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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5년 3월 16일 주일
[(자) 사순 제2주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오늘은 사순 제2주일입니다. 위대하시고 진실하신 하느님께서는 성실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는 이들에게 당신 얼굴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십자 가의 신비를 굳게 믿고 성자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순종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주님의 뜻을 따르기로 다짐합시다.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아브람과 계약을 맺으시며, 유프라테스강까지 이르는 땅을 후손에게 준다고 하신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이라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산에 오르시어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인다(복음).
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충성스러운 아브라함과 계약을 맺으셨다>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15,5-12.17-18
그 무렵 하느님께서 아브람을 5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말씀하셨다.
“하늘을 쳐다보아라.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그에게 또 말씀하셨다. “너의 후손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
6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
7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주님이다.
이 땅을 너에게 주어 차지하게 하려고, 너를 칼데아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이다.”
8 아브람이 “주 하느님, 제가 그것을 차지하리라는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묻자, 9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삼 년 된 암송아지 한 마리와 삼 년 된 암염소 한 마리와 삼 년 된 숫양 한 마리,
그리고 산비둘기 한 마리와 어린 집비둘기 한 마리를 나에게 가져오너라.”
10 그는 이 모든 것을 주님께 가져와서 반으로 잘라,
잘린 반쪽들을 마주 보게 차려 놓았다. 그러나 날짐승들은 자르지 않았다.
11 맹금들이 죽은 짐승들 위로 날아들자, 아브람은 그것들을 쫓아냈다.
12 해 질 무렵, 아브람 위로 깊은 잠이 쏟아지는데, 공포와 짙은 암흑이 그를 휩쌌다.
17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리자,
연기 뿜는 화덕과 타오르는 횃불이 그 쪼개 놓은 짐승들 사이로 지나갔다.
18 그날 주님께서는 아브람과 계약을 맺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이집트 강에서 큰 강 곧 유프라테스 강까지 이르는 이 땅을
너의 후손에게 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필리피서 말씀입니다. 3,17―4,1
17 형제 여러분, 다 함께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여러분이 우리를 본보기로 삼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다른 이들도 눈여겨보십시오.
18 내가 이미 여러분에게 자주 말하였고 지금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데,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19 그들의 끝은 멸망입니다. 그들은 자기네 배를 하느님으로,
자기네 수치를 영광으로 삼으며 이 세상 것만 생각합니다.
20 그러나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구세주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합니다.
21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키실 수도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4,1 그러므로 내가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형제 여러분,
나의 기쁨이며 화관인 여러분, 이렇게 주님 안에 굳건히 서 있으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졌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28ㄴ-36
그때에 28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셨다.
29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
30 그리고 두 사람이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모세와 엘리야였다.
31 영광에 싸여 나타난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을 말하고 있었다.
32 베드로와 그 동료들은 잠에 빠졌다가 깨어나 예수님의 영광을 보고,
그분과 함께 서 있는 두 사람도 보았다.
33 그 두 사람이 예수님에게서 떠나려고 할 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베드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34 베드로가 이렇게 말하는데 구름이 일더니 그들을 덮었다.
그들이 구름 속으로 들어가자 제자들은 그만 겁이 났다.
35 이어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36 이러한 소리가 울린 뒤에는 예수님만 보였다.
제자들은 침묵을 지켜, 자기들이 본 것을 그때에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시어 기도하시는데,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루카 9,31)을 말합니다. 이 떠나심은 ‘영광’을 위한 ‘넘어가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고난을 겪고, 예루살렘의 최고 법정 산헤드린의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예고하셨습니다(9,22 참조). 영광 가운데 나타난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십자가 죽음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실 것임을 분명히 합니다. 잠에서 깨어난 베드로는 예수님과 함께 모세와 엘리야가 영광에 싸여 있는 것을 보고는 초막 셋을 지어 드리겠다고 합니다.
베드로는 그들이 영광 가운데에 있는 것을 보았지만,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다만 자신이 본 그 영광이 계속되기만을 바랐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 사명의 깊이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함께 있었던 요한과 야고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 제자들을 끝까지 포기하시지 않고, 그들을 위하여 수난하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제자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두고 떠났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포기하시지 않은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 사명의 신비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포기하시지 않을 것입니다.(한창현 모세 신부)
귀찮더라도 또다시 산 밑으로 내려가야겠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단 가운데 핵심급이라고 할수 있는 제자 세명, 베드로, 야고보, 요한만을 데리고 타볼산으로 올라가십니다. 정상에 도달한 제자들은 잠시후 기상천외한 광경을 목격하게 됩니다.
스승님의 얼굴과 분위기가 평소와는 완전 다른 모습, 거룩하고 태양처럼 빛나는 모습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놀라움의 시작일뿐이었습니다. 잠시 후 전설로만 여겨왔던 신앙의 선조 아브라함 할아버지와 대 예언자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은 장차 이루어질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영광스러운 부활을 핵심 제자들에게 살짝 미리 보여준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 제자에게만 살짝 천국 문을 열어 보여준 사건이라고나 할까요.
그야말로 황홀경에 도취된 베드로 사도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마음과 더불어, 이 좋은 곳에서 저 위대하신 인물들과 함께 영원히 살았으면 하는 마음이 일었습니다. 시끄럽고 복잡하고 아귀다툼의 산밑의 세상으로 내려가고 싶지 않은 마음에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루카 9,33)
베드로의 제안에 예수님께서 어떻게 반응하셨는지에 대해서 복음사가들은 구체적으로 기술하지 않습니다. 존경하는 김승훈 마티아 신부님께서는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생각은 베드로 사도의 생각과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무 놀라서 반쯤 얼이 빠진 제자들을 어루만지시며,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어서들 일어나거라. 우리는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황홀한 산 위 풍경을 뒤로한 채, 다시금 인간 세상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질 수난을 향한 여행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어리석은 베드로 사도의 표현을 통해 어찌 그리도 우리들의 생각과 흡사한지 놀랄 지경입니다.
우리 역시 얼마나 부족한 존재입니까? 주님의 뜻을 따르는 데는 너무나 게으르고, 잠시 편안하기만 하면 그냥 그곳에서 주저앉고 맙니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아직 멀고도 멉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한 우리는 주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계속 가야만 합니다. 중간에 힘들다고 주저앉아 버리면 우리는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편하고 안락한 길을 찾는다면 우리는 주님 십자가의 신비를 깨닫지 못한 사람이 될 것이고, 주님 십자가와 원수로 살게 될 것 입니다.(김승훈 신부, 당신께서 다 아십니다, 빛두레 참조)
형제들과 공동체 식사 중에 있었던 일입니다. 식사가 거의 다 끝나갈 무렵, 원장 신부님께서는 식사 후 기도를 하려고, 계속 분위기를 살피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한 식탁에서는 한 형제의 주도로 나라와 민족, 인류와 지구 온난화 등을 주제로 한 범국가적, 범세계적 대화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인내심의 한계를 느낀 원장 신부님은 이런 말로 대화를 종료시켰습니다. “자, 그럼 나라는 나중에 구하고, 우선 마침 기도부터 바칩시다.”
그렇습니다. 이상은 원대하게, 뜻은 크게 품어야겠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선은 늘 우리의 발밑을 향해야겠습니다. 매일의 귀찮고 짜증 나는 일상사 안에 하느님께서 굳게 현존하고 계십니다. 부족하고 죄투성이인 우리 공동체 안에 하느님께서 활동하고 계십니다. 거룩한 산 위에만 계속 머물러 있을 수 없습니다.
귀찮더라도 또다시 산 밑으로 내려가야겠습니다. 형편이 좋든지 나쁘든지, 내려가서 주님의 말씀을 선포해야겠습니다. 조금 전에 맛본 감미로운 천상 체험을 이웃들에게 나눠야겠습니다. 저 아래로 내려가서, 복음 때문에 고생하고 박해받으며, 멸시당하고 배척당하면서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미국에는 없는데, 한국에 있는 주거 방식이 있습니다. ‘전세(傳貰)’ 제도입니다. 임대인은 일정 금액을 지급하고 임차인의 주택을 계약기간 동안 사용하는 제도입니다. 계약기간이 끝나면 임대인은 임차인의 결정에 따라서 다른 곳으로 옮겨가야 합니다. 계약기간이 끝났을 때 임차인이 전세 금액을 올리면 임대인은 올린 금액을 더 지급하고 재계약을 하든지, 아니면 다른 곳으로 옮겨가야 합니다. 제가 어릴 때는 ‘내 집 마련’은 서민들에게는 ‘꿈’과 같았습니다. 제 기억에 어린 날 이사를 자주 가야 했습니다. ‘쌀가게, 미진이네, 담배 가게, 재웅이네, 쌍둥이네, 할머니 집’까지 6번을 이사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6학년이 될 무렵 비로소 더 이상 이사 가지 않아도 되는 집이 생겼습니다. 어머니는 무척 기뻐하였습니다. 알게 모르게 주인집 아이들의 눈치를 보았던 저도 기분이 좋았습니다. 어릴 때, 매주 ‘주택복권 추첨’이 있었습니다. 1등에 당첨되면 주택을 살 수 있을 만큼의 당첨금이 지급되었습니다.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은 2년 후면 설립 50주년이 됩니다. 지금 성당이 3번째 성당입니다. 첫 번째 성당은 ‘다운타운’에 있었다고 해서 다운타운 성당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독일인 이민 공동체가 세운 성당인데 독일인 이민이 줄면서 한인 공동체가 다운타운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했다고 합니다. 다운타운 성당이 좁고, 주차장이 협소하여서 교우들은 더 넓고 큰 성당을 원했습니다. 다운타운 성당에서 지내면서 교우들은 지금의 자리에 성전 대지를 마련했습니다. 새로운 성전을 세우기 전에 임시로 옮겨간 성당이 있었습니다. 창고 건물이었기에 교우들은 그 성전을 ‘창고 성전’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새로 마련한 땅에 성전을 세우자는 의견이 있었고, 지금의 성전 위치가 달라스 중심에서 서쪽으로 치우쳐 있기에, 이민 오는 분들이 북쪽에 세워지는 새로운 도시로 오기에, 북쪽에 성전을 세우자는 의견이 있었다고 합니다. 몇 번의 진통 끝에 지금, 우리가 있는 이 자리에 아름다운 성전이 세워졌습니다. 교우들의 땀과 눈물로 세워진 성전입니다. 2017년 3월에 새 성전이 완공되었고, 축성식이 있었습니다. 어느덧 8년이 지났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아브람은 하느님께 2가지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는 땅의 축복입니다. 다른 하나는 자식의 축복입니다. 어렵게 자기 집을 마련하는 것도 큰 기쁨이고 축복입니다. 40년 만에 아름다운 성전을 세우고 축성하는 것도 큰 기쁨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 집에서 사는 가족들의 삶입니다. 넓고 큰 집에 살면서도 사랑이 없으면, 믿음이 없으면, 희망이 없으면 그 집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행복한 집이 될 수 없습니다. 6번이나 옮겨 다니면서 이사를 할지라도 그 집에서 사랑이 꽃이 피면, 믿음이 자라나면, 희망이 열매 맺으면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행복한 집이 될 수 있습니다. 새로 신축된 아름다운 성당에 있으면서도 공동체에 사랑이 없으면, 믿음이 없으면, 희망이 없으면 그 성당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행복한 성당이 될 수 없습니다. 다운타운에서 힘들게 미사를 봉헌했어도, 창고에서 공동체를 이루었어도 그 성당에서 사랑이 꽃이 피면, 믿음이 자라나면, 희망이 열매 맺으면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행복한 성당이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거룩하게 변모하셨습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대화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천막 3개를 만들어서 함께 지내자고 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해석을 잘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거룩하게 변모한 것은 구약의 율법과 예언서에 기록된 대로 수난을 통해서만 영광스러운 부활이 있음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난과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였고, 그런 일은 없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베드로를 꾸짖으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 종교는 삶을 해석하는 것입니다. 종교는 삶의 길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삶을 해석하고, 삶의 길을 충실하게 따라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에게서 왔으니, 하느님께로 가야 하는 존재입니다. 하느님께 가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오늘 제2독서는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다 함께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여러분이 우리를 본보기로 삼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다른 이들도 눈여겨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키실 수도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아름다운 성전과 공동체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성전과 공동체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당신과 함께>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 9,35)
살리시는 당신을 따라
살고파 나선 길 위에서
살리시기 위해서
반드시 죽으셔야 한다는
받아들일 수 없고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당신의 말씀에
코앞에 닥친
당신의 죽음보다
당신과 함께 한다면
반드시 맞닥뜨려야하는
아직은 뿌연 나의 죽음이
오히려 더욱 쓰라리게
가슴을 파고들어
살려면 떠나야 하고
따르면 죽어야 하는
참담한 갈림길에서
느닷없이 곁에 계신
빛나는 당신을
살아있는 당신을
영광스러운 당신을
어느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고
악착같이 움켜쥐어
당신과 더불어
빛나는 나를
살아있는 나를
영광스러운 나를
그려보는 꿈은 이내
온데간데없이 부서지고
끝내 길을 가시려는 당신과
갈지 말지 두려움에 머뭇거리는 내가
날것 그대로 마주한 순간에
생생하게 듣습니다
무른 믿음을 다지는 하느님의 소리를
바랜 희망을 돋우는 하느님의 소리를
식은 사랑을 지피는 하느님의 소리를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당신의 말씀을 듣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듣고 싶지 않아도
당신의 말씀을 듣겠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따를 수 없어도
따르고 싶지 않아도
당신을 오롯이 따르겠습니다
“당신과 함께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당신을 배척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처럼 배척을 받아 죽음을 당하였다가
당신과 함께 사흘 만에 되살아나게 하소서”
오늘의 성인
성 헤리베르토 (Heribert)
활동년도 : 970-1021년
신분 : 대주교
지역 : 쾰른(Koln)
같은 이름 : 헤르베르또, 헤르베르뚜스, 헤르베르토, 헤르베르투스, 헤리베르또, 헤리베르뚜스, 헤리베르투스
독일의 보름스 태생인 그는 로렌의 고르즈 수도원에서 공부한 뒤, 고향으로 돌아와서 사제로 서품되었다.그는 오토 3세의 재상으로 있다가 쾰른의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는 라인의 도우츠에 수도원을 세우는 한편 평화의 전달자로 크게 활약하였고,성직자의 규율을 엄히 다스렸을 뿐만 아니라 빈민구제에 온힘을 기우렸다.그는 이상적인 주교의 모델로서 공경받고 있다
옛부터 정치가로서 성인이 된사람은 비교적 적다.그러나 이러한 사람은 위로는 군주에게 충성을 다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돌보며 국가를 안녕하게 인도했으니, 성 헤리베르토도 그런 위대한인물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790년경 독일의 보름스의 후작가(侯爵家)에서 태어나 그곳 주교좌 성당 부속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그 뒤 로드 링겐 주 고르즈에 있는 베네딕토 수도원에서 연구를 계속하다가 귀향 후히르데바르토 주교에게 서품을 받고대성당의 주임사제가 되는 한편, 그 시의 이탈리아 정책국(政策局)에 근무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독일 황제 오토 3세가 보름스에 행차했을 때헤리베르토의 재능이 발견되어 시종(侍從)에 임명되고 그 뒤 늘 황제를 수행하며 봉사하게 되었다.
다른 시종들은 제 관직이나 지위를 이용해 자신의 사리사욕만을 채우고 있었지만 헤리베르토만은 오로지 봉사의 정신으로 황제의 신변을 염려하고 나라를 위하는 마음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오토 황제는 깊이 그의 충성을 기특하게 생각하고 그를 유르드부르크의 주교로 임명하려 했으나 겸손한 그는 완강히 이를 사양했다.
그런데 999년 마침 게룬의 대주교 에베르게리오가 서거한 것을 기회로 또다시 그의 후계자로 지목을 받아,쾰른의 성직자나 신자들은 합심해 드를 추대하고 황제도 그의 취임을 원했으며 교황 실베스테르 2세도 그를 정식으로 퀼른의 대주교로 임명했으므로 비록 헤리베르토 일지라도 이번만은 거절할 길 없어 때마침 머물던 라벤나에서 퀼른으로 향했다
그는 엄동설한에 누더기 옷을 걸치고 맨발로 그 시(市)로 들어갔던 것이다.
선임자 에베르게리오는 성직자로서 맞지 않은 사치를 즐기던 사람이었던만큼 대단히 호화스러운 생활을 했으므로 신자들은 신임 대주교의 이런 검소한 모습을 보고 매우 감동했다고도 하지만, 실제 헤리베르토의 일상 생활은 빈민의 아버지, 수도자의 보호자, 영혼의 착한 목자로서 손색이 없었던 것이다.
1002년 오토 황제가 이탈리아를 방문했을 때 헤리베르토도 그를 수행했지만 불행히 황제는 중병에 걸려 비테르보 지장에서 승하했다.
이때에 성사를 주고 황제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며 임종에 대한 교회의 기도문을 외우며 그의 명복을 위해기도하고 또한 온갖 장애를 무릅쓰고 유해를 독일에 운반해 아헨에 있는 가롤로 대제의 무덤 옆에매장할 수 있도록 주선한 이는 실로 헤리베르토 바로 그분이었다.
그 뒤 곧 하인리히 2세가 제후들의 선거에 의해 당선되어 황제위에 올랐다.
그때 헤리베르토는 다른 이를 추천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그는 쾌히 오토 황제에게 의탁받은 황제의 표시인 창을 하인리히에게 넘겨주었다.
그러한 일이 있은 후 그에 대해 모함하는 자가 있어서 황제는 그의 충성을 의심하고 그를 벌주기 위해 쾰른에 가게 되었다.
그러나 조사한 결과 그의 무죄함을 깨닫고 도리어 오랬동안 불의를 감수하여 온 그의 온순함에 감탄하고 그 후부터는 한층 더 그를 우대하게 되었다고 한다.
1021년 관할 내의 지방교회 시찰차 출발한 대주교 헤리베르토는도중 중병을 얻어 쾰른에 돌아오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로써 재기 불능을 각오한 그는 유산을 교회와 빈민 구제에 기부하도록 유언하고“우리의 가난한 형제들이 곤궁을 당하지 말게 해 주소서”하고 기도하며 3월 16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그가 친히 세운 독일의 수도원에 매장되었다.로마 순교록에는 그를 완덕의 성인이라고 극구 찬양하고 있으며 이상적인 주교의 모델로서 공경받고 있다
성 아브라함 키두나이아 (Abraham Kidunaia)
활동년도 : +366년경
신분 : 은수자
지역
같은 이름 : 아브람, 에이브러햄, 키두니아
성 아브라함 키두나이아는 메소포타미아의 에데사(Edessa) 교외에서 태어났다. 부유한 부모들이 결혼을 강요하면서 신부를 골라 두었지만 아브라함 자신은 독신생활을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입 밖에 발설할 수는 없었다. 당시의 결혼 풍습은 7일 동안 결혼 축제를 계속했는데, 그는 7일째 되는 날에 어느 사막으로 숨어버렸다. 그를 찾는 수색작업이 끊임없이 계속되었지만 모두 허사로 끝났다. 그러나 그의 친구들이 사막에 있는 그의 은둔소를 발견하여 억지로 그를 끌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미 부모들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전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기부하라는 위임장을 친구들에게 써 주었다. 아브라함 자신에게는 시계와 염소털옷 그리고 몇 개의 식기만 남겼다.
그는 하루하루의 삶을 자신의 마지막 날로 여기고 최선을 다하였다. 그의 성덕이 차츰 알려지자 에데사의 주교가 그에게 은둔소를 떠나 백성들에게 설교해줄 것을 간곡히 부탁하여, 그는 결국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주교에게 요청하여 이교도들이 득실거리는 베스키두나(Beth-Kiduna)에 성당을 짓도록 하고 그곳을 자신의 본거지로 삼았다. 성 아브라함은 잔잔한 미소와 인내심 그리고 끊임없는 기도를 통하여 우상숭배에 빠진 주민들을 감동시킴으로써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선교활동 중에 혹시라도 세상일에 마음이 흔들릴까봐 늘 조심하다가 결국은 은퇴하여 자신의 은둔소로 돌아가서 여생을 지냈다. 그는 70세에 선종하였다. 그는 아브라함 키두니아(Abraham Kidunia)로도 불리는데, 키두나이아 또는 키두니아라는 이름은 그가 활동했던 성당 이름에서 나온 것이다.
복자 로베르토 달비(Robert Dalby)
활동년도 : +1589년
신분 : 순교자
지역
같은 이름 : 달비, 로버트, 로베르또, 로베르뚜스, 로베르투스
요한 아미아스(Joannes Amias)와 로베르투스 달비(Robertus Dalby, 또는 로베르토)는 요크셔(Yorkshire) 출신으로 프랑스 랭스(Reims)의 두에 대학교를 마치고 사제로 서품된 후 1589년에 영국 선교 길에 올랐다. 요한은 7년 정도 선교하였고, 로베르투스는 1년 남짓 활동하였다. 이들은 함께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그는 1929년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