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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SS.. 2차대전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SS를 아실 것입니다. 이 SS는 순전히 이 한 사나이의 '작품'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인리히 히믈러... (1900~1945)
SS의 아버지, 하인리히 히믈러는 1900년, 바이에른의 란츠후트라는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중학교 교사, 어머니는 가족에 헌신적이고, 충실한 카톨릭 신앙심을 가진 전형적인 주부였습니다.
깊은 가족애와 신앙심으로 가득 찬 이 집안은 매우 유복했고, 이런 환경 속에서, 하인리히는 모범생 중의 모범생으로 자라나게 됩니다.
학교에선 항상 상위권을 다투었고, 나비수집을 취미로 삼고있었던 이런 모범생이 600만명의 유태인을 가스실에 몰아넣을 것이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히믈러는 모범생이었지만, 그의 꿈은 군인이었습니다.
프리드리히 황제 후로 이어진 군인에대한 이유모를 존경심과 사회적 지위는 이 어린 아이에게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하인리히가 제7보병연대에서 장교 후보생 훈련을 받고있었돈 1918년....독일은 전쟁에서 지게 됩니다.
장교를 꿈꾸던 '어린'하인리히의 꿈은 무참히 짓밟혀졌습니다.
그 후, 바이마르 공화국이 들어서면서 거리에서는 스파르타쿠스단과 극우단체들이 거리에서 빈번히 총격전을 벌였고, 하는일이 없었던 퇴역 군인들과, 아무데나 가서 몽둥이를 휘두르는게 낙이었던 깡패들이 이런 싸움에 참가하게 되면서 걷잡을수 없이 커지지만, 하인리히는 역시 모범생이었습니다. 이런 싸움 같은 데에는 껴들지도 않았던... 아주 훌륭한 모범생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때 주목할 점이 하나 있다면, 이런 혼란기에는 대부분 반유태주의가 판치게 되는데요, 히믈러는 이 시기에 반유태주의의 책을 많이 탐독했다고 합니다. 이런 밑천들이 유태인들을 가스실에 보내게 될 지식들이라는건 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그는 농업 비료공장에 취직해서 비료연구를 했습니다. 그리고, 터키어를 열심히 공부해서 터키로 이주해 농사나 짓자고 하던 이 순박한 청년은, SA(돌격대)의 대장 에른스트 룀을 만나게 됩니다.
1923년 그는 정식으로 나치당에 입당했습니다. 그리고 돌격대의 일원이 되어서 뮌헨 폭동에도 참가했었지만, 히틀러같은 월척에 비해, 그는 워낙 잔챙이였기때문에 체포를 가까스로 면했습니다.
25년, 그는 돌격대의 하부조직 SS로 전출되었습니다. 그는 그때까지만해도 정말 평범하디 평범한 나치당원이었습니다.
이런 히믈러를 바꾼것은, SS가 발행하는 신문 '펠키셔 베오바하터'에서 일하기 시작하였을 때였습니다. 그는 그저 꼼꼼하게 일을 했을 뿐이었으나, 곧바로 상관들에게 눈에 띄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보아, 이런 미미한 평대원도 눈에 돋보이는 SS라면, 돌대가리들의 집합소라는 SS의 별명은 그다지 과언은 아닌것 같습니다. (제 생각 -_-;;)
그리고, 그는 그가 그토록 존경하고, 신처럼 떠받들게 될 히틀러를 만나게 됩니다.
그를 만나고 나서 히틀러에 대한 광신에 젖은 그는, 알프레드 로젠베르크와 마인캄프를 엄청나게 연구해댔습니다. 그리고, 북유럽 아리아족에대한 전설 등을 연구하면서 책을 많이 썼습니다.
그의 상관들은 그를 좋게 평했다고 하죠. 이런 지적 엘리트가 가뭄에 콩나듯 하던 SS에서, 그는 히틀러의 눈에 띄어서 고속승진을 하게 되고, 자신을 모범생으로 만들어준 집안 환경과는 정반대인 악마로 성장해 나갔습니다.
그는 카톨릭을 비방하는 한편, 교황을 공개처형해야한다는 극단적인 주장까지 일삼았습니다.
1929년, 그는 마침내 SS의 총수로 발탁됩니다. 히믈러는 정말 히틀러의 마음에 쏙 들다고 평할수 있겠습니다. 괴링같은 욕심많은 디케(뚱뚱이, 돼지 등으로 해석 가능합니다.)들이 뇌물로 부당한 이익을 챙길때, 그는 봉급만으로 생활을 검소하게 꾸려갔습니다.
SS대원들은 선발기준에서 외모가 엄청난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구 프로이센의 전쟁영웅들이나 육군 (롬멜 장군 등...)은 SS를 행진용 퍼레이드 부대라고 비웃기까지 했죠.
멋진 제복을 깔끔하게 차려입고 아리아 신화에 바탕을 둔 장엄하고 웅장한 의식으로 튜턴족의 부활이라는 치켜세움도 받았던 SS.... 그리고 개전이 시작되면서 아리아족의 긍지가 흘러 넘치던 SS도 이방인들에게 문이 서서히 열렸습니다.
예를 들자면, 회교도 사단인 한드싸르(탈영병이 워낙 많기로 유명했죠..), 전향을 결심한 영국군 60명에다가 군단이라는 거대한 이름을 갖다붙인 영국 자유군단 등등 이 있었습니다.
이런 일은 다 히믈러가 추진했고요...
또한 외계인같은 그는 수백만의 유태인을 가스실로 보냈던 그는, 러시아 포로 처형장에 시찰나갔을때, 총애맞은 러시아 포로가 피투성이가 되서 땅바닥을 긁으며 죽어가는 장면을 보고서 비명을 지를 뻔 했다고 하고요, 피 얘기만 하면 곧 토하기 일쑤였습니다.
카톨릭을 그렇게 모질게 비난하면서도, 자신은 결혼해서 안락하고 모범적인 가정을 착실하게 꾸려나가던 그였습니다. 그의 아내와 딸에게는 정말로 자상하게 대해 주었지만, 아리아인 우월 의식은 아직도 그의 뇌리 깊은 곳에 박혀 있었지요.
1945년 4월... 주코프 원수와 로코소프스키 장군을 선두로한 소련군들이 베를린으로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을 때, 그는 사태를 알아차리고 독자적으로 연합군과 화평조약을 맺으려 함으로써 히틀러를 격노케 합니다. 그는 결국 베를린에서 도망쳤습니다.
5월, 영국 첩보부는 '하인리히 히친거'라는 가명을 쓰던 그를 잡아서 체포했습니다.
그는 체포당하려 할 때, 청산가리 캡슐을 깨물었습니다.
모순으로 가득 찬, 한 사나이의 생애는 이렇게 끝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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