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마늘 작업을 하면서 할머니들끼리 나누는 여러 얘기를 가만 듣다 보면, 그중에 어떤 주제는 그 얘기와 연관돼서 생각이 확대되면서 잠깐이라도 또 다른 생각을 해보게 되는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그저께인가 서울에서 오신 봉사자분이 할머니들을 보고, “나이 많으신 옛날 어르신들이 많이 배운 요즘 젊은 사람들보다 훨씬 지혜로운 것 같다.”라는 말씀하시는 걸 들으면서 저 역시 ‘아니 옛날 분들은 더 많이 배우거나 가방끈이 긴 것도 아닌데,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로는 ‘경험, 혹은 체험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인 것 같습니다. 옛날 분들은 주변의 모든 것이 마냥 부족한 결핍의 상황, 가난한 시대를 살아온 분들이다 보니, 그러니 모든 걸 오로지 몸으로 때울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가령 학교 갔다 오면 당장 밭 일도 도와야 했고, 어머니를 대신해서 동생들 밥도 해 먹여야 했고, 또 할머니들 말씀대로 나물 뜯으러 갈 때도 지금처럼 차를 몰고 가서 어느 곳에 세워놓고, 그땐 좋은 배낭 같은 것도 없어서, 옛날엔 채집한 나물을 보자기 같은 데 담아서 그걸 머리에 이고 먼 길을 걸어와야 했습니다. 이처럼 그때는 모든 게 열악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몸으로 때울 수밖에 없었던 그런 ‘경험들’이 오랜 세월 ‘숙성’이 되면서 지금에 와서 ‘삶의 지혜’가 된 것입니다.
그에 비해서 요즘 사람들은 체험의 기회를 잃어버렸습니다. 지금처럼 몸으로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없어진 것은, 요즘 사람들이 특별히 나빠졌거나 게을러져서 그런 게 아니라, 모든 게 풍족하여 결핍을 모르기 때문이기도 하고, 요즘 사람이라면 꼭 습득해야만 정상적 생활이 가능한, 배워야 할 정보의 양이 너무 많기도 하거니와, 그 쏟아져 나오는 정보를 습득하고 쫓아가기에도 허덕허덕대는 판에, 지금 우리 현실이 따로 시간을 내서 ‘몸으로 경험하는 일’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점점 몸으로 하는 경험의 기회를 우리가 잃게 되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면 요즘 젊은 사람들은 직접 김치를 담그는 법 같은 것은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잘 모르지만, 반면 인터넷에 접근하는 방식 같은 건 아주 잘합니다.
이 이야기를 오늘 복음과 연결시켜 보자면, 원래 우리 그리스도교는 초대교회 때부터 본래 ‘만남의 종교, 체험의 종교’였었는데, 이게 점점 세월이 흐르면서 이론을 바탕으로 한 ‘교리 중심’의 종교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더라도 앞을 못보던 눈먼 바르티매오는 직접 예수님을 만나고, 또 예수님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직접 졸라대고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라는 주님 질문을 통해 큰 은혜, 기적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신자들에게는 여러 가지 이론과 교리만 있지 이런 직접적인 ‘예수님 과의 만남이나 체험’이 많지 않습니다. 또 한 번 인용하지만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교회에서 복음적 열정이 사라진 것은 “아직 그분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했던 것이고, 우리 신앙이 이처럼 점점 형식적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이론적으로 ‘이해하는 신앙’이 아니라 ‘체험되는 하느님’이어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