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말 서구 제국주의의 침략과 식민정책이 동아시아를 휩쓸던 시기, 조선은 일본 제국주의에 침탈당했고 유교 통치이념에 바탕을 둔 조선왕조(1392~1910)는 막을 내렸다.
이 시점에 홍암(弘巖) 나철<羅喆, 본명 두영(斗永), 뒤에 인영(寅永)으로 개명, 1863~1916)이 중광(重光)한 대종교(大倧敎)는 20세기 초 한국 사회를 대표하는 민족종교로 자리 잡았다.
배달민족의 정체성을 지키고 단군신앙에 토대를 둔 제천의례를 거행하며, 한민족 고유의 종교문화와 사상을 계승하려 한 것이 그 출발점이다. 국시(國是, 홍익인간)와 국전(國典, 개천절), 국기(國紀, 단군기원), 나아가 국교(國敎)·국어·국사 등 한민족 정체성의 근원이 사실상 대종교의 중광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사정은 달랐다. 정체성의 근간이 되어야 할 단군의 위상은 기자에 밀려 초라해졌고, '단군조선'보다는 '기자조선'이 우선시되었다.
정도전이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 국호조(國號條)에 남긴 글이 이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해동은 그 국호가 하나가 아니었다. 국호를 조선으로 삼은 경우가 셋이었으니, 단군·기자·위만이 그것이다. 박씨·석씨·김씨가 서로 계승하여 신라라칭하였으며, 온조는 앞서 백제라 칭하였고, 견훤은 뒤에 후백제라 칭하였다. 또 고주몽은 고구려라 칭하였고, 궁예는 후고구려라 칭하였다. 왕씨는 궁예를 대신하여 고려라는 국호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모두 한 귀퉁이를 차지하여 중국의 명령을 받지 않고 스스로 명호를 세우고 서로 침탈하였으니, 비록 칭하던 바가 있더라도 어찌 취할 만하겠는가. 오직 기자만은 주무왕의 명령을 받아 조선후에 봉해졌다. (…) 기자는 무왕에게 「홍범」을 펴고 그 뜻을 부연하여 '팔조의 가르침'을 지어 나라 안에 시행하였으니, 정치와 교화가 성대히 행해지고 풍속이 지극히 아름다웠다. (…) 장차 홍범지학과 팔조지교가 오늘날 다시 시행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공자께서 '나는 그 나라를 동주(東周)로 만들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어찌 나를 속이셨겠는가."
정도전은 조선 건국 당시 국호를 정하면서 '팔조교(八條敎)'와 '홍범(洪範)'을 전한 기자를 기리고, 조선이 '기자조선'을 계승한 나라임을 분명히 못 박았다. 동시에 주무왕과 공자를 흠모하며 조선을 동주(東周)에까지 연결시켰다. 뼛속까지 스며든 존화주의(尊華主義)의 단면이 그대로 드러난다.
문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태조실록' 태조 1년(1392) 8월 11일자에는 예조전서 조박(趙璞) 등이 다음과 같이 상서한 기록이 실려 있다.
"신 등이 삼가 역대의 사전(祀典)을 살피건대, 종묘 · 적전 · 사직 · 산천 · 성황 · 문선왕의 석전제는 고금에 두루 통행되었으며 국가의 상전(常典)인 것입니다. 지금 월령의 규식대로 아래에 갖추어 기록하오니, 청하옵건대 유사(攸司)에 내려 때에 따라 거행하소서. 원구(圜丘)는 천자가 하늘에 제사 지내는 예절이니, 이를 폐지하기를 청합니다."
유교의 종주국이자 천자국을 자임한 중국 앞에서, 단군신앙의 오랜 전통이자 상징인 제천권(祭天權)을 스스로 내려놓은 셈이다. 정체성의 근본에 해당하는 제천권을 행사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정신사적으로도 뼈아픈 사건이었다. 천손의식이나 배달민족이라는 관념을 상실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제후국을 자처한 조선이 천자국 중국을 향해 모든 권한을 포기한 부끄러운 상징성의 사례이기도 하다. 결국 유교적 통치 이념을 표방한 조선은 그 한계 안에서 무너졌다.
황제국만이 하늘에 제사 지낼 수 있다는 유교적 세계관 아래, 조선은 세조 10년(1464)의 환구제를 마지막으로 제천의례를 중단했다. 이후 약 430여 년이 지난 1897년, 고종은 대한제국 수립을 준비하면서 옛 남별궁 터(현재의 웨스틴 조선호텔 일대)에 '환구단(圜丘壇)'을 다시 세웠다.
<승정원일기> 고종 34년(1897) 9월 17일자에는 환구제의 절차를 정한 원구의(圜丘儀)가 기록되어 있고, 같은 날을 기해 국호가 정식으로 '대한(大韓)'으로 바뀌어 고유제문에도 '대한'이라 쓰도록 명해졌다.
고종은 그해 양력 10월 12일 환구단에서 천지에 제사를 지낸 뒤 황제 즉위식을 거행했고, 이튿날 국호를 '대한', 연호를 '광무(光武)'로 정하는 조칙을 반포했다. 환구단 복원과 환구제 부활은 단순한 의례 회복을 넘어, 중국과의 사대 관계 단절과 자주독립국 수립을 알리는 가장 분명한 상징이었다.
대종교 역시 정확히 이 자리에서 출발한다.
1909년 음력 1월 15일(양력 2월 5일), 나철은 단군대황조신위를 모시고 제천의 대례를 행한 뒤 '단군교포명서(檀君敎佈明書)'를 공포하며 중광을선포했다.
그는 이날부터 매년 음력 10월 3일을 경축일로 삼아 행사를 이어 갔다. 이듬해 단군교를 대종교로 개칭한 뒤, 국치 직후인 1910년에는 교명(敎命)으로 종단의 의식 구례를 제정·발표했다. 의식과 행사를 규정한 이 문서 가운데 개천절 항목에는 "개천절은 강세일(降世日)과 개국일(開國日)이 10월 3일이라 경일(慶日)로 합칭(合稱)함"이라 명시되어 있다. 우리 역사에서 '개천절'이라는 명칭이 공식적으로 자리 잡은 출발점이 바로 여기다.
나철은 이 의식을 통해 '천자만이 제천의례를 거행할 수 있다'는 중화적 세계관을 정면으로 부정했다. 단군에게 '대황조(大皇祖)'라는 칭호를 부여함으로써, 한민족이 천손(天孫)이며 독립된 민족국가의 일원임을 당당히 선포한 것이다.
이는 흔히 말하는 단일민족(單一民族), 곧 '하나의 민족'이라는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단군의 자손으로서 한 갈래로 이어진 겨레라는 의미의 단일민족(檀一民族)의 정체성을 토대로 한 선언이었다. 그렇기에 일제에 맞선 독립투쟁의 가장 강력한 원동력이 되었으며, 백범 김구도 말했듯이 '한배검의 자손인 이상 모두가 이 교화 안에서 살아왔음'을 천명한 의례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매우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