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늘 / 류효정
그늘이란 이중적이다. 뜨거운 퇴약볕 아래에서 허덕이는 생명을 지켜주는 든든한 존재이기도 하지만, 자칫 커다란 나무의 그늘에 가려져 제대로 자라지 못하는 작은 꽃들도 많다. 우리 엄마도 그렇다. 언니에게는 뙤약볕을 가려주는 든든한 존재이지만, 나에게는 마치 작은 꽃의 성장에는 관심도 없는 태도의 나무같다.
이런 생각은 하루아침에 생긴 것이 아니다. 엄마는 늘 언니 하나만 바라보셨다. 학창시절, 언니가 한 과목만 만점을 받아와도 선물을 사주셨지만 내가 전 과목 만점을 받아왔을 때에는 짧은 칭찬도 없었다. 성인이 되어 반찬도 만들어 보내고 이사할 때마다 따라다니며 짐을 싸주고 청소까지 해주셨다. 반면 내가 대학생이 되어 자취를 시작하게 되었을 때는 멀다는 핑계로 단 한번을 오지 않으셨다. 집을 구하는 것도, 이사를 하는 것도 혼자서 해야만 했다. 사실 언니가 더 멀리 사는데 말이다.
셀 수도 없는 엄마의 편애에 복잡하던 마음이 펑 터져버릴 일이 생겼다.
2년 전, 아빠가 일을 하다가 크게 다치셨다. 지붕을 수리하던 중에 노후화된 지붕에서 발을 헛디뎌 5m 높이에서 추락하셨다. 안타깝게도 시멘트 바닥이었는데다 마침 주변에 아무도 없었기에 의식을 잃으 채로 한참만에 발견되었다. 중환자실에 입원하신 아빠는 혼자 화장실조차 갈 수 없는 상태였기에 간병할 사람이 필요했다. 엄마는 아빠를 대신해 200여 마리의 소를 혼자 돌보게 되어 도저히 간병할 체력과 시간이 없었다. 게다가
그 흔한 보험 하나 없는 아빠의 입원비가 만만치 않았기에 간병이는 꿈도 못꿨다. 그래서 나와 언니가 직장에서 쓸 수 있는 최대한의 무급휴가를 내고 간병을 시작했다. 못 자고, 못 먹고 못 씻는 간병 생활보다 힘든 것은 아빠의 상태의 차도가 없다는 점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우리는 슬퍼할 여유도 없이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혔다. 나와 언니의 무급휴가가 끝나가도록 아빠가 일어나지 못하신 것이다. 무급휴가를 하루 남긴 더녁에 우리는 가족회의를 하게 되었다.이미 힘든 우리 셋으니 얼굴에는 짙은 그림자가드리워져 있었고 이 막막한 상황에서 누구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긴 침묵을 깬 것은 엄마였다.
"둘째가 회사를 그만두고 계속 간병을 해야겠 다."
어안이 벙벙했다. 내가 부모님의 도움없이 자리잡은 직장은 쉽게 얻어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는 정규직인데 어째서 계약직인 언니가 아니라 내가 그만 둬야 한다는 생각을 하신거신지 당최 이해가 가질 않았다. 아니 화났다.
"그럼 내가 다시 취업 못하면 엄마가 책임질 거 야?"
나는 소리를 지르며 자르를 박차고 일어났다. 나의 희생을 강요하는 엄마에게 울컥했다. 물론 내가 회사를 그만둘 수도 있지만 엄마가 먼저 나에게 단호하게 말씀하신 것이 충격적이었다. 그간 쌓여있던 묵은 감정들까지도 모두 얽혀 올라왔다. 뛰쳐나간 나를 따라 엄마가 나오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미안하다."
엄마의 이 짧은 사과 한마디에 그동안 섭섭했던
감정들이 서서히 녹기 시작했다. 엄마와 나는 부둥켜 안고 엉엉 울었다. 내색할 수는 없었지만 엄마도 나에게 미안함을 느끼셨다니 오히려 내가 못나게 느껴졌다.이젠 어린아이도 아닌데 엄마의 진심을 헤아려드리지 못했구나 싶어서 죄송했다. 완전히 모든 것을이해하기 힘들겠지만 앞으로는 엄마에게 내가 든든한 그늘이 되어 드려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내가 몰랐을 뿐이지 엄마는 나에게도 언니에게 준 그늘 못지 않은 커다란 그늘을 늘 주셨다는 것도 비로소 깨달았다.
"엄마, 앞으로는 제가 엄마의 든든한 그늘이 되 어드릴게요.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