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릿돌’ 이대현 목사님
저는 예전부터 늘 형님이라고 불렀고, 형님은 늘 저를 ‘서목사’라고 했습니다. 늘 예의바르고 존중한다는 것이지요. 형님을 처음 뵌 것은 대학원에서 신학공부를 시작할 때였으니 딱 40년이 되었습니다.
형님은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다니는 좋은 고등학교, 대학교를 나와서 당시에 최고의 직장이라고 하는 현대건설에서 재무와 자금을 담당하는 중책을 맡았지요. 그때의 사장이 나중에 대통령이 되었지요. 그런데 다른 중책을 하나 더 얹었으니 ‘현대건설 신우회’였습니다. 직장 동료들과 함께 성경공부를 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인데, 그러다가 박명자 사모님과 교제를 시작했습니다. 결혼 이야기가 오고 가면서 사모님이 형님에게 딱 한 가지 조건을 걸었습니다. ‘절대로 신학공부해서 목사가 되지 않기로’. 그러겠다고 해서 결혼을 했는데, ‘절대로’는 깨지고 직장에서 나와서 신학의 길로 들어섰는데 그때 형님의 나이가 30대 중반이었지요. 나중에 사모님이 하시는 말씀이 “나는 거짓말하는 목사에게 속아서 결혼했어요.”라고 하셨고, 형님은 그냥 웃고만 계셨지요.
예수가 좋아서 신학은 했지만 목회의 현장이라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평탄하고 은혜스러운 것만은 아니지요. 그중의 하나는 소위 ‘한신 본과’ 출신이 아니라는 것 때문에 차별과 소외를 많이 당했는데, 저 역시 같은 일반대 출신이어서 많이 그랬습니다. 목회를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서울 수유리에 있던 단독주택 한 채는 온전히 사라졌고, 나중에 익산에 ‘머릿돌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교육과 신학이 있는 교회에 대한 비젼이 있었습니다. 나이가 드시면서 건강이 좋지 않아 정년보다 일찍 은퇴를 했습니다.
형님 은퇴만 하면 날개를 달 수 있다고 생각했던 사모님은 날기도 전에 형님 수발에 정말 고생 많이 하셨지요. 나중에 사모님 말씀이 형님이 늘 교회에만 계시고, 공부만 하는 것을 말리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은퇴 후 우리 교회 몇 년 나오시면서 교회는 작지만 신앙의 수준이 있고 성숙한 것 같아서 좋다고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몇 년 전 인천으로 이사하신 것은 아들이 서울에 있기도 하지만, 사모님 여동생 부부가 적극 권했습니다. 언니 혼자 형부 돌보기가 너무 힘드니까 곁에서 같이 힘을 보태겠다고 해서 가신 것이지요. 그 뒤로 늘 사모님과 안부를 주고 받으며 지냈습니다만, 어제 형님의 소천 소식을 들었습니다.
형님 이름 앞에 ‘머릿돌’을 붙이면서 이 편지로 추모합니다. 신사적이고 선비 같았던 형님에게 우리 주님의 안식을 기도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