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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불교문학 원문보기 글쓴이: 靑岩/鄭日相
북소리·죽비소리·철부지소리(243)
걸망에 담아 온 水鍾寺일화와 인연
글: 靑岩 鄭 日 相
전통적으로 우리 집안은 불교를 신봉하고 절에 다녔다. 내 조부모님이 그랬고 아버지 어머니도 절에 다니셨다. 그래서 내가 어릴 적에 어머니 손에 이끌리어 절에 찾아가 절밥을 얻어먹고 절을 하고 과일이며 떡 같은 것도 얻어먹으며 절에 가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었다. 그렇게 절에 다닐 적에 어린마음에 신기하게 비쳐지는 스님의 모습이 똑 같았다는 것이다. 빡빡 밀어버린 민머리에 삿갓 같은 모자를 쓰고, 걸망을 짊어졌으며, 집신에다 지팡이를 짚고 손에는 목탁을 들어 손목엔 염주 알을 끼고 도포 같은 회색 옷을 걸친 모습을 보면 동화나 그림에서 본 영락없는 도사모습이다. 내게는 스님이라는 존재가 신기하기만한 존재로 각인되고 어린 마음에 이와 같은 세상과 사람이 따로 있구나하고 일반인들과 구별되는 사람이라 생각할 정도였다.
집안에 가끔 스님들이 찾아왔고 절 근처나 길거리에 다니는 스님을 보면 한 결 같이 스님들은 걸망을 메고 다니는 뒷모습을 보며 자랐다. 도대체 나는 그 걸망 안엔 무엇이 들어있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걸망 속엔 시주받은 양식과 곡류, 바리(바리때)와 불경을 넣고 다닌다는 이해로 정리되지만 말이다.
그런 나는 성장하고 사회의 일원이 되면서 좋은 산이나 절을 찾거나 경관이 좋은 곳에 갈 때엔 그 다녀온 흑적을 남기기 위해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내가 걸머진 걸망 속엔 카메라와 노트와 여러 여행에 필요한 물품을 넣고 다닌다. 푸르고 싱그러운 잎이 철을 보내고 난 뒤 낙엽은 떨어져 뿌리로 돌아가고 인생은 올 때 그랬듯 빈손으로, 흙으로 간다는 것을 알기에 넉넉한 마음으로 허허거리며 살려고, 그 여유를 탁발하러 산사를 찾아 무던히도 많은 절을 찾아 다녔다. 그런 내 마음의 인연으로 이번 불교문학회에서의 수종사문학기행에도 참여하지 않았던가? 그 날은 엊그제 부처님오신 날의 전전날이었다. 평소에도 뭔가 모자란 듯한 생각이 들면 담길 것 없는 걸망 하나 둘러메고 산사 풍경 소리를 듣기 위해 산사를 찾곤 했었는데 그래서 이번에도 등산배낭을 메고 따라 나섰다. 내 마음의 걸망은 사실 간단히 물건을 담는 가방이기도 하고 등산백이기도 하다. 이들은 오로지 구멍이 숭숭 뚫려 담는 쪽 쪽 흘리는 엉성한 걸망이지만 언제나 산사를 찾을 때는 이 걸망들을 챙긴다.
걸망을 챙겨 가끔은 가출을 하지만 출가出家는 아니다. 한 번도 출가할 마음을 먹은 적은 없지만 가끔 가출이라도 하고 싶으면 걸망을 챙겨 산사를 찾아 나서기도 했다. 어떤 때는 연緣으로부터 가출을 시도하고, 어떤 때는 속박으로부터의 가출을 하기 위해, 또는 내 번뇌로부터의 가출도 시도하고 연정으로부터의 가출도 시도해 보기도 했다. 그러면서 사람이 산다는 것은 생각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절감하기도 한다. 생각하면서 심사숙고하며 가출을 시도 하지만 번번이 이불 속 몽상으로 끝나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끊고 싶은 연과 속박, 버리고 싶은 번뇌와 온갖 연정을 멀찌감치 가져다 버리겠다며 열심히 챙겨보지만 걸망에 담겨지는 것은 하나도 없고 끊어지는 것도 없는 것이 내 가출이고 걸망이다.
이렇게 어릴 적의 회상과 절의 이미지를 안고 이번 문학탐방을 수종사水鍾寺로 정했다는 연락이 왔기에 즐거이 참가했으며 나로서는 이 절을 두 번 찾는 인연의 절인 셈이다. 수종사는 남양주시 조안면에 위치한 운길산雲吉山 중턱에 자리 잡은 절로서 두 강물이 도도히 합류하는 두 물머리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이다. 이 두 물머리의 흐르는 물은 금강산에서 발원한 북한강과 강원도 금대봉 검룡소儉龍沼에서 발원한 남한강이 합쳐지는 장소로 이 주변의 경관은 사계절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이 매우 아름답다고 전해오는 곳이다.
수종사水鍾寺는 세조世祖와 깊은 인연이 있다. 임금이 금강산을 구경하고 돌아오는 길에 두 물머리 근처에서 하루 쉬어가는 날 밤, 이른 새벽 절에서 울려 퍼지는 종소리에 잠을 깨어 그 종소리에 이끌리어 찾아 간곳이 바위굴이었고 그 종소리는 그곳 바위굴 속에서 떨어지는 물소리 이었다. 그 종소리는 임금에겐 환청幻聽이었지만 그 소리는 절의 종소리로 들렸고 낙수落水의 신비함의 소리와 그리고 그곳에는 18나한들이 모셔져 있었다. 그래서 내력을 살펴 물어보니 예전에 이곳에 절이 있었다는 보고를 받고 왕이 중건할 것을 명해,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이름까지 水鍾寺(수종사)라 지어주고 오늘에 이르고 있는 절이다. 자기가 들었던 종소리는 절의 새벽종소리였는데 바위 글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였음을 상징하는 물 수水자와 쇠북종 종鐘자를 합해 水鍾寺수종사라 명명하였다 한다. 그래서 세조임금과 깊은 인연을 가지고 역사의 이야기 거리로 남아 있어 지금도 그 임금 영안을 극진히 모시어 오면서 역사와의 인연을 이곳을 찾는 중생들에 인연이란 화두를 던지고 있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 절엔 국가지정 보물(제1808)로 지정된 팔각오층석탑이 있고, 세조가 절을 짓고 기념으로 심었다는 무려 500년이 넘은 수령의 두 은행나무도 깎아지른 벼랑 끝에 늠름하게 서 있으면서 모진 풍파와 세월과 역사의 무게를 안고 굵고 튼튼한 가지를 뻗어 내며 품위 넘치는 자태로 자라고 있다. 여름엔 이곳을 찾는 나그네에게 그늘을 선물하고 가을이면 노오란 옷으로 갈아입는다. 그리고 탐스런 은행 열매를 떨 구어 약으로 쓰고 사람들의 즐거운 가을 과일 구실을 하면서 이 절의 역사를 묵언으로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어 나는 그 곳을 방문한 흔적으로 그 앞에서 포즈를 취해 사진에 담아왔다.
초여름의 문학 탐방지로 정해 일행과 수종사로 오르는 길목은 맑은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나무와 덤불과 싱그러운 숲의 잎들과 모든 자연의 생명이 고르게 성장하고 있어 깊은 생명의 원천으로 우주를 순환하는 절대성絶對性의 시간을 초월한 무한성을 일러주고 있다. 그리고 태초에 우주를 생성시킨 모태母胎의 이치를 깨닫게 해 나의 내면적 역사를 관조觀照케 하는 시간을 갖게 한다. 그러면서 싱그런 초여름이 서 있는 자태가 무한히 아름다워 보인다. 푸름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다. 계곡을 따라 오르는 길은 등산로이기에 진흙냄새가 풀풀 나는 자연 그대로 이면서 도시의 찌든 피곤함을 싹 가시게 한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올라 운길산 중턱에 자리 잡은 수종사 두 물머리에 서서 깊은 숨을 들이킨다. 그리고 경관들을 내려다본다. 이른 봄과 초여름엔 신록과 짙은 녹음의 싱그러움을 선사해 주며, 가을엔 짙은 색깔의 천연색 자연을 느끼게 하고 곧이어 뒤따르는 겨울철엔 하얀 설경을 만끽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 사계절의 풍광은 시간과 날씨에 따라, 그리고 해 뜨는 장면과 해가지는 노을 짓는 경치는 어느 곳에서 느끼는 경관과는 확연히 구별됨을 느낄 수 있다. 서울을 끼고 흘러내리는 한강하구에서의 이 관경들을 보면 스모그현상으로 크게 감동받을 수 없을 만큼 퇴색된 관경이라면 이곳에서의 관견은 선명함과 신선하면서 우리의 시야에 또렷이 닥아 오는 맛이 다르다. 이렇게 일몰과 운무 등 아름다운 풍광을 볼 수 있는 곳으로서 서울 주변에선 자연감상의 최적지로 손꼽히는 장소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었을까? 조선초기의 학자 서거정徐居正은 수종사를 ‘동방의 제일의 전망을 가진 사찰’이라고 수종사를 극찬한 곳이었기도 하다. 계절은 5월말쯤이라 푸름의 향연이 펼쳐져 있다. 화려한 초록의 세계색깔이다.
18세기 우리나라 화가인 겸재 정선은 「경교명승첩」이라는 화첩에 양수리와 양평을 배경으로 한 ‘독백탄獨栢灘’이라는 그림을 남겼는데, 절집 뒤로 운길산이 솟아있고 양평 양수리와 두 물머리를 멋들어지게 화폭에 담아 자연의 생김그대로 그림으로써 그려 당대의 선비들로부터 사실화로서 가장 사랑을 받으며 극찬을 받았다는 장면이 떠오른다.
수종사水鍾寺, 이 절 인근에 생가가 있었던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은 일생을 통해 수종사에서 지낸 즐거움을 ‘군자유삼락君子有三樂’에 비교할 만큼 즐겨 찾던 곳으로 역사 문화적 가치가 큰 곳이고 깊은 인연을 갖고 있는 곳이다. 또 우리나라 초기에 최고의 다선茶仙으로 일컬어지는 초의선사草衣禪師(1786~1866)가 정약용을 찾아와 한강의 아름다운 풍광을 즐기며 차를 마신 장소로서의 수종사는 차 문화와도 깊은 인연이 있는 곳이다. 그리고 녹차와의 인연은 추사 김정희金正喜(1786~1856)도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추사가 제주도에 귀양생활을 할 때에 줄곧 녹차를 대어준 일화는 널리 알려져 있는 이야기가 아니던가. 그런 그들 세시서 가끔 이곳 수종사에서 만나 조선의 다문화茶文化를 논하고 정사를 이야기 했으며 일상사들에 이루기까지 담론을 일삼았다는 곳에 기념비적 집을 지었는데 이름 하여 삼정헌三鼎軒이다. 이 절간의 가장 좋은 자리에 세워져 있지 않았던가. 이 세 사람의 차 정신과 이들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지금 이 절의 가장 아름답고 풍광 좋은 장소에 무료 녹차 시움 장을 세우고 이름을 三鼎軒삼정헌이라 지어 현판 돼 있지 않았던가?
禪房(선방)처럼 운영하는 삼정헌에 우리 일행이 들어가 은은한 차향이 풍기는 녹차를 마시며 은밀히 농축된 즐거움을 맛보게 되어 너무 즐거웠다. 나도 녹차 맛에 반하고 길들여져 있어 매일 녹차를 즐겨 마시고 있는데, 그 녹차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보편화된 시기는 아마도 이운해의 ‘부풍향차보(1755)’에 기록된바와 같이 단산과 추사와 초의의 차 사랑을 토대로 발전한 것으로 전해오고 있다. 이들의 차 문화에 공헌한바 기여는 우리나라 국민의 정서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이 세분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우리 녹차의 중흥을 이뤘음을 자타가 인정하는 바 인데, 인간이란 잠시 이 세상에 머물다 가는 곧 '천지는 만물이 하룻밤 쉬었닥 가는 여인숙
春夜宴桃李園序' 이라고 이태백이 설파했든 것처럼 인생이란 잠시 이 우주에 머물다 사라지지만 이들 상정헌에 아로새겨진 세분의 흔적은 영원히 그 이름을 남기게 되어 역으로 이들이 우주공간에 연인숙을 영원히 운영함과 같다고 느껴진다.
이외에도 많은 시인묵객들이 이곳의 풍광을 시·서·화로 남겼으며, 특히 회화로는 겸재 정선鄭敾(1676~1759)의 경교명승첩
京郊名勝帖 중 독백탄獨栢灘이 현재의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양수리’의 모습과 현재의 운길산, 수종사의 경관을 보여주는 고서화도 있고, 또 조선후기의 문인화가 정수영鄭遂榮(1743~1831)이 한강과 임진강을 여행하며 그린 한·임강명승도권漢臨江名勝圖券중 수종사에서 내려다보는 경기도 광주시 미호 전경(현 행정구역: 광주시 남종면)도 그 시대의 명승지 경관을 잘 보여주는 곳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많은 시인 묵객들이 이곳 흔적들과 역사를 배경으로 글을 남긴다는 것은 당연한 명제이면서 명승지가 아니던가.
하여간 이 남한강과 북한강의 두 물줄기인 두 물머리만나는 이곳과 수종사와 삼정헌과 녹차문화에 깃든 인연은 나와도 계속 이어지고 있음은 행운이 아닌가 싶은 심정이 인다. 언젠가는 홀로 이 수종사를 찾아 걸망을 짊어지고 가출해서 하룻밤 템플스테이(Temple Stay) 하면서 더 깊은 인연을 맺어볼까 생각해 본다.
2015. 5.23 水鍾寺를 다녀와서
첫댓글 선생님의 깊은 학문에 경의를 표합니다
훌륭하신 대선배님을 옆에서 보라다보는제가 행운아입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절절히 역사를 공부하는 것 갘습니다.
차의 역사와 우리의 문화의 발상 등 소상히 알게되어 감사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