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0년 만의 해후 고려불화대전'에서 물방울 수월관음도를 보았다.
모셔진 그림들 하나 하나 모두가 걸작이지만
이 물방울 수월관음도는 유달리 시선을 끌었다.
저절로 합장하게 되고, 보고 또 보고.. 자리를 뜨기가 정말 아쉬웠다
왜 그랬을까? 어떤 매력이 이토록 사로잡는 것일까?
이 감동을 카페에 소개하려고 집에 돌아와 메모도 정리하고
인터넷에서 자료를 검색하다보니, 이 관음도에 대한 작은 논란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광배의 모양이 물방울이냐 버들잎이냐..
그래서 '물방울 수월관음도'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기는 하였지만
그래서는 안 되고 버들잎 모양의 광배를 한 '양류관음도'라고 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이구동성으로 대단한 걸작이라고 찬탄해 마지않는다.
현존하는 고려불화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고들 한다.
그런데.. 왜 걸작이라는 걸까? 그 설명은 별로 찾아볼 수 없었다.
먼저.. 이 관음도의 광배가 버들잎이라면..
광배를 나뭇잎 모양으로 한 그림은 몰라도 존상은 꽤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뭐 별로 특이할 것도 없지 않은가? 묘사 기법만 본다면 이에 못지않은 그림들이 많다.
그런데.. 광배가 물방울이라고 한다면.. 그렇다면 얘긴 달라진다.
물방울 모양의 광배는 그 어떤 데서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구성의 관음도라는 의미가 된다.
그런데 이 관음도를 보관하고 있는 일본에서 어떤 명칭으로 부르는지는 몰라도
광배의 모양을 물방울이라 보고, 그래서 의미가 있는 그림이라고 보는 것 같진 않다.
그럼 무엇일까? 무엇이 이 그림을 그토록 매력 있게 하는 걸까?
전문가들은 광배가 물방울이냐 버들잎이냐.. 그 모양을 가지고 왈가왈부하지만
그거야 그림을 그린 혜허스님 마음이지 누가 단정 지을 수 있겠는가?
사실 처음 봤을 때 그 느낌은 물방울같이 보였다. 내 눈에만 그랬을까?
전문적인 설명을 듣고 보니 버들잎일 수도 있겠구나 생각도 들지만
그냥 눈으로 보이는 느낌은 영락없는 물방울이다.
이제 혜허스님의 마음을 한번 짐작해 보자..
혜허스님.. 그 법명만 봐도 보통 분은 아니셨을 것 같다.
법명을 지을 때 그 분의 인품을 보고 짓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혜허(慧虛).. 지혜조차 텅 빈.. 어디에도 걸림 없는 무애자재한 분이 아니셨을까?
그렇다면 아주 파격적으로 물방울 광배를 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물과 관음은 잘 어울린다.
관음보살의 통상적인 지물이 정병인데 그것은 곧 감로수를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관음보살이 들고 있는 지물 버들가지를 이용하여 버들잎 모양의 광배를 할 수 있다면
더욱 일반적인 지물 정병을 이용하여 감로수 물방울 모양의 광배를 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더군다나 이 그림에서 관음보살은 오른손엔 버들가지를, 왼손엔 정병을 들고 있다. 그렇다면 이 모양은..
오른손의 버들가지로 왼손에 든 정병의 물을 찍어 중생에게 감로수를 뿌려주는 형상으로 볼 수도 있다.
관음보살이 감로의 물을 뿌리고.. 그 뿌려지는 물방울 속에 또 관음보살이 있고..
참으로 멋지지 아니한가! 원융무애한 화장세계가 그대로 드러난다..
그러므로 물방울 광배.. 안 될 이유가 없다. 결코 무리가 아니다.
오히려 더 자연스러운 구상일 수도 있다.
더 심오한 구상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 그림의 포인트는
광배의 모양 못지않게 광배의 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광배는 불보살을 장엄하기 위한 일종의 장식인데
이 그림처럼 큰 광배는 본 적이 없다.
관음보살의 두 배가 넘는다.
가수는 노래로 말하고, 시인은 시로 말한다.
석공이 조각으로 말하듯, 화가는 그림으로 말한다.
그런데 보살보다 두 배나 더 큰 광배를 그려
마치 주객이 전도된 것 같은 파격적인 구성으로
혜허스님은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불꽃 모양의 광배..
그것은 태양 빛과도 같은 광명을 상징한다고 한다. 빛은 곧 작용이요 생명이다.
빛을 잃은 태양은 아무 작용도 없고, 작용이 없으면 이미 태양도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네 사람도 눈에서 빛이 난다고 한다. 눈에서 빛이 없다면 우리의 생명도 없고 작용도 없다.
그래서 죽음을 일컬어 '눈의 빛을 잃는다' 하여 안광락지(眼光落地)라 하지 않던가..
빛을 발하고 있다는 것은 활발발한 작용이 행해지고 있음이다.
그러므로 불보살의 모양은 주체이며, 광배는 그 작용이다.
모양은 상(相)이요 작용은 행(行)이다.
혜허스님은 무리일 정도로 광배를 크게 그림으로써
그 행(行)을 웅변으로 강조하고 계신 것은 아닐까?
"모양다리(相)를 쫓지 말고 그 작용(行)을 보라!
가수라는 어떤 주체가 따로 있어서 그가 노래를 잘 하는 것인가? 아니면
누구든지 노래만 잘하면 그가 바로 가수인 것인가?
도둑이라는 어떤 주체가 따로 있어서 그가 도둑질을 하는 것인가? 아니면
누구든지 도둑질을 하기만 하면 그가 바로 도둑인 것인가?"
"이제 그대에게 묻는다.
관세음보살이라는 어떤 존재가 따로 있어서 그 분이 자비행을 펼치는 것인가? 아니면
어떤 존재든지 간에 자비행을 펼치기만 하면 그가 바로 관세음보살인가?
내가 여기 우아하고 아름다운 자태로 관음보살을 그렸지만
이 모양으로써 관세음을 보지 말고,
그 작용이 관세음임을 바로 보라.
보살행이 관음보살의 행동이 아니라
관음보살은 보살행의 명찰일 뿐임을 바로 보라."
혜허스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게 아닐까?
고려는 불교로 인해 흥하였지만 그 타락상도 만만치 않았다고 한다.
방편에 눈이 멀어 본질을 외면하는 세태에 대한 경고나 아니었을까?
그림을 그리면서도, 그림에 잡히지 말라는 역설의 가르침이나 아닐까?
만약에 스님의 심중이 그러하다면, 이렇게..
모양다리.. 상(相)에 끄달리지 말라고 광배를 크게 그렸더니
후세 중생들은 그 마음 헤아릴 생각은 안 하고
광배의 모양이 이거냐 저거냐 따지고만 있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이 아닌가..
이 역시 손가락만 쳐다보는 격이라..
달은 보려하지 아니하고..
부처님께서도 말씀하셨다.
'모양으로써 나를 구한다면 그것은 삿된 도(邪道 사도)이니 결코 나를 볼 수 없으리라'
육조단경도 이렇게 설파한다. 부처의 행(行 작용)이 바로 부처이니라.. (불행시불 佛行是佛)
그렇다. 부처를 구하든 보살을 찾든
이유를 막론하고 모양으로써 보려한다면
그것은 밖으로 찾는 것이니, 외도와 다를 게 무엇이겠는가?
그래서 스님은 커다란 광배에 관음이라는 작은 명찰을 그려 넣었으리라..
이것이 시공을 넘어 내 마음을 두드리는
혜허스님의 메시지다.


※ 고려불화대전 구경하기 http://cafe.daum.net/santam/IQZL/156

첫댓글 참으로 혜철하신 통찰이고 사유입니다. 광배의 모양에만 집착하는 이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날카로운 지적과, 광배를 크게 그린 혜허스님의 의도를 명쾌하게 추론해서 "모양으로 나를 구하지 말고 부처의 행을 행하라는 " 부처님 말씀에 이르도록 귀결시킨 글이 감동을 주는군요.단순히 아름다움을 떠나 관음도의 본래 의미를 다시 되새기는 계기가 됐습니다.고맙습니다. _()_
감사합니다.. 참으로 대단한 그림이고 경험이었답니다..
다시 보기 어렵고.. 다시 느껴보기 어렵겠지만요.. _()_
오늘 불교TV를 보니까 이 관음도가 유명한 이유중에 하나로, 관음보살님의 표정을 꼽더군요.
중생을 어떻게 구제할까.. 고민하는 표정이라네요..
관음도에 나타난 표정의 의미를 받아드리는 것도,각자 업식에 따라 다르겠지요? 말씀을 듣고 한참을 보고 있으려니, 상념에 잠기신 표정 같기도하네요..
하나에서 무수한 여럿이어라 그리고 다만 하나이어라
간절의끝에서 부르니 어찌 나투지않으리오
자비하시어라 자비하시어라 . . . _()_
아둔한 제 눈에도 기품이 느껴지는 관음도 입니다.무지한 저는 깊은 뜻 헤아리지도 못한 체 그저 모양다리만 보고 그 잠깐의 느낌으로 접고맙니다만.. . 이렇듯 깊은 사유로 풀어나가주신햇빛엽서님 글 읽고서 다시 보니 그 의미가 또 새롭답니다..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바다님 _()_
물방울이라는 표현보다는 버들잎이 관음과 더욱 친밀한 어감입니다
아름다운 그림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