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호>
한 점 섬/ 양선규
물바람으로 헹궈도 잊혀지지 않는
사월의 꽃비 대신 별 비 내리는 맹골
슬픔도 오래되면 옹이가 되는 것처럼
펄럭이는 깃발, 한 점 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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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호>
초승달 1/ 김종
입 벌린 허공에
저리 감기는
눈빛이면
흐르던 실개천
길을 잃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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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역/ 공광규
대전에서 오송까지 고속열차로 와서
무궁화 열차로 제천 가는 길
12월 오후 청주역 철로변에
겨울의 마음인 듯 눈이 내렸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모두
흰 눈처럼 깨끗할 것만 같습니다
짐승도 아까워
산등성이에 발자국을 남기지 않은 눈밭
지붕은 옛날 빨랫줄에 널어놓았던
흰 광목인 듯 반듯합니다
옛날 할머니들이 시장에 이고 나온
모시 조각조각을 이어붙인 들판이
수은을 가득 담아놓은 호수인 듯
반짝반짝 햇살을 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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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의 힘/ 유은희
솔기 풀린 바짓부리를 꿰매려고
실패에서 실마리를 찾다 그만 놓치고 만다
또르르 구석으로 구르는 실패에서 한없이 실은 풀리고
풀린 실을 실패에 되감다가 문득
실패를 생각한다
실패가 없다면 실은 어디에 감지?
실패는 실의 등뼈라는 생각을
실패는 삶의 등뼈라는 생각으로 이어
풀린 실을 바늘귀에 길게 꿴다
바짓부리를 꿰매고도 남아
셔츠까지 꺼내와 단추를 하나하나 홀치고는
아직 풀리지 않은 소매 시접도 새발뜨기를 해둔다
옷들의 바늘땀처럼
촘촘하게 살아올 수 있었던 것도
실은 실패의 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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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라는 영화/ 한성례
전쟁 영화를 찍는 곳
전쟁터
이 행성의 전쟁영화 세트장에서
전쟁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
그곳에서는 전쟁의 프레젠테이션이 펼쳐진다
끝나지 않는 비극
살이 찢기고 피가 튀는 현장
무명 배우들이 목숨 걸고 뛰어다니는 곳
그들은 주로 죽는 자의 역할을 맡는다
이 영화는 결코 어떤 영화상도 주어지지 않는다
고통스런 죽음 그리고 죽음
끝이 없는 죽음
전쟁이라는 영화는
이 행성에서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다
전쟁터
젊은이들을 인신 공양하는 곳
신은 젊은 피를 원한다
확실히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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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멸(消滅)/ 설정환
참깨 털러간다
전등 불빛보다
기침소리가 먼저 눈뜨는
새벽 다섯 시
숨이 목에 걸리듯이
칼칼한 거친 숨소리
그 숨소리에
대문 밖 자주물달개비꽃 찬 이슬을 굴린다.
두 다리에 얼굴 묻은 늙은 흰 개도 눈뜬다.
목탁을 치는
절집에서처럼
안개 낀 산밭으로
목탁을 치고 가는
경운기에 앉은 아버지
참깨 털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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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호>
그 남자의 저녁 산책· 3/ 강경호
낮에 보았던 빌라촌 건너 담벼락
형형한 붉은 빛 눈망울을 한 CCTV
그 앞을 지날 때마다 들려오는 기계음
"이곳은 쓰레기 투기 금지 구역입니다 함부로 쓰레기를 투기하면
법적 처벌을 받으니 조심하십시오"
재활용품을 분리하는 것이 몸에 밴 나는
환경운동을 실천하는 모범시민인데 무엇을 조심하라는 말인가,
빌라촌 앞을 지날 때마다 기분이 더럽다
처음에는 CCTV 앞을 투기꾼 대접을 받으며 지나갔지만
이후부터는 CCTV센서와 거리를 두고 지나갔다
길고양이가 지나가도, 밤산책을 하는 사람과 반려견이 지나가도
투기꾼 혐의자로 취급하는 CCTV와
어둠 속에서 지켜보고 있는 낭랑한 기계음 목소리의 여자를
오늘밤도 멀찍이 떨어져 재빨리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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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버둥/ 강만
그녀는 살려고 발버둥 치고
나는 살려보려고 발버둥 쳤다
살고 죽는 건 하늘이 정하는 일
그녀는 발버둥 치다 떠났고
나는 발버둥 치며 보냈다
장례를 마친 며칠 후
그녀가 침대맡에 놓고 떠난 화분에서
싹이 돋았다
인연이 서러워
어금니를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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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
반성-편지/ 고선주
맛이 깊어갈수록
목이 메이는 겁니까
계란 노른자가 잘 넘어가지 않네요
지금도 깨물고 있습니다만
뼈도 없는 속살만 있는 녀석이
목메이게 하다니
나도 누군가에 목메이게 하지 않았는지
덜컹 겁이 났습니다
뼈대 없다고 함부로 하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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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라고 대답했다/ 고철
나팔꽃 보다 환한 얼굴로
나쁜 말 못하는 지렁이의 사투리처럼
어슬렁거려도 좋은 오후
주간신문을 사서 읽었다
행복하려고 노력하십시오!
내일 보려고 한 점괘가 오늘 나와서
참 좋았다
네! 라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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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사한 배후/ 김정수
이웃집 뒤뜰에 손바닥만 한, 내 얼굴보다 큰 모란이, 붉은 화왕(花王)
이 피었는데, 오래 방치된 담장 너머 무자비하게 화사한데, 왠지 누
추하고 초라해서, 매지구름 불러들이지 않아도, 부지불식간에, 층층
의 그늘 건너가는데, 사람을 들킨 그 자리
무안인지 미안인지 모를 것을
생각하다가
무심결에
그만,
등을 보이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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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다 만 책/ 박완호
읽다 만 시집을 책상에 엎어 놓았다
제목이 시인이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당연하다는 듯
세상은 고요 속으로 빠져들었다 읽다 만 책은
그 자세로 주말을 보낼 것이다 바코드로만 자신을 증명할 것이다
책꽂이에는 읽을 책들과 읽은 책들이 빼곡하게 꽂혀 있다 바코드
에 새겨진 속말을 숨기고
제목과 이름만으로 저를 드러내는 것들, 읽다 만 책은
그들과 다른 자세로 주말을 견뎌야 한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을
ISBN과 값을 고스란히 까놓고는
아닌 척 모르는 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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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 배한봉
사람 마음은
비 온 뒤의 땅처럼 굳어
단단해야 한다고 믿고 살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텃밭 일궈보니
단단해지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었다.
삽이 들어가지 않을 만큼 다져진 흙은
작물 뿌리가 뻗을 수 없는
불화 덩어리였다.
오래 묵힌 사람 마음도
파 뒤집어 굳은 흙덩어리처럼 깨서
포슬포슬하게 만들고
밑거름 넣어 잘 섞어 줘야
물 잘 스며들고
공기 잘 통해서
사랑을 잘 키운다는 것을 알았다.
어제의 비와 오늘의 햇볕이
땅심으로 만나는 것 보고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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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그아웃/ 이송희
불 꺼진 길 위에,
음악이 멈춘다
어두운 공기에 비린내를 섞으며
내 안의 나를 향해서
신호를 보낸다
검은색 소파에 길게 몸을 파묻은 채
시간을 거꾸로 세워 쏟은 말을 담는다
끊겼다 이어지는 비,
자꾸만 내리는 비
새로 고친 대문이 아직은 낯설어
암호로 깔아둔 길 위를 서성이다
잊었던 열쇠를 꺼내
꼬리말을 달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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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은 제 앞에 열리는 모든 시간에 최선을 다하며 삽니다. 박토든
옥토든 발아한 곳을 천혜의 장소로 변모시켜요.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바람이 불면 흔들리면서요. 그러려니 얼마나 수고스럽겠습니까. 그 모습이
애잔하게 인간의 모습에 겹쳐졌습니다.
- 시와사람 시인카페/ 서연정/ '시조, 든든한 나의 동행' 가운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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