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에 강릉 가다 보면 진부에서부터 대관령까지 ‘첫눈조심’이라고 쓴 임시 표지판이 곳곳에 세워져 있잖아.
그 얘기를 했더니 여기 사람들이 다 안 믿어.
이 사람들은 겨울이면 눈 속에 살아도 첫눈이 어떤 건지도 잘 모르는 사람들이야.
첫눈이라는 게 그렇잖아.
그냥 봐선 온 지도 안 온 지도 잘 모르고, 그렇지만 사람 마음 들뜨게 하고, 길은 미끄럽고….
그런 뜻이라고 말하면, 정말 그런 표지판이 있다면 그건 시(詩)지 교통 표지판이 아니라는 거야.” 그래, 찍으면 발자국 자리도 안 나게 내렸는지 안 내렸는지도 모르게 왔다 가는 것, 혹은 그렇게 왔다가는 사람, 그 모든 것이 첫눈인 것이었다.
-291∼292쪽,‘첫눈’
동인문학상 현대문학상 이효석문학상 허균문학작가상 등 굵직한 상을 휩쓴 강릉출신 소설가 이순원(52·사진)씨가 창작 소설집 ‘첫눈’을 들고 독자들 곁에 돌아왔다.
6년 만에 묶어낸 이번 창작집에는 작가가 긴 호흡으로 써낸 7편의 단편소설이 수록돼 있다.
맑은 문체와 풍부한 서정으로 우리네 삶을 투영하는 문장은 여전한데 이번에는 그 시선이 그동안 뭇 사람들의 눈길이 가지 않았던 삶의 그늘진 곳에 좀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
잔잔한 서정을 작품 전반에 녹여 놓아 문장의 서정은 여전하지만 현실의 아픔과 사회적 비극을 밀도 있게 그려내며 다문화 사회에 살고 있는 깊은 내면세계와 조응하는 작가의 주제의식이 묵직하게 전해져 오는 소설들이다.
표제작 ‘첫눈’은 언제 온 지도 모르게 흩날리는 첫눈처럼 인생에서 예측하기 힘든, 불현듯 다가오는 만남과 이별을 겨울바다를 배경으로 그렸다.
사회적인 관점에서는 부적절한 관계라고도 볼 수 있는 남녀의 애틋한 만남과 헤어짐을 잔잔하고 유려하게 그려내 독자들로 하여금 긴 여운을 드리우게 하는 작품이다.
“그 들꽃 같은 여자아이가 지금 현수막이 내걸린 정미소 처마 아래에 서 있다.
이제 옆으로 조금씩 야위어가기 시작하는 열이레 달 아래에 이름도 없이 울고 서 있다.
(중략) 미안하다, 베트남 처녀여.
정말 미안하고 미안합니다, 바레.
그리고 미안해요, 호 아저씨…”-127쪽, ‘미안해요, 호 아저씨’
‘미안해요, 호 아저씨’는 우리 농촌에서 일상적인 것이 된 옌볜, 베트남 처녀와의 결혼 문제를 소재로 했다.
도시화가 불러온 농촌 사회의 아픔과 함께 경계를 넘어선 인간 본연의 존엄에 대해 각성하게 하는 작품이다.
그런가 하면 ‘라인 강가에서’는 파독 광부의 이야기를 통해 개발 시대의 어두운 기억을 일깨워 우리에게 남겨진 책무와 역사의 희생자들까지 돌아보게 하고, ‘카프카의 여인’은 주류라고 이름 지어진 것들에 대한 회의적인 고찰 안에서 타인의 존재를 반추하게 한다.
또한 ‘멀리 있는 사람’에서는 혈연을 넘어선 우리 안의 유대성을 확인시켜 현대인들에게 결여된 가족 간의 정을 되살려 깊은 향수를 불러 일으키고, ‘푸른 모래의 시간’은 개개의 의지로 어찌할 수 없는 숙명들을 시간의 바다 안에서 흘려보내야 하는 인간들의 유한성에 대해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