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 상당히 좋은 글이라고 생각한다.
예비군 훈련, 마땅히 없어져야 한다!
사실 이런 거 여기 올려도 되는 지 모르겠지만
군대 갔다와서 예비군 훈련가야 되는
불쌍한 거학 초등학교 남자들이라면
동감해 줄 것으로 믿는다.
누군가, 300번을 먹을 수 있겠군?
말과 사물 [말에 대해 아무말이나](MAL 1) [3019/2968]
제 목: [Idio] 예비군 훈련을 앞두고, 헷
올린이: 김현우(nuovo) 2000.07.02 02:00:13 조회: 45
담주 예비군 훈련을 앞두고 훈련장으로 가는 마을버스 노선을 인터넷에서 찾다가,
우연히 이 글을 발견했습니다. 벌써 보셨던 분들도 있겠지만... 원문의 주소는
http://myhome.netsgo.com/idiosynk/IdiosynKrasie/사회/예비군.htm 이고
...idiosynk 까지만 치면 전체 홈페이지로 들어갑니다.
어쨌든, 이 글이 '감동'을 준 이유는,
우선 그 리얼할 묘사와 설명 때문이겠죠. 그런데 그런 쪽으로 재미난 글은 사실
이미 적잖고, 그보다는
둘째, ISA(이데올로기 국가장치)로서의 군대 (또는 예비군, 아니 그보다는
군사주의적 사회)에 대한 탁월한 분석력 때문입니다. 군대 무경험자는
RSA로서의 군대라는 개념과 망가진 지인(현역간 놈들)의 모습을 그냥 병렬적으로
받아들이는 반면, 군대 유경험자들은 너무 개인적인 맥락이 강하고, 또 너무
넌덜머리가 나서 예컨대 사회학 전공자들도 그 경험을 어떻게 이론적으로 천착해볼
시도를 하기 어렵기 마련인데 이 글은 아주 수준있는 분석인 듯합니다. '군사주의적
사회'라는 것은 군대가 한국사회의 '매트릭스'라는 건데 이 부분은 사실
술자리에서나 인정되고 동시에 안주꺼리로 넘어가고 마는 테마입니다.
아래 본문 중 예비군 1년차의 심리와 '군대 가족'에 대한 설명이 특히 볼만합니다.
그런 이론적인 배경(?)을 깔면 더욱... 어쨌든,
세째, 그리하여 이 군사주의적 사회 -- 이 개념은 실은 최근 권인숙씨가 쓰고
발표한 글에서 제안한 개념인데 -- 를 이제 물고 들어가야 된다는 생각이 든단
거겠죠. 매향리, 군축, 군사문화 뭐 이런 단편적인 것들을 넘어서. 반전 평화운동,
페미니즘 운동, 반국가운동, 반자본운동이 이땅에서 심화되기 위해 반드시
넘어가야할 주제로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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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itic
예비군 훈련장에서 - 이건 왜 그토록 지겨울까?
나는 서울특별시 관악구 신림 O동 동대원으로서 5년차 예비군이다. 洞隊에
편성되어 훈련을 받기는 올해가 처음이다.
99년 5월 X일, '향방 작계'(鄕土防衛 作戰計劃의 군대말) 훈련 6시간을 이수하고,
다시 그로부터 2주 후에는 '기본 훈련' 8시간을 받았다. 앞에 것은 동네
초등학교에 모였다가 동네 지키는 훈련을 받는 거다. 저녁 6시에 모여서 한
시간동안 출석 확인하고, '적'을 포획하는 법, 시가지 참호 만드는 법을
실습(?)하다가 밤이 깊어지는 동네로 나갔다. 나는 평소 자주 가던 치킨 집 옆
골목에 배치되어 장장 30분에 걸쳐 예비군 동료 6명과 함께 이 골목을 사수했다.
뒤에 것은 안양에 있는 예비군 관리대대(이하 예관대)에 가서 실탄 사격도
하고(칼빈 6발), 시가지 전투도 연습(!)하고, 아나운서 유정아가 나레이터로 나온
안보 비디오도 보는 훈련이었다.
'미필자'나 여성 독자들을 위해 약간은 장황한 설명이 필요할 듯하다.
예비군 훈련이란 이렇다... 제대한 남자들은 제대한 다음 해부터 지역(자기가 사는
동네) 또는 직장 예비군대(대학생이나 규모가 큰 직장 예비군)에 편성되어 8년에
걸쳐 훈련을 받는다. 8년은 둘로 나눠지는데 '동원 예비군'이라 불리는 처음
4년간은 집을 떠나 현역 군부대에 편성되어 받는 2박 3일(올해부터 3박 4일로
늘어났다)간의 동원 훈련과 기본 훈련에 참가해야 한다. 대학(원)생들은 2박
3일간의 동원 훈련을 면제받는다고 한다.
군대를 정상적으로(!) 갔다온(방위도 포함) 한국의 남자들은 누구나 그야말로
'얄짤 없이' 예비군이 된다. 군대를 갔다온 남자들 모두는 여성들이나
'미필자'들이 갖고 있지 않은 일련 번호 하나씩을 가지고 있다. 이 곧 군번이다.
좀 과장하면 늙어 죽을 때까지(실질적으로는 자랑스런 민방위 대원이 될 때까지),
마치 주민등록번호가 그러하듯이 이 아홉 자리 번호는 늘 사람을 따라 다닌다. 한
번 남편이나 선배, 친구의 주민증을 잘 들여다 보라. 증 왼쪽 하단에 '육' '9X'
'보병' 따위의 문자와 함께 이 번호가 동(면)사무소 직원의 필체로 씌어져 있다.
이사를 가거나 진학 또는 졸업하거나 하면, 이 번호도 함께 XX동에서 OO동으로, 또
XX대학에서 OO회사로, 이사 가고 졸업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번호는 '국민
개병제(皆兵制)'가 낳은 단순한 일련 넘버가 아니다.
이 번호를 가진 사람이면 누구나 예비군 훈련에 참가해야 한다. '얄짤 없이'.
<예비군법>에 의하면 훈련에 정당한 사유 없이 반복적으로 불참한 자는 국가에
의해 고발 조치되고, 6월 이하의 징역 또는 최고 200만원의 벌금이나 구류형을
선고받게 된다. 조선시대의 '군포'와 달라서 벌금 낸다고 훈련이 면해지는 건 되는
건 아니다. 벌금 내고 가야 된다.
<광수 생각>이라는 별로 시답잖은 만화를 그리는 뚱땡이 만화가가 일전에
'상습적인 훈련 기피'로 불구속 기소되어 징역 1년 6월을 구형 받고,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 사회봉사 80시간 선고(중앙일보 5월 26일자) 받았다. 더 옛날에는
가수 송창식이 비슷한 사유로 구속된 적도 있다. 한국의 예비군이 전체 약
300만명(?)을 헤아린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런 식으로 고발되고 재판 받아서
범법자가 되는 남자들의 숫자는 상당히 될 것이다.
돈 많고 빽 좋은 '신의 아들', '장군의 아들'이거나 피치 못할 지체장애나
건강상의 사유가 있는 경우가 아니면 '군대 빼기'가 보통 일이 아니듯이 예비군
훈련 빼기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예비군 훈련장에는 갖가지 종류의
보통 사람들과, 보통 사람의 범주를 넘어서 있는 사람들도 다 모여 있다. 물론
그들 모두의 주민증 번호 뒷자리는 '1'로 시작된다. 몇 해 전 TV에서 이런 코미디
프로를 본 적이 있다. 게이 바의 여장 남자들이 경찰에 단속되어 잡혀 왔는데, 한
게이가 다른 게이에게 묻는다. "언니, 어젠 왜 일 안 나왔어?" 언니 왈,
"지지배야, 어제 동원 예비군 훈련 갔다 왔잖니?"
그렇다. 예비군 훈련장에는 20대 중반에서 30대 중반까지 연령대의 한국 보통(?)
남자들이 다 모인다. 그들이 아나키스트나 사회주의자 전위 조직원이건,
친북주의자이건... 심지어 그들이 해병대 출신이건 6방 출신이건, 게이
인권운동가이건 만민중앙교회 신도라도. 그리고 거기 예비군 훈련장에서 그
남자들은 하나(?)가 된다. 동네 술집 아들내미와 고시 준비생, 조폭 행동대원과
대학 강사, 벤처 기업가와 실업 청년, 철가방과 주방장이. 예비군 훈련받는 그날,
훈련장 안에서, 그리고 훈련장 오가는 관광버스 안에서 모두 그들은 평등한
'예비군'이다. 이것이 위대한 한국식 국민 개병제다.
해마다 예비군 훈련 통지서를 받고 나는 생각하는 것이다. "아, 대한민국이 나를
잊지 않고 있구나. 어쩜, 내가 관악구로 이사온 것도 알고 있네...". 그리고 다음
순간 이런 不敬과 不忠에 극하는 감탄사가...... "에이, 씨불... 또냐? 또?"
한국 남자(물론 여군도 있지만 편의상 이렇게 쓴다)들에게 군대 경험은 무엇인가?
그리고 한국 사회 구조의 재생산에 400만에 달하는 규모의 현역, 예비역 군대와
군대 경험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새벽 5시 50분에 집을 나섰다. 부시럭대는 소리에 아내가 잠을 깼다. 이제는 몸에
맞지 않게 된 칙칙한 예비군복에, 긴 머리를 억지로 덮어 쓴 빌린 군모에, 게다가
그야말로 '둔탁함' 자체인 워카까지 갖춰 신은 남편이나 애인, 남자 선배의 모습은
늘 보던 그들의 모습과는 생판 다른 것일 테다. 아내는 잠이 덜 깬 와중에도
비실비실 웃는다. 여성들이여! 당신네들이 전혀 상상할 수도 없는 짓거리를 당신
애인과 남편, '오빠'는 예비군 훈련장에서 행하고 있다. 짐승처럼 옷 입고,
짐승처럼 기어다니고, 짐승처럼 밥 먹고, 말도 안되는 구식 총을 쏘아댄다. 그리고
그들은 당신을 만나기 전에, 군대에서, 그보다 더 심한 짐승이었다.
1년에 단 며칠, 시간을 내서 예비군 훈련에 참여하는 일이 해당되는 남자들에게는
그야말로 귀찮은 일이다. 생업은 오늘 하루(또는 사흘), 중단되어야 하고 약속은
연기되어야 한다. 게다가 예비군 훈련의 내용 자체가 흥미롭지 못한 것이다.
귀찮지만, 5년차로서, 이제 몸과 마음은 예비군 훈련을 향해 자연스레 움직인다.
특히 1년차 예비군들에게서 많이 볼 수 있는 모습인데, 그들은 예비군 통지서를
받고 또 훈련장으로 나오면서 긴장하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그것은 잊어왔던
악몽을 다시 꾸는 것과 같은 일이기 때문이다. 제대를 앞두고 말년 휴가증을
받으러 인사과에 갈 때, 그리고 전역 대기하는 보충대로 편입될 때 우리는 얼마나
기뻤던가?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 "이 동네를 보고는 오줌도 안 싼다"는 군대 에피그램이
왜 있겠는가? 다시는 그 놈의 군복과 군모를 걸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마음
속 깊은 데서 우러난 정서와 의지의 자연스런 발현이라고 설명할 수밖에 없다.
군대 내의 인간 관계 그 전체 - 아무리 잘 적응한다고 해도 곧잘 사람을 지치게
만드는 계급 위계와 미묘한 이해 관계, 그리고 그로 인해 늘 억압될 수밖에 없는
심리적 상황을 다시 겪고 싶지 않다는 것 아닌가? 또 그러한 상태를
유지,재생산하기 위해 군대 내에서 개발·계발된 억압적 수단들, 즉 갖가지 종류의
얼차려와 폭행, 고함 소리와 폭언, 위협과 회유들을 맛보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는 군대 내에서 주로는 그러한 억압적 수단들의 대상이 되었고, 이른바
'고참'이 되어서는 그 주체가 되기도 했다. "본전 생각"이라는 말이 있기는 해도,
정말 못된 종류의 인간이 아니라면 자발적으로 "나쁜 고참"이 되고 싶었던 고참은
없을 것이다. 군대 내의 위계와 군대 내 일상의 재생산 구조는 누군가를 꼭 나쁜
고참으로, 또는 고문관으로 만들게끔 작동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는 때렸던 김병장도, 맞고 화장실 가서 '씨팔 씨팔' 하며 눈물 짰던
박일병도 모두 같은 피해자일 수도 있는 것이다.
괜히 예비군 1년차를 쫄게 만드는 요소는 이외에도 많다. 게거품을 물었던 유격과
ATT, '총 잘 못 쏜다고' 또 게거품을 만들었던 PRI 등등과 같은 '몸'에 부과되는
고단함들, 그리고 밤새 어둠만 쳐다보며 오들오들 떨며 한없이 외로웠던 경계
근무나, 낡아 빠져 군견한테도 안 먹힐 것 같은 시대착오적인 '정신 교육들'...
이 모두는 실제로 3년 이쪽 저쪽의 시간 동안 우리를 긴장시키고, 겁먹게 하고,
비겁하게 했고, 짜증나게 했고, 외롭게 했던 것이다. 제대 후 이 모두를 이제 겨우
잊고, 그것들이 이제는 모두 '완전 종료'된 것이라 믿어마지 않았던 가련한 저
1년차, 저 자신이 이제 개구리복과 워커를 걸친 채, 다시 눈앞에서 간부 계급장과
인마 살상용 쇠붙이들이 오락가락 하는 것을 보자 긴장하는 것이다. 이 긴장은
너무 자연스럽고 당연하여, 인간적인 종류의 것임이 분명하다.
1년차에게 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예비군도 '軍'이고, 예비군 훈련도 군사
훈련이다. 예비군 훈련은 우리의 일상적 세계에 한 발 쑤욱 들이밀어 넣어진
'군'이며 '전쟁'인 것이다. 그리고 '최후의 냉전 지대'라는 한국 사회에서 '군'과
'전쟁'은 일상적 공포이며, 바꿔서 유식 떨며 말하면 초월적 일상이다.
때로 술이 거나하게 되어서, 많은 한국 성인 남자들은 게거품을 물고 군대 경험을
이야기한다. 그 이야기에 한 번 꽃이 피면, 피치 못할 사정으로 군대를 안(못)
갔다온 사람이 옆에 있건 말건, 여성들이 酒席 참여자의 대부분이건 말건, 훈병
시절에서부터 제대 말년에 겪은 일까지, 부풀리고 뻥 튀기고... 때로 이런 차원을
넘어서 실제로 지가 전혀 겪지 않은 일이나 어디서 주워들은 경험담, 거짓말까지
온통 버무린다. 혹 그 자리에 같이 있거나(없는) 상대방에게 '꿀리지' 않을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총동원하는 것이다. 그 자리에서 한국 남자들은 '코만도'나
'람보'에는 못 가더라도 모두들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쯤은 된다.
불과 2-3년의 경험으로 이와 같은 현상이 빚어진다는 건 그 경험의 강밀도를
반증하는 사실이기도 할 것이다. 인생의 금쪽 같은 시기에 겪은 그 대단하고
황당한, 통과제의! 왜 군대 같다와야지 '사람이 된다'는 말이 있겠는가?
그런데, 이런 '뻥'들을 지겹게만 생각 말고 화제가 떠올라 왔을 때 한 번 귀
귀울여 들어 보라. 재밌는 사실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자신이 군대 있을
때 얼마나 심각한 고문관이었고, 얼마나 비겁했고, 얼마나 나쁜 놈이었고, 얼마나
쫄았던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이나 경우는 한 건도 없다는 것이다. 혹간 얼마나
많이 맞았고 얼마나 고생했는지에 대해서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또한 자기
경험을 과시하기 위한 보족적인 성질의 것이지 군대에서 겪었던 비참과 자아
망실과 억압의 경험 자체를 말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 왼쪽 그림> www.army.go.kr에 있는 이현세의 만화 "까치병장" 중 한 대목이다.
유격장의 분위기와 조교와 병사의 관계가 잘 묘사되고 있다. 이 다음 장면에서
공포와 긴장을 못 이긴 미국 유학생 한재훈 이병은 못나게도 바지에 쉬를 지리게
된다.(그림이 흐릿해서 죄송... 워낙 육본 홈페이지에 올라 있는 상태가 희미하다.)
상당히 특이한 체질(이른바 '군바리 체질')의 소유자가 아니고는 누구나
파괴적이며 억압적인, 때로 모멸스런, 총체적으로 말하여 '다시 겪고 싶지 않은'
기분 나쁜 경험을 기억 속에 내장하고 제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말 잊고 싶은 그 경험과, 거기에 처했던 자신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
것이다. 아니, 말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다. 자기 속내 까발리기를 직업으로 삼는
소설가들이다. 지금은 흘러 간 경향이 되었지만, 7-80년대에는 신춘문예 응모작
중에 군대 체험을 소재로 삼은 이야기가 가장 많았다고 한다. 젊은 작가
지망생들에게도 역시 군대 체험이 가장 강력한 통과제의였기 때문이라고 쉽게
생각해볼 수 있다.
특이 체질을 타고난 작가들이야 어쨌든, 통과제의에서 겪은 것을 남들 앞에서
속속들이 이야기할 사람은 별로 없는 것이다. 그것이 첫경험이든, 포경수술이든,
군대 경험이든 아픈 통과제의에서의 경험은 기억 속에 간직된 채 그냥 사회의
'성숙한' 한 구성원으로, 즉 '어른'이 되어 살아가게끔 되어 있는 것이다.
이 통과제의라는 성격의 군 체험이 우리 사회에서 갖는 문제성이야말로 중요하다.
과연 어떤 통과제의의 푸닥거리가 군대에서 행해지는가?
군대 자체는 완벽하게 완결적인 하나의 사회이다. 이에 걸맞게 거기에는 고도의
분업과 위계화된 질서가 존재한다. 이등병에서 병장에 걸친 쫄병과 고참병들,
간부, 장교의 인적 구성은 완벽한 피라미드를 이루고 있으며, 수백 가지 종류의
'주특기'에 따라 자신이 맡는 일이 정해져 있다. 육군의 경우 대부분의 병사는
'일빵빵(100)'이지만, 와중에서도 계급과 해당 부대의 사정에 따라 3년 내내 밥만
하거나, 타자(컴퓨터)만 치거나, 남의 머리만 깎거나, 테니스만 치거나, 운전만
하거나, 보초만 서다 볼일 다 본다. 이런 분업의 경계를 넘어서는 일은 사회에서
직종을 바꾸는 것만큼 어렵다.(그래서인지, 아예 의무를 면제받거나 후방으로 배치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직'을 잘 받기 위해서 따로 빽이나 돈을 쓰는 경우도
많다.)
분업의 체계는 군이 그 실질이야 어떻더라도, 형식상 완벽한 계산적 합리성과
효율성을 추구한다는 점에 깊이 관련된다. 투입과 산출에 대한 정밀한 계산과
변수에 대한 예측, 미세한 부분에까지 장악한 분업의 체계가 군을 지탱하는
핵심이다. 온갖 문명의 산물들도(통조림, 몇몇 종류의 패션 등 일상적 소비물부터
4륜구동 자동차와 인터넷까지) 군을 위해서, 군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라 한다.
(물론 한국군이 이런 걸 만든 건 아니다. 한국군도 물론 이런 걸 표방하고
싶겠지만, 실질에 있어서는 아주 이러한 대원리와 너무 큰 상거를 갖기 때문에
자주 국민들이 열받아 한다.)
각설, 군대가 군대 바깥 우리 사회의 분업 체계와 억압 구조의 모델이며, 동시에
사회의 축소판이라는 점은 군의 계급적 위계구조에서 더욱 잘 드러난다. 계급에
따른 철저한 명령과 복종의 체계는 말할 것도 없고 이를 위한 행위의 기제들 - 즉,
서열과 그에 따른 언어적 통용 구조(호칭과 존대말)가 바로 그것이다. 신교대에
입소하자마자 일반 사회의 땟물을 벗어야 하는 신병에게 교육되는 것이 바로 이런
것들이다. "-요"자가 붙는 모든 말이 폐기되고(모든 존대말은 "-습니다"체만
허용되는데, 왜 그래야 되는지 아직도 이해가 안되는 군대의 비밀 중 하나이다),
새로운 호명 기제(나는 "훈병! 김!말!똥!", 너는 "김병장님")가 병사들에게
부여되는 것이다.
게다가 군대는 가족이기도 하다. '애'인 이등병에게 내무반의 아비가
분대장이라면, 또다른 고참 누군가가 에미다. 그리고 중대 병사들 전체의 애비가
중대장이면, 인사계는 에미다. 애비의 애비도 있고, 에미의 에미도 물론 있거니와
사단 본부대에 근무하던 필자가 귀를 의심하면서 연병장에서 직접 들었던 바,
"사단장님이 우리 사단 2만 병사의 아버지라면 사단 주임상사님이 바로
어머니입니다!". 결단코 내가 그들을 애비, 에미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아버지와 어머니의 역할은 사회에서의 그것과 유사하다. 녹색 견장을
단 아버지는 가족을 대표하며, '아이'들에게 명령하고 복종할 것을 강요하며, 벌
준다. 어머니는 밥을 챙겨주고, 휴가 보내주고, 상담하며, 벌 받는 아이를
감싸주기도 한다. 전 사회의 '가족(주의)화'라는 들뢰즈의 테제가 상기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군대는 거대한 학교이다. 앞서 말한 모두가 보편적 윤리로서, 병사들에게
교육된다. 이를 따르지 않으면 비공식적으로는 고문관이 되어 군대 생활이
'꼬이든지', 다른 병사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당하고, 아니면 군기교육대나
감옥(영창) 간다.
한 명의 이등병은 이십 몇 개월을 거치는 동안, '훈병'에서 '병장'으로 자라난다.
그러면서 어깨에 견장을 달고 '애비' 놀이를 해보기도 한다. 관계 속의 고통과
고독을 배우는 법을 배우기도 하고, 자신의 기능적 임무를 철저히 반복 실행하는
훈련을 한다.
군에서 배우는 것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고 생각된다. 즉 쁘띠 부르주아, 혹은 그
이하 계층의 공민(=국민)으로서 윗사람에게 복종하고 사회의 기능적 메카니즘
속에서 철저히 자기 임무를 성실히 이행하는 것(몇 안되는 아랫사람을 복종시키는
연습은 이 속에 포괄된다)! - 그래서 군대를 갔다와야 비로소 인간이 된다??!
부모와 학교로부터 배우지 못하거나, 제대로 익히지 못하여 군대에서 반복적으로
교육, 재교육되는 것은 또 있다. 그 중 중요한 것은 지겨운 '안보, 이념 교육'을
통해 교육되는 이데올로기 교육인데, 이를 구구히 쓰는 것은 참 지겨운 일이다.
여기서 북한은 '적'이며 '북괴'이며, '우리 내부의 적'은 사회 혼란
세력이다.(한총련 학생과 민노총 노동자들은 단골 출연자로 안보 교육 비디오에
등장한다. 그리고 때로 '일본'이 우리의 적이라고 교육하기도 한다.)
이러한 안보 이념은 '정신'교육이라는 명확한 형태에 의해서보다는 더 자주
반복적으로 군대 내의 일상 생활을 통해서 교육된다. 상시적인 국기에 대한 禮,
국가 제창 등은 말할 것도 없고, 정말 '군'이 국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국가'가
'군'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忠'은 강조된다. 왜
군대의 경례 구호가 "충성"이겠는가? 이 충성은 국가에 대한 충성일 뿐 아니라,
상관들에 대한 충성이기도 하다.
군대에서 우리가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 배우는 모든 것 중에는 정말 안
배워도 될, 배우지 않으면 더 좋을 것들도 포함되어 있다. 그 첫째는 한국식 부패
구조의 핵심이라는 '클라이언틀리즘(clientalism - '높은 자리에 있을 때 잘
봐줘'가 이 개념에 대한 가장 쉬운 뜻풀이)'이다.
군대는 정말 한국식 클라이언틀리즘의 아성이다. 학연, 지연이라는 군대 밖
'연줄'과 '동기'니 '期數'니 하는 군대 내 '緣'은 군내에서의 생활과 인간관계에
있어 그야말로 중요하다. 학교나 고향 선배가 혹 내 고참이거나 중대장이라든가,
위병소와 px에 내 동기가 있다거나 하는 일은 '군대 생활이 피(펴)는 데' 있어
얼마나 중대한 요소인가! 뿐만 아니라 군 입대가 강제적 의무로서 젊은 남성들에게
계속 부과되는 한, 계속 반복될 수밖에 없는 '병역 비리' 자체가 클라이언틀리즘을
매개로 해서 이뤄진다.
그리고 군 경험은 한국식 '클라이언틀리즘'이 재출발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이른
바 '전우'들이 거기서 만들어지고, 軍緣이 생겨나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학연과
지연 못지 않게 중요한 삶의 요소가 된다.(아나운서 이계진과 신윤주가 사회를
보는 'TV 내무반'이라는 프로를 본 적이 있는지? 동기들과 고참, 선임하사들이었던
아저씨들이 떼거지로 나와서 생사를 확인하고 인연을 불태우는 그런 프로다.)
군연의 중요성은 군 경험의 강렬함에 비례한다. 방위 출신들이 기수별로 또는
부대별로 제대 후 다시 모여 뭔가를 했다는 소리는 결코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러나
해병대 출신, 특전사 출신, 그리고 ROTC와 육사 출신의 장교들은 아마 지금 이
시간에도 서로 연락하여 기수와 제대 연도를 서로 확인하고, 돈도 빌리고, 술잔도
나누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와중에 클라이언트와 패트론으로서의 관계를
만들어 나가려 노력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군대는 한국의 남성중심 문화와 그 이데올로기가 유지 온존
강화되게끔 하는 중요한 재생산의 장이기도 하다. '사내'들끼리 생활하는 그 곳은
한국의 남성중심 문화가 아무런 반성과 제약을 받지 않고 횡행하는 무풍지대이다.
마초맨이 될 것을 끊임 없이 강요받는 훈련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그러고도
네가 군인이야?"라는 질책은 곧잘 "그러고도 네가 사내야?"라는 질책과 등치될 수
있다.) 생활 자체가 그러한다.
한참 끓어오르는 왕성한 성욕을 주체하기 힘든 나이에 우리는 군대에 간다. 성욕은
어디선가 충족되거나, 승화 또는 배설되어야 하는데, 매우 난감하다. 군 복무라는
생활은 이를 올바른(?)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는 통로가 구조적으로 차단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다양한 방식의 자구책이 병사들 스스로에 의해
개발되지 않을 수 없다.
각종의 간접적 경험담("야, 너 사회 있을 때 가시내들 따 먹은 이야기 해 봐!",
"야, 너 이번 외박에서 네 여대생 애인 따 먹었지? 그 이야기 한 번 해라")과 간접
체험(서적과 야한 사진들), 부대 주변 업소를 이용한 매매춘(꽤 많은 남자들은
입대 전야에 친구들의 손을 잡고 '업소'에 가서 동정을 지우기도 한다. 그리고
거기서 물꼬를 튼 어떤 병사들은 3년내내 부대 주변의 업소를 이용하기도 한다.
대단히 순진했던 한 후배가 군대가서 거의 업소 상단골 손님으로 활약한다는 말을
들었다. "너 왜 그러는데?" 묻자, 후배 왈, "그것 밖에 재밌는 게 없더라구요.)
그리고 자위 행위.(내가 있던 부대의 사단장 왈, "화장실은 우리 병사들이 젊음을
발산하는 중요한 장소입니다")
이러한 대단히 정상적(?)이고 온건한 방식 외에, 때로 힘 없고 가녀린 쫄따구를
이용하는 남색이나 계간이 행해지기도 하고, 對民 사고로서의 강간사건이
일어나기도 한다. 여하간 여성은 대상 그 이하도 그 이상도 결코 될 수 없다.
거기에 여성은 전혀 없고, 여성적인 것은 '군'과 어울리지 않기에 타기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반성될 여지가 없는 남성 중심의 성문화를 70만의 남성들이
동시에 체험하고 있다. 한국에서 남성 위주의, 반여성적인 공간은 아직 광막히
펼쳐져 있다. 그리고 '군'은 이 광막한 공간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잡다하게 중요한 생각들을 하는 와중에 버스는 안양 관동교장에 도착했다.
올해부터 예비군 훈련이 확 달라졌다고 매스컴에서 떠들어댔는데 과연 그러했다.
들어가는 입구에서 받는 복장 검사부터 강화되었다. 나는 작년에 워커(280mm, EE
사이즈)를 한 친구에게 빌려주고 못 돌려받는 바람에 운동화를 신고 훈련을
받았다. 아주 편했는데, '발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면 별로 시비거는 교관이나
조교는 없었다. 그러나 올해는 달랐다. 그리고 예비군 훈련장에 오는 사람들이
지겹고도 아까운 시간을 떼우기 위해 가지고 오는 신문이나 책들도 훈련장에
가지고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것이다.
연병장에 모여 입소식을 한다. 국기에 대한 경례, 대장님께 대한 경례("충!성!")에
이어 등단한 예관대의 대대장님이 아주 게거품을 무는 것이다. '여러분도 소문을
들었겠지만 예비군 훈련을 작년과 같이 생각해서는 안된다', '훈련에 제대로
임하지 않는 예비군은 바로 퇴소 조치시키겠다!'는 요지의 위협성 환영사가
이어졌다.
예비군 훈련은 귀찮은 것이다. 그래서 아주 애타서 반복되는 조교들의
외침("선배님, 줄 좀 맞춰 주십시오, 선배님, 모자를 써 주십시오, 선배님,
호주머니에 손!")이나 교관들의 위협에도 몸은 무겁기만 하다. 아주 만근억근이다.
총은 땅에 끌리고, 양손은 쉼 없이 호주머니 속으로 들어간다. 오후 4시까지
시간을 빨리 보내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예비군들의 과제이다. 앞에서 예비군
훈련이 주는 '긴장'을 말했지만, 2-3년차만 되면 거의 다 사라질 그 긴장보다도 더
큰 특징은 바로 이것이다. 물론 이는 '긴장'과 상관성을 갖고 있기도 하다.
생업을 중단하고, 또는 학업과 빈둥대기를 중단하고, 직장 상사와 팀 동료들 그외
선후배에게 "나, 낼 예비군 훈련가요"(이 말에 토다는 상사나 동료는 거의 없다),
양해를 구하고 다음날 새벽 아침밥을 굶은 채 훈련장으로 우리는 왔다. 워커 끈은
반만 묶고 모자는 호주머니에 찔러 넣고, 상의 단추는 세 번째부터 채운 채.
그리고 여기서... 시간과 싸운다.
'점심은 언제 먹나...', '끝나고 술 한 잔 하나' - 이건 평소에도 비교적 한가한
예비군이다. 생업에 쫓기는 아주 바쁜 예비군들은 아예 불참할 것이다. 그리고
바쁜 예비군들은 쉴 새 없이 휴대폰을 꺼내든다. 훈련용 연막탄과 수류탄 신관이
쾅 꽝 연기내며 터지는 와중에 맨홀을 통과하여 적을 향해 돌진하다가, "날 좀
보소오, 날 좀 보소오", 한 발 또 한 발 카빈 총탄을 뜨거운 총열에 장전하다가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불어". 미처 처리하지 못한 생업과 일상업들이 하루동안
마냥 '열중 쉬어', 지체되고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예비군 훈련에 나온 남성들은 누구나 이 훈련이 왜 필요한지 의문을 품어 보았을
것이다. 국가적 동원이 곧 국가적 낭비로 느껴질 만한 이유는 많다. '안보'니
'남북 대치 상황'이니 하는 말을 여기서 누가 꺼낸다면 그 입에다 재갈을 물리고
싶다. 예비군 전력이 '국가 안보'에 얼마나 보탬이 되는지 아무리 설명한다 해도
설득력을 갖기 힘든 것이기 때문이다.
기백만 규모의 예비군 전력을 상시 운영해야할 만큼 위협적인 안보 상황에 우리가
처해 있는지 나는 모르겠다. 우리에게는 첨단 전자장비로 무장한 70만 강군이
있고, 게다가 가공할 미군이 뒤를 받쳐주고 있지 않은가.(유사시(?)엔 심지어
자위대가 우리를 도와줄지도 모른다는데?) 북한의 전력이라는 게 얼마나 쪽수
위주로 허름한 것인지 금번 '서해 교전'으로 증명된 바 아닌가? 그래서 당신들은
그 '승전보'에 기뻐 그렇게 날 뛴 것이 아닌가?
"예비군은 적 또는 무장공비의 침투에 대처, 향토방위체제를 확립하기 위하여
설치되었으며, 호국의 투사로서, 군·경의 동지로서, 국민의 자제로서 '일하면서
싸우고, 싸우면서 일하는' 범 국민적인 자유 방위의 역군이다"가 공식적인 예비군
창설 목적이며 개념이다. '일하면서 싸우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총 쏘다 말고
휴대전화 받는 우리 예비군들은 보여준다. 그리고 우리 사회의 '일 하는
일상'조차도 얼마나 깊이 국가에 의해 장악되어 있는지를 보여준다.
국가는 우리 일상 깊숙한 곳에 파고 들어와 있다. 예비군 훈련장에 온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그들은 국가에 의해서 "호국의 투사" 또는 "군경의
동지", "자유방위의 역군"으로 호명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공평한(?) 이 호명을 거부할 경우, 그는 처벌받게 되어 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기백만 예비군의 존재를 통해 이익을 보는가? 도시락 만들어
대주는 아저씨들인가? 음료수 팔러 버스에 오르는 아줌마들인가? 월급 받아 먹는
동대장 아저씨들인가...?
각설, 현역 군대가 한마디로 거대한 국민(보통) 교육 기관이라면 예비군은 일종의
평생교육 기관인 셈이다. 현역 시절에 배운 많은 것들 - 군사문화, 복종심, 남성
우위, 국가주의, 냉전 이데올로기. 그리고 이 모두를 위한 행위의 기제들을 잊지
않게 하기 위해 국가가 베풀어 주는 대단한 은혜인 것이다.
정해진 시간에 똑같은 옷과 패션으로 모이고, 내 이름이 거기 있는지를 확인하고,
또 신분증을 총기와 바꾸어 가진다. "충!성!" 구호로 대장님께 인사하고, 열
맞추어 훈련장으로 간다. 누군지 모르는 막연한 적을 향해 내달리고 총탄을
날린다.
그러나 이제 그 대단한 은혜를 영특한 우리 예비군들은 전혀 고마워하지 않는
듯하다. 군대에서 배운 것들은 따로 복습할 필요없이 우리의 삶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명령과 복종은 이제 지겹다. '생업' 속에서 또 그것을 위해서 우리는
충분히 국가에 복종하며 상사에 순응하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지 그
모두는 지겨울 뿐이며, 혹 가다가 애꿎은 후배 기간병에게 신경질을 부려보는
것이다. 내 표적에 6발이 맞았건, 9발이 맞았건, 중요하지도 않고 이제 술자리의
안주거리가 될 수도 없는 것이다.
P.S> 사소한 듯 하지만 절대 사소하지 않은 예비군들의 불만 한 가지 : 왜 국민의
자제이며 군경의 동지이며 호국 투사이기도 한 예비군은 제 돈 내고(교통비와
중식비) 훈련받으러 가야 하는가?
글쓴 이 : 김장철(heutekom@yaho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