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도시라면 당연히 교통수단을 고려해야 하지만 마카오는 도보로 천천히 돌아보아야 유적이 보이더군요.
도시의 복잡함이나 중국풍의 화려함으로 함께 뭍혀있기 때문입니다.
세나두 광장은 초창기부터 이어온 마카오의 중심지로서, 현재에도 많은 공식적인 행사와 축제 장소로서 각광받고 있다고 합니다. 전 의회 빌딩 근처에 자리한 전형적인 삼거리 회관 또한 중국인들의 행사에 중요한 장소로서 역할을 하고 있으며, 이는 마카오만의 독특한 포용과 공존의 모습들을 보여준다는 것이죠. 내가 갔을 때도 중국공산당 19기 중앙위원회가 열리는 기간이라 행사 축하 조형물이 광장에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광장 양면의 건물들은 파스텔 빛의 신 고전주의 건물들이 자리잡고 있으며, 이는 유럽의 우아한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어 관광객들과 현지 시민들의 사랑을 받는 답니다. 이곳광장의 특징의 하나는 물결모양의 모자이크 보도라는 군요.
성도미니크성당-중국에서 지어진 첫 번 째 성당으로 본래 멕시코의 아카풀코에서 건너온 3명의 스페인계 도미니카 사제들에 의해 1587년에 건축되었으며, 이 성당은 성녀 로자리의 형제애 (Brotherhood of Our Lady of the Rosary)라는 곳과 이어져 있습니다. 중국땅에 발간된 첫 포르투갈 신문 (1822년 9월 12일자 [차이나 삐])이 이곳에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건물 뒷편의 종탑은 작은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약 300점을 공예품을 소장하고 있습니다(출처:구글, 위키백과)
잠시 이정표 거리라고 할까요? 여행후기에 '바디샆'지나서 육포거리하는데 그 이정표중의 하나입니다.
이곳이 유명한 '육포의 거리'입니다. 신림동 떡볶이 골목, 안지랑의 곱창골목과 같은 성격이랄까요? 가게마다 맛배기 내놓은것이 많아서 이마트나 홈플러스 가서 맛보는 기분입니다. 여러종류의 육포를 맛보는데 별로 구분이 잘 안가더라구요, 사람이 너무 많고 시끄러워서 살려는 마음이 안들었습니다. 이곳이 소매치기가 성행한다고 해요. 하여간 마카오 관광의 대명사인 성바울성당터에 가려는 길입니다.
많은 인파를 넘어 언덕에 보이는 건물이 성 바울 성당입니다. 성 바울 성당 계단 앞에 있는 예수회 기념 광장. 광장 오른쪽에 꽃을 든 여자와 악수를 청하는 남자 청동 조각상이 있다. 중국과 포르투갈의 우정을 표현하였다고 합니다
성 바울 성당(Ruinas de S. Paulo, 大三巴牌坊, Ruins of St. Paul's)은 동양과 서양의 종교와 문화가 혼합된 마카오의 상징적 성당이다. 성 바울 성당은 마카오 초창기 교회이자 예수회 소속 대학이었다. 천주실의의 저자인 마테오리치가 이 대학 출신이다. 아시아 주변국가에 파견할 선교사를 양성하기 위해서 1580년에 지어진 이 성당은 1595년, 1601년 화재로 훼손되었다. 다음 해인 1602년 기초 공사를 시작하여 1637년에 완성하였다. 당시 마카오가 해상 무역으로 번성하여 성당을 크고 화려하게 지을 수 있었다.1834년 마카오 내란으로 예수회가 해체된 후에는 군사시설로 쓰이다가, 1835년 또 한 번의 화재로 정면만 남기고 허물어졌다. 성당 건물은 폐허가 되었지만 성당 정면이 역사적 가치가 높고 계단에서 바라보는 주변 환경이 아름다워서 관광객이 많이 찾는다(출처:위키백과).
사람들로 북새통이어서 잠깐 사진촬영도 쉽지가 않았다. 하여간 21세기의 최고의 발명품은 셀카봉이다.
성 바울 성당 정문에 예수회 문양과 조각을 새겨 놓고, 동상을 세워 놓았다. 1620년부터 예수회 수도사 카를로 스피놀라가 중국인 조각가와 일본의 종교 박해를 피해 나가사키에서 도망친 일본인 천주교 석공들의 도움으로 7년 동안 작업하였다. 그래서 성당에 동양의 문화적 요소가 많이 가미 되었다. 일본인들이 순결의 상징으로 생각하는 국화를 마리아 옆에 장식하였고, 중국에서 최고 권력을 의미하는 용을 조각하였고, 교훈적 이야기를 중국어로 새겨 놓고, 중국풍의 사자 동상을 세워 놓았다. 성 바울 성당의 정면 조각은 종교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맨 위의 비둘기는 성령의 힘을 나타낸다. 그 주변의 해와 달, 별은 천지창조를 뜻한다. 그 밑의 동상은 어릴 때의 예수상으로 왼쪽에 고난의 상징인 채찍과 가시관이 있고, 오른쪽에 천국으로 가는 계단이 있다. 세 번 째 단에는 예수회의 종교관을 조각하였다. 성모 마리아 상 옆으로 6명의 천사 조각을 새겨 놓았다. 세 번 째 단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가면서 사탄으로 인해 인간은 망망대해를 떠돌아다니는 존재이나 구원의 샘물로 생명의 나무를 얻는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만약 구원을 받지 못하면 용에 의해 해골(지옥)이 된다는 구조이다.
1835년에 성 바울 대학과 이웃한 마터 데이 성당이 화재로 소실되어, 지금은 소위 성 바울 성당의 유적이라 불리는 잔해만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하고 상징적인 성당의 전면부가 남아 있어 관광객들은 동서양의 건축 예술이 융합된 우아함을 충분히 엿볼 수 있습니다. 마카오의 다문화적인 특징을 대표하는 상징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당의 전면부만이 남아있어서 힘의 균형에서 부족하다고 진단한 모양입니다. 하긴 상식적으로 보아도 조금은 불안한 형태입니다. 뒤로 가서 보았더니 철골로 보강을 하고 균형을 이루었더군요. 감시자가 만지거나 접근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지하에는 묘도 있고 유물도 전시되어 있습니다.
몬테 요새는 모두 예수회의 건축물로 마카오의 “아크로폴리스(성채)”입니다. 요새에서 바라다 본 성당과 성당을 주변으로한 도시풍경입니다. 어딘지 허름한 시가지의 모습에서 우리나라 재래시장이 연상됩니다.
몬테 요새는 1617년에서 1626년 사이에 건축되어 사다리꼴 모양으로 약 10,000 평방 미터 지역을 점유하고 있으며 마카오의 방어를 위한 중심 요새입니다. 이 요새는 대포, 병영, 우물 그리고 약 2년을 견딜 수 있는 군수 창고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요새의 네 개의 모퉁이는 보호벽을 형성하기 위해 돌출되어 있습니다. 박물관은 들르지 않고 정상에서 시가지와 성당, 성곽의 대포를 보고 내려왔습니다. 마테오릿치 신부님상이 있어서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인증삿이니까요^^
그리고 또 망고쥬스를 잘하는 이 가게에서 마른 목을 축이고 반드시 한국인이 들르는 한 곳을 가는데, 인상에 남을 포토죤은 성당이 보이는 골목길이라고 합니다.
성안토니오 성당-김대건 신부님-1560년 이전에 대나무와 목재로 만든, 마카오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 중 한 곳입니다. 이 곳은 예수회가 마카오에 가장 처음으로 본부를 설치한 곳이기도 합니다. 성당은 몇 번의 재건을 거쳐,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성당은 1930년대에 만들어진 성당입니다. 과거에는 많은 포르투갈인들의 결혼식이 이 성당에서 거행되었으며 중국인들은 그것을 화왕당 “花王堂-꽃들의 성당” 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한국 가톨릭 최초의 신학생인 김대건 안드레아, 최양업 토마스, 최방제 프란치스코가 박해를 피해 유학을 와서 공부한 곳이기도 하다. 왼쪽에 김대건신부님을 모시고 있다. 생각해보면 서울에서 여기까지 걸어서 온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하는 점을 신앙만의 힘이었을까 궁금하다. 기록은 발톱이 빠지고 발가락이 짓물렀고 벌레들이 뭄을 갉아먹었다고 한다. 압록강을 건너 만주, 북경, 상하이를 거쳐 장장 6개월의 대 장정이었으니 그 투혼들을 높이 여겨야하지 않겠는가. 탈북자들이 태국까지 가는 여정을 고려한다면 목숨을 걸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서양이 문물과 지적수준을 접하면서 신학생이었던 이분들은 허약한 조선이 무엇을 해야하는가를 느끼고 신앙적으로 접근했던 선각자들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당시 세계정세는 강자들의 포식시대였다고 본다. 그 상징을 마카오 몬테요새의 대포에서 느낄 수 있다. 비록 지금은 한낮 전시물에 불과하지만, 당시는 원시적 원주민들에게 과히 넘지못할 무지막지한 힘의 상징이었으리라. 어쨋든 신자로서 이러한 성당의 유적을 중심으로 관광을 할 수 있어서 흥분된 격정을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