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동백 /임정희
남편의 말에 의하면 시어머니는 모든 면에서 시할머니의 발뒤꿈치에도 못 따라 갔다했다. 여자가 글을 아는 것이 흉이다 하여 남몰래 성경책을 읽으셨던 시할머니 자랑을 침이 마르도록 하고 있다. 똑똑해서 무서운 시할머니가 순박하기 짝이 없는 시어머니를 시집 살린 일에 대해서는 깜깜한 마음이다. 자기를 낳아 기른 어머니를 어쩌면 그렇게 평가절하 할 수 있을까 이해가 가지 않았다.
2004년 첫눈을 밟으며 산을 오른다. 그제 오후에 잠시 내린 눈이 팔공산 자락에 제법 하얗게 쌓였다. 이미 어느 정도 삭은 활엽수 낙엽들과 반반씩 섞여 지면을 온통 덮고 있다. 미끄럼을 피해 조심스럽게 걷다가 비상 헬리곱터 착륙장에서 산동백을 만났다. 한티재에서 팔공산 동봉으로 향하는 열 고개 째 능선에서 부대끼는 폐활량으로 산행을 멈추었다. 폐부 깊숙이 파고드는 찬바람에 가슴이 따가워 더 이상 오르기에는 무리였다. 쇠약한 내게는 열 고개도 벅찬데 시어머니의 한 생은 수 십 고개에 달했으리라.
열 평 남짓한 공터에 억새 숲을 등지고 양지쪽에 퍼져 앉았다. 보아하니 산불이나 또 다른 유사시 이용 가능한 비상 헬기장이었다. 음료수로 목을 축이며 소나무 사이로 고개를 빼들고 동봉을 바라본다. 대략 동봉정상의 3할 정도를 등반했을까말까 한데 벌써 힘에 벅차다. 내가 시어머니의 한 생을 이해하려면 마지막 끝 봉우리 동봉까지 올라봐도 다 모를 판이다.
시어머니는 더러 명절날이면 밤늦도록 동서형님과 도란거리는 저희 곁에 누워 당신의 시집살이 이야기를 덕담처럼 읊으셨다. 시할머니는 4대 독자인 아들이 결혼하여 수년이 넘도록 아이를 갖지 못하자 작은댁을 차례로 둘이나 들여 아들에게 신방을 꾸며주었다. 간단한 형식을 차릴 때마다 시어머니는 정해진 절차처럼 보름만 쉬고 오라는 시할머니의 엄명에 따라 떡 보퉁이를 이고 친정으로 보내졌다. 죽어서도 그 집 귀신이 되어야 한다는 친정 아버지께 떠밀려 사나흘만에 시집으로 돌아와 부엌 바닥에 거적때기를 깔고 살았다.
어느 한겨울 밤 부엌아궁이 앞에 웅크리고 누웠는데 그날따라 달이 휘영청 너무나 밝아 왈칵 설움이 들었다. 무심코 '저 놈의 달은 어찌 저리도 밝을꼬!' 중얼중얼 신세한탄을 했더니 바로 옆방에서 새색시와 사랑을 나누던 시아버지가 욕하는 소리로 잘못 듣고 후딱 뛰어나와 시어머니의 머리채를 움켜쥐고 장작개비로 사정없이 때리더라 했다. 하루는 뒤뜰 처마 끝에 새끼줄을 매고 목 메달아 죽으려 했더니 시아버지가 불쑥 나타나 낫으로 새끼줄을 싹둑 잘라 내리면서 '내가 널 버리지는 않으마' 해서 그 말을 믿고 꾹 참고 살았다하셨다.
첫 번 째 작은댁은 2년이 넘도록 수태도 못하는 주제에 들일만 하는 시어머니를 못 살게 질투해서 시할머니가 내 쫓았다. 혹시 시어머니라도 수태하기를 바라고 방에 들여 하룻밤 재울라치면 성냥불을 확 그어 불을 켠다든지 그 행실이 방정맞았다 했다.
그 후에 들인 둘째 작은댁은 다소곳한 성격대로 다행히 수태를 했다. 냇가에서 시어머니와 마주 앉아 빨래를 하던 작은댁이 둥둥 떠내려가는 옷가지를 건지려고 물에 들어가더란다. 그때 드러난 작은댁의 허연 종아리에 부스럼이 더덕더덕 하더라 했다. 알고 보니 사람들이 꺼려하는 흉한 전염병이라 마을 사람들이 한 우물을 못 먹게 해서 온 식구가 동네에서 따돌림을 받게 되었다. 요즘도 못 고치는 나병이었다.
아이를 가진 여자를 그냥 내칠 수 없어 건너 산 양지에 움막을 지어주며 '아이를 낳으면 우리가 거둘 게' 하며 살게 했다. 시어머니는 그곳에 먹을 것을 가끔 갖다 날랐다. 겨울이 다가오는 가을날, 아이를 낳을 때가 다 되었는데 작은댁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시어머니가 그 산 주변을 며칠째 헤매다가 냇가 한쪽구석에서 아이를 안고 쓰러져있는 산모를 발견하고 아이는 거두어 왔다. 그 후 작은댁은 그 곳에서 영영 모습을 감추었다 했다.
시어머니는 그 아이를 하느님이 당신께 주신 귀한 자식이라 여기고 애지중지 키우셨다했다.
그 후 시어머니께 태기가 있어서 첫 딸을 낳으셨다. 하루는 작은댁이 낳은 장남이 학교에서 돌아와 배가 아프다며 마루에서 뒹굴었다. 장남은 시어머니가 들에서 일하는 시아버지를 불러 급하게 소달구지에 싣고 읍내 의원으로 달려가다 도중에 숨을 거두었다 했다. 시어머니의 손에 9년 동안 살다간 불쌍한 자손이었다. 그 후 시어머니는 계속해서 세 아들을 낳으셨다. 마침내 수를 다하신 시할머니는 숨을 거두며 시어머니께 자식을 못 낳아 구박했던 것을 빌고 또 빌며 눈을 감으셨다 했다.
4대 독자 집안에 열일곱에 시집가서 서른 넘어 첫아이를 낳았으니 그러기까지 설움이 오죽했으랴. 그래도 3대째 기독교 집안이었으니 다행히 내침을 당하지는 않았다. 고생 끝에 남들처럼 아들딸을 낳았지만 그러기까지 시아버지의 술과 놀음 탕진으로 가세가 기울어 먹을 것이 없었다. 그렇게 어렵사리 키웠건만 아들들은 어머니의 한평생 애 궂은 삶을 다 모르는 것 같았다. 지금도 남편의 시할머니 자랑은 반복되고 있다. 할머니가 마당 한쪽에 가꾸던 꽃밭이야기며, 눈 속에서 산동백 가지를 꺾어와 항아리에 꽂아놓으면 방안에 향기 그윽하게 노란 동백이 피더라는 이야기며, 이른봄에 파랗게 싹이 털 뭇 가지를 취해서 집안에 꽂아 놓으니 한겨울에도 봄을 볼 수 있었다는 둥 곧잘 시할머니를 선녀로 둔갑시켰다. 살림솜씨 외에도 시할머니의 인품이나 지혜가 시어머니보다 월등했다니 감히 내가 까치발로 넘어다보지 못할 분임에 틀림이 없다.
남편은 산동백을 보면 아직도 할머니 자랑을 한다. 어느새 나도 전이가 되어 산동백을 보면 얼굴도 모르는 시할머니가 생각난다. 아니 순박하셨던 내 시어머니가 생각난다. 산동백은 높은 산의 잔설이 찬바람에 허리를 움츠리는 눈물 괸 응달에서 핀다. 내 시어머니처럼.
04.12.16.-2월 토론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