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광복회광주광역시지부
 
 
 
카페 게시글
역사교실 스크랩 나주 궁삼면 농민항쟁
어등산나무꾼 추천 0 조회 95 16.01.07 02:3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수탈된 토지를 되찾기 위한 농민들의 36년 동안의 투쟁

 

 

일제강점기에 농민들의 피땀 어린 투쟁이 어린 곳이 나주에 있다. 궁삼면(宮三面이)라 불리는 지역이다. 궁삼면은 행정 명칭이 아니라 농민들이 되찾고자 했던 나주군 지죽면, 욱곡면, 상곡면 3개 면의 궁토(宮土)를 말한다. 지금의 영산포, 왕곡면, 세지면, 봉황면 일원이다. 궁토란 이름이 붙게 된것은 영친왕의 생모인 순빈 엄씨를 위해 지은 경선궁의 장토로 둔갑되었기 때문에 궁토라 부르는 것이다.

 

서기 1888년 두 해에 걸친 혹심한 가뭄으로 영산강 유역인 지죽, 욱곡, 상곡 등 3개면 일대의 민유지 4만5000여 두락을 경작하던 1400여 농민 중 많은 사람들이 마을을 떠나게 되어 주인 없는 전답이 1100여 두락에 이르렀다. 경저리 전성창은 자신이 3년 동안 세금을 대납했다 속여 이 땅을 자기 소유로 하고 그 외 소유자가 있는 토지 1만3000여 두락까지 강탈하였다.

 

1894년 되찾은 이 땅은 2년 후 채규상이 전라도관찰사로 나주에 부임하면서 재강탈되었으나 1897년 토지환부판결을 받게 된다. 이에 탐학무도한 전성창은 김영규와 모의, 순검관 헌병 등 100여 명을 앞세워 반대하는 면민을 포박, 구타하여 4만5000 두락의 농토를 약탈하였다.

 

1899년엔 경성재판소에 제소키 위해 경성에 올라간 면민 36명이 체포투옥되고 승소판결 토지증거서류를 탈취당하였다. 1908년 토지소유증명을 해주라는 내각법제국의 엄명에도 불구하고 김영규는 나주군수 김성기에게 벼 200섬을 뇌물로 바쳐 삼면의 토지를 경선궁의 장토라고 허위보고, 정부의 결정을 번복케 했다.

 

1909년 동양척식회사는 토지매수반을 파견하여 관헌의 위력과 뇌물로 분쟁중인 삼면토지의 매매계약을 체결, 시가 200만원 상당을 단돈 8만원에 매수하고 3개 면민에게 승인날인을 강요했으나 한 사람도 이에 응하지 않자 3개 면의 이상협, 장홍술, 강자옥, 김운서 등을 체포하여 혹독한 태형 끝에 도장을 빼앗아 삼면 토지를 동척 소유로 했으니 이때부터 3개 면민과 동척 간에 토지계정이 시작되었다.

 

한일합병이 이뤄진 1910년 10월 면민 대표들이 상경하여 동척과 담판했으나 무위에 그치자 토지매수무효 및 토지반환청구 소송을 냈다. 동척은 1912년 일본 이민들에게 경작권을 양여하기 위해 일본인 헌병들을 앞세워 왕곡면 양산리에 출동, 논두렁에 닥치는 대로 동척의 푯말을 박았다. 이 때 이회춘의 노모가 분연히 저항하자 새끼줄로 노파의 목을 묶고 군도와 몽둥이로 난타하여 즉사케 했다. 이에 이회춘은 경성고등법원에 호소하려고 마을사람들과  노모의 시체를 메고 서울길에 나섰다가 남평에 이르러 헌병에게 모진 매를 맞고 쫓겨와야 했다.

 

이듬해인 1913년 경성고법에서 토지반환청구소송에 승소하였으나 귀환도중 나주경찰서 경찰대에 혹심한 구타를 당하고 승소판결문을 빼앗기고 말았다. 거듭된 패소에도 소유권을 주장하던 동척은 1914년 등기말소 소유권인도소송을 제기한 3개 면을 헌병 700여 명을 동원 점령하고 면대표 10명을 구속했으며 농민 150여 명을 영산강 헌병분유소와 광주감옥에 가두었다. 또 2만여 면민에게는 3개월 동안 문밖 출입을 금지시키고 가혹한 고문과 협박으로 소유권포기증서에 날인케 했으며 소송도 취하케 하고 말았다.

 

1920년 면민대표 120여 명은 소작료 불납운동을 전개했으며, 토지회수투쟁위원회를 조직하여 남자는 몽둥이, 여자는 치마에 돌멩이를 담아 나주경찰서를 습격하고  3개 면 주재소 및 소작료 수납장 기물 등을 모조리 파기 소각하였다.

 

이 사건으로 면민대표 등 200여 명이 체포구금 되었는데 이를 탄원키 위해 일본인변호사 포시진치에게 민사소송을 의뢰했다. 1926년 동척은 경찰과 총독부와 합세하여 영산포에서 현지조사에 착수한 포시 변호사를 속이려 했으나 면민 대표들의 끈질긴 제보와 폭로로 그들의 비리가 백일하에 폭로되고 말았다. 그러자 경찰은 면민대표는 물론 일반 면민까지 구급하고 고문을 가했으면 이 때문에 나재기는 불구의 몸이 되었다.

 

광복후 1945년 나재기를 위원장으로 한 궁삼면농민회가 조직돼, 적산으로 처리된 궁삼면 토지의 무상분배를 미군정에 요청하는 한편 궁삼면 사건의 진상을 신문사 등 각계 각층에 배포하였다.

 

결국 농민들이 제 땅을 다시 돈을 내고 사는 큰 부담을 겪고 서야 이 투쟁은 끝이 난다. 이 사건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이 바로 문순태 선생의 ‘타오르는 강이다.

 

지난 1908년 식민지 치하 이후 동양척식주식회사의 토지수탈에 대항, 36년 동안 끊임없는 투쟁을 벌여온 궁삼면 농민들의 구국정신을 되 새기는 「궁삼면 항일농민운동기념비」가 나주시 왕곡면 장산리 나주∼영암간 국도변에 세워지고 이 일대가 기념공원이 된다.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