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을 먹고 느긋하게 늘어지는데 아내가 느닷없이 회충약이라며 알약 하나와 물컵을 들이민다. 우선 무슨 놈의 회충약이냐고 따지자 아내는 가끔씩 먹어줘야 한단다.
이미 저녁까지 먹었기에 약효를 들먹이며 싫다는 기색을 보이자 아내는 상관이 없단다. 요즘 회충약은 밥을 먹으면서 먹는다고. 그리고 약을 먹어도 회충이 녹아 없어지기에 나오는 줄도 모른단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회충약을 털어 넣는 애들에게는 조금의 거리낌도 없다.
무섭다는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하긴 회충이라는 녀석을 한번도 구경 해보지 못하였을 것이다.
애들이 보고 있는데 먹지 않을 수가 없다.
실로 오랫만에 먹어보는 회충약이다.
회충약 하면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내게는 적어도,
첫째 우선 밥을 굶어야 한다.
둘째 노란 오줌이 나오는 것은 물론 하늘과 천지가 노란색으로 보인다.
셋째 온 몸과 세상이 빙빙 도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런 선입관이 깊게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먹기가 꺼림칙하다.
그러나 먹기 싫은 진짜 이유는 다음 날의 소동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가물거리는 추억을 헤집어보면 언제나 웃음꽃을 피워주는 것 중의 하나는 아마도 회충약으로 인한 에피소드가 아닌가 싶다.
혼자만 있을 때도 그때의 추억이 떠오르면 빙그레 웃음부터 번진다.
당시에 회충은 반드시 없애야 하는 박멸의 대상이었다.
선생님께서 회충은 우리의 영양소를 가로채는 원흉이라고 그렇게나 강조에 강조를 하였건만 하얗고 동그란 알약이 어찌도 그렇게 먹기가 어려웠는지.
대표적으로 기억되는 이름은 산토닝이었다.
당시의 회충약은 하얀 알약으로 너 댓 개씩을 한꺼번에 먹어야 했는데 그 맛이 약간은 씁쓰레한 맛이었다.
첫 모금의 물에 바로 목구멍을 넘겨버리면 쓴 맛이 그다지 심하지는 않았으나 실패하여 두세 번으로 접어들면 그 쓴 맛의 정도가 엄청나게 심해졌다.
회충약 먹는 날이면 선생님께서는 집에 가서 절대로 점심을 먹어서는 안된다고 신신당부를 하셨다.
그리고 저녁도 가능하면 늦게 먹으라고 하셨었다.
초등학교 시절
4교시가 끝나 집에 갈 시간이 되면 선생님께서는 커다란 양은 주전자 가득 물을 떠다놓고
직접 1번부터 차례로 불러내어 알약을 건네주면서 억지로 먹였는데.
내 짝꿍 복순이는
선생님께서 알약 몇 개에다 물 한 컵을 따라주고
“아~ ~ 해봐라.” 하시면
하얀 알약이 입안에 그대로 남아있기를 몇 차례
결국 엉덩이 몇 대를 맞고서 눈물 찔끔거리기도 했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혀 밑에 알약을 숨겼다가 나중에 뱉어냈다는 놈들과
손바닥에 놓고 입안에 넣는 척 하고는 재빠르게 물만 마셨다는 녀석들의 무용담이 들리고는 했었다.
학교에서 회충약을 먹은 다음 날 선생님께서는
“한 마리 나온 사람!” 하고 손을 들라고 하여 세어보고
“두 마리 나온 사람!” 하고 세어보고 했었는데
열 마리 정도에서 손들기를 끝내겠다는 선생님께서
“손 안든 사람!” 하니까 누군가가 번쩍 손을 들고는
“겁나게 나와부렀어라우.” 하였었다.
그리고 그날 들려온 소식 하나
이웃 반의 한 놈이
밤중에 잠자다가 항문이 어째 고물고물 한다 싶어
손가락에 잡히는 것을 무심코 잡아 당겼는데
회충 한 마리가 쏘옥 기어 나와 손끝에서 꼼지락 거리고 있어
울고불고 난리가 났었더란다.
그리고 나중에 들려온 소식 둘
당시에는 학교를 오갈 때 그 마을의 학생들이 모두 함께 모여 옹기종기 걸으며 온갖 추억을 만들던 시절이었다.
애향단인가 뭔가를 만들어 깃발을 들고 마을의 학생들 전부가 모여 선두의 구령에 맞추어 번호를 붙여가며 등하교를 하였다.
4교시에 끝나는 1학년이 6교시의 6학년과 함께 갈려고 운동장 구석을 맴돌며 배회하다 깃발을 든 6학년의 뒤를 따라가기도 했었는데
책보자기를 어깨에서 허리로 내려오도록 비스듬히 꽁꽁 동여메고 두 팔을 씩씩하게 흔들며 따라 갔는데 그때는 그 모습이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뒷자리 친구 놈이 절대로 비밀을 지키라며 들려준 얘기인데
아침에 학교를 오다가 볼일을 보러 길 옆 바위 뒤로 돌아간 상급생 계집애 한 명이 통 나오지를 않더란다. 기다리다 못한 다른 계집애 한 명이 무슨 일인가 싶어 가봤는데
나중에 들어간 계집애가 외마디 비명소리를 지르고 갑자기 뛰어내려와
“엄마! 엄마!”
하면서 발을 동동 구르더란다.
깜짝 놀라 죄다 우르르 몰려가 보았더니
상급생 계집애 앞에 꼬물거리는 회충의 무더기 앞에서 당황한 빛으로 허리춤을 추키고 있었단다.
(그런데 평소 배앓이를 자주 하던 그 애는 그 이후로 배앓이가 없어지고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하였는데 어른들은 그런 경우 거싯보가 빠졌다고들 말하였다.)
그리고 하나 더
고등학교 선배 한 분이 쓴 글인데 그 일부를 그대로 옮겨 보겠다.
지가 학교에 갈라고 막 세수를 하고 있는디
측간에서 “오빠 오빠” 하고
내 동생 맹순이가 악 비스꼬롬하게 막 나를 부릅디다.
“뭣 땜시 부르냐?” 헝께
“언능 와 보랑께. 언능”
그래서 오매 요것이 어짠 일로
‘똥 누면서 까지 나를 부른다냐 별일이세.’
그람시롱 가봉께로
오메 진짜 일은 일입디다.
맹순이 똥구녁에서 회충이 꼬물꼬물 함시롱 매달려 있는디 고것이 아무리 힘 주어도 안떨어진다고
“어째야 쓰까. 어째야 쓰까. ”
함시롱 눈물이 그렁그렁 헙디다.
나는 얼른 집 뒤 까끔에 가서 싸리나무를 꺾어 젓가락을 맹글어 갔고 와
회충들을 꽉 집어서 훅 방아댕게붕께
고것들이 쏙 빠져 똥 통에 떨어져각고 엇짤지 모르고 자빠졌습니다.
“오빠 잘 했제?”
나는 손바닥을 탈탈치며 돌아서서 입주댕이를 쪼갰지라.
그 당시 대변검사 한다고 선생님께서 채변봉투를 나누어 주었을 때는
측간에서 볼일을 보지 못하고 두엄자리에 재를 뿌려놓고 일을 보고는
조그만 비닐봉지에 콩알만 하게 콕 찍어 넣은 다음
부엌에서 비닐봉지를 불로 지져 겉봉투에 학년 반과 번호 이름을 써서 넣은 다음 밥풀을 이겨 꼭꼭 봉하여 제출하였었는데
나중에 보면 빈 봉투만 제출한 애들도 있었고
비닐봉지 가득 담아온 애들도 있었고
학교엘 올려고 나섰을 때서야 갑자기 생각나 측간에 가서 아무리 용을 써도 변이 안 나와 아버지 대변을 담아 제출하였다는 애들도 있었다.
가져오지 못한 애들은 선생님께서 다시 쥐어주시는 채변봉투를 받아들고 교실에서 쫓겨나기도 했었다.
참으로 생각해보면 절로 웃음이 나오는 회충약이다.
그러나 이제는 사라진 풍경이다. 애들에게 당시의 얘기를 들려주었더니, 얘기하는 나는 터지는 웃음을 가까스로 참는데 무슨 말인지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한다. 징그럽게 엉뚱한 얘기를 한다고 난리를 친다.
그립다. 그때의 정겨운 모습들이.
첫댓글 천구백사오십 년 대, 그 때를 요즘 세대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산토닝, 옛친구처럼 반갑네요 .회충약 단체로 먹던... 아련한 추억입니다.
우리반 머슴애는 공부하다가 고것이 입으로 나오는 바람에
선생님이 빼내고 난리가 났었지요. 재미있게 감상했습니다.
먹어 보셨나요? 저도 가만히 돌이켜 보니 입으로 나왔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언제 누구에게 들었는지는 모르지만.....감사합니다.
알약 구충제는 그래도 양반입니다. 가마솥에 해초를 끓여 먹이던 때도 있었습니다.
가마솥에 해초를 끓여 먹었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저희들은 경험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전체적으로 아직은 불필요한 사족이 많다는 것을 느낍니다. 일부러 조금 길게 늘려 약 4페이지 정도가 되도록 했었는데 향후에는 2페이지 정도가 되도록 과거의 추억을 더듬어 보겠습니다.
산토닝 이야기가 아주 재미있고요.특히 항문에 걸려 주렁주렁하는 모습은 징그럽지만 넌픽션으로 나도 경험했습니다.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