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사 개념어
사전 삼림출판사 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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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주의 marxism
19c 사회상이 다 그렇듯이 marxism도 프랑스 혁명과 영국의 산업혁명의 이중혁명의 충격 속에서 생성된다
. 레닌에 따르면 마르크스주의는 19c 사상적 主潮인 독일 고전철학 영국고전 경제학, 프랑스의 사회주의를 원천으로 한다.
정체성은 여러 다양한 주장이 대립한다.
karl heinrich marx 1818-1883은 유대인 변호사인 아버지와 네덜란드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다.
6살에 세례를 받고 본 대학에서 인문학교육을 이수 1836년 베를린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 할 때
‘청년헤겔주의자’에 가담 한다.
당시 좌파 헤겔주의자인 ‘브르노 바우어’는
기독교가 도래 할 때보다 더 거대한 사회전복이 진행 중이다 역설한다.
1841년 마르크스와 청년헤겔주의자들이 ‘포이어바흐’의 기독교의 본질의 영향을 받아
헤겔의 변증법을 포이어바흐의 유물론과 결합시키는 노력을 했다.
마르크스는 라인신문의 편집자가 된 후 포로이센 당국의 정간시킬 때까지 독일에 있다
프랑스로 건너간다. ‘경제철학초고’와 ‘헤겔의 변증법적 비판을 위하여’를 출판한다.
그 내용에 ‘종교는 인간의 아편’이며 프롤레타리아의 봉기가 필요하다는 내용이 나타난다.
1845년 ‘엥겔스’와 함께 ‘신성가족’을 출판하여 청년헤겔주의자들의 사변적 관념론을 비판했고,
독일 ‘이데 오르기’에서 유물론적 역사관을 전개했다.
1847년 ‘프루동’의 ‘비판의 철학’에 맞서 ‘철학의 빈곤’을 출간 해 프루동을 부티 부르주아 적이라 비판한다.
1848년 ‘공산당 선언’에서 “이제까지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며
프롤레타리아의 승리로 계급투쟁 및 계급사회가 사라질 것이다”예언을 한다.
1859년 독일에서 ‘자본론’을 출간한다.
이 유명한 노동계급의 바이블은 1867년 독일 베를린에서 1권을 출판
2,3권은 그의 사후 엥겔스가 냈다.
독일에서 초판 1000부가 팔리는데 5년이 걸리나
1872년 러시아어 초판은 1000부가 두 달 만에 매진된다.
그는 주장하길 자본주의는 기업체의 과당 경쟁으로 이윤이 하락,
이로 인한 임금저하, 노동계급의 저항과 과잉생산으로 공항을 유발하면서 사멸할 것이고,
더 높은 사회로 대체가 될 것이다 예언을 한다.
貴族은 무엇인가!
프랑스 혁명 직전 프랑스 인구는 2800만 명 추산된다
. 제1신분 인 성직자는 0.5% 제2신분인 귀족은 1%, 1신분이 6-10%의 토지를 소유하고,
2신분이 20=25%의 토지를 소유 전체인구의 1.5%가 전체토지의 33%아상을 소유한다.
1신분 중 고위 성직자는 귀족이나 하위 성직자는 평민출신들이다.
왕국신민은 ‘기능’에 의해 세 신분으로 구분되나 ‘자질’은 귀족과 평민으로 구분된다.
귀족은 라틴어 ‘nobilis'에서 왔다. 고귀하단 뜻이다.
귀족의 우월한 자질 인정받으려면, 관대함 명예심 용기 등의 덕목이 있어야 한다.
자질은 혈통애서 새겨져있다.
프랑스 귀족은 ‘푸른 피’라 부르는 연유는 여기에 있다.
오래된 귀족 일수록 고귀하고 확실하다 평민의 때를 벗기여 줌으로써 고귀한 자질을 강화시켜 주기 때문이다.
1583년 앙리3세는 최소 4대의 족보를 가진 귀족을 문벌귀족으로 인정했다.
특권은 칼을 찰 권리와 방패와 투구에 문장을 넣을 권리 상석을 요구 할 권리
하급심 재판을 받지 않고 형사적인 문제는 바로 고등법원의 재판을 받을 권리들이다.
처형 시는 교수형이 아닌 참수형의 특권이 있다.
세금은 군역대신 내는 세금인 인적 타유 세는 면세며 기타 세율도 낮은 세율로 낸다.
귀족은 귀족다워야 하므로 상업엔 종사 할 수 없다.
귀족은 작위(공 후 백 자 남)를 자진 귀족과 기사나 에퀴이어 같은 작위를 못 가진 하위 귀족이 있다.
전통적으로 전투에 참여한 귀족을 帶劍귀족이라 한다.
법원이나 관직을 통해서 귀족이 된 계급은 法服귀족이라 한다.
귀족은 세습되며 가문의 소유물이다.
무정부주의 anarchism
정부나 통치의 부재를 뜻하는 그리스어 ‘an archos'에서 유래된 말이다.
정치의 조직 규율 권위를 거부하고
국가 권력의 강제수단을 철폐하여 자유 평등 정의 형제애 등을 실현하려는 이데 오르기다
이 근간은 국가나 정부기구는 해롭고 사악하며 인간은 그것들 없어도 올바르고
조화로운 삶을 영위 할 수 있다는 信念이다
. 만약 인간이 법과 사회체제의 구속에서 벗어나 相互扶助의 원리를 실천하면
진정한 의미의 정의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역설했다.
집단의 권위 인정범위, 사유소유인정여부, 이상사회 실현을 위한 수단의 폭력인정 여부,
3가지 논점이 발생된 차이다.
이론적 기초는 ‘프루동’이다 소유는 무엇인가에서 ‘나는 무정부주의자이다’라 선언한다.
그들은 스스로 상호주의자라 부른다,
1864년 프루동 사후 영국노동조합운동세력과 사회주의자들이 제휴
국제노동자협회(제1인터내셔널)창설,
그 들은 마르크스 진영과 대립한다.
그리고 ‘사회민주주의’동맹을 결성 프루동주의를 수정해 집단주의 이론을 창출한다.
1939년 스페인 내전이 종식되자 무정부주의 운동이 종말에 이를 때까지
주류는 ‘바쿠란’의 집산주의와 혁명적 폭력 론 자였다.
무정부주의와 관련된 윤리사상은 레오 톨스토이는 평화적 급진주의와 이성적 그리스도교의 이름으로
정부를 주정하고 도덕적 재생을 주장했고 공산주의를 옹호 한다.
마하 트라 간디는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비폭력 시민운동은 톨스토이 소로사상에서 착안된 것이며 자치적 촌락인 코뮌을 세우려는 지방분권 기획이었다.
무정부주의는 1960-1970년대의 반체제 학생들과 좌익지식인들 사이에 유행했는데
물질적이고 기계적 문화에 대한 비판의식으로 받아졌다.
한국은 1920년대 망명한 독립운동자 유학생들 사이에 싹트기 시작
대표자가 단재 신채호이다
‘조선혁명선언’에서
단재는 1923년에 의혈단의 강령 투쟁목표 정치이념을 무정부주의적 사상으로 이론화 시켰다.
평등의 실현은 자유억압으로 작용, 무정부주의 근간을 침해한다.
국가가 개인의 자유 억압은 사실이다.
그러나 국가가 없다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에 빠진다.
이것을 무시한 유토피아적이. 오르기다.
그러니 그 투쟁을 테러리즘에 의지 하지 않을 수 없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폭력이란 불의에 의지한 것이다.
2012 12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