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 上海 샹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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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23일 파나마에서 LA로 가는 비행기에서 ....
파나마 해안에 화물선이 유유히 운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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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나마 해안의 작은 파도가 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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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에서 본 파나마 해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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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23일 밤 11:16pm Copa 비행기로 LA에 도착하여 한인타운에 가서 설농탕 먹고 사우나에 가니 새벽3시입니다. 송만우랑 같이 지압을 받고 그날 저녁에 친구들이 일식집에서 모였는데 나는 비행장으로 가서 상해로 떠났습니다. 9월26일 상해 푸동(浦東)공항에 도착했습니다. 내가 생각해도 너무 바쁘게 다닙니다.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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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 지하철입니다. 푸동(浦東)공항에서 지하철을 탈때면 중간 광란루(廣蘭路) 역(站)에서 꼭 갈아타야 합니다. 안그러면 다시 푸동공항까지 갑니다. 사람들이 다 내립니다. 그리고 건너편의 지하철을 갈아타야 합니다. 그래서 상해시내로 들어가야 합니다. 역(站)을 ?이라고 발음을 합니다. 한국에서는 안쓰는 한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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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 호텔로 가는 도중 콩다방(Coffee Bean)을 지나가는데 주소가 복주루(福州路)666 입니다. 기독교인들은 666 숫자를 안 좋아합니다. 사탄의 숫자이기에 안 좋아합니다. 그러나 중국사람들은 8 과 6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4 를 안좋아합니다. 4는 발음이 死 와 같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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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인민광장(人民廣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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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건물을 찾기위해 마당로(馬當路)로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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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이 타이킹루(泰康路) 입니다. 마당로(馬當路) 에서 5분정도입니다. 예술거리로 옛날 프랑스 조계지(租界地)입니다. 지하철 1호선을 타고 황피난루(黃陂南路)역에서 내려 약 10분 걸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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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청사를 물어서 찾아 왔습니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한자: 大韓民國臨時政府, 영어: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1919년 ~ 1948년)는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선포된 3·1독립선언에 기초하여 일본 제국의 대한제국 침탈과 식민 통치를 부인하고 한반도 내외의 항일 독립운동을 주도하기 위한 목적으로 1919년 4월 13일 중화민국 상하이에서 설립된 망명 정부 형태의 독립운동 단체(임시 정부)였습니다. 같은 해 9월 11일에는 각지에 설립된 임시정부들을 흡수·통합하여 통합임시정부로 발전하였습니다. 줄여서 임정(臨政)이라고도 부릅니다. 임시정부가 건설되면서 대한민국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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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는 교통이 편리하고 쑨원이
이끄는 광동정부의 지원도 받을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또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등의 조계가 있어서 일본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조건도 갖추고 있었습니다. 독립지사들은 자신들에게 가장 우호적인 프랑스 인사들의 도움을 받아 프랑스 조계에 살면서
활동을 펼쳐나갔습니다. 이런 까닭에 독립지사들이 상하이로 몰려들었습니다. 1918년 조직된 신한청년당은 1919년 1월 파리 강화 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여 조선의 독립을 주장하기도 하였습니다. 상하이는 3·1 운동의 진원지이기도 하였습니다.
상하이의 독립지사들은 1919년 여름부터 더욱 민활하게 움직였습니다. 신규식을 비롯하여 서병호, 여운형, 조동호, 박찬익, 선우혁
등은 한국과 만주, 연해주, 미주에서 몰려드는 지사를 맞이하기에 바빴습니다. 상하이의 독립지사들은 프랑스 조계를 중심으로
외지에서 온 사람들의 숙소를 마련해 주고 고려교민친목회를 조직하여 교민 상호간의 긴밀한 연락망을 만들었습니다. 이 무렵 만주와
연해주의 이동녕, 이시영, 김동삼, 신채호, 조성환, 조소앙 등 명망 높은 독립지사가 상하이로 와서 자리를 잡았고, 한국에서 현순, 손정도 등이 이곳으로 파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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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한청년당은 파리강화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약속받을 것을 결의하고 김규식 등을 대표단으로 파견합니다. 프랑스에 도착한 김규식은 신한청년당과 전파통신으로 교신하였고, 신한청년당은 로비에 필요한 자금을 모금하여 송금해주었고 김규식의 파리강화회의 파견은 3.1 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의 계기를 마련합니다. 출국 전 김규식은 신한청년당 당원들에게 다음과 같이 독립 시위를 벌일 것을 주문하였습니다.
"파리에 파견되더라도 서구인들이 내가 누군지 알리가 없다. 일제의 학정을 폭로하고 선전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국내에서 독립을
선언해야 된다. 파견되는 사람은 희생당하겠지만 국내에서 무슨 사건이 발생해야 내가 맡은 사명이 잘 수행될 것이다."
그의 주장에 고무되어 신한청년당은 국내에 사람을 파견하여, 함태영, 조만식 등의 민족지도자를 만나기도 했습니다. 김규식의 부인 김순애는 배를 타고 국내에 잠입하여 애국부인회 결성을 추진하였습니다. 함태영을 만나 국내 독립운동 방법을 의논하였으나 체포되어 투옥될 경우 해외에서 활동하는 남편의 활동에 타격을 줄수 있다는 함태영의 설득으로 김순애는 다시 상하이로 귀환하였습니다. 그의 독립 시위 주문은 3·1 만세 운동이 벌어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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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건물로 들어가는 입구입니다.
3·1 운동 직후 국민의 의사를 대표할 의결 기관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국내외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널리 확산되었습니다. 그러나 고종과 순종이 건재하고 있어서 망설이는 인사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1919년 3·1 운동 후 독립운동을 계속 확대해 나가기 위해 국내외에서 정부수립계획이 진행되었습니다. 당시 상하이에는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결집되어 있었습니다. 독립임시사무소를 설치한 이들은 독립운동의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논의를 거듭했습니다. 먼저 임시정부 수립론이 대두되었는데 조선총독부에 맞서 민족의 망명정부를 조직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세였습니다. 그러나 여운형 등은 정부를 조직하기에는 시기가 이르다고 보고 당 조직을 제대로 갖추고 난 뒤에 정부를 조직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먼저 정부를 조직해야 한다는 주장에 묻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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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식당입니다.
1919년 4월 10일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 김신부로에서 각 지역의 교포 1천여 명과 신한청년당이
주축이 되어 29인의 임시의정원 제헌의원이 모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습니다. 그 후 22일엔 2차의정원 의원 57인이
참석하여 국내의 8도 대표와 러시아, 중국, 미주 등 3개 지방대표가 각각 지방선거회를 통해 의정원 의원을 선출했습니다. 의장에는
이동녕, 부의장에는 손정도를 선출했습니다.
의정원은 법률안 의결, 임시대통령 선출 등 국회와 같은 기능을 했습니다. 1919년 4월10일 의정원 회의에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민주공화제를 골간으로 한 임시헌장을 채택한 뒤 선거를 통해 국무원을 구성했습니다. 행정수반인 국무총리에 이승만을 추대하고 내무총장에 안창호, 외무총장에 김규식, 군무총장에 이동휘, 재무총장에 최재형, 법무총장에 이시영, 교통총장에 문창범 등 6부의 총장을 임명한 뒤 4월 13일 정부수립을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4월 11일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됐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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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선생님 집무실입니다.
같은 시기에 경성(서울)에서는 한성임시정부가 수립되었고 연해주에서도 대한국민의회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자연스레 상하이의 임시정부는 통합문제를 제기하였습니다. 통합교섭은 대한국민의회와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이에서 진행되었습니다. 현실적으로 국내와는 연락을 할 수 없었고 미국에 있는 이승만과도 상의할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대한국민의회의 대표로 선정된 원세훈이 상하이로
와서 교섭을 벌였습니다. 양쪽 모두 정부의 위치를 자기 지역에 두되 산하의 부서만 양쪽에 배치하자는 주장을 폈습니다. 두 주장이
팽팽히 맞섰지만 그에 못지않게 단일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열망도 높았습니다. 결국은 상하이 임시정부에 통합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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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김구선생님 사무실 책상입니다.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 당시의 참여자는 여운형, 손정도, 조소앙, 김철, 선우혁, 한진교, 신석우 현순, 신익희, 조성환, 이광, 최근우, 백남칠, 김대지, 남형우, 이시영, 이동녕, 조완구, 신채호, 진희창, 신철, 이영근, 조동진, 김동삼, 김규식 등 30인이었습니다.
그 밖에 김구, 이동녕, 신규식 등이 설립에 참여하였고, 안창호, 이동휘, 이승만 등이 1919년 4월에서 9월 사이에 임정의 영수로 임명되어 상하이로 출입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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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성립지도입니다.
초기 임시정부는 내무총장 안창호의 주도로 연통제(국내의 비밀행정조직망)와 교통국(임시정부 통신 기관)을 조직하는 한편 독립신문을 발행하였으며, 각종 외교 선전활동 등을 전개하였습니다. 또한, 애국공채 발행과 국민 의연금을 통해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승만과 안창호가 독립운동의 방략상으로 대립하였으며, 이념적으로도 국무총리인 이동휘는 사회주의 혁명을 부르짖었고 대통령 이승만은 미국식 자유민주주의를 주장하여 서로 충돌하였습니다. 임시정부 내의 사회주의자들은 안병찬, 여운형을 중심으로하는 이르쿠츠크파와 이동휘를 중심으로하는 상하이파, 그리고 김준연을 중심으로 하는 엠엘파(ML)로 나뉘어 갈등을 빚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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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독립선언서입니다. 그당시 글씨체로 쓰여져 있습니다.
1920년 12월 8일 이승만이 대통령 취임을 위해 상하이로 들어오자 독립운동가들은 이승만의 독단적인 구미 위원부 설치 건과 국제연맹 위임 통치 건에 반대하였는데, 특히 러시아 연해주 거류 동포사회에서 조직된 대한국민의회가 임시정부에 통합되며 그들의 대표로 국무총리가 된 이동휘는 미국교포의 독립자금을 축내며 외교운동으로 신탁통치를 주장하는 이승만이 대통령을 맡는 것에 대하여 반대한다며 국무총리직을 사임하였습니다.
이동휘가 사임하고, 이승만에 반대하는 신채호 등이 이탈하자 임시정부는 혼란에 빠졌습니다. 안창호는 코민테른 자금을 임시정부에서 사용하는 것을 반대하였고, 이동휘는 고려공산당을 만드는데 이 자금을 사용하여 이승만을 견제하였습니다. 이승만은 혼란을 수습하는 것이 불가해지자 다시 미국으로 떠나버렸습니다. 반임시정부적인 군사통일 촉성회의 국민대표회의 개최 주장이 호응을 얻자 임시정부는 국민대표회의를 소집할 계획을 세웠고, 이를 위하여 안창호와 김규식이 내각에서 사퇴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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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임시정부는 소련의 레닌으로부터 혁명자금 200만 루블을 지원받았는데, 그가 보내온 40만 루블과 20만 루블을 수령한뒤 자금분배 과정에서 문제가 제기되었습니다. 이동휘는 한형권, 김립을 보내 60만루블을 수령해 오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동휘 등은 임시정부에 지원금을 납부하지 않았고, 이에 김구는 이동휘 일파를 추격하여 김립을 암살하고 이동휘, 한형권 등을 비롯한 임시정부 내 사회주의자들을 모두 추방하였습니다.
1923년 1월부터 6월까지 5개월 동안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
각지의 200여명의 대표가 참석하였습니다. 국민대표회의는 임시정부의 해체와 재건을 주장하는 창조파와 임시정부의 개혁을 주장하는
개조파로 분열되어 결국 아무런 결실을 얻어내지 못하였으며 내무총장 김구는 유명무실해진 국민대표회의에 대해 해산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후 재중국청년동맹, 주중국청년동맹 두 공산계열 단체가 경쟁했으며, 좌우 통일을 위하여 안창호 등에 의해 유일독립당촉성회가 결성되었으나 사회주의 계열과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해산되는 등 양자의 분열을 거듭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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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에서 심어둔 공작원들은 여러 번 일본 영사관이나 조선총독부의 문건을 빼돌리기도 했습니다. 이들 공작원들은 목숨을 걸고 적지에 침투하여 조선총독부의 자료들을 빼돌렸고, 총독부나 일본 영사관 내에 근무하는 친일파들을 설득, 포섭하여 문건을 빼돌렸습니다.
청산리 전투 직후 일본군의 문건 내용을 청취한 박은식은 이러한 사실을 자신의 저서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남겼습니다. '우리 사령부의 조사 보고에 의하면 적군(일본군)의 사상자가 천6백여 명이었고, 중국 관청의 조사에 의하면 일본군의 사상자는 천 3백여 명이었습니다. 일본 영사관 비밀 보고서에 의하면 "이도구 전투들에서 카노 연대장, 대대장 2명, 소대장 9명, 하사 이하 군병 사망자가 9백여 명이라고 하였다."라고 기록했다. 이범석 역시 일본군의 기밀을 훔쳐낸 사실을 자신의 회고록 우둥불에 기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