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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레길" 9월 9일 동해문화원에서 행하는 문화학당의 강사로 초대되어 대면 강의를 했다. 강의는 오후 2시로 예정되었지만 이승휴의 유적지인 무릉계곡, 용계, 중대동, 삼화사를 찾아 보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출발했다. 새벽2시에 일어나 준비를 더 하고 아침 7시 차를 타고 동해시 9시 50분에 도착했다. 문화원장님이 대기하고 있어 우리는 무릉계곡, 삼화사를 2시간 답사했다. 나는 십여편의 삼화사관련 논문을 읽으면서 처음으로 가 보는 답사였다. 그리고 무릉계곡을 따라 차로 가면서 주차장에 수백대의 관광객의 차가 이미 와 있어 어디를 가든 이런 현상을 보게 되어 씁쓸한 느낌을 받았다. 나도 차가 있기에 쉽게 올라가는 것이지만, 현장에는 향토사가 네분이 오셔서 설명을 해주셨다. 오늘 내가 발표 원고에서 다룬 윤종대씨는 자료를 큼직한 글씨로 복사한 것을 주셨고. 그 원문을 외우면서 이야기 해주셨다.
이승휴가 '보광정기'에서 서술한 첫대목의 중대동이라는 반석은 그 곳이 틀림없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위로 삼화사가 옮겨 중창되었다. 철불을 모신 법당이 적광전이라고 해서 조금 이상한 느낌을 주었다. 비로자나불을 모시는 법당은 '대적광전'이로 하지 그냥 적광전이란 것이 생소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두 시간 동안 향토사가들의 상세한 설명을 들었다.
2시부터 40여명에 운집한 강당에서 강의를 했다. 향토사만을 다룰 수 없어 원고에 없는 역사와 문화에 대한 강의를 10분 동안 했고, 이에서 꼭 읽어볼 책으로 세권을 소개했다. "동방견문록"과 "대당서역기", "유라시아 유목민족사"(르네 그루쎄 저 김호동역, 1998. 사계절) 세 책이다.
그리고 강의에서 앞으로의 역사창조의 꿈을 가슴 속에 심어주었는데 얼마나 싹을 틔울지 모르겠다. 올사모 카페를 통해서 인연을 맺었으면 좋겠다는 것은 강의 첫번에 강조해 두었다. 그리고 내 강의가 끝난 후 수료식이 있었다. 83세의 누님이 앞자리에서 열심히 들어주었던 것이 깊은인상으로 남는다. 나는 그 분을 누님이라고 불렀다. 앞으로 우리가 죽을 때까지 열심히 살자는 이야기를 사형전 3시간을 남겨놓고 인간의 삶을 논한 톨스토이의 이야기 까지 해주었다. 오후 7시 KTX를 타고 집에 10시반에 도착했다. 향토사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또 앞으로의 생을 위해 열심히 공부하는 동해시민의 강렬한 열기와 의지를 느낄수 있었다.
준비된 강의안을 옮겨 싣는다.
한국의 역사와 문화
정구복: 한국학 중앙연구원 명예교수, ‘올바른역사를사랑하는모임’ 지킴이(cafe/daum/allsa moo)
1. 들어가기
본인은 지금 “이승휴의 제왕운기”라는 제목으로 책을 쓰고 있는 중이다. 제가 동해시 문화원의 ‘문화학당’ 강의를 부탁 받은 것은 아마 제가 삼척시에서 추진한 이승휴의 표준영정문제에 깊숙이 간여하였던 것이 계기가 된 것 같다. 얼마 전에 동해시 문화원에서 보내준 “동해시의 역사인물 이승휴”라는 책자와 “東海文化” 17호(2020년) 잡지를 한권 받아 보았다.
그래서 제목을 한국의 역사와 문화라고 하였는데 문화원에서 보내준 자료를 검토하는 중에 이승휴의 유적지 사료에 대한 검토로 주제가 잡혔다.
현재 동해시에서 제왕운기의 산실인 집필지가 삼척시 천은사가 아니라 동해시 중대동으로 유적지가 새롭게 지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 문제에 대한 나의 견해를 여러 분과 함께 의논해보고 싶다. 그러나 본인은 무릉계곡과 두타산을 오른 경험이 없어 잘못된 견해일지 모른다. 본 발표는 논문이 아니므로 하나의 제언으로 받아주시기 바란다. 그 동안 오종식 문화원장님과의 여러 차례 통화가 있었고, 자료 제공도 있었음에 감사를 표한다.
2. 동해시의 역사적 정체성의 문제
동해시는 1980년에 삼척군의 북평읍과 명주군의 묵호읍이 통합되어 신설된 도시이다. 강릉시와 삼척시에서 일부를 떼어서 동해시로 성립되었다. 동해시라는 명칭은 한국에서 특이하다. 동해라는 명칭은 일찍이 고구려본기 주몽에 대한 기사와 광개토대왕의 능비문에서 나오고 있다. 또한 동해라는 용어는 우리나라 애국가 첫머리에 나오고 있으며, 국제적으로 일본과의 외교적 문제로 다루어지고 있는 국제적 바다이므로 동해시의 의미는 대단히 크고 중요하다.
그러므로 동해시민이 동해시의 역사적 정체성의 확립이 중요함을 충분히 알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 정체성을 동해시가 성립되기 전의 이 지역에 대한 역사적 자료를 통해서 세우려는 착상은 무리임을 먼저 지적하고 싶다.
동해시가 성립되기 전의 삼척지역의 역사현장이 바로 이곳이었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제왕운기를 집필한 시간이 길게 잡아야 4~5년 간인데 그 사적지가 잘못 지정된 것을 바로 잡아 동해시로 찾아오려는 의도는 십분 이해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천은사가 제왕운기를 집필한 장소로 지정된 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밝히려는 노력이 동해시에서 꾸준히 행해져 왔다고 본다. 그것은 바로 문화원과 삼화사가 그 중심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 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루어보겠다.
2.1. 두타산 무릉계곡
두타산은 해발 1353m에 달하는 산으로 현재 삼척시와 동해시에서 공유하고 있는 산이다. 두타산을 동해시의 산이라고 할 수도 없으며 삼척시의 산이라고도 할 수 없다. 두타산 무릉계곡은 동해시의 유산으로 국민관광지제1호와 명승지 제37호로 지정된 자연경관이 아주 뛰어난 곳이다. 무릉계곡에 대한 문헌적 연구는 그동안 꾸준히 진행되어 온 것으로 알고 있다. 예컨대 배재홍의 ‘武陵亭 崔潤祥의 武陵九曲과 武陵九曲 詩’(동해문화 17호), 권석순의 ‘고소설 최생우진기의 신선체험 고찰-두타산 무릉계곡의 명소를 중심으로’ 등이다.(상동) 후자의 글에서는 1521년 삼척 부사를 지낸 신광한이 쓴 고소설과 삼척부사였던 김효원이 1577년에 쓴 ‘두타산일기’ 삼척부사를 지낸 허목이 1661년에 쓴 ‘두타산기’를 소개하고 있다. 이 중 뒤의 두 자료는 배재홍의 문헌 금석문 자료로 본 두타산 무릉계(2005,동해문화인쇄사)에 소개되었고, 이들 자료도 한번 읽어 보았다. 신광한의 ‘최생우진기’는 국문학계에서 여러 편의 논문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아마도 무릉계곡을 찾은 사람들의 기행문이나 등산기는 더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옛 선인들이나 무릉계곡의 뛰어난 경관은 많은 시인 묵객들이 즐겨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옛 날 자료가 아니더라도 이런 기행문은 두타산 무릉계곡의 자료로 앞으로 축적되기를 기대한다.
2.2. 동해시의 문화 유산 삼화사
동해시에는 유명한 삼화사란 불교유산이 있다. 삼화사의 석탑과 불상에 대한 여러 편의 논문을 읽어볼 수 있었다. 이는 학계의 중요한 관심을 가진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삼화사는 신라말기부터 강원도 지역의 빼어난 산세로 인하여 선승들이 크게 주목했던 곳이고, 동해안은 경주로부터 해안을 따라 올라오기 쉬운 지형상의 이점 때문에 원효와 의상의 화엄종 신앙도 널리 퍼졌음을 불교 유산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삼화사는 한국 역사학계, 미술사학회, 불교학회,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연구의 중심과제로 주목하고 있다. 이승휴의 문제도 현재의 삼화사와 직접 간접적으로 연계되었다.
3. 이승휴의 제왕운기의 산실이 동해시의 중대동이라는 설의 검토
윤종대의 ‘제왕운기의 산실은 중대동이다. 보광정기, 간장사기, 간장암중창기를 중심으로’라는 글과 신왕신의 ‘이승휴 유적지 재 비정을 위한 시론’이란 두 편의 글이 동해문화 17호에 실려 있다. 이를 중심으로 검토하여 보겠다.
3.1. 두타산에 대한 해석
우리나라에서 두타산이란 명칭은 인터넷 검색을 하여보면 두 곳이 나오고 있다. 다른 한 곳은 진천군과 증평군 사이에 있는 해발 598m의 산이다. 이곳에서는 두타산의 의미를 전혀 두타라는 원래의 의미와는 전혀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
삼척시와 동해시의 두타산은 해발 1353m로 백두대간에 있어 북으로는 금강산, 설악산, 남쪽으로는 태백산에 이어지는 높은 산이다. 두타의 뜻에 대해 “한국불교대사전”(한국불교대사전편찬위원회 간. 1982. 총 7권)에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석가모니의 제자 중 마하가섭은 두타행의 제1인자로 설명되어 있고 12두타행이 설명되어 있다. 이를 요약하면 승려의 의식주 생활에서 검소와 청빈의 행을 두타행이라고 한다. 마하가섭은 옷을 공동묘지에서 얻은 한 벌의 옷을 입었고, 식사는 하루에 탁발한 한 끼의 식사를 했으며, 주거는 나무 아래나 노천이며, 눕지 않는 행을 하였으니 당시 그 실천을 가장 철저히 하여 이를 두타 제1행이라 하였다. 그리고 불경 중 12두타경이라는 경전까지 있다. 그리고 두타와 두타산에 대해서는 국어사전에도 올라 있다.( 이희승의 “국어대사전”(민중서관 간, 94년간 개정판)에도 두타행에 대한 설명이 있고, ‘두타산’에 대한 항목에서 동해시와 삼척시의 산으로 서술되어 있다.)
3.2. 이승휴의 호가 ‘두타산 거사’라는 설
이 설은 제왕운기를 충렬왕에게 바칠 때에 두타산 거사라고 쓴 것을 근거로 들고 있다. 그러나 ‘두타산 거사’라는 칭호는 이 곳 단 한 곳에 보이고 있고 ‘두타산 동안거사’라는 칭호를 본인이 직접 사용한 예를 4곳에서 찾을 수 있다.(경상도 진양부에서 제왕운기를 출판하는 사람에게 보낸 서신의 세 통과 몽산화상이 법어를 준 것에 대해 사례한 글에서 ‘두타산 동안거사’라고 자신이 직접 칭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그런데 ‘두타산 동안거사’ 전체를 이승휴의 호로 볼 수는 없고 두타산 자락에 살고 있는 동안거사라는 뜻이므로 호는 ‘動安居士’라고 해야 옳다.
제왕운기에서 ‘두타산 거사’라고 칭함은 충렬왕에게 올리는 본에서 자신의 호를 씀이 무례라고 생각하여 호를 생략하여 두타산 자락에 살고 있는 재가 불자라는 뜻으로 사용했다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두타산 동안거사’라는 칭호는 불교에 심취한 이승휴에게는 자랑스러운 칭호로 직접 사용하였음이 확실하다. 따라서 두타산 거사를 자신의 호로 썼다는 해석은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3.3. ‘보광정기’와 ‘간장사기’, ‘간장암 중창기’의 사료비판
‘보광정기’와 ‘간장사기’는 동안거사 이승휴가 직접 지은 글이다. 그러므로 사료적 가치가 다른 사료보다 월등히 높은 것이고 ‘보광정기’에서의 지형에 대한 설명은 아주 상세하여 마치 그림을 그린 것 같다. ‘간장암 중창기’도 고려 시대 이승휴 사후에 아들들의 주선으로 지어진 글이므로 후대의 많은 자료보다 사료적 신뢰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사료1. ‘보광정기’
이승휴는 두타산을 여러 차례 등산하여 그 절경을 직접 잘 알았다고 생각한다. 그는 등산을 좋아하는 날렵한 체격을 가졌다고 생각한다. 이는 그가 1273년 원나라에 서장관으로 갔을 때에 일행 200여명이 관광하던 중 연경의 금나라 때 지은 호천사의 탑 위까지 올라갔던 세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던 사실을 통해 그가 건강하고 날렵한 신체를 가지고 있었던 신체적 상황을 본인이 처음으로 밝혔다.(제1회 동안거사 이승휴 표준영정 세미나의 주제발표문 참조).그런 신체조건을 갖춘 그가 현재의 무릉계곡의 중대계곡(중대동)까지 적어도 몇 차례 올라갔을 것임은 틀림없다.
‘보광정기’의 서술 구도는 중대동에서 시작하여 위의 몇 개의 산봉우리에 대한 설명을 하고 계곡을 따라 내려오면서 풍광을 서술했다. 중대동의 위치를 밝힌 것은 동해시의 큰 성과이다. 이에서 아래쪽의 구산동과 용계를 언급하고 있다. ‘보광정’의 명칭은 용안당을 개칭한 것이라고 했다. 그 위치 비정을 위해서는 현재도 당시의 산형이 크게 변하지 않았다면 추정이 가능할 정도로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용계 양쪽에 간장사에 기증한 그의 땅 시지(산판)의 형세를 살펴야 한다.
용계와 귀산동이란 지명은 ‘보광정기’를 짓기 전 25~6년 전 이승휴의 어머니가 살던 고향에 그가 과거 급제 후 찾아와 10년을 산 기록을 상세히 남긴 ‘병과시’ 서문에도 보이고 있다. 이에서 ‘구동 용계 곁에 띳 집을 짓고 살면서 직접 밭 갈며 어머니를 모셨다’고 했고 또한 ‘어머니를 모시는 여가에 앞 시내에서 노닐었다’ 했다. 그리고 시 중에 마을의 장로와 이야기 한 것이라든지, 시문장 속의 표현이라 그대로 믿기 어려운 점이 있지만 “세 집이 있는 마을과 가까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구산동과 구동은 같은 지명의 표기라고 생각한다.
병과시에 나오는 용계와 구동은 자연경관이 뛰어난 중대동 아래의 험한 계곡이라고 생각하기 어렵다.
1289년에 지어진 ‘보광정기’는 자연형세에 대하여는 상세한 서술을 하면서도 그는 중대사나 삼화사 등 사찰 이름에 대하여는 전혀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심지어 자신이 1000상자의 불경을 빌려다 본 절의 이름이 무엇인지도 ‘간장사기’에서도 밝히지 않고 있어 지형의 서술에 있어서 문학적 서술에 도취되어 ‘서술의 편향성’을 보이고 있다. 최해가 쓴 1332년의 ‘간장암 중창기’에서 산 중에 있는 삼화사에서 불경을 빌려다 읽었다고 함으로 이승휴 생시에 삼화사가 있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기에 문학가이고 시인이었던 그가 ‘보광정기’의 서술에서 이런 두타산의 산세의 위용을 배경으로 서술함은 당연한 것이다. 그는 ‘보광정기’의 마지막 찬으로 지은 노래에서도
玆之山兮, 奇且安兮 餘生能有幾兮 廉退豈無味兮 歌聖德而傳不朽兮, 轉海藏而薦遐壽兮, ...
이처럼 그는 두타산을 멋지게 묘사하고 불교에 심취해 있음과 충렬왕에 대한 충성을 맹서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노래의 중요한 의미는 기이하고 안온한 두타산의 정기처럼 자신의 여생을 바쳐 불교를 통해 충렬왕의 성덕을 길이 전하고 무한한 축수를 하겠다는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사료 2. ‘간장사기’
‘간장사기’는 ‘보광정기’가 지어진 후 5년 후인 1294년에 지어졌다. 이에서 간장사는 전일의 용안당임을 명시했다. 또한 불경을 열람하려고 지은 것임을 ‘보광정기’에 밝혔음을 언급하고 있다. ‘간장사기’에 의하면 용안당을 지은 때는 1280년(경진년) 이전일 것임이 확실하다. 이 ‘간장사기’는 석가모니의 일대기와 그 사상의 위대함을 서술한 후에 고려 태조의 백성을 위한 훌륭한 정책, 지리를 잘 택해 사찰을 짓게 한 설 등을 극찬하여 충렬왕까지의 왕조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고 있다.
그런데 이 글에서 갑오년(1294)에 골짜기 입구에서 나왔다. 廣川 아래 두 내 사이에 약간의 버려진 땅을 안집사의 허가를 받고 간장사에 바치니 세속에서 말하는 7~8결의 땅을 시주하여 황제의 축수를 기원하게 한다고 했다.
이 절은 경역이 마을과 접해 그다지 외로이 떨어져 있지 않고 집은 무릎을 펼 정도로 작고 검소해 꾸밈이 없다고 했다.
옛 성인이 말하기를 “때가 말세를 당해서는 산도 아니고 들도 아닌 인가 근처에 풀을 엮어 집을 짓고 편히 참선을 한다고 했으니 그 뜻한 바가 까닭이 있다. 청컨대 高人 達士는 이곳에 머무소서! 이는 후인들이 알지 못할까 염려되어 이에 그 사실을 쓴다.
‘간장사기’와 ‘보광정기’의 두 사료 사이에 미묘한 변화를 읽을 수 있다.
요컨대 1.간장사는 용안당을 계승한 것이라는 점. 2. 이에서 동내 입구 쪽으로 나왔다는 점, 3) 산도 아니고 들도 아닌 마을과 연결된 곳이라는 점 등이 주목된다. 산에서 벗어난 마을임을 말하고 있다. 즉 산록임을 뜻한다.
그가 골짜기 입구에서 나왔다는 것이 얼마의 거리인지는 전혀 언급이 없다. 그러나 마을과 인접한 지역이므로 당시 마을이 어디에 형성되었을 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에서 ‘보광정기’에서 그리고 있는 산세의 풍광과는 거리가 있는 마을과의 공존함을 감지할 수 있다. 이는 그 자신만의 세계에서 가족을 둘러싼 사회와의 접촉을 등한시 할 수 없음을 노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료 3. ‘간장암 중창기’
1323년 최해가 동년우인 이연종의 부탁을 받고 썼으나 그가 직접 이곳에 와 보지 않고 썼으므로 당시 간장암의 위치나 모습을 상세히 서술하기에는 어려운 문제점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중창기에서 ‘간장사기’에 새로이 추가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별장인 용안당에서 이 산에 있는 삼화사에 가서 불경인 대장경을 빌려다 날마다 읽어 10년 만에 끝냈다.
2. 후에 별장을 스님에게 희사하고 이어서 근처의 밭 여러 경을 바쳐 스님이 상주할 수 있는 밑천으로 삼도록 했고 집 간판을 ‘간장암(간장사)’으로 바꾸었다.
3. 중형이 출가해 승려가 되었는데 지난해(1321~2?)에 어머니를 뵈러 왔다가 암자가 여러 해 동안 썩고 허물어진 것을 보고, 맏형과 함께 중창하기로 하였다. 승려 담욱은 제자들을 거느리고 중창하였는데 이 때 친지 예문관 신천이 관동의 진무를 하던 차 본부에 부탁을 내려 도와주어 1년 안에 완성했으며, 制度를 바꾸고 규모를 키워 단청을 아름답게 하였다.
3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때 중창을 하면서 용안당의 좁은 곳이 아닌 근처의 곳으로 옮겨 중창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승휴가 쓴 ‘보광정기’를 들어 곧 바로 제왕운기의 집필 장소가 현재의 동해시 무릉계곡의 중대사 자리라고 예단함은 지나친 억설이라고 생각한다. 삼척부사인 허목이 무릉계곡을 찾은 것은 지금의 동해시 하단 계곡을 따라 갔음을 그의 등산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승휴가 살았던 당시 삼척부에서 두타산을 가는 길이 무릉계곡을 따라 올라가는 길 외에 천은사로부터 올라가는 길이 없었는지도 조사되어야 한다. 아마 간장암이 중창될 때에는 이 길을 택했을 가능성이 높다. ‘간장사기’에서 이승휴는 오늘 날 삼척시와 동해시의 논쟁을 예견한 듯이 ‘간장사기’ 말미에 후인들이 알지 못할 까봐 ‘간장사기’를 쓴다고 했다.
‘보광정기’의 서술대로라면 용계의 윗쪽 험한 내가 흐르는 곳 인근이라고 할 수 있으나 자기가 사는 집을 겸손하게 용안당이라고 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보광정기는 두타산의 산세를 시인답게 멋지게 묘사했다. 그러나 ‘간장사기’에서는 용안당이란 당호를 버리고 간장사라고 하면서 그 곳에서 마을 인근으로 옮겼음을 시사하고 있으며, ‘간장암 중창기’에서는 불경을 빌려온 곳이 삼화사라는 것과 중창시 규모를 바꾸고 확대했다는 점과 원래의 용안당 자리에서 다시 자리가 옮겨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때 중창한 것은 이승휴가 제왕운기를 집필한 곳을 설명함에는 적절한 자료가 아니다. 집필한 장소를 굳이 밝히려면 ‘간장암중창기’보다는 ‘간장사기’에서 실마리를 구해야 할 것이다.
비록 ‘보광정’의 옛 자리를 이 기록에 의해 구하려 한다 해도 900년이 지난 지금 지형과 내의 변화가 없었다고 하기 어려우며, 또한 그가 제왕운기를 저술한 4~5년의 생활이 마을과 떨어진 곳에서 구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의 문집 첫머리에 나오는 ‘촌거자계문’은 그가 생활하였던 모습을 이해함에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어야 할 것이다. 그의 가족과 분리된 이승휴의 생활연구는 이승휴 당시의 사실을 올바로 이해할 수 없다. 이승휴의 자료는 그의 문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사정을 이해함에 대단히 부족함을 느낀다.
4. 삼척시 천은사가 이승휴의 유적지라는 설의 검토.
이를 비정함에 ‘보광정기’와 ‘간장사기’의 사료를 심도 있게 고찰하지 않은 것은 문제가 있다. 천은사 자리가 제왕운기를 집필한 장소라는 주장한 근거는 간장사의 명칭이 조선 시대 문인들의 기록과 고지도 자료를 치밀하게 정리하여 간장사가 임란 직후에 흑악사로, 그리고 1896년 대에 천은사로 명칭이 변경되었음을 밝혔다.
이에는 실제 삼척부사를 지낸 여러 사람들의 기록도 참조했다. 그리고 현재 천은사의 아미타불복장물에서 1596년에 써진 아미타불 불상의 중수에 시주한 사람들의 명단이 나오는데 이에 ‘흑악사’라는 절이 중심이고, 중대사, 오봉암, 영은사의 승려로 시주한 이름이 보이고 있다.
그리고 임란이후 삼척부사를 지낸 이명준, 이병연과 허목도 간장암과 흑악사를 일치시켜 기록하고 있다. 이 점에서 절의 이름의 전승관계로 보면 간장사-흑악사-천은사 라는 승계관계가 정리된다. 이는 조선시대의 사찰명의 전승관계라는 점에 문제가 있다. 조선 건국 후 200년간의 불교 탄압기에 간장사가 지속되었다는 보장은 없다. 그렇다고 흑악사가 굳이 간장암과 연결시킨 역사의 고리를 부정할 근거도 또한 부족하다. 이런 문헌 검토 위에 현장에 대한 깊은 다방면의 조사가 이루어져야할 것이다.
동해시에서 천은사 발굴과정에서 이승휴의 유적이 나오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음은 분명 지나친 판단이다. 이승휴가 제왕운기를 집필한 곳이 현재 어디든 간에 그의 유적이 남아 있는 것을 기대할 수 없다. 요컨대 동해시의 제왕운기 산실이 동해시라고 주장함은 사료에 대한 심층적 비판을 결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 곳이 현재 어디든 동해시와 천은사의 거리는 산 등성이 넘어 있는 10리 안의 곳이고 삼척부(당시 진주부) 관내이며, 모두 두타산 산록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무릉계곡의 자연 경관만을 가지고 제왕운기의 산실, 이승휴의 유적지를 논함은 마치 중국의 동북공정을 보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앞으로 동해시에서는 삼척시와 함께 이승휴를 공유하면서 그 연구에 함께 힘을 기우리기를 희망한다. 삼화사에 있던 불경이 강화도에서 인간한 팔만대장경 판본인지. 숙종대의 의천의 속장경인지 아니면 현종대의 초조대장경을 본 것인지를 ‘간장사기’에 서술된 내용을 가지고 밝히는 작업을 해야할 것이다. 동해시에서 삼화사의 성격은 신라말 고려초에 세워진 절로서 철불에서 나온 명문의 해석에도 해결해야할 점이 많다. 비록 삼화사가 동해시 안에 위치하고 있어도 이에 대한 연구에서는 삼척시와 공동 보조를 취함이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다.
동해시의 역사적 정체성은 과거 삼척시가 가졌던 이사부와 이승휴의 역사를 공유할 수 있다.
5. 동해문화원의 앞으로의 활동 방향
동해시는 신생도시이다. 과거의 역사를 만드는 것보다 앞으로 역사창조에 더 힘을 기울려야 함을 강조하고 싶다. 미국은 과거의 역사가 없는 나리이지만 자기들의 역사창조를 위해 진보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고, 교육을 통해 미국의 역사를 전 국민에게 열심히 교육을 시키고 있음은 다 아는 사실이다. 역사란 과거의 역사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현재의 역사와 미래의 역사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5.1. 역사의 주인공은 현재를 살고 있는 동해시민 모두이다.
과거에도 역사 자체는 그렇겠지만 기록은 일반 사람은 역사의 기록에서 삭제되고 지배층 위주의 기록으로 써졌다. 비록 일반 서민의 활동이 평범해서 무슨 역사 창조의 역할을 했느냐고 하겠지만 역사의 무대에서 이런 사람들을 모두 제거하면 남는 사람은 몇이나 될 가요. 그래서 과거 역사의 기록은 모든 역사 활동의 성과를 한 두 사람이 차지한 것입니다. 이는 마치 전쟁에서 승리한 전공을 지휘한 장 수 몇 사람의 공로로 기록된 것과 같다.
현재 우리는 모든 시민이 역사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자기의 기록을 남길 수 있는 문맹자가 거의 없는 국가이다. 우리는 중국화된 유교, 불교의 큰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서양문화의 홍수 속에 문화창조의 방향성을 잃고 있다.
역사에서 미래의 역사를 중시할 때 시민의 중지를 모으는 것, 토론문화의 정착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모든 시민이 현재와 미래의 역사 창조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방향으로 나가는 데에 목표를 두어야 할 것이다.
5.2. 동해시민의 새로운 역사창조
동해시는 ‘동해’를 대주제로 삼아야 한다. 동해시는 두타산과 동해가 연결되어 있다. 이 중 두타산은 백두대간 중의 한 산으로 영동과 영서지방을 나누는 것으로 99개의 굽이길인 대관령이 터널로 뚫였고, KTX가 통해 인간의 왕래는 용이해 동해시는 갇힌 지역이 아니다. 동해안을 따른 비 소식, 겨울에 2m 정도의 폭설, 여름철의 해양 바캉스, 해양레저 등은 동해시의 자연적 특징이기도 하다. 섬이 없는 점이 문제이지만 인공섬을 만들 수는 없을까도 고민해볼 문제이다. 이런 자연에 대한 글쓰기. 사진으로 남기기, 음악, 조각 등의 예술로 작품을 계속적으로 개발해야 할 것이다.
이럴 경우 동해안에 인접한 여러 도시와 협력하고 의견을 교환하여 협력과 상생의 길을 모색함이 좋을 것이다. 동해시민이 앞으로 이 사회를 이끌어갈 인재가 나오고 더 나아가 세계적인 인물이 될 수 있는 문화 환경을 설계하고 조성함이 문화원의 사명이고 진로라고 말하고 싶다. 이는 시민들의 글쓰기 운동, 자기생활의 기록화, 미래 생활의 꿈 그리기 등 다양한 주제가 있다. 노인의 기성세대들도 최소한 이런 새로운 미래 역사 창조에 협조자가 되도록 새로운 문화 변화에 항상 생각과 행동을 바꾸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6. 맺음말
동해시는 강원도의 일부이다. 강원도는 아름다운 산세와 청정한 기후로 우리나라 불교의 성지로서 기여해왔다. 이런 오랜 문화전통에 힘입고 동해의 신선한 바람과 무한한 진출의 가능성은 대한민국의 발전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고 굳게 믿는다. 이웃 도시와 배타적 태도보다는 포용적이고, 공유하는 문화풍토를 만듦에 노력을 경주하고 앞으로의 역사를 만듦에 시민의 중지를 모으고, 세계적인 모든 지혜와 지식을 우리의 것으로 만드는 큰 그림을 설계함에 문화원이 기여하기를 기대한다.
동해시민의 무궁한 발전과 미래의 꿈을 키움에 적극 성원하고 싶다. 감사합니다.
(2021.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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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요즘 며칠간 올사모 카페에서 정 박사님을 뵐 수 없어 안부가 궁금했는데
의미 있는 역사 유적 탐방과 귀한 자리 강의를 하고 오셨군요.
'이승휴의 제왕운기'를 집필하고 계신다니,
정 박사님의 또 하나의 훌륭한 학문적 업적이 되리라 믿습니다.
정 박사님의 역사 유적 탐방 옥고를 통해 많은 것을 배웁니다.
동해는 개인적으로 저의 처가집이 있는 지역이기도 합니다. 박사님의 설명을 참고하면서 저도 한번 투어를 해보아야겠네요
두 분 딱딱한 원고 세심히 읽어주신 점 감사드립니다. 올사모 카페를 소개했습니다. 그런데 처음 들어오는 분은 댓글을 쓰지 못해 얼마나 동지자를 거둘지는 의심스럽습니다. 글쓰기의 소중함 독서, 인생의 업그레이드 등을 강조했습니다. 동해에 대한 단상은 창작의 난에 동해의 꿈이라고 실었습니다. 살펴 보아주시기 바랍니다.
9월 9일 강의 중 독서를 권장하면서 소개한 책 중 '중앙 아시아의 유목민족사'는 ( 르네 그루쎄 저, "유라시아의 유목민족사" 1998. 김호동 역, 사계절입니다. 수강하시는 분이 이 책의 출판사를 묻는 질문에 답변을 못했는데 그 분은 이 책을 읽으신 분이 아닐까 합니다. 제가 서명을 착각한 잘못을 크게 뉘우칩니다. 이를 위 글에서도 수정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