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7일 수요일
『고통 구경하는 사회』 김인정 지음
‘나와 닮은 것들에 대한 연민’에서 시작된다.
새벽 6시, 어둠이 길어져 아직 날이 밝지 않은 이른 시간. 출근을 준비하던 남편이 말했다.
“어제 현대차 울산 공장에서 3명이 죽었대. 배기가스 실험하다 그랬다는데… 남양 연구소에서 근무하던 연구원들이래…”
놀란 나는 끝날 듯 끝나지 않는 남편의 말끝을 잡고 물었다.
“실험하다? 연구원이?”
“응. 나도 어제 아버지 전화 받고 알았어. 뉴스 보시다가 전화하셨더라고. 네가 하는 일은 관련 없는 일이냐며. 그런 실험 너도 하는 거냐며. 걱정돼서 전화하셨나 봐.”
남편은 현대모비스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현대차 울산 공장도, 남양 연구소도 남편에게는 익숙한 곳이다. 뉴스를 보시던 부모님도 ‘현대자동차, 연구원, 실험’이라는 단어에 덜컥 아들 생각이 나셨던 모양이다.
현관문을 나서는 남편에게 잘 다녀오라는 인사를 건네는데, 이 당연한 아침 인사가 어쩐지 공허하게 느껴졌다. 그들의 일상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여느 때처럼 잘 다녀오라는 인사를 하고 저녁이면 늦더라도 당연히 집에서 만날 거라 생각했겠지. 포털 메인에 관련 기사가 보였다. ‘산업재해라는 고통의 흔함’(94쪽) 앞에서 빠르게 지나가던 스크롤이 멈췄다. 40대, 30대, 20대 남성이 죽었다. 먹고 살기 위해 일하는 현장에서 사람이 죽었다. 처참한 묘사나 안타까운 사연을 동반하지 않았는데도(99쪽), 나는 기사를 찾아 읽고 또 읽었다. ‘나와 닮은 것들에 대한 연민’(153쪽) 때문이었을까.
나는 노동자의 딸이다. 아빠는 항상 몸을 쓰는 일을 하셨다. 크고 무거운 기계를 다루셨고, 물건을 만들어내고 옮기는 일을 하셨다. 지금도 다부진 아빠의 몸은 켜켜이 쌓인 노동의 흔적이리라. 일흔 가까운 나이에도 아빠는 의료기기 생산 업체에서 일하고 계신다. 뵐 때마다 점점 힘에 부친다, 나이가 들어 이제 못 하겠다 하시면서도 이내 그래도 할 수 있을 때까지는 해야지 하신다. 그런 아빠의 손등에는 유독 상처가 많다. 기계에 찍히거나 가까스로 피하면서 난 상처다. 아빠는 괜찮다 하시지만 내 마음은 편치 않다. 노동의 무게를 견디기에는 너무나 얄팍한 파스가 아빠의 어깨와 목 주변에 붙어 있을 때면 마음이 더욱 아린다. ‘무리하지 않으셔야 할 텐데. 저렇게 일하시다 사고라도 나면 어쩌지.’ 괜한 걱정이다 싶으면서도 ‘여전히 하루에 6명이 넘는 노동자가 산업재해로 목숨을 잃고 있는’(100쪽) 사회에서 나는 안도하지 못한다.
이제 나는 노동자의 아내이기도 하다. 컴퓨터 앞에 앉아 프로그램을 설계하고 실험 데이터를 분석 검토하는 일이 남편의 주된 업무이기에 얼핏 보면 그리 힘든 일도 아닌 것 같다. 무리하게 몸을 쓰는 일이 아니니 다칠 일도 없을 테고. 하지만 남편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고단함이 느껴진다. 다양한 변수와 예상되는 경우를 최대한 고려해야 하고, 프로그램이 정상 작동하는지 계속 확인해야 하는데 그러다 보면 결국 일은 끝이 없단다. 다했다고 생각하면 또 다른 경우가 보이고 프로그램이 그것까지 반영할 수 있는지 확인하다 안 되면 다시 수정해야 하고. 오늘 일을 많이 했다고 내일 해야 할 일이 줄어들지 않는 상황이다. ‘그럼 어차피 끝도 없는 일, 쉬엄쉬엄 자기 몸 챙기면서 하면 되지.’ 남편도 그렇게 생각한단다. 하지만 회사는 그리 넉넉한 시간을 주지 않는다. 사람이 하는 일인데 당연히 예상하지 못한 경우가 있을 수 있고, 그로 인한 문제 발생도 가능한 것이라 여긴다지만, 그 문제 때문에 회사에 손해가 발생한다면 책임은 오롯이 프로그램을 짠 실무 담당자에게 전가된다. 그러니 6시 30분 출근, 10시 퇴근을 해도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문제를 생각하면 불안감이 밀려온다는 것이다. 몸은 몸대로 힘들고 머리는 지끈지끈 아프고. 스스로가 소모되고 있다고 느끼는 남편의 일터도 안전해 보이지 않는다.
‘살기 위해 일하는 사람이 일하다 죽는다.’(『지금은 없는 시민』, 149쪽)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그렇게 매일. 그러나 우리는 그 죽음을 일일이 알지 못한다.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너무 자주 비슷한 소식을 들은 나머지 이제는 무뎌졌기에. 나 역시 그랬다. 그러나 나와 연관된 혹은 내가 아는 현장에서의 죽음은 다르다. 내가 직접 겪은 일은 아닐지라도, 나와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나 느낌 때문에 가깝게 다가온다. 그러면 지나치지 않고 들여다보게 된다. 머물러 생각하고 찾아보게 된다. 같이 아파하기도 하고,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한 목소리를 모으고 행동하기도 한다. 무뎌져 있었던 마음, 생각이 움직이면서 산업재해, 중대재해처벌법, 또 다른 노동자의 죽음을 찾아보았다.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되었다.
『고통 구경하는 사회』에서 저자는 ‘나와 닮지 않은 이들의 아픔’을 이야기하면서 “나와 닮은 것들에 대한 연민은, 자꾸 나에게로, 나라는 좁은 둘레로, 가족으로, 우리 민족으로, 우리 인종으로, 우리 계층으로, 우리나라라는 비좁은 단위로 파고들어 그 바깥을 바라볼 수 없도록 우리의 이성을 빨아들이고 있는 건 아닐까?”(153쪽) 경계한다. 나와 연관된 고통에만 머무르지 않기를 당부한다.“나 이상의 테두리를 감각하고, 나의 가족이나 친구보다 더욱 큰 사회가 있음을 인지하고, 지구 공동체 안의 시민으로서, 인류의 일부로서 어떤 고통과 어떤 뉴스를 더 큰 ’우리‘의 우선순위로 놓고 해결해 나가야 할지 고민하는 것. … 나와 연관되지 않는 일 역시 중요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154쪽)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나와 닮지 않은 이들의 아픔을 감각하고, 나와 연관되지 않은 일 역시 중요할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은 어떻게 시작될까. ’나와 연관된 고통‘에 반응하고, ’나와 닮은 것들에 대한 연민‘을 느끼는 것에서 나의 마음은 움직이고 우리는 행동하기 시작한다. ’연관되다‘, ’닮다‘는 말은 이미 ’나‘만이 아닌 ’우리‘의 존재를 담고 있기에. 그러니 내가 반응하게 되는, 연민하게 되는 고통, 그것을 제대로 들여다보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자. 내딛어야 할 다음 한걸음이 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