 대규모로 도착했다.
그 말을 들은 주전충은 모골이 송연해져 군영을 불태우고 밤중에 도망가다 길까지 잃게 되었고, 도중에
밭갈이하던 농부들이 괭이와 몽둥이를 들고 쫒아오자 도망가는 통에 군수 물자와 병기를 전부
잃어버리기까지 하였는데, 알고 보니 이존욱의 부대는 본대가 아닌 선봉대에 불과했는데 그걸
보고 겁에 질려 도망쳤던 것이고 이 사실을 깨달은 주전충은 너무나 부끄러워 건강이 악화되고 맙니다.
한편 그때 후당의 이존욱은 다른 방면으로는 주덕위와 이사원을 파견해 연나라 유수광을 괴롭히고
있었으니.... 믿고 있던 후량이 대패해 달아나자 유수광은 최후라고 생각해 거란을 끌어들이려
한연휘를 파견하지만, 거란의 태조인 야율아보기는 한연휘를 오히려 자기 부하로 만들어 버립니다.
유수광은 모든 희망을 잃고 사신을 주덕위에게 파견하여 화친을 구걸했는데, 사신의 목소리가 매우
애절했다고 하지만 주덕위는 냉랭하게 말하였으니 대연 황제(유수광)는 어찌 암컷같이 납작
엎드리는가? 나는 명령을 받아서 죄인을 토벌하려 왔을 뿐이고 동맹을 맺는 일은 내 소관이 아니다.
소위 대연(大燕)의 황제 유수광은 정말 공포에 질려 몇번이나 사신을 파견해 애원
하였고 주덕위는 못이기는 척 이존욱에게 이 말을 전하였는데, 이존욱은 그 말을
듣고 스스로 유주로 떠났고 홀로 성 아래에 도착해 여유있게 유수광에게 말합니다.
"나는 본래 공과 더불어 당조(唐朝)를 부활시키고자 하였으나, 공은 저 주전충이 한 짓(황제를
참칭한 것)을 따라하였소. 장부의 성패란 본래 모름지기 향하는 대로 될 뿐이니 공은 어찌
하겠소이까?" "나는 도마 위에 올려진 생선일 뿐이오. 오직 왕께서 판단해 주시구려."
그러더니 유수광은 도망가버렸고 이존욱은 유주에 입성하여 갇혀있었던 유인공을 잡았습니다.
유수광은 멀리 도망치다가 발에 동상이 걸리고 길을 잃어 자신의 부인에게 밥을 구걸하게
하다가 잡혀서 이존욱의 앞으로 끌려오게 되었으니 이존욱은 연회를 즐기고 있던 중에
유수광을 보자 비웃었으니 어찌 주인께서 손님을 피하여 먼 곳에 갔던 것이오? 그후
애원하는 유수광을 단칼에 처형해 버렸고 이때 유수광 밑에있던 신하도 대세에 따라
이존욱 밑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가 바로 오대십국시대의 대표적인 재상인 풍도 입니다.
922년, 이존욱이 한참 동안 세력을 키우고 후량을 거의 멸망 직전으로 몰아
넣던 시기에, 거란족의 야율아보기는 대군을 이끌고 유주, 탁주(탁현),
정주를 공격했는데 야율아보기의 부인이었던 술률 황후는 이에 반대하였습니다
우리에겐 양과 말이 풍부한데 어찌 병사들을 피곤하게 하십니까. 또한 듣기로 진왕 이존욱은 군사
를 부리는데 가히 대적할 사람이 없다고 하는데, 만일 패배가 있다면 후회한들 어찌 되겠습니까?
하지만 야율아보기는 이 말을 듣지 않고 출병하였는데, 그 소식을 들은 이존욱의 장수들과
병사들은 안색이 변하였고 도망치는 사람까지 있었는데, 모든 장수들이 도망치길
청할 때 이사소가 나서서 말하였으니 강한 적이 앞에 있으니 우리는 전진은 할 수
있으되 후퇴는 할수 없고, 또한 가볍게 움직여 민심을 동요시키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이존욱도 용기를 얻고 용감히 싸워 승리하였고, 마침 시간이 지나자
폭설이 내려 말들이 죽자 야율아보기는 하늘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탄식하였으니....... 하늘이 아직 나로 하여금 여기에 이르게 하진 못하는구나!
하지만 이존욱도 거란의 야율아보기에 대해 감탄하게 되는데, 그들이 떠난 자리에 가자
볏짚을 깔고 앉은 모양이 반듯하고 하나의 어긋남이나 어지러움도 없어서 못내 탄식
하였으니..... 오랑캐가 법을 적용함이 마침내 이와 같은데, 중국에서는 미치지 못하는구나.
위박 번진은 하북 3진의 하나로써 당나라 조정에서도 제대로 제압하지 못했던 강력한 번진
세력이었으니 당나라 말기에 삽시간에 최강으로 떠오른 주전충이 건재할 시기에는
위박 번진도 돌아가는 눈치를 보며 조용히 있었지만, 주전충이 죽자 위박 번진
역시 다시금 강력해지기 시작했으며 자립하여 후량에 대항해 후당에 구원을 요청합니다.
후량 내부에서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자 이존욱은 기뻐했으니... 그는 즉시 위박 번진을
거두어들이기 위해 장군 이존심에게 군단을 이끌고 진군하게 했는데, 이 움직임에
후량 장수 유심은 놀라 황급히 병력을 주둔시키니 유심의 움직임을 본 이존욱은
아무래도 자신이 직접 나서야 일일 쉽게 해결 될 것이라고 여겨 현장으로 나갑니다.
이리하여 위박 번진의 곤수 장언은 5백여명의 은창효절군(銀槍效節軍) 과 함께 이존욱을
만나러 나갔으니 과거 양사후가 위박 번진을 장악하면서 여타 강력한 친위 부대
장수들을 죽였고, 이후 스스로 은창효절군이라는 또 다른 친위 부대를 만들었는데
이 은창효절군은 용사 수천명을 선발해 조직한 정예병이었으니 그런 호랑이 같은
용사들이 5백이나 함께 하니, 이존욱을 만나는 장언은 나름대로는 꽤 조심했던 것입니다.
이존욱과 은창효절군의 용사들을 거느린 장언은 영제(永濟)에서 만나게 되었으니, 그런데 장언을 본
이존욱은 무슨 말이 나오기도 전에, 너는 주군을 능멸하고 위협했다. 또한 백성들에게는 잔혹했다.
내가 이곳에 온 며칠 사이에 너를 원망하는 사람을 100명을 보았다. 나는 백성을 위할 뿐임으로,
네가 공로가 있다하나 지금 너를 죽여야겠다. 그렇게 말하고는 곧바로 장언의 목숨을 빼앗았습니다.
장언은 항변을 하거나, 혹은 도주하며 은창효절군의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려 항전하게 해보거나
하지도 못했고 그냥 이존욱을 보자마자 꾸지람을 한번 듣더니 그대로 살해당했으며 같이
온 여타 지휘관들 7명도 바로 살해당하니.... 은창효절군의 용사들은 아무리 용맹하다고
해도 명령을 내릴 사람이 없으니 무엇을 해야할지 당혹스러워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눈 하나 깜빡도 하지 않고 위박 번진의 주요 인물을 처리한 이존욱은 그런 5백여 명의 은창효절군에게
말하는데.... 죄는 이 8명에서 그쳤으니 나는 이들 외에는 아무에게도 죄를 묻지 않겠다. 나머지
에게는 물을 것이 없다. 모두 힘을 다하여 내 수호자가 되어라. 그리하여 하루가 지나고 다음 날,
나타난 이존욱은 어디 산책이라도 가는 양 가벼운 복장을 입고 느긋하게 그들 앞에 서 있었을 뿐입니다.
이 시점에 은창효절군의 5백명 병사들은 모두 무장을 한 상태였으니 딱히 대규모 병력을 거느리고
있지도 않고 무장을 하지도 않은 이존욱을 죽이는 것은 어린아이 손목 비틀기보다 쉬운 일이었
을 뿐이나 이존욱은 그런 점을 전혀 생각지도 않고 은창효절군을 아무렇지도 않게 대하였고,
이때에 이르러서야 은창효절군은 이존욱이 자신들을 죽이려는게 아니며 오히려 마음을
놓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관대함과 배포에 크게 감동하여 이존욱을 따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존욱은 지난 100여년이 넘게 당나라의 중심부에서 막강한 세력을 과시하고 당대에 이르러서도 후량의
황제들을 벌벌 떨게했던 위박 번진을 단신으로 하루만에 평정해버렸으며 이후 이 은창효절군은 진왕
이존욱의 친위 부대에 편입되어 장전은창군(帳前銀槍軍)이 되었고, 후량과의 전투에서 눈부신
무훈을 세우게 되며 특히 치열했던 918년 12월, 호류의 전투에서 이들이 보여준 무공은 놀라웠습니다.
왕언장은 철창의 명수로서 무용으로 따지면 당대에 누구도 비할 바 없었으며, 주전충이 아직
주온이었던 시절부터 용맹하게 싸워 보필해 온 충신으로 이존욱은 후량에게 번번이 승리
하여 모두들 두려워하였는데.... 왕언장만은 이존욱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니 하루는
이존욱이 왕언장의 부인과 자녀를 생포한후 투항을 권고하였으나 왕언장은 두번
듣지도 않고 사신의 목을 베어버렸으며 이 소식을 들은 이존욱은 왕언장을 존경하게 됩니다.
이때 이존욱은 계속된 승리로 자신감에 차있어, 자신의 이씨(李氏) 성은 할아버지가 공을 세워
국성을 받은 것이니 당나라의 이씨를 계승한다고 말하고는 당나라를 다시 세웠으니
이것이 후당(後唐)으로... 이 소식을 들은 후량의 황제 주우정은 당황하여 왕언장에게
나가서 싸우라 말했고 왕언장(王彦章)은 군사를 이끌고 나가 수천명을 물리치는 공을 세웁니다.
그러나 왕언장이 죽을 힘을 다해 승리하고 나라를 일으키려고했으나, 후량은 이미 망하게될 나라라 도리가
없었으니 왕언장은 조암과 장한걸이라는 소인들이 나라를 망치는 것을 알고 그들을 향해 불평하게
되었는데, 이 소리를 들은 조암은 왕언장을 미워하며 단응이라는 무장과 함께 왕언장을 해치려 하였으니
단응은 왕언장을 시기하고 있었기에 동조하여 황제 주우정에게 모함하였고 왕언장은 죄도 없이 파면됩니다.
바로 그해 10월, 후량은 형세가 몹시 위급해져 왕언장을 다시 등용해 단응과 함께 10만 군사
를 이끌게 하였지만 주력은 단응이 이끌었으니 적은 병력으로 뭘 해볼 수도 없어 왕언장
은 이존욱에게 사로잡히는 신세가 되었고, 이존욱은 왕언장을 놀려댔으니 "그대는 나를
어린아이 처럼 여긴다고 하는데 어찌 나에게 사로잡혔는가? 아직도 나를 그렇게 생각하는가?"
"대세가 이미 기울어 인력으로는 어찌할 수가 없으니 나로서도 할 말이 없다네." 이존욱은 왕언장을
흠모하므로 치료해주고 자신에게 귀순할 것을 권고했지만 왕언장은 듣지 않았으며 대신에 희대의
명대사를 남겼으니...... 표범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는 법이지! 나는
나라에 큰 은혜를 입었는데 어찌 아침에 양나라의 장수가 되었다가 저녁에 당나라의 장수가 되겠는가!
왕언장(王彦章)은 군졸로 시작해 전투마다 군공을 세워서 후량의 개국후에 봉해진 입지전적인
인물로 철창을 다루는 솜씨가 뛰어나 항상 선봉에 서서 활약했기에 왕철창(王鐵槍)이란
별명이 붙었으니 그를 모시는 사당 또한 철창묘라 부르는데.... 믿기 힘든 이야기지만
하루 해가 지기전에 후당의 장수 서른 여섯명을 혼자서 모조리 쓰러뜨린 적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격이 강직하고 곧은 탓에 후량의 황제인 주우정에게 미움을 받았으며 또한 그를 시기한 간신들
에게 모함을 당하였는데, 그러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후당의 공격으로 부터 조국인 후량을 지키고자
하였으나 내부가 썩을대로 썩은 후량은 오래 버티지 못했고 결국에는 나라가 멸망하는 비운을 겪습니다.
본래 군졸 출신이었기 때문에 왕평이나 석륵처럼 글을 읽을 줄 몰랐지만 주위 사람들에게 책을 읽도록
시키고 곁에서 이를 듣는 것을 즐겼다는데, 어느날 한 사람이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라는 글을 읽어주자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죽는 순간까지 이 말을
외울 정도로 좋아했다는데, 그 말처럼 후량 최고의 용장이자 충신으로서 그 이름을 후세에 남겼습니다.
왕언장이 결코 귀순하지 않을 것을 깨달은 이존욱은 어쩔 수 없이 왕언장을 처형하였으며 왕언장
의 혼백을 모신 가흥 철창묘는 김용의 무협소설 사조영웅전, 신조협려에서 중요한 사건들이
일어나는 무대로, 강남칠괴가 어린 시절에 어울려 놀았던 곳이며 왕언장도 무력으로 유명합니다.
민담, 소설 등에서는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이존효에 가려져서 덜 알려졌는데 수호지에서 동창부로
쳐들어간 노준의 군의 두령들을 돌팔매만으로 잇달아 쓰러뜨린 몰우전 장청을 보고 크게 놀란
송강이 장청을 왕언장에 비유하기도 하는데, 왕언장이 죽은후 주력을 이끌던 후량의 대장
단응은 5만의 군사와 함께 후당에 귀순했고 이에 후당은 개봉을 함락하고 후량을 멸망시켰습니다.
만약에 후량 황제 주우정이 왕언장을 의심하지 않고 단응 밑에 둘게 아니라 그에게 총대장
을 맡겼으면 후량이 패배하지는 않앗을 것이니.... 일본 센고쿠 시대의 무장 이소노
가즈마사가 떠오르는데, 1570년 6월 28일 오다 노부나가는 동맹인 도쿠가와군과
함께 2만 8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비와 호수 오다니성 小谷城(소곡성) 을 치러 나섭니다.
아사이씨는 아사쿠라씨와 연합해 18000여명의 군대가 결집하니 오다는 양동작전
을 펴서 支城(지성)인 요코야마성(橫山城) 을 포위공격해 아사이· 아사쿠라
연합군을 끌어내서는 아네가와강에서 접전 하니 아사쿠라씨와 도쿠가와가
맞붙고 오다군과 아사이씨가 격돌하니..... 처절한 아네가와 전투(姉川戰鬪) 입니다.
아사이군의 선봉 이소노 가즈마사는 오다군 선봉 사카이 마사히사 부대를 돌파해 파죽지세
로 기노시타(하시바) 히데요시와 시바타 가쓰이에 진을 격파하여 오다군 13단 진중 11단
까지 쳐부수는 맹공을 보였으나 이나바 잇테쓰 구원으로 위기를 벗어나는데, 2년후 오다
노부나가는 다시 오다니성을 공격하기 위해 사전 정지작업으로 나가하마 남쪽 사와산성
을 지키는 아사이가의 맹장인 이소노 가즈마사가 배반할 것이라는 거짓 정보 를 흘립니다.
이 미끼에 걸려든 아사이씨가 의심하자 헤어나기 힘들다고 생각한 이소노 가즈마사 는 그만 진짜로
오다군에게 항복 해 버립니다. 그러자 오다 노부나가는 쾌재를 부른후 1572년 7월 5만 대군
으로 출정해 아사이씨의 오다니 (小谷) 성을 포위하니 이소노 가즈마사가 없는 아사이군은 야전을
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수성에 전념하다가 결국 성이 함락되어 망하니 충신을 의심한 죄인가 합니다?
이존욱은 후량을 멸망시킨후 곽숭도를 파견하여 전촉까지도 멸망시키는데 이렇게 빛나는 무훈을 세웠지만
내치에는 너무나도 무능해서 막장가도를 달리며 답이 없는 행보를 이어나갔으니... 우선 자신의 모사
이자 내정에 일가견이 있던 장승업이 화병으로 죽어버린 게 치명타였는데, 본래 장승업은 이존욱이
황제가 되는 것에 반대하였지만 이존욱이 듣지 않자 마음이 답답해 앓아눕다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존욱 본인이 노는 것을 너무 좋아하는 것도 큰 문제가 되었으니 본래 부터
이존욱은 음률과 가무에 능한 풍류남아였으며 평소에 노래를 좋아해 100곡을
만들었는데,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자기가 할 일을 안 하는건 아니었으나 대업을 완수
하고 장승업이 죽고 나서는 자제력을 잃고 나태해지며 끝내 막장 일로를 걷게 됩니다.
이존욱은 연극을 무척 좋아했는데, 스스로 "이천하"(李天下) 라는 예명을 만들고
배우 노릇을 하는 추태를 보이기도 했으니.... 이때 같이 공연했던 영인들은
이존욱의 환심을 사 이간질을 함으로써 후당의 정사를 더 어지럽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 중에서도 개념이 있는 사람이 있었는데, 경신마라는 사람이 그러했으니...
이존욱이 춤을 추면서 연극 준비를 하다가 "이천하(李天下), 이천하!" 하고 자신의 예명을
사방에 소리친 적이 있었는데 그러자 경신마는 곧바로 달려가 이존욱의 뺨을 후려쳐 버렸습니다.
황제가 뺨을 얻어맞은, 고금 역사에 없을 일이 벌어지자 주변에선 모두 놀라 식은땀만 흘렸고
이존욱도 하도 어이가 없어 물었으니.... 어찌하여 천자의 뺨을 친단 말이냐? 그러자 경신마는
느긋하게 대답했는데 천하를 다스리는 사람(理天下)은 하나 뿐인데 어찌 이천하를 찾는단 말이냐?
가만히 생각해보던 이존욱은 오히려 껄껄 웃더니 경신마를 칭찬하였으며, 어느날 사냥을 떠났
을 때 이존욱과 수하들이 멧돼지를 잡으러 논밭을 짓밟자 마을의 현령이 이것을 제지
하였는데... 한참 노는데 기분이 언짢아진 이존욱은 현령을 해치려고 했지만 눈치를
본 경신마는 곧바로 튀어나오더니 현령의 뺨을 때리면서 엄숙하고도 웃기게 소리칩니다.
이놈아! 현령이란 놈이 천자가 사냥을 좋아한다는 것도 모른다는 말이냐? 어찌 알면서 백성들에게 경작
을 시켜 천자의 사냥을 방해되게 하였느나. 안다면 어째서 밭을 그냥 뒤집어서 천자의 말이
통쾌하게 달리도록 하지 않았느냐는 말이다. 곡식을 거두는 일 따위가 천자의 흥 보다 중요하단 것이냐?
이존욱은 이 말을 듣고서야 머리가 차가워지면서 생각이 제대로 돌아 현령을 풀어주었지만 면전
에서 이런 일갈을 당했음에도 자신만의 풍류를 멈추지 않았다는데... 이러한 유흥으로
정사를 다스리지 않은 것도 문제였지만 가장 큰 문제는 환관과 연극 배우를 총애해 환관을
부하 장수들과 관리들을 감시하는 감찰로 쓰게 한 것이 신하들의 엄청난 불만을 사게 됩니다.
덤으로 공겸이라는 자를 등용하여 세금을 거두게 한 건데, 이 인간이 저지른 세금 착취는
악랄함을 넘어서 그야말로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으니 땅을 걸어가도 세금을
내게 했으며 다리를 지나가도, 심지어 배를 타고 가는 것도 세금을 따로 내게 했습니다.
이런 세금 착취 중에서도 유명한 것이 '작서모세'(雀鼠耗稅). 직역하면 '참새와 쥐 때문에 소모되는
세금' 이란 뜻으로 당시 세금은 당연히 쌀과 같은 곡식으로 냈는데, 이 곡식을 운송하고 창고에
보관하다 보면.... 새나 쥐가 곡식을 훔쳐먹게 되므로 그 소모분을 미리 걷는다는 발상이었습니다.
보다못한 대신들이 이러다 백성들이 들고 일어선다고 간언했음에도 이존욱은 무시하며 '뭐 잘하고 있네?'
라고 여겼는데 결국 이존욱이 죽고 공겸은 명종 이사원의 명령으로 능지 처참형을 당했는데, 백성들이
찢겨나간 공겸의 살점에 오줌을 누기도 하고 씹어 내뱉어 발로 짓뭉길 정도로 엄청난 원망을 받았
으니 오죽하면 야사에서 공겸을 죽이니 3년은 풍년이 올 정도로 하늘도 좋아했다고 전했을 정도입니다.
더욱 이존욱을 막장화시켰던건 유 황후였으니 그녀 역시 막장으로 살다간 인물로 일생 동안 정말 염치라고는
하나도 없는 철면피였으니.... 어릴때 전란으로 원건풍이라는 자에게 유괴되어 욕을 당하며 고생하다가
미색만으로 황궁에 입궐했는데 처음에는 후비였지만 결국 이존욱의 다른 후비들을 제치고 황후가 되었습니다.
이존욱은 유 황후의 출신이 천하다는 소문을 듣고 끊임없이 놀려댔으며 이걸 확인하기 위해
유 황후의 아버지라고 자칭하는 유산인(劉山人)이라는 노인을 데리고 오게 했으니....
원건풍은 이때 왔는데 원건풍은 분명 이 노인이 유 황후의 아버지가 맞다고 증언했습니다.
그러나 유 황후는 자신의 신분이 드러날까봐 친아버지가 분명한 그 노인에게 "넌 누구야? 우리
아버지는 전란때 돌아가셨는데 헛소리하지 말고 꺼져" 라는 희대의 거짓말을 하며 욕설을 마구
퍼붓고 곤장을 쳐서 내쫒게 했는데 유산인은 한숨을 쉬며 떠났으며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이 모습을 본 이존욱은 황후의 침소로 갈 때마다 일부러 낡은 옷을 입고 흉내내면서 그
패륜 행각을 대놓고 조롱하기도 했으니 아비다. 아비가 딸을 보러 왔다! 그러나
아무리 당시 상황이 난세라 해도 패륜아를 용납할리는 만무했으니 유 황후는 천하
의 인간 말종으로 낙인찍혔고 이는 남편 이존욱의 이미지까지 덩달아 실추시켰습니다.
후당에서 인플레가 일어나 월급을 못 받은 군인들의 쿠데타가 일어나자 유 황후는 "나한테는 화장대
하나, 은대야 세 개밖에 없다." 라며 마지 못해 그것들을 위문품이라고 수만명이나 되는 병사들
에게 나눠주니 병사들은 장난 치냐고 거세게 반발했고 기세에 겁을 먹은 유황후는 그제서야
많은 재물을 풀었지만 병사들은 우리 처자는 이미 굶어죽었는데 이게 뭐가 소용이 있느냐며 분노합니다.
병사들은 장종의 양자 이사원을 옹립하는 동시에 자신들의 한때 주군이었던 이존욱에게로 칼끝을
돌렸으니 이존욱은 쿠데타를 스스로 막던 도중 날아온 유시(流矢)에 맞아 중상을 입은채로
궁궐로 후퇴했는데..... 치명상을 입은 이존욱은 우유가 먹고 싶다고 유 황후를 찾았으나
그녀는 그를 환관에게 맡기고 자신은 재물을 싸서 달아난 뒤 였고 이존욱은 세상을 떠납니다.
이존욱이 맞서 싸운 상대 중에 야율아보기는 거란 왕조를 개창한 걸출한 인물이었고,
주전충을 상대로는 무참히쳐부수었는데 주전충이 황소의 난을 진압한 인물에다
이극용을 상대로는 그렇게 밀리지 않았다는 곳을 생각하면 군사적인 능력은
실로 굉장한 편이었던 셈이니 당대에는 "대적할 수 없는 인물" 로 평가 받았습니다.
3면이 적들로 둘러싸인 위태로운 정세에서 이존욱은 유연을 멸하고 거란을 격퇴시켰
으며 당나라가 200년 가까이나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던 하북 3진의 성덕(조나라),
위박(위나라) 번진을 폐하는 한편 후량마저 멸망시킴으로써 일개 지방
왕조를 중원의 패권을 쥔 오대의 정통 황조 중 하나로 승격시키는데 성공하였습니다.
또 이무정의 기나라를 멸하고 고계흥의 형남국을 종속시켰으며 사천의 전촉을 멸함으로써 최악의
형세부터 시작하여 연전연승해 천하의 절반을 차지하는 위업을 달성하였으니 이 판도는
후주(後周)의 명군 세종이 통일전쟁을 다시 시작하기 이전까지 오대 십국 중 최대의 판도였습니다.
이존욱의 뛰어난 군사적 능력이 아니었다면 당말로 부터 이어온 오대 십국 초반의 화북의 대할거는 좀
더 시간을 끌었을 것이고... 거란이 그틈을 타 요나라 태조가 태종보다 20년은 더 빨리 중원을 남침
하였을 것이니, 그야말로 이존욱은 오대 십국시대 초반부의 주인공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말 위에서 천하를 얻을수는 있지만 다스릴수는 없습니다 可以馬上得天下 不可以馬上治天下)”
유방이 한나라를 세우고도 원래가 건달 출신인지라 성품이 거칠어 말 타고 적을
공격하듯 나라를 다스리자 육가(陸賈) 라는 신하가 목숨을 걸고 간언했다는데
이 말에 꼭 들어맞는 사람이 이존욱이니..... 그는 전투에는 능해도 통치에는 무능했습니다.
내정에서는 무능을 넘어 막장 가도를 달리며 통일사업이나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화시키는
데는 실패하면서 이존욱 자신은 평생의 원수였던 주전충 처럼 비참한 최후를 맞고야
말았으니 내치를 잘만 꾸려나갔더라면 오대 십국을 끝낸 통일 군주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데...... 때문에 그는 “난세의 명군이자 치세의 암군” 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습니다.
이존욱의 사후 사천에서 후촉이 독립해 버렸으나 그럼에도 후당은 2대 황제인 명종 이사원
이 내정을 바로 잡은 덕분에 다시 중흥을 이룩하였으며...... 해서 이사원이 통치한
7년은 당나라의 계승을 표방하며 오대 왕조 중에서도 괜찮은 시대였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그런데 장예모 감독이 주윤발, 공리, 주걸륜을 주연으로 만든 영화인 “황후화” 가 이 명종
이사원을 암시하니, 10세기 당나라 멸망후 여러 군벌들이 스스로를 황제로 자처하며
송이 건국될 때까지 중국이 여러 국가로 나뉘어있던 오대십국시대 후당이 가장 유사합니다.
실제 후당 명종 이사원이 병에 걸렸을때 이사원의 차남 이종영(李從榮)은 부황이 이미 죽은 것으로 착각
하고 제위를 욕심내어 난을 일으켜 궁으로 쳐들어 왔다가 진압되고 처형되며.... 영화 시작 때 '오대
십국시대 928년' 이란 자막이 등장하고 둘째 아들의 반란이라는 부분이 들어가는 것을 보면 그렇습니다.
원제는 만성진대황금갑(满城尽带黄金甲)이니 '성 안의 모두가 황금 갑옷을 둘렀네' 라는 뜻으로
황소의 난으로 유명한 당나라 말기의 반란 지도자 황소가 지은 시구에서 따왔다는데,
영화의 원작은 조우(曹禺)의 희곡인 “뇌우(雷雨)”를 각색한 것이니 민국시절 콩가루
재벌가의 왕자의 난을 다룬 작품이었으나 장예모는 이를 사극으로 번안하여 영화화한 것입니다.
이사원은 후량을 멸망시킬 당시에 황제는 아니었지만 후량과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역사적 배경을 생각하면 부부간에 불화가 있는 것이 당연하고 또한 결말은
부자간 쿠데타로 왕조가 내분되면서 멸망을 암시하는데, 이는 겨우 건국 14년
만에 골육상쟁으로 약화되었다가 거란족 요나라에게 망한 후당의 비극과도 일치합니다.
황제 이사원이 죽자 다시 혼란이 이어지니 이사원의 사위이자 절도사인 매국노 석경당(石敬塘)
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형세가 불리해지자 오랑캐 거란족을 끌여들이니 힘겹게 쌓아올렸던
나라는 13년 만에 처절히 멸망하고 후당은 단명한 나라 중 하나가 되었으며 후진을 건국한
석경당이 "연운 16주" 를 통째로 거란에 할양하면서 북방 민족이 중원을 짓밟는 기반이 됩니다.
이때 마지막 황제인 이사원의 양자인 이종가는 낙양성을 전부 태워버리라고 명하지만... 황후가
"궁궐을 태우면 새 황제는 분명 더 화려하게 궁궐을 신축할 것입니다. 그럼 백성들만
고통받게 됩니다" 라고 간언을 하자 결국 포기하고 자신이 있는 누각에만 불을 지르며 일족과
함께 자살을 택했으며 진시황으로 부터 전해지던 전국 옥새가 이때 행방이 묘연해졌다고 합니다.
후당은 중국 역사상 마지막으로 낙양에 도읍을 정한 왕조로, 이후 부터는 개봉(후진, 후한, 후주, 북송),
임안(남송), 남경(명나라 초기), 북경 등 완벽하게 중국의 중심이 동쪽 해안지역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925년에 후당은 “후백제의 견훤에게 백제왕” 의 작위를 내렸으며 그리고 후당이 멸망
하는 해에 한반도의 후삼국 시대도 끝을 맺었으니, 한편 신라는 경명왕 부터 경순왕
까지 후당에 조공을 했었고.... 사신을 보내서 공물을 바치고 조공하는등 교류를
했는데 왕조는 자주 바뀌었지만 중국의 중원 지방은 안정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3번째 왕조 후진(後晋)
후진(後晋)은 돌궐의 일파인 사타족 출신의 석경당에 의해서 936년에 건국되었는데 석경당의 성씨 및
북방 민족 출신을 따서 석진(石晉), 북진(北晉), 호진(胡晉)이라고도 부르기도 하며 거란의 지원을
받아 후당(後唐) 을 멸망시키고는 나라를 세운후 곧 배신한 탓에 대노한 거란의 침입으로 망했습니다.
석경당은 전란으로 폐허가 된 낙양을 버리고 개봉으로 천도하였는데 국가의 탄생 부터
가 거란의 대규모 병력 지원 덕택에 이루어 졌기에 석경당은 937년에 정식으로
국명을 요(遼)로 고친 거란에 시달리며 매년 막대한 공물과 세폐를 바쳐야 했고,
이미 연운(燕雲) 16주까지 통째로 들어바친 상황에서 군사적 압박까지 시달립니다.
석경당은 튀르크계 사타족(沙陀) 출신으로 태원 출생이니 후당의 이존욱을 도운 개국공신이었다가
명종 이사원(李嗣源)의 충실한 신하가 되어 많은 일을 하였으니... 이사원은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 부마로 삼을 정도로 신임했고 금군장관(禁軍長官)이 되어 하동절도사
(河東節度使) 와 북경유수(北京留守)를 겸하게 되었는데 청렴하고 일을 잘해 신망을 얻었습니다.
장인인 명종 이사원이 죽고 아들 이종후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는데, 노왕(潞王) 이종가(李從珂)의
반란으로 이종후는 기병 50기만을 거느리고 도망쳐 위주(魏州)를 지나다가 마침 그곳을
지나던 석경당과 마주치게 되었는데, 석경당은 명종의 사위이고 이종후는 아들이라 자형
과 처남 사이이니 위급한 처지에 빠진 이종후 로서는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은 순간 이었습니다.
그런데 석경당은 사정을 듣자 한숨을 쉬면서 불안해 하더니 위주 자사 왕홍지(王弘贄) 와
상의해 보고 말을 올리겠다며 우선 그 자리를 떴으며.... 둘이 만난 자리에서 왕홍지는
“예전에도 도망친 황제들은 많았는데 병사 아니면 돈이라도 있었지요. 그런데
지금 저 천자는 가진 것이라곤 병사 50명밖에 없는데 우리가 도울 필요가 있겠습니까?”
결단을 내린 석경당은 이 말을 이종후의 심복인 궁전 고사 사수영(沙守榮)과 황가 시위 분홍진
(奔弘進)에게 전하니 화가 난 분홍진은 석경당을 꾸짖었습니다. “황제는 명종의 아들이고
자네는 명종의 사위인데, 황제가 천하에 믿는 사람이 자네밖에 없건만 배신을 하겠다는 건가?”
사수영은 석경당을 죽이려고 칼을 뽑아 달려들었고 석경당의 위사 역시 칼을 뽑아들고 싸우다
둘 다 죽었으며 분홍진은 몹시 노해 자결을 택하니, 석경당은 심복 유지원(劉知遠)을 보내
50명의 병사들을 단숨에 죽이고는 낙양으로 달려가 이종가에게 항복했으며 그 사이에
왕홍지는 이종후를 잡아 가두었고 이종가는 이종후는 물론이고 아내와 아들들까지 학살합니다.
이종가는 석경당이 먼저 굽히고 들어와서 이종후를 죽이고 황제가 되는데 성공했지만 석경당
과는 이전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으니, 석경당의 군사들에게 조서를 내려 위문하였는데
석경당의 부하들이 석경당에게 만세를 외치는 사태가 벌어지자 이종가 입장에서는
불쾌하면서도 그가 언제 반란을 일으킬지 모르니 석경당을 천평군 절도사로 좌천시킵니다.
하지만 석경당은 이종가의 주변에 심복을 많이 만들어 놓아서 그의 동태를 두루 살필 수
있었으며 전국에 흩어진 재산을 모으고 군비를 확충하며 만만의 준비를 갖추고 있다가,
자신에게 인사 좌천의 명령이 떨어지자 심복 유지원을 불러 의견을 물으니 유지원은
“우리에겐 정예부대가 있으니 바로 지형을 점하고 싸우면 반드시 대업을 이룰 것입니다.“
하지만 석경당의 모사인 상유한(桑維翰)은 의견이 달랐는데, 그는 이렇게 말했다는데
“이곳은 거란과 가깝습니다. 만약 우리가 거란 군주를 대왕으로 모시고 구원을
청하면 무슨 일이 있어도 저녁이면 지원군이 올 터이니, 어찌 근심이 있겠습니까?”
그러자 석경당은 요나라에 칭신하는 것을 넘어서 요태종 야율덕광의 아들이 되기를 간청하는 상주문을
거란에 보내니... 그때 석경당은 47세, 야율덕광은 37세였으니 아들보다 열살 어린 아버지가 탄생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며 심지어 석경당은 후대에까지 악영향을 끼칠 엄청난 선택을 합니다.
바로 만리장성 이남의 “연운(燕雲) 16주”를 거란에게 무상으로 넘겨주기로 한 것이니 이에
유지원은 어이가 없어 참다 참다 석경당한테 간언을 올려 이를 만류합니다.
“신하의 예도 모자라서 아들과 아버지의 예를 맺는 것은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더구나
도움을 원한다면 재화와 보물만으로도 충분할 텐데, 어찌 땅까지 내어주시려고 하십니까?”
가을이 되자 태종 야율덕광은 약속대로 5만 대군을 이끌고 남하해왔으니, 석경당은 이종가와의 싸움에서
위태로운 지경에 처해 있었는데 요군 5만이 이종가의 군대를 격파해 단숨에 전세를 뒤바꿔버렸으니
.... 상황이 불리해지자 이종가 휘하의 장군들과 병사들도 황제를 배신하고 석경당에게 투항했을
정도였으며, 패배한 이종가는 가족과 함께 누각에 불을 질러 분신자살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후당을 멸망시킨 석경당은 즉위식을 거행하여 황제가 되는데 거란의 야율덕광은 석경당을 중원의
황제로 만들어주겠다며 신하들과 함께 그의 즉위식에 참석하여 손수 책봉식을 거행했으니....
야율덕광은 직접 석경당에게 옷을 입혀주었는데 놀랍게도 중국 옷이 아니라 거란식 의복이었습니다.
중국의 황제가 다른 나라이자 이민족 황제에게 굽실거리며 오랑캐의 의복인 거란 옷을 입고 책봉
되는 상황이었는데.... 당나라 때 이미 황제가 책봉 간섭을 받거나 아우 나라 노릇을
한 적은 있으나 이런 전례는 없었으며 황제가 된 석경당은 약속대로 요나라에 세공을 바쳤습니다.
이런 꼴을 보다 못한 심복 유지원이 자립하고 토욕혼이 이반한후 번진들의 반란에 시달리는
중에 반란을 진압하지 못하는 것을 요나라 조정에서 책망을 받게 되자 석경당은 불안해
근심하다가 죽으니 황제가 된후 6년 만으로, 후계자인 아들 석중예는 형의 아들인 출제
석중귀에게 찬탈당하고 이어 석중귀 조차 거란에 적대하다가 패함으로써 후진은 멸망합니다.
나라를 세울 때 이민족인 오랑캐 거란을 불러 원조를 받으니 오랑캐의 기세가 강해졌고, 백성들이
재앙에 빠졌으며 전쟁이 오랫동안 계속되어 좀처럼 끝나지 않고 군대를 부려도 지키지 못하였고
자기를 믿어준 황제를 두번이나 배신해 죽게 만든 것만으로도 박한 평가를 들어도 할말아 없습니다.
거란에 바친 유주(계, 탁 등), 삭주등 연운 16주는 중국의 한족 왕조들은 험준한 방어 요충지를 성벽으로
이어서 건설하였는데 바로 만리장성이었고, 이후로 이 만리장성을 의지해 북방의 유목민족들을
방어해 왔는데 연운 16주는 만리장성 바로 이남에 위치한 곳이니 도적에게 문간방을 내어준 것입니다?
곧 하북 평야지대를 방어하는 지정학 요충지이자 지형적 방어물이 없어졌다는 것을 의미하니
요, 금, 원 등 유목민족 국가들이 아무런 저항 없이 중원으로 쳐내려올수 있었을뿐더러
이 지역 물자를 바탕으로 해서 유목 연맹 국가의 한계를 넘어선 중앙집권화 까지
가능하게 해준 지역인데 스스로 이 알토란 같은 땅을 넘겨주었으니 참으로 큰 손실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