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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이동활의 음악정원 ♣ 원문보기 글쓴이: 황금마삭
1. 11살에 출가한 고려 왕자 의천,
송나라로 밀항한 이유!
"이 땅에 경론은 있으나
소와 초가 결여돼 있으므로
요와 송에 있는 과교(불교 연구서)를 수집하고자 합니다."
- <대각국사문집> '대세자집교장발원소'
"이 땅에 수도하는 사람도 적고
참된 진리는 이단에 무릎을 꿇었다.
중국에 가서 배우지 않는다면
어두운 눈을 씻기 어려울 것이다."
- <대각국사문집> '입송구법청원표'
서기 1085년 4월 초팔일밤.
고려의 수도 개경은 초팔일을 맞아
화려한 연등회 행사로 불야성을 이루었다.
이날밤 개경을 몰래 빠져나온 승려 일행이
밀항을 하기 위해
중국 송나라 상인 임영의 배에 몸을 실었다.
밀항을 하려는 승려는
고려 불교계 최고 지위인 승통이자 고려의 왕자였던 왕후(王煦).
우리에게 대각국사 의천으로 널리 알려진 그가
송나라로 밀항을 감행한 이유는 무엇일까?
"대각국사 의천,
아마 한번쯤 이름은 들어보셨겠지만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의천은
고려 11대 임금 문종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는데요,
11살에 출가해서
불교계 최고 지위인 승통의 자리에까지 올랐습니다.
그런데 의천은 31살이 되던 서기 1085년 4월 초팔일밤,
남들의 눈을 피해 송나라로 밀항을 감행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밀항을 한다는 것은 많은 위험이 뒤따르고
경우에 따라서는 처벌을 받을 수도 있는 일입니다
이 때문인지 밀항 당시 의천은
형벌을 무릎쓰고 험한 파도에 몸을 맡기고 떠나는
자신을 용서해달라는 편지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그가 밀항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개성 오관산(五冠山) 자락에 위치한 영통사.
대각국사 의천이 출가했던 유서깊은 절이다.
2005년 10월.
남북의 불교인들이 한자리에 모여 뜻깊은 행사를 가졌다.
조선 중기 불에 타 없어졌던 영통사를
남북한이 힘을 합해 복원하고 낙성식을 갖게 된 것이다.
"정말 완전히 폐허였는데
29개 건물이 복원이 되어서,
북한의 불교 대표 200명, 우리 남한 대표 300명 등 합해 500명이 모여서
장엄하게 봉불식을 하고, 낙성식을 하고, 학술 대회를 열었습니다.
정말 이것은 남북의 진정한 불교 교류, 민간 교류였고,
또 이런 것이 진정한 평화적 통일로 가는 길이 아닌가 하는 감회를 느꼈습니다."
- 전원덕 스님(대한불교천태종 총무원장)
한국 천태종이 50억원을 지원해 이뤄낸 이번 복원으로 인해
영통사는 29채의 건물이 거의 옛모습을 되찾았다.
영통사에는 당간지주를 비롯해 몇몇 국보급 유물이 남아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대각국사 의천의 행적을 기록해놓은
'영통사 대각국사비'다.
당대의 명문장가 김부식이 지은 비문에 따르면
의천은 11살 나이에 화엄사 종단인 영통사로 출가하였다.
"경덕국사를 따라 영통사에 출가하였다.
불일사에서 구족계를 받으니
그 때 11세였다."
왕자였던 의천이 왜 11살 어린 나이에 출가를 했을까?
"지금과 달리 불교가 국교였던 시대입니다.
따라서 승려가 된다는 것은
세속적으로도 출세를 한다는 의미를 띄게 되는 것입니다.
또 사찰은 유력한 경제집단이었습니다.
정치세력들이
불교 교단을 장악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왕실을 비롯한 귀족 가문들이
경쟁적으로 자기 자식들을 출가시키게 됩니다."
- 남동신 교수(덕성여대 사학과)
11살 나이에 출가한 의천은
불과 2년뒤 승통의 직위에 오른다.
고려 시대에는
승과에 합격한 승려에게
승계를 부여했다.
승계는 모두 여섯 단계로 되어있는데
승통은 그 중 최고 직위다.
僧統(승통)
首座(수좌)
三重大師(삼중대사)
重大師(중대사)
大師(대사)
大德(대덕)
"승통이란 것은 글자 그대로 '승려를 통솔하는 자리'입니다.
그러한 승통은 고려가 승려에게 주었던 여섯 단계 승계 가운데 최고위직에 해당합니다.
비유하자면 카톨릭에 추기경과 같은 자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자리에는 통상 고매한 승려 가운데서도
40대 정도가 되어야 승통에 다다를 수 있는데,
의천 같은 경우는 이례적으로 13살 어린 나이에 승통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 문종이 화엄종 교단을 장악하기 위해서
어린 아들을 왕의 힘으로 승통의 자리에 임명한 것입니다."
- 남동신 교수(덕성여대 사학과)
이후 불교와 유교 등에 통달하던 의천은
31살에 중국으로 밀항한다.
왕자이자 승통으로서 편안한 삶을 살아갈 수 있었던 그가
송나라로 밀항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
<대각국사문집>에 그 단서가 남아있다.
19살에 쓴 글을 보면,
의천은 그 때 이미 불교 경전 연구서인 교장을 수집하기 위해
송나라에 갈 뜻을 내비치고 있다.
"이 땅에 경론은 있으나
소와 초가 결여돼 있으므로
요와 송에 있는 과교(불교 연구서)를 수집하고자 합니다."
- <대각국사문집> '대세자집교장발원소'
뿐만 아니라 침체된 고려의 불교를 살리기 위해서는
송나라에 가서 공부하고 와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 땅에 수도하는 사람도 적고
참된 진리는 이단에 무릎을 꿇었다.
중국에 가서 배우지 않는다면
어두운 눈을 씻기 어려울 것이다."
- <대각국사문집> '입송구법청원표'
"불경의 수집 간행을
벌써19살때 당시 선종 앞에서 이미 서약을 한 바 있었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중국에 가야 했고,
또 하나는 당시 고려 불교계의 문제,
교단의 파벌 싸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새로운 종파 천태종을 개창할 뜻을 세우는 데
그러기 위해서는 송나라에 가서
천태종을 새로 전수해와야 하는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 최병헌 교수(서울대 국사학과)
그러나 송나라로 가려던 의천의 뜻은
조정 대신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번번히 좌절된다.
"의천의 입송구법은
문종대와 선종대 수차례에 걸쳐 논의되었습니다.
대신들은
왕의 동생의 신분으로 바다를 건너가는 것은
상당히 위험하기 때문에 신변의 안위를 보장할 수 없다는 표면적인 이유를 들었구요,
보다 실질적인 이유를 들 것 같으면
당시 고려와 송과 요(거란) 3의 미묘한 국제관계 가운데에,
의천이 왕의 동생으로 송으로 가게 되면
고려와 요의 외교적인 마찰, 분쟁의 소지가 있었기 때문에,
문벌귀족, 대신들이 의천의 입송구법을 만류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 박용진 박사(국민대 강사)
의천은 이미 중국의 화엄종 정원과 수 차례 편지를 주고받으며
송나라행을 구체적으로 준비하고 있었다.
'정원법사에게 올리는 편지'
그리고 밀항을 하기 2년전
정원으로부터 초청장까지 받는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서신은 물론 밀항 준비까지
송나라 상인들이 돕고 있다는 것이다.
"의천이 몰래 제자 2인과 더불어
송나라 상인 임영의 배를 타고 갔다."
- 고려사 열전3
"그 당시 송과 고려는
요를 의식하여
공식적인 외교관계를 맺지 않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주로 비공식적인 외교관계로
이전부터 고려와 송을 왕래하던 송상들을 통해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의천도 입송하기 전
청주의 복건성으로부터 들어오는 상인을 통해서
송나라 조정과 또 불교 정원 같은 분과 서신 왕래를 하며
송의 정세를 상당히 파악하고 있는 상태였고,
그 때 송나라측에서는 '어떤 외교적인 이유(군사 동맹의 필요성)'로
의천에게 송상을 통해 입송을 권유했던 것으로 추측이 되고 있습니다."
- 이범학 교수(국민대 국사학과)
입송하기 전 글을 보면
의천의 의지는 매우 확고했다.
"송나라에 들어가는 배들을 바라보니
불법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 더욱 간절합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주상께서는
형벌을 무릎쓰는 신을 용서하소서.
이제 만 번의 죽음을 가볍게 여기고
험한 파도에 몸을 맡기옵니다."
이제 의천은 밀항을 감행한다.
조정 대신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힌 의천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밀항뿐이었다.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송나라 밀항을 치밀하게 준비했던 대각국사 의천.
그는 조정에 들어가 눈물을 흘리며 호소도 해보았지만
번번히 조정 대신들의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결국 의천이 택한 것은 송나라 상선을 타고 밀항하는 것이었습니다.
밀항을 통해 송나라로 건너간
의천의 주요 여행 경로를 살펴보겠습니다.
의천은 정주항에서 송나라 상선에 몸을 싣고
25일간의 항해 끝에 중국 산둥반도 남쪽에 있는 밀주 판교진에 도착합니다.
여기서 다시 육로를 통해 연운항 -> 상구를 거쳐
당시 북송의 수도였던 개봉으로 향해
한달 남짓 머무르면서 송의 황제를 비롯해 많은 관료, 승려들과 교류합니다.
그리고 밀항을 도왔던 정원법사를 만나기 위해 항주로 내려가는데요,
이 때는 변하라는 수로와 수나라때 만들어진 경항운하를 이용합니다.
항주에서 오랫동안 머물렸던 의천은
귀국 직전 이곳 천태산 북청사를 들러
영파를 거쳐 다시 정주로 돌아옵니다.
의천이 송나라에 머문 기간은
총 14개월로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습니다만,
그가 거쳐간 길은 직선으로 연결해도 2만 리가 넘는 대장정이었습니다.
의천이 송나라에 간 것은 지금으로부터 거의 천 년전인데요,
중국에 남아있는 그의 발자취를 살펴보겠습니다."
2. 송나라에서의 의천의 행적
"의천이 불경 170권 3부를 혜인원에 기증했다.
또한 금을 시주하여 화엄각을 지었다."
"그리하여 황제의 조서, 항주의 공식 서류, 사찰 비석 등은
모두 '혜인고려사'로 기록하였다."
중국 산둥반도 남쪽에 위치한 교주시.
대각국사 의천이
오랜 항해 끝에 도착한 곳이 당시 밀주 판교진이
오늘날의 교주항 부근이다.
교주시에 있는 한 공원.
이곳에 '고려정관(高麗亭館)' 비가 세워져 있다.
'고려정관'이란
고려에서 온 사신들을 위해 세운 숙소를 말한다.
비문에는
'의천이 판교진에 상륙, 잠시 머문 후 북송이 수도 변경(개봉)으로 갔다'고 전한다.
"많은 고려 상인들이
한반도에서 밀주 판교진을 거쳐
수도 개봉으로 갔습니다.
송나라 조정은
밀주와 개봉 사이 주요 도시에
고려 상인과 승려를 위한 고려관을 세웠습니다.
밀주의 고려관은 당시 규모가 가장 컸습니다."
- 장수풍 연구원(청도시 사회과학원)
당시 중국으로 가는 길은
북쪽 산둥반도의 등주로 가거나
남쪽 영파로 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의천 일행은 등주가 아닌 밀주 판교진을 통해 송나라에 들어갔다.
왜 그랬을까?
청나라 때 쓰인 <청주부지(靑州府志)>에 의하면,
의천이 밀항하기 한 해전에
송나라 조정은 조서를 내려
밀주에 고려관을 지었다고 한다.
"송나라 때 고려관이 이 곳에 있다.
원풍 7년(1084) 조서를 내려 고려정관을 지었다."
"한나라 이후 수. 당 때까지
가장 번성했던 항구는 래주와 등주였습니다.
그러나 송은 요와의 잦은 전쟁으로
이 항구들을 사용하는데 큰 제약을 받았습니다.
요가 이 항구들에서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송은 어쩔 수 없이 항구를
산둥반도 남쪽, 밀주 판교진으로 옮겨야 했습니다."
- 장수풍 연구원(청도시 사회과학원)
송나라 조정은
판교진에서 수도인 변경으로 향하는 길목마다
숙소를 설치하고 관리를 파견해
의천의 여행을 도왔다.
지금은 개봉으로 불리는 북송의 수도 변경.
이곳에서 당시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다.
도시 한쪽에 우뚝 서 있는
높이 55미터의 철탑만이 옛 영화를 짐작케 한다.
도심 한복판에 자리한 '송도어가(宋都御街)'.
'고려의포(高麗醫鋪)'
지난 2000년초 개봉시에서
옛 송나라 수도의 번화했던 거리를 재현해놓은 것이다.
용정공원은
북송의 궁궐이 있었던 자리다.
현재 있는 건물은 대부분 후대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수차례 반복된 홍수로 북송의 황궁이 물밑으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역사상 수차례 발생한 황하의 범람으로 인해
송나라 황궁은 지하 7~8미터 아래 묻혔습니다.
땅 위에서는 흔적을 찾을 수 없으나
고고학 탐사를 통해 황궁의 기본 상황은 파악했습니다."
- 증광경 관장(개봉시 박물관)
의천이 찾았을 때
송나라 황제는 직접 수궁전에 나와 의천을 친견하고
많은 예물을 하사하는 등 극진히 접대했다.
송나라 황제는 왜 의천을 그토록 환대했던 것일까?
"북송은 건국 이래 오랫동안 나약했습니다.
송 신종은 새로운 개혁을 시작했습니다.
신법개혁(왕안석)이라고 하는 것으로 매우 많은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동시에 군사적인 측면에서도 약국의 지위를 벗어나고자 했습니다.
부국강병책과 함께
외교적으로도 적극적으로 고려를 이용해 요를 견제하고자 했습니다.
송나라 조정이 고려를 특별대우하고 의천을 환대한 것도 이와 관계가 있었습니다."
- 장수풍 연구원(청도시 사회과학원)
북송의 수도 변경에 도착한 뒤
의천은 계성원(啓聖院)에 머물면서
황실의 주선으로 당시 화엄종의 대가인 유성법사와 교류한다.
황궁의 서문 근처인 계성원은 남아있지 않지만
당시의 복원 모형을 보면
황제가 머물던 대경전(大慶殿)에 근접해 있어
송 조정의 각별한 대우를 짐작케 한다.
한달 동안 황궁에 머문 뒤
의천은 오랫동안 교류해온 정원을 만나기 위해
경항운하를 통해 항주로 향한다.
항주는
예로부터 이승의 천당이라고 불릴 정도로
빼어난 산수로 유명한 곳이다.
그 때문인지 당시 항주에는 무려 360여 개가 넘는 사찰이 있었다.
항주는 송나라 불교의 중심지였던 것이다.
정원이 있었던 혜인원은
항주의 절경인 서호 남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지금은 그곳에 호텔들이 들어서 절의 흔적은 찾을 수 없고
대신 절터 한컨에 소동파상이 세워져 있다.
소동파는 의천이 귀국한 뒤 항주지사로 부임했었다.
혜인사터
소동파 상
혜인사산도
그런데 안내표시석엔
이곳이 '혜인원'이 아닌 '혜인고려사터'라고 적혀있다.
왜 이런 이름이 적혀 있을까?
의천의 방문을 계기로 송 조정은
혜인원의 세금을 면제해주면서 시설을 정비시켰다.
의천은 이곳에 오랫동안 머물며
정원으로부터 화엄학을 공부하게 된다.
함순임안지
의천이 일방적으로 배우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항주의 <지방지>에 따르면
의천은 많은 돈과 불경을 시주하게 되는데
이후 혜인원은 '고려사'로 불리게 된다.
"의천이 불경 170권 3부를 혜인원에 기증했다.
또한 금을 시주하여 화엄각을 지었다."
"당시 항주인들은 혜인사를 '고려사'라고 불렀습니다.
의천이 고려의 왕자였기 때문입니다.
그가 불경을 기부하고 돈을 내어 절을 증축한 후
고려사로 개명되었습니다.
그 후 관청과 송 조정에서도 이에 동의했습니다.
그리하여 황제의 조서, 항주의 공식 서류, 사찰 비석 등은
모두 '혜인고려사'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 포지성 연구원(절강대학 한국학연구소)
청나라 때 만들어진 지도에도
혜인원은 고려사로 표시되어 있다.
혜인원은 1958년에 없어졌는데
일제 강점기까지도 '고려사'라는 이름이 남아있었다.
의천은 항주에 머물며
많은 절을 방문하고 승려들과 교류하는데
그 중에 하나가 상천축사다.
의천은 이곳에서 천태종 승려 종간을 만나
천태종의 기본 교리와 수행법을 배우게 된다.
"의천은 상천축사에서 종간대사를 만납니다.
그에게서 천태종을 배웁니다.
또한 의천은 항주에 있을 때 용정사에서 원정을 만납니다.
원정과 종간은 사제지간인데
의천은 이들에게서 천태종 교리를 공부했습니다."
- 포지성 연구원(절강대학 한국학연구소)
14개월의 유학을 끝내고 귀국하기전
의천은 천태산를 찾는다.
천태산 기슭, 풍광이 아름다운 곳에
중국 천태종의 중심 사찰인 국청사가 자리잡고 있다.
이 절은 천태종의 창시자인 지자대사의 유언에 따라
수양제가 창건한 것이다.
천태산 뒤로 자동차로 한 시간 가량 올라가면
천태산 정상에 지자대사의 육신을 모신 지자탑원(智者塔院)이 있다.
의천은 지자대사탑에 참배를 하면서
고려에 돌아가면 목숨이 다하도록
천태종 개창을 위해 노력할 것을 맹세한다.
의천은
송나라에서 수집한 3천 여권의 불교 전적을 가지고
귀국길에 오른다
마침내 중국에서 불법을 배우고
불전을 이루겠다는 애초의 뜻을 모두 이룬 것이다.
"앞서 보신 것처럼 송나라 조정의 환대는 전례가 없는 극진한 것이었습니다.
송나라는 고려에서 온 의천을 왜 그렇게 극진하게 대접했던 것일까요?
그것은 당시 미묘관 동북아의 정세 때문이었습니다.
<국제관>을 통해 알아보겠습니다."
"대각국사 의천이 송나라를 방문한 당시
동북아의 국제 상황입니다.
중국의 송나라는
북쪽의 요나라로부터 끊임없는 외침에 시달려왔습니다.
11세기 초의 송은 요와 협약을 맺고 평화를 되찾기는 했지만
매년 엄청난 양의 금와 은을 갖다바쳐야 하는
굴욕적인 외교의 결과였습니다.
한편으로는 서하와의 계속된 전쟁으로
송나라의 재정은 파탄나고 백성들의 삶은 궁핍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약관의 나이 스무살에 황제에 오른 신종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왕안석을 통해서 신법개혁을 강력히 추진했는데요,
왕안석의 신법은 탈세를 막고 재정을 늘리는 등
한마디로 부국강병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왕안석의 신법은 대외정책에서도 변화를 추구하는데요
이 때 나온 것이 '連麗制遼(연려제요)'책입니다.
고려와 연합해서 요나라에 대응한다는 것인데요
당시 송나라는
고려가 요의 침략을 세 차례나 물리친 군사강국임을 잘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고려왕의 동생 의천이 방문하자
송나라는 정치적인 목적에서 그를 극진히 환대했던 것입니다.
재밌는 것은 우리에게 중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문인 소동파가
고려 배척론을 제기하고
의천의 방문에 대해서도 여러 차례 비난했다는 점인데요
그 이유는 소동파가 왕안석의 개혁정책에 반대하는 구법당 관료이기도 했지만요
당시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의천 등 고려 사신의 접대를 위해서 지나치게 비용을 쓴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3. 의천의 '교장(불교연구 주석서)' 간행 사업
"흥왕사에 교장도감을 설치하고
요와 송에서 구한 4,000권을 다 간행하였다."
- 고려사 열전3
"'속장경'은
일본 학자에 의해 잘못 붙여진 이름,
본래 이름이 <신편제종교장총록>에도 나와 있듯이
'교장'으로 해야 합니다.
- 박상국 실장(국립문화재연구소)
"그런 일이 있었군요.
아무튼 송나라에서 귀국한 의천은
애초 그가 꿈꾸었던 일들을 하나씩 추진해나갑니다.
그가 제일 먼저 착수한 것은
우리에게 속장경으로 잘 알려진 교장을 간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전남 순천에 있는 송광사.
지난 2004년 초,
절 입구에 있는 사천왕상과 사천왕문을 보수하던 중
의천과 관련된 중요한 고서가 발견되었다.
"사천왕문과 사천왕상이 상당히 불완전하고 많이 훼손된 상태였거든요.
그러던 차에 보수를 하기 위해 사천왕상의 복장을 조사하던 차에
그 전적이 발견된 겁니다."
- 김영주 연구원(송광사 성보박물관)
불상의 배 안에 사리나 경전을 넣는 것을 복장이라고 하는데
송광사 사천왕상 내부에서 모두 12종의 전적이 발견된 것이다.
현재 이 책들은 송광사에 보관되어 있는데
검토 결과 그 중 11종은 불경에 대한 연구 주석서인 교장으로 확인됐다.
그중 일부에 간행 기록인 간기가 남아있는데
고려 흥왕사에서 처음 간행한 것을
조선시대 간경도감에서 다시 간행했다고 적고 있다.
'고려국흥왕사'
'조선국 간경도감'
"송광사 사천왕상에서 발견된 교장을 보면은
그 뒷장에 고려 대각국사 의천 시대 간행된 원래 간기와
조선 세조때 간경도감에서 간행했다는 중수 간기가 같기 기록되어있습니다.
그걸 통해서 이 책은 대각국사 의천이 처음 간행했던 원간본이 아니고
조선 세조때 간경도감에서 간행한 중수본임을 알 수 있습니다."
- 송일기 교수(중앙대 문헌정보학과)
송광사에는 이번에 발견된 교장 이외에도
몇 권의 교장이 더 전해져 있다.
이 책들에는
최초의 간행이 고려 흥왕사에서 의천이 간행했다고 되어있다.
대반야반경소(송광사 전래본)
의천(義天) 대흥왕사봉(大興王寺奉)
중국에서 귀국한 직후 의천은
개경에 있는 흥왕사에 교장도감을 설치하고(1086년)
송나라에서 수집해온 3천권의 교장들을 간행할 준비에 착수한다.
교장을 본격 간행하기 앞서 펴낸 것이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摠錄)'이다.
간행할 교장의 총 목록인 것이다.
목록에는 총 1085부, 4858권이 기록되어 있다
의천의 교장사업은 그야말로 방대한 작업인 것이다.
교장총록을 만든 이듬해 1091년.
의천은 누락된 교장을 수집하기 위해
직접 남방 지역 사찰 순례에 나섰다.
전남 순천 선암사 뒤편에 있는 대각암(大覺庵)은
의천이 남방 순례 때 머문 곳으로 전해진다.
이런 인연으로 선암사에는 '대각국사 의천'의 영정을 비롯해
의천이 입었다는 '금란가사' '향로' 등 유품들이 전해져오고 있다.
또한 '선암사중창건도기'에 따르면
의천이 머문 동안 선암사는
대대적으로 중창되었다고 한다.
"선암사는 한 1,470여 년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 유구한 역사 중에 의천 대각국사의 흔적이 제일 많이 남아있고
그분이 선암사를 제일 크게 중창 불사를 하셨지요."
- 승범스님(선암사 성보박물관장)
의천은 국내 뿐만 아니라
송과 요에도 사람을 보내 교장을 구해왔다.
그렇게 십 년에 걸쳐 간행 사업을 통해 이루어진 교장은
모두 4천권에 달했다.
"흥왕사에 교장도감을 설치하고
요와 송에서 구한 4,000권을 다 간행하였다."
- 고려사 열전3
"의천이 간행한 교장총록이라는 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중국과 거란과 신라, 고려에서 저술된 불교 전적들을 전부 모아서
하나의 총서 형태로 간행한 것을 이야기 하는데,
그것은 대승불교권,
한자로 경전을 번역하는 문화를 총정리하는
역사적인 불경 사업이었습니다.
바로 대승불교권에 불교연구서들을 총수집, 간행한 사업은,
인도에서 만들어진 경전을 간행하는
경, 율, 론 삼장과는 다른 의미를 갖는 것이죠.
어떤 의미에서는 동아시아 불경을 정리한다는 의미에서
대장경보다도 더 큰 문화사적인 의미가 있는 사업이라고 보여집니다."
- 최병헌 교수(서울대 국사학과)
고려 시대 의천이 간행했던 목판본들은
초조대장경과 함께 대구 부인사에 보관되어오다가
몽고 침입 때 모두 불타버렸다.
교장의 원간본 일부가
일본 동대사 정창원 등에 전해오고 있다.
고려 때 간행된 원간본은
조선 세조 때 만든 간경도감 판본과는 달리
두루마리 형태를 하고 있다.
이것들은 의천 생존 당시
일본측 승려의 요청으로 보내진 일부가 전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의천이 간행한 교장은 대부분 사라졌을 뿐아니라
그 이름 또한 오랫동안 '속장경(續藏經)'이라고 잘못 불리워져 왔다.
국립문화재연구소 박상국 실장에 따르면
일본 학자에 의해
속장경이라고 잘못 붙여진 이름이 지금껏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속장경이라는 말은
대장경의 속편 혹은 후편이라는 말로써 사용됩니다.
그런데 의천 대각국사가 수집해서 간행한 것은
대장경의 후편 혹은 속편이 아니고
대장경에 대한 연구 주석서를 모두 모아가지고 간행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일본 학자에 의해
한 번 '속장경' 내지 '속대장경'이라고 불리워진 이후에
해방 이후 오늘날까지 잘못 불리워지고 있는 것이죠.
본래 이름이 <신편제종교장총록>에도 나와 있듯이
'교장'으로 해야 합니다.
- 박상국 실장(국립문화재연구소)
동아시아 전역에 흩어져 있는
4천 여권의 교장을 모두 수집, 간행하고
널리 보급했던 의천의 교장 간행 사업.
그것은 밀항까지 불사했던 그의 강력한 의지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의천.
그의 이름은 동아시아 불교계의 발전 사업에 뚜렷하게 남아있다.
"당시 의천이 나라 안팎의 모든 교장을 수집하고 목록을 만들어 간행했다는 것은
오늘날로 치면 어느 한 학문 분야에 전 세계 모든 논문들을 수집하고 이를 체계화 한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의천의 노력은 그야마로 세계 역사상 전무후무한 업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 고려 불교 통합 운동, 천태종 개창 실현!
'천태 사상은 최고의 진리이나
아직 나라에 종파가 세워지지 않아 애석하다
하지만 깊은 뜻을 가지고 있다'
의천이 송나라에 갔던 목적은 교장을 수집하는 것외에
고려에서 천태종을 개창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경북 칠곡에 있는 선봉사 대각국사 의천비인데요
천태종 개창을 향한 의천의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습니다.
'천태 사상은 최고의 진리이나
아직 나라에 종파가 세워지지 않아 애석하다
하지만 깊은 뜻을 가지고 있다'
당시 고려 불교는 왕실이 후원하는 화엄종과
문벌귀족이 후원하는 법상종,
그리고 제 3의 종단인 선종으로 나눠져
갈등과 대립이 심각했습니다.
의천의 천태종은
이러한 분열된 불교계를 통합하고자 하는 시도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시도는 곧바로 강력한 반발에 부딪힙니다."
교장 간행과 함께 천태종 개창을 준비하던 의천은
마흔살이 되던 해 갑자기 흥왕사 주지직마저 내놓고
해인사(경남 합천)로 쫓겨난다.
팔만대장경판이 보관되어 있는 해인사 장경판전에는
사찰에서 만든 서적 목판만을 보관하는 사간판전이라는 전각이 있다.
이곳에는 의천이 남긴 글들을 모아 엮은 대각국사문집 목판이 보관되어 있다.
문집에는 의천이 해인사로 쫓겨난 후에 지은 시문들이 남아있다.
"신은 종실의 은혜는 깊지만
불문의 덕은 적어 돌아보면 좋은 때를 만나지 못해
품은 뜻은 있으나 펼 수 없기에
산 속에 숨어산 지 오래입니다."
- <대각국사문집> '제선왕문'
해인사로 쫓겨난 자신의 복잡하고 답답한 심정을 읊고 있다.
"치욕을 당해 가며 여려 해 서울에 살면서도
교문에 쌓은 공이 없어 부끄럽구나
이 때에 도를 행한 것은 공연한 헛수고였으니
어찌하여 산골에서 성정을 즐기는 것만 같으랴
일이 지난 뒤 몇 번이나 탄식을 일으켰던가
해가 바뀌어도 군친의 은혜를 갚을 길 없네."
- <대각국사문집> '해인사퇴거유작'
"의천은 시문에서 개경에서 살았던 삶들이 상당히 굴욕적이었고
이 때 행했던 불교와 관련된 활동들이
상당히 헛수고였다는 것을 비탄해하고 토로하는 심정들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의천이 당시 처했던 정치적, 불교적 상황의 좌절속에서
해인사로 내려갔음을 말할 수 있겠습니다."
- 박용진 박사(국민대 강사)
의천은 왜 쫓겨났던 것일까?
의천이 귀국하고 3년뒤(1089년 10월),
어머니 인예태왕후의 지원으로
천태종의 중심 사찰인 국청사 건립 공사가 시작된다
하지만 나라의 재정 창고인 신흥창 화재 사건이 발생하며서
공사는 5개월만에 중단되고 만다.
"이 신흥창 화재 사건과 국청사 공사 중단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연치 않게도 국청사 공사가 시작되고 5개월만에
화재 사건과 함께 국청사 건립이 중단되고 있다는 것은,
국청사 건립을 중심으로 하는 불교계 재편 운동에
반대 세력의 반발이 상당히 거셌다는,
화재 사건과 더불어 국청사 건립이 중단되었다는 것은
두 세력의 대립과 갈등이 이 신흥창 화재 사건으로 상징화 되지 않는가 이렇게 판단됩니다."
- 박종기 교수(국민대 국사학과)
국청사 공사 중단 2년후
인예태후와 형인 선종마저 죽자
의천은 곧바로 해인사로 쫓겨난 것으로 보인다.
대각국사묘지명
'인예태후와 선종이 죽자
의천은 해인사에 머물렀다.'
그렇다면 의천은 왜 천태종 개창을 추진했을까?
"그 당시 불교 정황이 화엄종과 법상종, 선종 등 3세력으로 대립했거든요.
그런 상황에서 천태종을 개창한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화엄종 세력하고 선종 세력을 결합을 시켜서
제 3의 종단을 만드는 것이거든요.
그러다보니 결과적으로 인주 이씨가 주도하던 법상종 세력은
상대적으로 천태종 계열 세력보다 위축되고 소외될 가능성이 분명해진 거죠.
그러니 자기들의 교단 지배력과 교단 내에 권력이 위축될 것을 예상하고
인주 이씨 세력과 법상종 세력이 당연히 반발하고 저항한 것지요."
- 김광식 박사(부천대 겸임교수)
인주 이씨 세력은
딸 셋을 왕비로 출가 시킨 이자연(李子淵 1003∼1061) 이래로
고려의 대표적인 문벌 귀족 세력으로 부상했다.
"딸 셋을 임금에게 출가시켰다.
가문의 번창함이 글자가 생긴 이래
공과 비교할 자가 없었다."
- 이자연 묘지명
인주 이씨 가문은
그들의 자제들을 법상종 종단에 주로 출가시켰다.
개경에 있는 현화사와 함께
법상종의 중심 사찰인 전북 김제 금산사에는
당시 이자연의 다섯째 아들인 혜덕왕사 소현이 주지로 있었다.
천태종 개창을 위한 국청사 건립 공사는 중단되고
의천이 해인사로 물러나 있을 당시,
소현은 금산사를 크게 중수하고
절 남쪽에 광교원을 설치하여
법상종 계통의 불경을 대대적으로 간행했다.
혜덕왕사비에는
소현이 법상종의 대표 사찰 현화사 주지로 있을 때
대대적인 중수 공사를 했다고 적고 있다.
"혜덕왕사가 현화사에 거처할 때
선리궁을 설치, 수창 2년(1096년)에 완공하였는데
그 규모가 굉장히 웅대하였다."
의천이 해인사로 쫓겨났을 때
법상종은 오히려 크게 융성하는 상황이었다.
"천태종의 국청사 공사가 중단되는 그 시점에,
현화사는 오히려 소현에 의해 대대적인 중창을 한다거나,
금산사에서 다양한 불교 서적, 특히 법상종 계열의 서적을 모아서 출판한다는 것은,
인주 이씨의 강력한 후원이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는 상황이라 볼 수 있는 것이죠."
- 김광식 박사(부천대 겸임교수)
고려의 대표적인 문벌귀족 인주 이씨 가문의 권세는
이자의 때 극에 달하는데,
이자의는 왕위를 찬탈하려는 난까지 일으킨다(1095년 7월).
이자의의 난은
의천의 셋째 형인 계림공이 진압한다.
그리고 그는 조카를 대신해 왕위에 오른다.
바로 숙종이다.
"이자의가 무뢰배를 모집하여 큰일을 일으키려 하였다.
계림공(숙종)이 소태보 등을 시켜 이자의와 그 도당을 베었다."
- 고려사 열전8
"고려사 기록에는 숙종이 이자의의 난을 진입하고 즉위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숙종이
이자의로 대표되는 인주 이씨 세력을 정치적으로 제거하고
실질적인 쿠데타로 즉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 박종기 교수(국민대 국사학과)
숙종은 즉위하자마자
해인사로 물러나있던 의천을
다시 흥왕사 주지로 불러올린다.
"숙종이 등극하자
급히 해인사로 사신을 보내
국사를 불러 흥왕사 주지를 맡게 하였다."
- 흥왕사 대각국사묘지명
또한 국청사를 완공해
천태종을 개창한다.
천태종을 기념하여 세운 선봉산 대각국사비는
당시 천태종 개창 상황을 자세히 전하고 있다.
숙종의 명에 따라
선종 승려 천여 명이 의천이 주도하는 천태종으로 옮겨왔다는 것이다.
이것은 화엄종과 선종의 통합을 의미하는 것이다.
"왕명에 따라 명공학도들이 모였다.
대각국사 문하에 300인과
선종 승려 천여 명도 함께 모였다."
"고려 불교사는 신라말 선종이 들어온 이래에
선종과 교종의 대립과 갈등이 계속 되어왔고,
고려 불교사는 선종과 교종을 어떻게 통합하냐는 문제가 핵심이었습니다.
의천의 천태종 개창은 간접적인 방법이긴 하지만
바로 교종과 선종을 통합하려는 시도로써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의천의 이런 선구적인 업적이 있어서
100년후에 다시
지눌(조계종)의 선교 통합 운동이 완성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의천의 불교사의 업적은
선교 통합의 역사에서 크게 평가되는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 최병헌 교수(서울대 국사학과)
천태종 개창.
그것은 분열된 불교를 통합하고
아울러 왕권을 강화하려는 정치적 목적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5. 주전론 상소, 시대의 경세가, 개혁가 의천!
"지금 이곳에는 고려 시대 사용했던 화폐들이 전시되어 있는데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화폐가 만들어진 것은 성종 때 996년입니다.
이 시대 철전과 함께 건원중보가 만들어졌으나 널리 쓰이지 못했습니다.
그 뒤 숙종 연간에 삼한통보, 해동통보 등의 동전과 함께
일명 활구라고 불리는 은병이 만들어졌는데요,
이 때 화폐 제조를 적극적으로 주장해 실행시킨 사람이
바로 대각국사 의천이었습니다.
어떤 계기로 고려의 승려였던 의천이 화폐 유통에 관심을 갖게 되었을까요?
또 그가 상소를 올려 적극적으로 화폐 주조를 권장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대각국사문집>에는
의천이 상소를 올려 주전 건의를 하는 글귀가 실려있다.
'주전'
즉, 화폐를 만들어쓰면 이로운 점을 예를 들어 설명을 하고 있는데
"첫째, 돈을 쓰면 운반의 수고로움을 덜고 편리하고
둘째, 간교한 무리들이 쌀에 잡물을 섞는 협잡을 방지할 수 있고
셋째, 녹봉을 쌀로만 지급하는데서 오는 폐단 방지
넷째, 화폐를 사용하면 보관과 저축, 지급에 편리하다"
"이를테면 교환 수단으로써 거래에 편리하다 점,
가치 저장상 물품 화폐를 쓸 때보다 훨씬 유리하다는 점,
국가 재정 운영과 관련해서 여러가지 장점을 가지고 있다는 점들을
이론적으로 쭉 정리하고 있는데,
이런 대각국사 의천의 화폐론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확인되는 기록상 최초의 것이고
또 굉장히 체계적으로 지적하고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 채웅석 교수(가톨릭대 인문학부)
의천의 해박한 화폐 이론은
실제 중국에서의 체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북송 개봉 상국사는
황제들이 제를 올리며 나라의 안녕을 기원했던 사원이었다.
당시 상국사는
백성들과 상인들을 위해
한달에 다섯번 절을 개방해 시장이 열리게 했다.
상국사 교역도
또한 당시 개봉에서는 시장이 활발히 펼쳐졌는데
이곳에서 의천은 돈이 갖는 개방성과 편리를 체험한 것이다.
"당시 송나라 같은 경우는
상공업이 크게 발전하면서
동전의 발행량이나 유통량이
당나라 시대에 비해서 연간 20배 이상 늘어나게 됩니다.
또 그 당시 왕안석을 중심으로 신법 개혁이 추진되면서
국가가 주도해서 생산력을 향상시키고
국가 재정을 늘려나가는 정책들을 펴고 있었는데,
그런 점들을 의천이 목도를 했을 것이고,
고려에서 숙종 때 신법 개혁 추진과 관련해서
의천이 화폐 건의를 주장하게 되는 배경이 되지 않았나 봅니다."
- 채웅석 교수(가톨릭대 인문학부)
당시 숙종은
의천의 건의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주전도감을 설치하고
해동통보와 삼한통보, 삼한중보를 발행한다.
그리고 강력하게 화폐 유통을 추진한다.
또한 일명 '활구'라고 불리는 은병을 만들어
고액 화폐로 유통시켰다.
숙종은
취약해진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여러가지 개혁 정책을 추진하는데
그 중 하나가 남경 천도였다.
즉위한 지 4년 되던 해 숙종은 북한산 자락에 승가굴에 제를 올린 뒤
남경을 세울 양주땅, 현재 서울을 직접 돌아보았다.
당시 숙종의 순행에 의천도 동행하는데
그가 숙종의 남경 건설 사업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왕이 왕비, 원자, 양부 관료 및 우세승통(의천)과 삼가간에 행차하였다."
- 고려사 숙종 4년(1099) 9월
'경'이란 일종의 준수도로
그 지역의 비중이 그만큼 커지는 것이다.
숙종이 남경을 건설한 것은
개경과 서경(평양), 그리고 남경(서울) 등 3경을 완성하면,
나라가 융성하고 태평하게 된다는 풍수지리설을 받아들인 것이지만,
실제적으로는 개경 지역에 근거하는 문벌 세력을 견제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비록 개경의 지덕이 세다는
풍수지리설을 명분으로 해서 남경 천도를 내세웠습니다만은,
그 이면에는 개경에 뿌리를 내린 문벌 귀족을 견제하고
새로운 왕권을 행사할 수 있는 터전으로써의
남경을 정치의 중심으로 생각한 숙종의 의도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 박종기 교수(국민대 국사학과)
의천과 함께
숙종의 개혁을 주도한 사람은 윤관이다.
경기 파주 여충사(麗忠祠)
윤관은 숙종의 뜻에 따라 군사 개혁을 단행한다.
두차례 여진과의 싸움에서 패한 뒤
윤관은 정규군외 별무반을 설치(1104년)할 것을 건의한다.
별무반에는
양반, 승려, 상인들은 물론
문벌 귀족들의 사병도 편입시켰다.
별무반 설치는
군사 강화이자 바로 왕권 강화책이었다.
"별무반을 설치하니
산관. 이서로부터 상고. 천예. 승려에 이르기까지
예속되지 않은 자가 없었다."
- 고려사 지35
그리고 남경 설치와 별무반 설치를
재정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이
바로 의천의 주전론인 것이다.
"숙종이 실시했던 여진 정벌, 수도 천도, 별무반 창설 같은 것은
막대한 재정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국가가 전국의 유통권을 장악해서 재원을 마련해서
막대한 정책을 실시하는 재정적 기반을 마련하는 목적과 함께
당시에 문벌 귀족들이 장악했던 경제권을
국가가 직접 장악하려고 하려는 목적도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 박종기 교수(국민대 국사학과)
<대각국사의천비문>에는 의천에 대해
'나라의 존칭으로 임금과 더불어 나라의 큰 일을 함께 논의하는 경우가 매우 많았다'고 적고 있다.
대각국사 의천.
그는 단순히 승려로 머문 것이 아니라
고려 중기 취약했던 왕권을 강화하고
현실 정치를 개혁하려고 했던 뛰어난 경세가였다.
"오늘 우리는 대각국사 의천의 삶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앞에서 보신 것처럼
그는 교장을 간행하고, 천태종을 개창하는 등
고려 사회의 불교 발전을 위해 많은 기여를 했습니다.
또한 친형인 숙종을 도와 취약해진 왕권을 강화하고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의천이 위험을 무릎쓰고 송나라로 밀항을 했던 것은
이러한 일들을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의천의 삶에는
당시 고려 사회가 안고 있었던 문제에 대한 고민과
그 해결을 위한 노력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원하는 삶을 다 이루지 못한 채
마흔 일곱이란 나이에 삶을 마감합니다.
의천의 삶을 몇 마디 말로 평가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당대 대문호 김부식은
개성 영통사에 있는 대각국사비문에
의천을 시대를 뛰어넘은 개혁가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국사는 천성적으로 성인의 도를 가지고 태어나
어려서부터 배움에 뜻을 두고 세속적 영광에는 조금도 미혹치 않았다.
도덕이 쇠퇴하고 학문은 황폐해 가는 시대에
홀로 세태를 거슬러 간 개혁가였다."
- 김부식
- 고두심의 HD 역사스페셜을 보고
(한국사 전에 비해 내용이 어렵고 서술형입니다만, 모쪼록 열공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