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삼동 주거지의 원위치 탐구 = 이형구 지음.
이형구 선문대 석좌교수가 지난해 발굴 50주년을 맞은 '역삼동 청동기시대 수혈 주거지 유적'의 가치와 보존 필요성을 담은 논문집.
역삼동 주거지 유적은 현재 서울 강남구 도곡동 매봉산 배드민턴장 아래에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유적의 규모는 폭 3m, 길이 16m, 깊이 50∼60㎝이다. 이곳에서는 조사 당시 토기와 도끼, 돌칼 등이 출토됐다.
저자는 "세계 최고의 문화도시라고 자처하는 서울 강남구에서 고대 유적 위에 체육시설을 지었다고 하는 사실은 우리를 당혹스럽게 한다"며 "사적이나 서울시 문화재로 빨리 지정하고 유적을 재발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또 다른 논고에서 "한강 유역의 신석기시대 유적은 평야에서 주로 발견되지만, 청동기시대에는 해수면이 상승해 유적이 상대적으로 높은 지대에 있다"며 "토기의 변화 양상도 해수면 상승과 연계해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태양. 120쪽. 1만2천원.
우면산에서 동쪽으로 뻗은 산줄기는 양재사거리 낮은 언덕을 지나 강남구 도곡동에서 매봉산의 88m와 95m 봉우리를 형성한다. 이어 동쪽으로 뻗어 탄천과 양재천이 만나는 곳에서 산줄기를 마친다. 매봉산은 우면산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청동기시대의 유적이 있었던 곳이다. 매봉산에 있는 역삼동 청동기유적은 한강유역에 벼농사가 시작된 뒤의 전형적인 주거지다. 이 유적은 한강 지류의 하나인 양재천변 역삼동 산 21-1번지(현재 도곡동)의 표고 90m의 구릉상에 위치한 민무늬토기시대의 거주지로, 화재로 인하여 유물이 원위치에 놓인 상태에서 그대로 발굴 조사되어 당시의 생활모습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그리고 매봉산에는 옛부터 이 마을의 풍작과 천재지변의 예방을 기원하며 수호신으로 받드는 동제당(洞祭堂)이 있다. 이 동제당은 매봉산 중턱 양지 바른 곳 도곡동 산 31-1번지에 남쪽을 향해 자리잡고 있다.매봉산에는 묘터에 관한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산 남쪽 기슭 독구리마을의 산 지세는 묘 자리가 있어 누구든 탐을 내고 있었다고 한다. 옛날 이 산은 장씨의 소유였는데 사돈인 이씨에게 묘터를 빌려주었다. 세월이 지나 장씨 집안과 이씨 집안이 서로 묘터의 소유권을 주장하였다. 이에 광주 고을의 원님은 묘를 썼던 이씨 소유로 판결하였다고 한다. 매봉산 서쪽 기슭 논현로 건너편 도곡동 산 177번지에는 60여년 전 자기 허벅지의 살을 떼어 아버지의 병을 고치고 3년간 묘살이를 한 김의신의 효자비가 서 있다. 효자비 앞에는 현재 역마을 사람들이 동신(洞神)으로 받드는 수령 약 700년의 느티나무가 있다.매봉산은 도곡동 산 31-1번지를 중심으로 한 91필지 249,800㎡가 도시계획에 의해 1987년 4월 22일 건설부고시 제152호로 미시설 근린공원으로 지정되어 도곡공원으로 이름 붙여졌다. 1993년 7월 23일 서울특별시고시 제218호로 최종 결정고시 되었고, 1993년 8월 5일 강남구고시 제30호로 지적고시 되었다. 도곡공원에는 간단한 운동시설 외에 별다른 시설이 없고 8동의 건물이 있다. 도곡공원의 임야면적은 44,000㎡로 연인원 10만명이 이용하고 있다. -서울시-
▲ 독구리 산제당
도곡동 산제당은 언제 처음 지은 것인지 모를 정도로 오래전부터 산제당이 존재하여 온 것으로 알고 있다. 적어도 이 마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500여 년 전부터 산제당은 존재하여 왔으리라 짐작된다. 매년 음력10월 초순에 택일하여 토착민들이 중심이 되어 서로 정성을 모아 제수를 마련하여 산제를 올리고 있다. 지금부터 약 60여 년 전에 산제당을 지금의 위치에 왼편으로 약100m 지점으로 옮긴 적이 있는데 그 해에는 나쁜 전염병이 돌고 흉년이 들어 주민들이 산신령님께서 노하셔서 그 같은 재앙이 든 것으로 알아 즉시 산제당을 지금의 위치로 원상복구하자 마을이 평온을 되찾았다고 한다.
▲ 孝子 金義信의 碑
오래전 김의신이라는 효자 한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아버지의 병을 고치려고 무척 애를 썼지만 백약이 무효였다. 뒷산 느티나무 밑에서 아버지의 병을 낫게 해달라고 백일기도를 하던 중 꿈에 백발노인의 산신령이 나타나서 사람의 허벅지살을 고아서 드리면 쾌유하게 될 것이니라 하고는 사라져 버렸다. 정신을 차린 의신은 자신의 허벅지살을 떼어 고아서 드렸더니 아버지의 병이 완쾌되었다. 병이 완쾌된 후 天壽를 다하고 돌아가시자 의신은 아버지 묘 앞에서 3년 동안을 움막을 치고 기거하면서 슬퍼하니 마을 사람들이 이곳 산 21번지에 孝子碑를 세웠다.이 비는 현재 역마을 사람들이 洞神으로 받드는 느티나무(수령 700년)앞에 있음
▲ 청동기시대의 수혈 주거지
BC7세기~4세기경 청동기인 들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이 주거지의 크기는 실내가 약 12평의 넓이로서 직사각형의 견혈식(堅穴式:세로로 파여진)이다. 유물로는 무문토기 9점, 돌도끼 3점, 반월형 돌칼, 단도마연토기 등 다수가 출토되었다. 유물은 숭실대학교 부설 한국기독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