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봉 도리촌(牛峰桃李村)의 선대 묘소(先代墓所) 답사(踏査)
- 우봉 도리촌 선영 묘단비(牛峰桃李村先塋墓壇碑)에서 후손 유원(裕元) 지음
* 귤산공(橘山公)의 휘(諱)는 유원(裕元)이고
생몰(生沒)년은 순조14년∼고종25년(1814∼1888)이며
백사공(휘 항복)의 9세손이고 이조판서 계조(啓朝)의 아들로 영의정을 지냈다.
* [···]는 대종보에 실려는 있는 내용임
* # 표시는 설명
○ 선영(先塋)의 위치
[옛 족보(族譜)에 이르기를 경주 이씨(慶州李氏)의 선영(先塋)이
우봉 도리촌(牛峰桃李村)에 있다고 하였으니
살피건데 우봉(牛峰)은 지금 *해서 김천군(海西金川郡-黃海道金川郡)이다.
송양(山밑松陽- 개성開城)과의 거리가 30리도 못되게 가까우니
우리 이씨가 대대로 분묘(墳墓)를 쓴 것이 참으로 마땅하다.]
*해서 김천군(海西金川郡-黃海道金川郡)- 1850년 전후의 지명
- 황해도 김천현 장단군 소남면 지금리 원촌
(黃海道金川現長湍郡小南面知琴里院村)이다.
- 장단군(長湍郡)을 한때는 개성부(開城府)라고도 하였고
지금리 원촌(知琴里院村)은 일명(一名) 우봉 도리촌(牛峰挑李村)이라고 하였다.
▲ 현재 묘소의 위치는 북한당국에 의해 두 차례 행정구역을 조정하였는데,
1946년에는 황해도 장풍군 소담리라 하였고
1952년에는 개성시 장풍군 십탄리로 지명이 바뀌었다.
2004년에 황해북도 장풍군 십탄리 서원동으로 다시 바뀌었다.
○ 익재와 밀직의 묘소만 확인
[익재(益齋)선생 휘(諱) 제현(齊賢)의 묘소와
그 자제(子弟) 밀직사(密直使) 창로(彰路)의 묘소가
현재 도리촌(桃李村)에 있어서
자손이 대대로 수호(守護)하고
그 위에 선조(先祖)의 묘소(墓所)가 있다고 운운(云云)한 것이 의심이 없다.
보첩(譜牒)에 이르기를
"태복시(太僕射) 열헌(悅軒) 휘 핵(月없는 膈+ 羽)과
자제(子弟) 금교정승(檢校政丞) 동암(東菴)
휘 진(王+眞)과 다음 자제 대제학(大提學) 송암(松巖) 휘 세기(世基)와
그 자제 상서(尙書) 휘 과(초두밑過)의
3대에 4분묘가 익재(益齋) 묘소의 위 날 등에 있다." 하였다.]
* 동암공(東菴公)의 묘소(墓所)는 방향(方向)으로 볼 때 계좌(癸坐)이고
그 옆에 익재공(益齋 公)의 묘소(墓所)는 자좌(子坐)이며,
밀직공(密直公)의 묘소(墓所)는 약간 떨어져 옆 산 능선(稜線)에 있다.
[세대(世代)가 요원(遼遠)하여 다만 익재(益齋)의 묘소와
밀직(密直)의 묘소만이 전할뿐이다.
익재(益齋)는 곧 동암공(東菴公)의 자제요,
상서(尙書)는 송암공(松巖公)의 자제로
태복시공(太僕射公- 열헌공 휘 핵)이 한 할아버지가 된다.
유원(裕元)이 익재(益齋) 묘소를 참배하고
두루 여러 선조(先祖)의 산소를 찾아보았는데
익재(益齋) 묘소의 위에 두 분묘(墳墓)가 있고
밀직(밀직) 묘소의 위에 또 큰 분묘가 둘이 있으니
3대(三代)의 4분묘가 맡기는 하나 마침내 분별(分別)할 수가 없었다.]
- 보첩에 기록된 대로 익재공(휘 제현. 17세) 묘소와
아들 밀직공(휘 창로. 18세. 익재공 3남)의 묘소 위치는
비명(碑銘)으로 정확히 알 수 있다.
열헌공(휘 핵. 15세. 익재공 조부)과
동암공(휘 진. 16세. 익재공 아버지. 열헌공 차자)과
송암공(휘 세기. 17세. 익재공 숙부. 열헌공 3자)과
그 아들 상서공(휘 과. 18세. 휘 세기의 3남)의 3대의 4분묘가 있기는 한데
표석이 없어 확실히 누구의 것인지 분별이 안된다.
첫댓글 동암공. 송암공은 형제분이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